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밀양 달빛 여울에 담긴 여주이씨 월연정 月淵亭

천부인권 2019. 7. 19. 10:58

 

20149.3.9 밀양 월연정 일원 원경

 

밀양 월연대 일원(密陽 月淵臺 一圓)은 국가지정 명승 제87호로 밀양시 용평동 2-1번지에 위치한다. 정자의 앞에는 밀양 응천강이 흐르고 뒤쪽은 추화산성과 봉수대가 위치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월연정과 쌍경당, 제헌 등의 건물이 집성을 이루어 조선시대 정자들이 단독으로 있는 것과 달리 정자 집합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측은 월연대 영역이고 좌측은 쌍경당 영역을 이루는데 계곡 사이로 다리를 놓아 두 영역을 통합했다. 뛰어난 자연 환경에 건축물을 적응시키듯 건설하여 무질서해 보이지만 자연에 동화하려고 노력한 사대부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圓)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동화된 모습의 건축물들은 자연과 인공을 결합시킨 조선 사대부의 정신세계관과 조경양식을 볼 수 있다.

 

 

 

밀양 응천강변의 월연정(月淵亭)은 월연 이태(月淵 李迨 1483~1536)¹⁾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지내던 별업(別業)으로 중종 15(1520)년 경에 월영사(月影寺) 옛 터에 창건하였는데 임진왜란에 불탄 후 230여 년간 폐허로 있다가 영조 33(1757)년에 6세손 지복(之復)의 주창에 따라 7세손인 수사(水使) 홍(泓)이 재물을 내어 예(澧)가 감역하여 복원 중건 되었고, 정조 22(1798)년에 8세손 병태(秉泰)가 종중의 논의를 얻어 중수하였다. 정당의 이름은 수월쌍청(水月雙淸)을 거울에 비유하여 쌍경당(雙鏡堂)이라 일컬었다.

 

 

2019.3.9 밖에서 본 제헌

 

쌍경당(雙鏡堂)

 

쌍경당(雙鏡堂) 편액

 

 

 

[원문]
雙鏡堂重建記
凝川是嶺南一府治 而楔以嶺南 何哉 豈不以地之佳麗 樓之軒赦 可以擅嶺南之勝 故歟 由玆樓而下 循江岸 行石棧 逶迤而東 則有一大坪坪盡而有大川 自東而南下 合于江流 由川而溯上 則有山繚繞如屛 其中有小洞 其下有絫石之臺 負山臨水 廣豁遜于嶺樓 而幽䆳過之乃 中廟朝故翰林李公別業也 昔安老用事 戕害善類 公亦爲其所擠 遂謝病歸于凝之舊庄 築臺曰月淵 寘堂曰雙鏡 仍自號月淵主人 又號琴書子 日嘯傲 其間以送老 公之志 雖不得少展於當時 公之名 至今與山水長留 凝之愚夫 亦皆知李翰林云 顧公之堂 見燬於龍蛇之亂 歲已久 未遑重新 六世 孫僉樞之復 嘅然有興廢之意 屬其再從弟之標 堂姪水使泓 乃卽其址經始之 凡軒幾楹 堂幾楹 其爲制精新靚密 煥然改觀 水使以堂記托余曰 聞曩子之過玆堂也 盍爲文以記之 余曰 臺之勝 余固登覽無餘 若翰林公之事 尤有所曠感 不能已者 今子言之 敢不托名之爲榮 蓋坐是堂而論其槪 則臺之左麓 有穹巖 巖下有小臺相望 兩臺之間 有一道山溪 淙錚瀉出 川溪之會有臥石 盤陀可坐以濯 堂前又有鉅石 走伏波心 突然成嶼 其下爲潭潭水淪漣如鏡 入夜受月 上下空明 一色雙淸 則鏡乎鏡乎 其在水與月乎 太史氏有曰 擧世混濁 淸士可見 若翰林公 淸士者非耶 色斯鴻冥 潔身遐擧 非淸士能之乎 曰公之心淸跡淸也 故所卜之地與臺旣淸 所樂之水與月交淸 一生閑適 享有其淸 而後人之登斯臺 覽斯扁者 莫不想像其淸操 炯識剩馥遺芬於千百載之下 則此堂之復成 而豈獨公子孫之幸 而已金聞翰林 公子孫甚賢而盛 皆于凝居 苟能體雙鏡之義 而自礪其身心 念肯構之艱 而勿替乎家聲 則乃先祖亦必曰余有後 其勉之哉
丙戌 元月 上澣
夏雪山人 南陽 洪晟 謹記

 

[해문]
쌍경당중건기(雙鏡堂重建記)
응천(凝川)은 영남의 한 고을인데 누각을 영남이라 한 것은 어째서 인가? 아마 땅의 아름다움과 누각의 높고 시원함이 영남의 명승지로 떨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누각 아래에서 강을 따라 돌 비탈을 통하여 구불구불 동으로 가면 하나의 큰 들이 있고, 들이 끝나면 큰 내(川)가 있는데 동으로부터 남으로 흘러와 강의 본류와 합친다. 내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산이 병풍처럼 둘렀는데 그 가운데 작은 골짝이가 있고, 그 아래에 겹겹이 쌓인 석대(石臺)가 산을 등지고 물을 굽어보는데 광활하기로는 영남루보다 못하지만 그윽하고 깊숙하기로는 낫다. 여기가 곳 중종조의 고 한림(翰林)선생 이공(李公)의 별업(別業)이다. 옛적에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휘둘러 선한 사류(士類)들을 해칠 적에 선생 또한 그에게 배척되었다. 드디어 병을 청탁하여 사직하고 응천의 옛 고장으로 돌아와서는 대(臺)를 쌓아 월연(月淵)이라 하고, 당을 지어 쌍경(雙鏡)이라 하고는, 이내 스스로 호를 월연주인(月淵主人), 또는 금서자(琴書子)라 하여, 날마다 그 안에서 소창하고 노닐며 노년을 보냈으니 선생의 뜻은 비록 그 당시에 조금도 펴지 못하였지만 선생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산수와 더불어 길이 남아 있어 응천의 어리석은 필부도 또한 이한림(李翰林)을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공이 지은 당은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나 미처 새로 중건하지 못하였다. 6세손 첨추(僉樞) 지복(之復)이 개연히 복구할 마음을 지녀 그 재종제(再從弟) 지표(之標)와 당질인 수사 홍(泓)에게 위촉하여 그 터에다가 중건하니 무릇 마루가 몇 칸이요 당이 몇 칸인데 그 제도가 정밀하고 신선하고 치밀하여 환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수사(水使)가 기문을 내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듣자니 예전에 그대가 이대에서 놀았다 하니 어찌 기문을 짓지 않으려나?”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대의 경치는 내가 올라가 남김없이 보았거니와 한림공의 사적에 대해서는 더욱 추모하여 마지않는 마음이 있다. 이제 자네가 말을 하니, 감히 이름을 붙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이 당에 앉아서 경치를 말하자면 대의 왼편 기슭에는 높은 벼랑이 있고, 높은 벼랑 아래에는 작은 대가 있어 서로 건너 보인다. 두 대 사이에 한줄기 작은 시내가 졸졸 흐르고 작은 개울과 큰 내가 만나는 자리에는 누워있는 바위가 펑퍼짐하여 앉아서 씻을만하다. 당 앞에는 또 큰 돌이 있어서 물속으로 뻗어들었다가 갑자기 불끈 솟아 섬이 되고, 그 아래 못(潭)이 있는데 못물이 잠잠하게 맑아 거울과 같다. 밤이 되어 달빛을 받으면 위아래 허공이 밝아 한빛으로 둘 다 밝으니 거울과 거울이 물에도 있고 달에도 있음이로다.
태사씨(太史氏)의 말에는 “온 세상이 혼탁하면 청사(淸士)를 볼 수 있다.”고 하였으니, 한림공이야 말로 청사라 일컬을만 하지 않은가! 기미를 알아차린 기러기처럼 몸을 깨끗이 하여 아득히 떠났으니 청사가 아니고서야 가능하였겠는가? 공은 마음이 맑음으로 말미암아 자취가 맑았고, 그러므로 자리 잡아 쌓은 곳이 대와 더불어 맑은데 즐겨하는 바 강물과 달빛이 어울려 맑았다. 일생을 한적하게 지내면서 그 맑음을 누렸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 대에 올라와 이 편액을 보는 이도 그 청결한 지조와 명석한 식견의 여운과 남은 향기를 천백 년이 지나도록 상상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당의 복구가 어찌 공의 자손들만의 다행이겠는가? 내가 들으니 한림공의 자손들이 매우 현명하고 융성하며 모두 밀양에 산다고 하는데 진실로 쌍경(雙鏡)의 뜻을 체득하여, 스스로 그 몸과 마음을 책려하여 유지(遺志)를 계승하기 어려움을 생각하고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는다면 선조께서도 반드시 “나의 뒤가 있구나.”라고 하실 것이다. 부디 힘쓸지어다.
병술(1766)년 정월 상한
하설산인(夏雪山人) 남양(南陽) 홍성(洪晟)이 삼가 기록하다.

 

【주석】
월연 이태(月淵 李迨)¹⁾ : 이태(1483~1536)는 연산군 시대에 밀양으로 내려 온 교위(校尉) 사필(師弼)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청직(淸直)하고 문장과 필법이 저명하더니 중종 4(1509)년에 대과에 급제하고 내외관직을 역임하였다. 권간(權奸)이 정치를 문란하게 함을 사초(史草)에 직서(直書)함으로써 그들의 미움을 받자, 호연히 돌아와 사화에 연루 되지 않으니 남들이 일러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 하였다. 월연의 수석(水石)을 애호하여 금서(琴書)와 어조(漁釣)로 여생을 보내면서 스스로 호(號)를 월연주인(月淵主人) 또는 금서자(琴書子)라 하였다.

 

 

 

 

[원문]
雙鏡堂記事後識
先祖月淵公。以經術文章負重望。入翰苑。爲權奸所擠。退居凝之舊莊。築臺曰月淵。寘堂曰雙鏡。鏡爲天心之月。月爲水面之鏡。玩天人之妙。寓仁智之樂。炳幾遐眺。爲己卯完節。懿蹟徽言。百不存一。龍蛇之亂。亭臺俱燬。曾王考甫十歲。經亂歸鄕。古家文獻。蕩然雲空。經始之議。有志未就。至有建院之語。主倅親到。謂之曰。儒林之建院雖重。先賢之別墅亦重。止其議。迄今百餘年。墜緖之責。在於不肖。歲丁丑春。從姪泓。捐羅營月俸。爲鏡堂重建之資。卽舊址而營之。再從姪灃。實相其役。凡若干月。功告訖。臨湖風物。不改舊觀。不肖。年今八十有六。常恐此役未遂矣。今幸遂焉。異日。歸拜泉下。其將有辭於祖先矣。不揆僭妄。玆敢識其事顚末。
六代孫之復。謹識。

 

雙鏡堂
庭院沈沈樹影齊 數聲砧杵水東西 春江波暖知魚樂 晩圃林深伴鳥棲 十里平蕪隨意豁 四山晴靄入 看低 廣川麗澤前期在 此際何須惜解携
李翊九

 

[원문]
雙鏡堂記
凝川。吾外鄕也。惟我外先祖月淵公。以瓌材䆳學。負一時駿譽。擢巍科。入翰苑。世方以遠大期之。不幸爲權貴所擠。卒蹇躓不大顯。旣不得有爲於時。則退居凝川之舊莊。以山水自娛。府東距五里許。據上游得異處焉。乃累石而臺之。築基而堂之。名其臺曰月淵。顏其堂曰雙鏡。日嘯傲其中。以爲終老之計。仍自號月淵主人。又號琴書子。寄雅懷於水石。寓眞樂於圖籍。榮辱兩忘于心。是非不關於耳。蕭然有出塵之想。人莫得以窺其際也。歲執徐。堂爲兵燹所灰。距今百有餘年。迄未克重新之。玄孫李君萬白。慨然于是。乃卽其遺址。謀結數椽。間貽書屬余記之。余辱居外裔之末。每以一未造觀遺躅爲恨。今於君之請。不可以不文辭。按君所爲識。堂前。有鉅石。走入波心。突而爲孤嶼。匯而爲深淵。方其波恬鏡面。月印潭心。水月雙淸。上下一色。吾不知水爲鏡乎鏡爲月乎。雙鏡之名。意者。蓋取諸此也。東西巖石間。又有小臺相望。泉潺潺而瀉出于兩臺之間。流入于川。枕簟夢寐。如聞金石聲。川溪交會處。又有臥石盤陀。蘸于波面。其上。可羅胡床八九。其景致之勝。眺望之樂。雖不吾目。可得而槩也。獨余因是而有大感焉。以我祖之才之學。使得其時展其蘊。則其所立。烏可量也。而道與時不相遇。才與命不相謀。曾不得一騁其胸中所抱負。卒自放於山水以終。不知造物者意竟何如。噫。人去堂廢。事往名存。荒臺宿莽。故淵寒月。幾年興苗裔之感矣。一朝。翼然棟宇。宛然如昨。山若增其高。水若增其深。遺芬剩馥。猶彷彿其未沫。雖曰廢興有數。亦不可不謂之能肯搆也。抑又有一說焉。物其物而視之。則物自物也。我自我也。不物於物。而反觀於我。則我亦物也。物亦我也。夫水譬則鏡也。鏡譬則心也。鏡不磨。則塵垢翳而光彩晦。心不養。則物欲蔽而天理絶。故曰。心如鏡。敬如磨鏡。我先祖之取鏡名堂者。意其寓意深。不徒物於物而已。願吾君。益加磨鏡之工。使此心。惺然不昏。瑩然不昧。庶幾不負命名之義。則是又肯搆之大者也。君於余。爲再從兄弟。好學而甚文。振先烈而大外門。吾惟望乎君爾。遂爲之記
權斗寅

 

 

 

 

 

 

 

 

 

 

 

제헌(霽軒) 전경

 

제헌(霽軒)은 이원량(李元亮, 1504~1567)의 호(號)이며 제헌을 지은 것은 이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을미년(1955)에 후손들의 합의로 월연정(月淵亭)의 왼편 아래쪽에 창건한 집이다.
이원량은 연산(燕山) 연간에 밀양에 입향한 교위 사필(師弼)의 손자이며 월연선생의 아들이다. 중종 31년(1536)에 진사과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선인 별서에서 소요하면서 시문과 어조(漁釣)로 여생을 보냈다.
 

 

제헌(霽軒) 편액

 

 

 

 

 

 

 

 

 

[원문]
霽軒記
密城之稱勝地名榭 必以雙鏡堂爲拇 盖以其湖山巖臺 眞天成別界 而又得月淵李先生 爲主人故也 先生以直道事恭僖大王 與一代名賢 彙征朝列 激濁揚淸 經邦國 扶世敎之志 旣而群小釀禍 蜮弩潛伏 先生遂炳幾遐擧 築月淵臺雙鏡堂 而高臥焉 未幾 北門之禍作 而善類虀粉 世稱公爲己卯完人云 先生有肖子 諱元亮 名登泮庠 聲華藉蔚 而亦深懲己卯 謝絶榮塗 隱遯于是 堂初號月暎 又號霽軒 盖月之本體光明 而餘光之及於物者爲暎 無陰雲之障者爲霽 是非公述先志光前烈之意乎 於乎 用之則行 舍之則藏 乃吾夫子之獨詡於亞聖者也 其難如此 而月翁旣行之於前 霽翁又繼之於後 可想旣世類襟懷 灑落光明無物可比倫 而惟霽天明月 始可以彷佛矣 但中經壬癸兵燹 文籍蕩佚 公之德行文章 無得而攷尋 殊爲可恨 然竊觀公從弟今是堂贈公詩曰
冷笑浮名役役忙 百年身世水雲鄕
蓴鱸逸興風千古 漁釣閒情月一航
紫陌黃塵無夢寐 綠蓑靑笠是行裝 此可爲徵公之三昧也 嚴公七里之灘 奚足專美於古哉 雙鏡月淵之間 可容得一亭宇 後孫諸公 敬慕公不衰 起數椽軒于其地 扁其楣曰霽軒 盖顧名而寓羹墻之思也 工旣訖 北走五百里 間記於相圭 顧癃弊不堪 而竊惟吾先祖忠定公 與月淵翁爲道義交 傍先荷塘翁 曁五代孫酉暘公 有雙鏡堂詩若記 追推先契 實不敢終辭 然江山景物之勝 則登覽者當自得之 不必記之 至若公心氣像 則今是翁詩在 苟刻之楣顔 則足令人千載想仰矣 尙何余言之足多也 今是翁 亦以承旨棄官而歸 遺亭在隔江漭蒼地 而扁以今是 化翁之以許好江山 專付于李氏一家者 吁亦異哉 是役也 幹其事者 後孫炳榮炳朝建衡甫 而遠來請記者 炳榮炳朝也 感其孝思之勤 並記之
歲赤鷄之秀葽月 永嘉 權相圭 記

 

[해문]
제헌기
밀성의 명승지와 이름난 정자를 일컬음에 반드시 쌍경당을 첫손가락으로 꼽는 것은 대게 호수와 산, 바위와 대가 참으로 하늘이 만든 별세계인데다 또 월연선생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곧은 도리로 중종(中宗)대왕을 섬겨 한 시대의 명현들과 조정의 반열에 함께 나아가 탁류를 물리치고 맑은 풍조를 일으켜 나라를 경영하며 세상의 교화를 부지할 뜻을 가졌다. 그러다가 소인배들이 화를 빚어내고 물여우의 쇠뇌(蜮弩)¹⁾가 잠복하자 선생은 기미를 꿰뚫어보고 멀리 떠나 월연대(月淵臺)와 쌍경당(雙鏡堂)을 짓고서 은거하였다. 오래잖아 북문(北門)의 화(禍)²⁾가 일어난 선한 사류(士流)들이 박살을 당함에 세상에서 공을 일컫기를 ‘기묘(己卯)의 완인(完人)’이 되었다고 말한다. 선생을 닮은 아들이 있었으니 휘 원량(元亮)이다. 이름이 성균관에 올라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또한 기묘년의 일을 깊이 경계하여 영화의 길을 사절하고 이곳에 은둔하였다. 처음에 당호를 월영(月暎)이라 하였고 또한 제헌(霽軒)이라고도 하였다.
대개 달의 본체는 광명(光明)한데 여광(餘光)이 사물에 비치면 영(暎)이 되고 음산한 구름의 장애가 없어야만 ‘제(霽)’가 된다. 이는 공이 선군의 뜻을 계승하여 전적의 사적을 빛내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등용이 되면 나아가 행하고 버려지면 숨는 것은 우리 공부자께서 유독 아성(亞聖 顏淵)에게만 권장하는 것이었다. 그 어려움이 이와 같은데 월연옹(月淵翁)이 이미 앞서서 행하였고, 제옹(霽翁)이 또 따라서 계승하였으니 그 대대로 닮은 가슴속의 회포와 쇄락(灑落)한 광명(光明)은 비교할만한 물건이 없고 오직 갠 하늘의 밝은 달만이 비로소 방불(彷佛)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겠다. 다만 중년에 임진·계사년의 병란을 겪으면서 문헌을 모조리 잃어버려 공의 덕행과 문장을 상고할 수 없는 것이 매우 한스럽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건대 공의 종제(從弟) 금시당(今是堂)이 공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우습다 헛된 이름 고생하며 바쁜 것이 백년 신세가 물구름 고장에 있네, 순채나물 농어회 천고의 빼어난 흥취 고기 낚는 한가한 심정 온 배에 달빛이로다. 벼슬길 누런 먼지 꿈에도 없거니와 푸른 도롱이 파란 삿갓 이게 봇짐이리오.”라고 하였으니 이로서 공의 삼매경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엄공(嚴公)의 칠리탄(七里灘)³⁾이 어찌 예전에만 아름다웠다고 하겠는가?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 사이에 정자 건물을 하나쯤은 받아들일 만한데 후손 여러분들이 공을 경모하는 마음이 쇠하지 않아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세우고 그 편액을 제헌(霽軒)이라 일컬었다. 대개 이름을 돌아보면 조상을 우러러 추모하는 생각을 붙인 것이다.
공사를 마치고 나서 북으로 500리를 달려와 상규(相圭)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면 병들고 피폐하여 감당하지 못하나 가만히 생각건대 나의 선조 충정공(忠定公)께서 월연옹(月淵翁)과 도의의 교분이 있고 방선조(傍先祖)이신 하당옹(荷塘翁)과 충정공의 5대손인 유양공(酉暘公)께서 쌍경당(雙鏡堂) 시와 기문이 있으니 선대의 교분을 미루어 추억하면 실로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산과 경물의 좋은 점은 올라가 보는 자가 절로 알 수 있을 것이기에 기록할 필요가 없고 공의 마음과 기상에 대하여는 금시옹(今是翁)의 시가 있으니 헌미(軒楣)에 새겨 놓는다면 천년토록 사람들이 우러러 상상하기에 족할 것이다. 내 말의 사족이 많아서 무엇하랴! 금시옹(今是翁) 또한 승지로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남긴 정자가 강건너 멀리 보이는 곳에 있는데 금시당(今是堂)이라 편액하였다. 조물주가 이렇게 좋은 강산을 오로지 이씨 한 집에만 준 것도 이상하다. 이 공사에 일을 맡은 자는 후손 병영(炳榮)과 병조(炳朝)와 건형(建衡)이고 멀리 와서 기문을 청한 이는 병영(炳榮)과 병조(炳朝)이다. 그 효성스런 생각과 부지런함에 감동하여 아울러 기록한다.
정계(赤鷄; 정유, 1957) 수요일(秀葽月; 4월)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 쓰다.

 

【주석】
물여우의 쇠뇌(蜮弩)¹⁾ : 물여우는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향해 모래를 쏘아 중독시켜 해친다는 짐승이다. 그처럼 남을 중상 모략하여 해치는 소인배들이 득세하는 위태한 정국을 가리킨다.
북문(北門)의 화(禍)²⁾ : 중종 기묘년의 사화(士禍)
엄공(嚴公)의 칠리탄(七里灘)³⁾ : 후한의 엄자릉(嚴子陵)은 광무제(光武帝)의 출사 권유를 마다하고 칠리탄(七里灘)에 은거하여 낚시고 소일하였다.

 

 

 

 

한림이공대(翰林李公臺) 석각

 

 

 

월연대(月淵臺)


월연대
월연대는 쌍경당의 좌편 구릉 위에 있는 이태선생이 풍영(諷詠)하던 곳이다. 월연정 복원 당시 재력의 부족으로 함께 중건하지 못하다가 고종 3(1866)년에 10세손 장운(章云)과 11세손 종상(鍾庠)이 주손(胄孫) 종증(鍾增)과 합의하여 중건을 보게 되었다. 사적은 월연정(月淵亭) 편에 실려 있다.

 

 

 

 

월연대(月淵臺) 협문에서

 

 

 

월연대(月淵臺) 편액

 

 

 

 

[원문]
月淵臺重建記
臺在凝州之東 梨淵上 故翰林月淵李公 所卜策也 盖公當靖陵己卯之世 以直道完節 退歸玆邱 爲構二室 一於右幽窈者 曰雙鏡堂 一於左 卽是臺 而臺於矗石削壁之上 甚飄灑焉 今讀其 ‘愁看世路危鮎竹 恨乏涓埃報聖朝 補闕拾遺嗟未得。莫如歸去任漁樵之詩。其志。槩可見耳。後七十餘年。而爲壬辰之兵。兵燹所及。無不蕩滅。堂與臺俱燼。大難甫去。而力不逮。歷三四世。猶未遑營建。至肅廟丁丑。鏡堂成。而臺不能竝也。今上之三年丙寅春。十代孫章雲,十一代孫鍾述。始克鳩材蓄力。而臺復其舊。燠室涼堂。制度精麗。刻舊額月淵臺三大字以揭之。梁楣庭砌。宛如昔日。距壬辰爲二百八十年矣。章雲,鍾煜甫。間嘗造余而請記。旣不獲辭。詢其所以爲月淵之勝而月淵之名。則曰。臺之上下。長松鬱然。老石嶄然。石徑奇危。澗水琮琤。火山斗起於其背。梨川經帶乎其前。琴野曠紆於其外。其中窈奧而成邱壑。中有堂。曰雙鏡。左有臺。曰月淵。江淸月朗。人影相涵。靜如沈璧。動如躍金。橫如布練。豎如擎柱。沖融晃朗。水天一色者。尤此臺之勝。而至於命名之意。則體仁智動靜之機。玩天地盈虛之理。心與水月而俱淸。風與山水而俱長。臺之所以名也。盍爲之記。余曰。水有大小。而月無不同。人有知愚。而性無不善。然則月者。體也。水者。用也。誠願公之幾千百來雲。造次必於是。以是而體先之心。以是而察己之心。常使吾心之體。湛然淸明。應物之用。隨感不差。如月之照乎淵。如淵之受乎月。則天之月。地之淵。卽在吾方寸之中。而先公當日。炳幾樂道之心。發見昭著於日用動靜之間矣。夫然則方可謂趾其美。承其休矣。豈徒是臺之重新而已。章雲甫曰。記如是。足矣。遂書之。以爲記。
當宁六年 龍集己巳小寒
大匡輔國崇祿大夫 原任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三軍府事 監春秋館事
豐山柳厚祚謹記

 

[해문]
월연대중건기(月淵臺重建記)
대는 응주(凝州)의 동편 이연(梨淵) 위에 있는데 고 한림 월연(月淵) 이공이 터를 잡아 쌓은 곳이다. 대개 공은 조선 중종 기묘년에 정직한 도리로 절의를 온전히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이 언덕으로 돌아와 두 집을 지었다. 하나는 오른편의 그윽하고 깊숙한 곳으로 쌍경당(雙鏡堂)이라 하였고, 하나는 왼편의 이 대(臺)로 첩첩한 바위 깎아지른 암벽 위에 만들어 매우 자연스럽고 생기가 넘친다. 이제 그가 지은 시의 “메기 대나무 오르듯 세상의 위태로움이 걱정인데, 티끌만큼도 성대(聖代)에 보답할 수 없음이 한스럽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할 바엔, 돌아가 고기 잡고 나무하는 일만 같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을 읽어 보면 그 지조를 거의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7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 미치는 곳마다 탕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당과 대가 모두 불타버렸다. 큰 난리가 겨우지나자 힘이 미치치 못하여 서너 세대를 내려 오면서도 오히려 영건을 꾀하지 못하다가 숙종(肅宗) 정축년(丁丑年)에 이르러 쌍경당은 이루었으나 대는 함께 짓지 못하였다.
지금의 임금 3년 병인(1866) 봄에 10대손 종술(鍾述)이 비로소 능히 자재를 모으고 힘을 길러서 대가 그 옛 모습을 회복하였는데 따뜻한 방과 시원한 마루로 제도가 정밀하고 아름답다. 옛 편액인 월연대(月淵臺) 세 글자를 크게 새겨 양미(梁楣)에 걸었으니, 정계(庭階)는 완연히 예전 그대로인데 임진년으로부터 280년만의 일이다. 장운(章雲)과 종욱(鍾煜)씨가 그 사이 내게 와서 기문을 청하기에 이미 사양할 수 없는지라 월연(月淵)이라 이름 지은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대의 위 아래로 큰 소나무가 울창하고 오래된 바위가 우뚝하여 돌길이 기묘하고 가파른데 산골물이 졸졸거리며 흐른다. 추화산(推火山)이 그 뒤로 우뚝 솟았고 이천(梨川)이 그 앞으로 지나면서 띠처럼 두르고 있으며, 금야(琴野)가 그 바깥으로 넓게 둘러쌓고 있으며 그 가운데 그윽하고 깊숙한 언덕과 골짜기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을 쌍경당(雙鏡堂)이라 하고 왼편에 있는 대를 월연(月淵)이라 한다. 강이 맑고 달이 밝으면 사람의 그림자를 서로 비추는데 잠잠하면 옥이 잠긴 듯, 일렁이면 금이 번쩍이는 듯하고, 가로 비키면 비단을 바래는 듯, 새로 꽂히면 기둥을 받친듯하여 가득하게 넘쳐흐르는 밝은 경색으로 물과 하늘이 한 빛깔로 어울리는 것이 이 대의 절경이다. 이름 지은 뜻을 말하자면 인자(仁者)는 움직이고 지자(智者)는 고요한 기미를 체득하고 천지에 가득 찼다가 텅 비는 이치를 음미하여 마음은 물에 비친 물과 함께 맑고 풍절이 산수와 함께 유구하다는 것이 이 대의 이름 지은 까닭이다. 어찌 기문을 짓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물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나 달은 다른 것이 없고, 사람에게는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있으나 성품은 선함이 않음이 없다. 그렇다면 달은 본체이고 물은 작용이다. 진시로 바라건대 동의 몇천 몇백 후손들이 잠깐 사이에도 반드시 여기에 유의하여 이로서 선조의 마음을 체득하고 이로써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여 항상 내 마음의 본체로 하여금 티끌 없이 밝게 하여 사물에 대응하고 작용하는 감정에 따라 빗나가게 하지 않기를 마치 달이 연못에 비치듯 연못이 달빛을 받아들이듯 한다면 하늘의 달과 땅의 연못이 곧 내 마음 가운데 있을 것이며, 선공(先公)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기미를 예견하고 도를 즐기던 정신이 일상생활의 동정(動靜) 사이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바야흐로 그 아름다운 자취를 따라 그 훌륭함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어찌 한갓 이 대(臺)만 다시 새롭게 하고 말 것이겠는가! 장운(章雲)씨가 말하기를 “그렇게 쓰면 흡족하가.”라고하기에 그대로 써서 기문으로 삼는다.
고종 6년(己巳, 1869) 소한(小寒)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삼군부사 감춘추관사
풍산(豐山) 류후조(柳厚祚)는 삼가 기록하다.

 

 

 

 

 

 

 

 

 

 

 

출처 및 참조
국역 밀양누정록-밀양문화원(2008.2.29)/신지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