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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면 옥계리 성산광평이씨 옥산사 玉山祠

천부인권 2019. 7. 30. 07:39

 

2019.7.7. 구산면 옥계리 옥산재

 

2019.7.7. 구산면 옥계리 옥산재

 

창원시 구산면 옥계리 688-7번지에는 성산광평이씨(星山廣平李氏)의 재실인 옥산사(玉山祠)가 위치하는데 해발고도는 41m이고, 「위도 35°06′00″N 경도 128°35′35″E」이다. 옥산사(玉山祠)는 옥계리의 초입에 단독으로 위치하며 요즘 뒤편 산에 성혈흠숭수년회가 자리를 하고 있다.
옥산사는 대문인 승륜문(承倫門)과 재실인 옥산사(玉山齋)로 이루어진 재각(齋閣)인데 규모는 크지 않다.

 

 

옥산재 정면에서 본 모습

 

 

해강이영규공적비(海崗李永奎功績碑)
공의 휘는 영규(永奎)요. 호는 해강(海崗)이다. 구산면 옥계리에서 1923년 계해(癸亥) 4월 15일 출생 계출(系出) 성산광평이씨(星山廣平李氏) 시조 고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사재시판서(司宰寺判書) 휘 무재(茂材)요 4세 고려명신 삼중대광(三重大匡) 광평군(廣平君) 휘 능(能)이요 9세 휘 호성(好誠)은 조선조 정헌대부 병조판서(正憲大夫 兵曹判書) 시호 정무공(靖武公)이시다. 13세 휘 칭(稱)은 석성현감을 지냈으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황곡파파조(篁谷派派祖)이시고 14세 휘 명신(明新+心)은 호가 병산(屛山)이요. 웅천현감 겸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으며 인조(仁祖) 갑자년에 이괄의 난에 공훈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록훈 되었다. 공의 14대조이시다. 16세 휘 시정(時井)이며 자는 대원(大源)이요 병산선생의 셋째 손자이시며 공의 12대조이시다. 공의 7대조는 휘 가선대부(嘉善大夫) 동화(東華)요. 공의 5대조는 휘 명옥(明玉 )이며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을 받았으며, 공의 증조부(曾祖父)응 휘 복수(馥洙)이시다. 초명은 흥복(興馥)이며 자는 덕화(德和)이며, 정헌대부사헌부대사성(正憲大夫司憲府大司成)을 지내시고 조부는 휘 상조(相祚)이시며 고(考) 휘 문현(文炫)이며 자는 춘행(春行)이다. 배는 김해김씨 태임(泰任)이며 김선수의 3녀이시다. 슬하에는 2남 6녀를 두었으며 공은 병술(丙戌) 2006년 6월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83세였다.
주간사업(主幹事業)

 

 

승륜문(承倫門) 편액

 

옥산재玉山齋 편액

 

 

玉山 柱聯
人生似幻化    인생사 모두가 꿈만 같다더니,
終當歸空無    종내에는 공과 무로 돌아가네.
待人春風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春風)처럼 너그럽게 하고,
持己秋霜       자기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秋霜)처럼 엄하게 하라.
到處有靑山    이르는 곳마다 좋은 일을 만나고,
到處有上手    이르는 곳마다 숨은 고수는 있다.
哀吾生之順臾 잠깐 사이에 스쳐가는 내 삶을 슬퍼하며
羨長江之無窮 가없이 흘러가는 장강 물만 시샘하노라

 

 

 

玉山祠記
文昌治南一舍許 龜山鎭玉浦里 有四楹三架之翼 然新構顔 以玉山祠者 星山李氏之 爲其先祖晩溪公諱喆暹建 而奉主常亨之所也 李氏中葉有屛山公諱明新+心 從寒岡鄭先生 學當昭敬玉玄黓之亂 慨然奮敵愾之義掃滅倭賊 以嵬勳卓行聞於世是 爲晩溪之來祖也 公以粹明之姿生于 是家紹承遺模其事親也 生以怡愉供悅喪 而易戚無憾葬 而盧墓拜哭當膝處不草祭 而克致如在之誠以至 収族交友忠信惇睦一生所踐履不離乎 彜倫切近之地 爲鄕省士友之所 仰中歲自咸州卜居于 海鄕之荒濱盖出於壓斷 名利晦跡鏟彩甘作聖代逸民也 距今爲二百星霜 而苗裔蕃息見數於南方巨閥名族 莫非公積德垂蔭 而實爲尊基之相也 雲仍篤於報本 前年相與營築一祠役將竣持傍孫璋祿氏之狀間記於不佞 余曰晩溪公之實行雅望似不愧於 韓文公所謂鄕先生沒 而可祭於社者也 豈惟爲慈孫之私薦 而上哉 顧今民彜墜盡尠聞有孝於先者 今於李氏親覩之誠 可欽嘆是役也 胄孫炳奎及義奎始終監董厚捐 誠金者永奎君也 玆並記
甲寅驚蟄節 漢山 安鍾禧 記

 

옥산사기(玉山祠記)
문창(文昌) 남쪽 30리 거리의 구산진(龜山鎭) 옥포리(玉浦里)에 4기둥 3칸의 지붕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뚝한데 편액에 옥산사(玉山祠)이다. 성산(星山) 이씨(李氏)의 선조 만계공(晩溪公) 휘(諱) 철섬(喆暹)을 위해 세운 것으로 신주를 모시고 향사를 드리는 장소다. 이씨들은 중엽에 병산공(屛山公) 휘(諱) 명신(明新+心)은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따라 배웠는데 소경왕(昭敬王) 선조 때 임진란을 당하여 개연히 적개의 의리를 일으켜 왜적을 소멸하니 우뚝한 공훈과 빼어난 행적으로 세상에 이름났다. 이분 이 만계(晩溪)의 중시조가 되었다. 공은 그 자질이 순수하고 맑았는데 이는 집안에 대대로 계승된 전범앋. 그 부모를 섬김에 살아서는 즐겁고 기쁘게 봉양하였고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을 다하여 아쉬움이 없도록 하였고 장례를 치르면서는 여묘를 짓고 절하고 곡하니 그 무릎이 닿은 자리에는 풀이 나지 않았고 제사를 지냄에는 정성을 지극히 하여 살아있는 것과 같이 하였다. 문중을 거두거나 벗을 사귑에 충성과 믿음 온순과 화목으로 대하니 일생동안 실천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떳떳한 도에 매우 가까운 경지에 이르니 고을의 선비들이 우러러는 바가 되었다. 중간에 함안에서 진해의 황량한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대개 명리를 실어하여 끊어내고 자취를 감추고 빛을 숨기며 태평성대의 자유로운 선비로 살고 싶은 데서 나온 결과였다. 지금부터 약 200여년의 세월이 되었으니 후손들이 번성하여 남방의 큰 문벌로 이름난 가문이 꼽히게 되었다. 공께서 음덕을 쌓아 후대에 내린 것이 아니면 실로 어찌 근본을 존중하는 면모가 되었겠는가. 상 후손들이 근본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돈독하여 지난해에 서로 한 사우(祠宇)를 짓게되었는데 준공을 하게 되니 그 방손(傍孫) 장록(璋祿) 씨가 행장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만계공(晩溪公) 의 실제 행실이 아름답게 우러러 바라보는 데 이는 한문공(韓文公)이 이른바 “고을의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 사우(社堂)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한 것에 부끄럽지 않다. 어찌 친자손들이라 해서 천거하여 올린 것이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백성들의 윤리가 바닥까지 타락하여 선대에 효성을 다한다는 말을 듣기 힘든데 지금 이씨들이 보여주는 조상을 모시는 정성은 가히 감탄하고 흠모할 일이다. 이 공역에는 주손(胄孫) 병규(炳奎)와 의규(義奎)가 시종일관 감동(監董)을 하였고 성금을 후하게 낸 사람은 영규(永奎) 군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아우른다.
갑인(甲寅) 경칩절(驚蟄節)에 한산(漢山) 안종희(安鍾禧)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