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요천시사와 창원 성주사 관음보살입상 이야기

천부인권 2019. 7. 20. 06:00

 

2009.3.29. 요천이 흘렀던 성주수원지 풍경

 

창원의 선비가 남긴 소산집(小山集)을 보다가 소산 김기호(小山 金琦浩 1822~1902)가 쓴 요천회운(樂川會韻)을 보게 되었다. 이 한편의 시에 우리지역의 잊혀진 역사가 남아 있기에 소개를 한다. 요천회(樂川會)는 지금의 요천시사(樂川詩社)로 이어졌는데 처음 요천회는 김녕김씨의 후손인 사파정동(沙巴丁洞) 김기호 선생을 중심으로 1859년  완암의 정재건(鄭在建), 안촌의 송병정(宋秉正), 덕정의 김진헌(金振憲), 모산의 김정호(金廷浩) 등과 이곳에서 요천유계(樂川儒契)를 맺고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계제사(契祭祀)를 지내고 시사를 열었다. 아래는 소산 선생이 읊은 요천회운(樂川會韻)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樂川會韻  요천회(樂川會)¹⁾ 운
龍華菴下一長川 용화암(龍華菴)²⁾ 아래 긴 시내 흐르는데
泉石名區我得先 천석의 명승지를 내가 먼저 얻었다네.
富貴之人山外地 부귀한 사람들은 산밖에 살고
淸閒者樂洞中天 청한한 자는 골짝 안을 즐기네.
塵心雨滌千峰靜 때 낀 마음 비가 씻어 뭇 산이 고요하고
春氣花生萬樹圓 봄기운에 꽃이 피어 나무마다 만발했네.
盛代吾儒修契事 태평성대 우리 유림의 계모임
三蘭九菊後相傳 3월 난초 9월 국화³⁾ 후세에 전하리라.

 

【주석】
요천회(樂川會)¹⁾ : 1959년 7월에 착공해 64년 7월에 완공되는 천선동 성주수원지(聖主水源池)가 건설되기 전의 성주계곡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요천(樂川)이고, 지금의 남천 상류 성주수원지 지역이다. 요천회(樂川會)는 요천시사(樂川詩社)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용화암(龍華菴)²⁾ : 지금의 성주사(곰절) 첫 번째 주차장이 있는 곳 아래에 있었던 사찰이다. 이 용화암에서 발견된 불상이 예전에는 용화전(龍華殿)에 안치된 창원성주사 관음보살입상(昌原聖住寺觀音菩薩立像)이다. 지금은 관음보살입상이 성주사 관음전에 있다.
3월 난초 9월 국화³⁾ : 요천회는 음력 3월과 9월 2회 정기 모임을 가졌다. 계원의 이름과 요천이라는 각자가 지금도 하천변에 남아있다.

 

 

 

 

요천각자와 요천회원 이름을 적은 마애석

 

 

 

요천각자와 요천회원 이름을 적은 마애석에 접근하여


요천각자(樂川刻字)와 요천회원 이름을 암석에 새긴 마애각(磨崖刻) 암괴는 성산구 천선동 산 129-1번지에 위치한다. 커다란 암괴의 중앙 상부에 직사각의 형태로 평면을 다듬고 우측에서부터 계원의 이름을 기록하고 좌측에 요천이라 새겼다. 이 마애각은 회원 수가 증원된 후 새긴 것으로 파악 되나 모든 회원의 후손은 파악 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찾아 정확한 이름과 인원수를 파악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철거된 용화전 모습

 

 

창원에서 사라진 사찰 이름 용화사(龍華寺)에 대한 기록은 지금까지 접한 경우는 없다. 다만 가재잡고 개구리 잡아 구워 먹던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용화전이 있던 자리에서 성주수원지로 내려가는 꽤 넓은 길이 있었고 길옆에 부도탑(浮屠塔) 2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그 부도는 지금의 성주사 입구에 옮겨 두었다.
옛 용화전(龍華殿)에 모셨던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은 성주사 경내에 관음전(觀音殿)을 지어 옮겨 모셨다. 따라서 용화전의 기록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후 알게 됐지만 왜 이 작은 정각의 이름에 전(殿)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사용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작은 전각에 불상하나 모시고 용화전(龍華殿)이라 한 것은 아마도 용화사를 기리는 뜻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성주사와 용화사는 각기 다른 영역의 사찰이었으나 용화사는 사라졌고 성주사는 중건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주사의 유물들은 인근의 폐허가 된 사찰들에서 수집하여 갖추게 되었고 그 중 성주사삼층석탑이 이를 증거 한다. 이 삼층석탑은 본래 탑골의 사라진 사찰터에서 수집해 온 것이다. 또한 창원성주사(昌原聖住寺)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역시 성주사로 옮기면서 성주사가 주인이 된 것이다.
현재의 『창원성주사(昌原聖住寺)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진품이 아니라 1970년대 초에 새로 재작한 것으로 당시 진품은 일본의 어디에 팔렸다.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을 성주사 주지가 일본인에게 팔아버린 사건으로 당시 인근 주민들이 성주사 주지에게 항의했고 그 결과 진품 대신 모사품이 자리를 하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모사품이 문화재로 등극을 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박모씨가 문화재 등록의 일등 공신인 것으로 파악됐다. 떠도는 풍문에는 『창원문화』의 창간호 표지에 진짜 용화사관음보살입상(龍華寺觀音菩薩立像)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하나 아직까지 그 창간호를 보지 못했다.

 

 

 

 

용화전 편액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는 계급대로 이름이 붙는데 전당합각 재헌루정(殿堂闔閣 齋軒樓亭)이 그 이름 서열이다. 대체로 전당합각((殿堂闔閣)은 궁궐에 사용하고 종교의 건물에 사용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즉 왕이 거주하거나 왕 이상의 권위를 가진 분을 모시는 경우에 사용한다. 궁궐에는 왕이 집무를 보는 근정전(勤政殿), 왕비와 왕이 거주하는 교태전(交泰殿) 등이 있으며 사찰에는 부처를 모시는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향교에는 (大成殿)이 그것이다.
재헌루정(齋軒樓亭)은 일반 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집의 이름을 재(齋)라 하고, 관청이나 사대부의 호(號)에 헌(軒)을 사용하며 루(樓)는 사적인 영역에 주로 사용한다. 정(亭)은 만든 사람은 있으나 누구에게나 사용을 허락한 시설에 붙인다. 간혹 누정(樓亭)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엄격하게 구분하면 루(樓)는 개인이 만든 시설보다 관에서 지은 건물이라 성곽의 관문 구실을 하여 일반인 사용에 통제가 있다. 또한 개인이 건축한 루(樓)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주인의 허락을 얻어야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대표적으로 초가3칸의 마루라 해도 주인의 허락 없이 앉으면 주거 침입이 된다.
우리 지역에 재(齋)는 각 성씨에 따라 제례의 공간으로 대부분 갖추고 있으며, 헌(軒)은 진해현 관아의 동헌(東軒)이 있고 창원의집 사랑채인 성퇴헌(省退軒)이 있다. 루(樓)는 창원지역에 대표적인 것으로 김종영의 생가인 소답동의 사미루(四美樓)가 있다. 경상남도에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 촉석루(矗石褸)가 있다.
그럼 창원지역에 요즘 만든 진해루(鎭海樓), 창원루(昌原樓)는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옳겠는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5호 창원성주사관음보살입상 (昌原聖住寺觀音菩薩立像)

 

끝으로 소산선생이 자손에게 전하는 말을 읊조려 보며 한편의 시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示子孫   자손에게 알린다.
積錢萬緡終歸虛 만냥 재산 모은들 끝내는 부질없고
積書千券不盡讀 천권 책을 쌓은들 다 읽지 못하리니
不如一生吾心上 차라리 한평생 내 마음 다 바쳐서
積善積功又積德 선행 쌓고 공 쌓고 덕을 쌓아라.

 

출처 및 참고

소산집 국역본-소산서당/(주)여백미디어(2013.10.21)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요천(樂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