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파괴된 최치원 노닐던 강선대 降仙臺

천부인권 2019. 11. 16. 21:20

1964년 지도속의 강선대 모습

 

마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최치원이 드리운 합포의 달그림자’의 책에서 강선대(降仙臺)를 현재 진해구 비봉동(飛鳳洞)에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지만 아니라는 증거가 너무 많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강선대는 『영남읍지-웅천현』편과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 거의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는 강선대(降仙臺)를 아래와 같이 기록을 하고 있다.


【山川
熊山 在縣北十里 爲邑主山 上有奇巖 高十餘丈 周五十餘丈 上可坐三十餘人 屹然特立 名曰天子峰 一脈西走 爲安民嶺 又西走 爲長福山 又西北走爲馬也嶺 又西入爲降仙臺 而山形崒起作臺 與昌原月影臺 隔浦相望 俗稱孤雲崔先生諱致遠 乘舟弄月 遨遊於此故名曰降仙臺 自馬也嶺 又一脈 走西南爲高山 上有烽燧 自高山落脈走西南爲飛巖洞 而有盤石 上可坐五十人 淸流作瀑 素沫飛空 悅若飛雪故曰飛巖洞 -中略-】

 

산천(山川)[해문]
웅산은 현에서 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읍의 주산이 된다. 산위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 높이는 10여장이고 둘레는 50여장이며 그 위에 30여명이 능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우뚝 솟아 있다. 이름은 천자봉(天子峰)¹⁾이라 한다.
거기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안민령이 되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장복산이 된다. 거기에서 또 서북쪽으로 뻗어 마야령(馬也嶺)²⁾이 되며 서쪽으로 더 나아가 바다에 드는 곳이 강선대가 된다. 산의 모습이 우뚝하게 대를 이루어 창원의 월영대와 바다를 사이로 서로 바라본다. 고운 최선생 휘 치원(致遠)이 배를 타고 달 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았다하여 강선대(降仙臺)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마야령(馬也嶺)에서 또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뻗어 고산(高山)이 되고 그 산 위에 봉수가 있다. 고산에서 서남쪽으로 떨어져 뻗어 “비암동(飛巖洞)³⁾”이 된다. 여기에 넓고 편평한 바위가 있어서 그 위에 능히 50여명이 앉을 수 있고 맑은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허공을 나는 물방울이 마치 흩날리는 눈과 같이 황홀하여 “비암동(飛巖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략-

 

【주석】
천자봉(天子峰)¹⁾ : 여기서 천자봉은 웅산의 시루봉(650m)을 지칭한다. 지금의 천자봉(500m)은 웅산의 시루봉에서 약 2km 남쪽에 떨어진 곳의 산정을 말한다.
마야령(馬也嶺)²⁾ : 현재 장복산길이 통과하는 마진터널 위의 고개를 말한다.
비암동(飛巖洞)³⁾ : 옛 상서면(上西面) 지역으로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비봉동(飛鳳洞)과 거의 동일한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다.

『영남읍지-웅천현』편과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마야령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는 산줄기는 두 곳이 있는데 한쪽은 강선대로 향하고 한쪽은 고산봉수가 있는 고산 아래의 비암동으로 간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봐도 현재의 진해구 비봉동은 아니라는 것이 잘 설명 되고 있다.


『영남읍지-웅천현』편과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마야령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는 산줄기는 두 곳이 있는데 한쪽은 강선대로 향하고 한쪽은 고산봉수가 있는 고산 아래의 비암동으로 간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봐도 현재의 진해구 비봉동은 아니라는 것이 잘 설명 되고 있다.



해동지도 -규장각 지리지

 

또한 옛 해동지도에 보면 강선대(降仙臺)의 위치가 표기 되어 있는데 당시의 상서면(上西面)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서면(下西面)의 지역에 표기 되어 있다. 해동지도에 기록된 하서면(下西面)은 「初竟四十里 終竟六十里」라 기록하고 있는데 읍치에서 처음 접하는 곳의 거리는 40리이고, 끝 지역은 60리라 기록하여 그 폭은 20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는 마야령에서 양곡(梁谷)을 거쳐 봉암진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표시하고 있다. 고산봉수의 위치와 강선대의 위치를 명확하게 표시하였는데 고산(高山), 즉 산성산 아래 마을인 비암동(飛巖洞)이 아니라 지금의 적현 산업단지 방향임을 잘 보여 준다. 지금의 위성사진과 비교해 봐도 정말 세밀하게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곳 적현 산업단지 안쪽에는 창원황씨 대종회 추경각(追敬閣)과 시조인 시중공(侍中公) 충준(忠俊)의 묘소가 위치한다. 이 묘소의 안산이 강선대가 있는 곳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창원황씨가 발행한 창원황씨 『추경각사적지(追敬閣事蹟誌)』에 실린 『강선대 유래(降仙臺 由來)』는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降仙臺 由來
始祖墳墓對案海畔 有一彈丸獨山而山之名 降仙臺也 如老龍吐珠蓋 天作玆山使之護 我先墓而爲案雖然山 在港側權在也人 方塡海廣港之日 實有人買入鑿之憂 今秋亭時 大邱達城町 龍瑞氏來觀時象 以不贍之家 與其胤京洙 極盡誠力 辨得壹百六拾圜金 買受玆山納于宗中永保 我先墓對案壯哉 此乃吾數百人 不能者 豈非千鷄中一鳳鳥乎 揭于齋壁用來世焉
辛巳十月 日
都有司漆原 泌秀謹記】

 

강선대 유래(降仙臺 由來)[해문]
시조의 분묘 앞에는 바닷가 이면서 둥글게 툭 튀어나온 산이 하나 있는데 산의 이름은 강선대(降仙臺)라 하고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아마 천작(天作)으로 생긴 이 산은 우리 시조 분묘를 보호하는 안산(案山)이다. 하지만 산이 항구에 접해 있고 타인의 소유로 되어있기 때문에 요즘 바다를 메워서 항구를 넓히려는 시기에 실지로 누가 매입해서 산을 헐어서 없애려고 해서 염려가 되었는데 금년 가을 묘사 때에 대구 달성정(達城町)에 사는 용서(龍瑞)씨가 와서 이런 현실을 둘러보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이지만 그 아들 경수(京洙)와 같이 성심을 다해서 돈 일백육십환을 준비하여 이 산을 사서 종중으로 등기를 해서 영원토록 선대묘의 안산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장하기도 하여라! 이런 일은 우리들 몇 백명이라도 못할 일을 했으니 닭이 천마리면 봉(鳳)이 한 마리 있다는 말은 이런 일을 비유한 말이 아닌가?
이 일을 기록해서 벽에 걸어 두고 후인들이 보게 한다.
신사(辛巳:1941) 10월 일
도유사(都有司) 칠원 필수(泌秀) 삼가 기록함.

 

1974년 강선대와 매립지 선이 보이는 사진

 

그후 시대(時代)의 변천과 후손들이 추원지성(追遠之誠)의 부족으로 인하여 1973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시책의 일환인 기계산업 육성과 철강공업단지 조성으로 웅남면 일대와 웅천 해안 백사장을 공단으로 매립하면서 조상 대대로 유전하여 왔던 강선대(降仙臺)를 허물어 그 돌과 흙으로 매립하여 그 아름답고 수려한 풍치는 간데없고 지금은 철강부두에 부딪치는 파도와 바람만 스치고 있어 유허지를 바라보는 후손들은 애석해 하며 옷깃을 여미고 숙연지념(肅然之念) 한다.

 

6.25전쟁 당시 군사주둔지 였던 마산고등학교

 

위의 내용과 해동지도의 위치 및 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 산천(山川)조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운최선생(孤雲崔先生) 노닐던 강선대(降仙臺)는 적현동 산업단지 매립 때 이미 매립된 것으로 파악되며 정확한 위치는 사진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굳지 추정한다면 창원특수강 공장부지 내( 성산구 적현로 147)일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최치원이 드리운 합포의 달그림자-마산문화원/도서출판바오(2016.10.31.)
웅천현읍지-진해문화원(향토사연구소)/동양문화사(1993.12.30.)
추경각사적지-창원황씨대종회/대보사(200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