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민속·향토문화재

창원읍성에서 가는 나루터 주물연진 主勿淵津

천부인권 2019. 11. 29. 12:59

 

 

 

2017.2.27. 임해진 나루에서 본 주물연진 공관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山川條)〗에는 『주물연진(主勿淵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물연진(主勿淵津)은 부(府) 북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칠원현(漆原縣) 매포(買浦) 하류이다. 언덕 위에 작은 소공관(小公館)을 개설하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한다. 【在府北四十里漆原縣買浦下流岸上設小公館以待倭使之乘舩往來】고 기록했다.

 

 

 

 

2019.5.10. 동정동 천주산 입구 장붕익 선정비


주물연진(主勿淵津)은 창원도호부에서 관찰사가 있는 대구 경상감영으로 가는 도로를 잇는 포구(浦口) 중 하나로 창원도호부에서 출발하여 굴현(堀峴)고개로 향하다 보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고 있다.”는 천주산(天柱山) 입구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옛 창원도호부사의 비 2기가 있는데 1702년 11월에 부임하여 1703년 7월까지 약 8개월 정사를 펼친 장붕익(張鵬翼;1646~1735)의 선정비(善政碑)이다. 비의 전면에는 각각 『부사장공붕익운거만고명엄선정비(府使張公鵬翼雲擧萬古明嚴善政碑)』
『부사장공붕익청엄선정비(府使張公鵬翼淸嚴善政碑)갑신사월일(甲申四月日,1704년)』이라 음각했다. 이 비 2기 옆에는 안내비석이 있으니 장붕익 부사가 『좌찬성에 증직되고 시호는 무숙(武肅)공이며, 고종 2년(1865)에 부조지전(不祧之典 : 국가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의 특전을 받았다.』는 사실과 약력을 알 수 있다.

 

장붕익(張鵬翼) 부사의 재미난 일화가 있어 소개 한다.
(당시 출처를 따라가니 글이 없다.)

검계 킬러 장붕익
위의 인용문은 18세기의 문인인 이규상이 쓴 ‘장대장전’의 일부다. 장붕익은 앞서 ‘화해휘편’의 영조 때 포도대장으로 검계를 소탕했다는 바로 그 인물이다. 장붕익은 1725~35년 사이에 포도대장을 지냈다. 포도청에 관한 자료로는 ‘포도청등록’이 있지만, 남아 있는 문헌들은 대개 19세기 것이고, 18세기 초반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자료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영조대의 유일한 검계 자료일 것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검계는 약 50년 뒤까지 그대로 존속했다. 이것은 아마도 검계 자체가 비밀 조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검계는 매우 비밀스런 조직인데, ‘장대장전’의 작자 이규상은 검계의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이규상은 물론 양반이며,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인 한산 이씨다. 이규상은 이 이야기의 소스를 밝히고 있다. 즉 검계의 구성원이었던 표철주(表鐵柱)가 그 정보원이다. 이규상이 만난 표철주는 ‘집주름’이었다. 집주름이란 요즘의 부동산중개업자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70여 세였으며, 귀가 먹고 이도 빠지고 등이 굽은 늙은이로 쇠로 만든 삽을 지팡이 삼아 짚고 다니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철주란 이름 역시 쇠삽을 짚고 다녀서 붙은 것일 터다.

일흔이 넘은 표철주는 초라한 노인이지만, 소싯적에는 “용감하고 날래며 사람을 잘 쳤으며, 날마다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동궁에 있을 때 호위하던 세자궁의 별감(別監)이었다. 늘 황금색 바지를 있었는데, 비가 와서 옷이 젖으면 새 바지로 갈아입을 정도로 깔끔하고 사치스런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규상이 표철주를 만났을 때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젊은 날의 사납고 불평스런 기색이 있었다. 이규상이 표철주에게 물었다.
“너는 마치 미친 사람 같구나. 평생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표철주가 한참 귀기울이고 주름진 입술을 달달 떨더니 몸을 뒤집고 철삽을 세우며 말했다.
“장사또가 죽었는가? 죽지 않았는가?”
또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지 않는 것은 장사또를 지하에서 만나기 싫어서지.”
또 검계 사람들의 일을 상세히 전해주며
“적잖은 호한들을 장사또가 죄다 죽여버렸지.”
표철주가 공포에 떠는 장사또는 다름 아닌 장붕익이다. 이야기로 보아 표철주는 한참 외지로 도망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어쨌거나 장붕익이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검계의 인물을 잡아 죽인 일이 검계 구성원에게는 일대 공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편하게 말해 장붕익은 조폭을 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소탕해버렸던 것이다.

 

 

 

 

2019.4.16 창원 북면 무곡리 박수석 송덕비


굴현고개를 넘어 화천리를 지나서 무동리 입구를 지나면 나지막한 갈곡고개를 넘게 된다. 이 갈곡고개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12월에 창원군민 북면소작농일동이 세운 박수석(朴水錫) 송덕비가 있다.

 

그 전면에 새긴 내용은 이와 같다.
士人朴水錫頌德碑    사인 박수석 송덕비-선비 박수석의 덕을 칭송하는 비.
三卋積陰 恵我耕食   삼대에 걸쳐 쌓은 음덕은 우리에게 경작하여 먹을 은혜를 베풀었고
歲値飢荒 稅減定式   흉년들어 기근을 당하는 시기에는 소작료를 감하는 제도를 정하였네.
刷不煩費 恤憫作力   번거로운 비용 부담을 없애고 불쌍한 사람을 구휼하는 데 힘을 썼으니
咸思報德 片石斯刻   그 덕을 보답하고자 함께 생각하여 비석에 이를 새겼도다.

 

 

 


2007.1.28. 북면 마산마을에서 바라 본 마금산 온천과 천마산 모습


이 갈곡고개를 넘으면 도사(道使; 내곡리)터 방향과 온정(溫井;북면 온천)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는데 좌측의 무릉산과 철마봉(鐵馬峰:현재 마금산, 280m) 사이의 도사(道使)고개를 넘어가면 지금의 칠북면 검단리가 나온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칠원현(漆原縣) 영포역(靈浦驛)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 갈림길에서 곧장 걸으면 온정(溫井)이다. 온정의 주산은 해동지도(海東地圖)에서는 철마봉(鐵馬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온정(溫井)이 부의 북쪽에 있다. 【溫井 在府北】고 기록했다. 철마봉(鐵馬峰)은 지금의 마금산(馬金山;280m)을 이르는 것이다. 

 

 

 

 

2017.6.11. 마금산 온천 뒤산 고갯마루에서 본 풍경


지금의 마금산 온천(북면 온천)은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 진주목 창원도호부에도 기록되어 있다. 온천(溫泉)이 부(府) 북쪽 18리 거리의 초미흘(草未訖)에 있다. [욕탕이 3간, 주사(廚舍)가 3간이다.] 【溫泉在府北十八里草未訖, [湯沐三間, 廚舍三間]】고 기록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山川條)〗에도 온정(溫井)이 부 북 20리 지점에 있다. 【溫井 在府北二十里】라 기록했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온정(溫井)이 창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마금산 온천이 한동안 폐쇄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개발했음을 알려 준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마금산에서 약수가 흘러 나와 치료가 된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 각지에서 각종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민들의 생활에 민폐가 되자 매몰했다고 한다.’ 창원시 웅천면의 목리마을 온천 폐기 이야기와 창녕군 부곡온천의 폐기 이야기도 비슷한 내용으로 전하고 있다.
지금의 마금산 온천 개발은 일본인 의사 덕영오일(德永吾一)이 개발에 착수하여 산장을 짓고 영업을 시작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이후 북면 온천은 지금도 창원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인데 이곳이 주 무대가 되는 근대 가곡이 탄생 했으니 「조두남의 산촌」이다. 이 가곡은 마금산 온천에 요양을 온 이광석이 지은 시(詩)에 조두남이 곡을 부친 것이다. 그 가사는 아래와 같다.

 

산촌-이광석 작시/ 조두남 곡
달구지 가는 소리는 산령을 도는데 물 긷는 아가씨 모습이 꽃인 양 곱구나.
사립문 떠밀어 열고 들판을 바라보면 눈부신 아침 햇빛에 오곡이 넘치네.
야아 박꽃향내 흐르는 마을 천년만년 누려본들 싫다손 뉘하랴.
망아지 우는 소리는 언덕을 넘는데 흐르는 시냇물 사이로 구름이 말없네.
농주는 알맞게 익어 풍년을 바라보고 땀 배인 얼굴 마다 웃음이 넘치네.
야아 박꽃향네 흐르는 마을 천년만년 누려본들 싫다손 뉘하랴.

 

 

 

 

 

2015.9.11 하천리 북천천변의 푸조나무 자생지


온천(溫泉)에서 낙동강을 향해 걸으면 낙동강변의 신기마을을 지나는데 낙동강변은 하천리 소속이다. 이 낙동강변에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는 푸조나무 노거수가 있다. 이 푸조나무 노거수는 낙동강변이 푸조나무의 자생지임을 증거 하는 중요한 식물 지표이다. 푸조나무 자생지의 공통점은 바닷가의 절개지이거나 하천변의 절개지라는 것이다. 이 푸조나무 자생지는 북면 하천리 1203번지에 위치하며 낙동강과 함께 흘러가는 북천천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북면 신기마을 주민들은 이 푸조나무를 신목으로 생각하고 해마다 제를 지내 왔는데 마을 전체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일이라 제주를 정하는 것도 엄격하였고 제물도 푸짐하게 장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푸조나무 자생지의 주위 환경이 많이 바뀌어 차량의 통행은 그리 많치 않지만 도로의 공간이 없어 위험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안전의 문제와 노인인구의 증가로 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가끔 무당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간다고 한다.
비탈의 경사가 심하여 푸조나무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가슴높이 둘레를 재는 것을 포기하고 왔는데 다음에 다시 간다면 밧줄을 준비하여 접근을 할 생각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300년 정도로 추정이 되는 크기이다.

 

 

 

 

2015.9.11 하천리 북천천변의 푸조나무 자생지


푸조나무를 사람들은 검포구나무, 금포구나무, 찌르레기나무 등 다양하게 알고 있는데 포구나무인 팽나무와 달리 검은 열매를 내가 어릴 때에는 먹기도 했다. 찌르레기나무라 하는 것은 이 나무가 겨울에 찌르레기의 식량이 되기에 찌르레기나무라는 이명이 붙은 것으로 생각된다.
푸조나무는 피자식물(ANGIOSPERMS), 쌍자엽식물강(DICOTYLEDONAE), 조록나무아강(HAMAMELIDAE), 느릅나무과(Ulmaceae), 푸조나무속(Aphananthe), 푸조나무의 학명은 Aphananthe aspera (Thunb.) Planch.이다.
푸조나무는 중국(중남부), 일본, 타이완, 우리나라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 경남, 전남, 서·남해도서 및 제주도에 자생지가 있다. 낙엽 활엽 교목으로 높이 25m, 지름 1.5m 정도 자라며, 수세가 강하고, 맹아력이 좋다. 성장이 빠르며, 나이가 어릴 때에는 기둥(樹幹)의 생장이 느린 편인데, 이 때 수피에 회백색 지의류(地衣類, lichen)가 붙어산다. 점점 수간 성장이 두드러지면 수피가 세로로 갈라지고, 속이 드러나면서 갈색이 비친다. 바깥의 회백색과 어우러져 회갈색 얼룩 문양을 띤다. 늙은 교목이 되면 느티나무처럼 수피는 큰 박편(薄片)으로 떨어진다. 거대한 초교목(超喬木)로 성장하면 줄기 아래에 판근(板根)이 발달함으로 쓰러지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잎은 어긋나며 5~10cm의 장타원·난형이다. 가장자리는 예리한 톱니가 있다. 표면은 매우 거칠며 뒷면에는 누운 털이 있다. 꽃은 암수한그루이며 4~5월에 나면서 동시에 핀다. 열매는 지름 8~13mm의 구형이며 9~10월에 흑색으로 익는다. 겨울까지 열매가 붙어 있어 찌르레기의 먹이가 되어 번식한다.
목재는 변재와 심재의 구별이 불분명하고 엷은 황백색으로 연하면서도 단단하다. 푸조나무는 연하면서도 단단하여 건축재·조선재·기구재 등으로 사용하며, 특히 저울자루·절구·세공재 등 귀한 용도로 쓰인다. 그러나 나무 수액에는 독성분이 있다.

 

 

 

 

김형대영세불망비(金炯大永世不忘碑)[해문-박태성]


이곳 하천리 푸조나무 노거수 자생지에서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낙동강을 마주하고 천추로의 좌측 북면 하천리 산9-5번지의 산 가장자리에 『창원 하천리 김형대영세불망비(昌原 下川里 金炯大永世不忘碑)』를 만나다.
김형대(金炯大)는 김녕김씨 백촌의 후손으로 자가 덕중(德中)이고, 호는 만취(晩醉)이다. 1909년 그 를 기리기 위해 하천리 341-1번지에 삼사재(三斯齋) 건설하여 향사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식을 모범적으로 잘 가르쳤으며, 친척들에게 의리를 지켜 화목하게 지냈고, 벼슬은 의관(議官)을 역임했다. 또한 그는 효자로도 유명한데 어버이의 병환에 약을 맛보고 대변을 맛보면서 극진하게 간호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보호각은 가첨석과 팔각의 기둥을 갖추고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전의관정이품김형대영세불망비(前議官正二品金炯大永世不忘碑)’라고 글귀가 새겨져 있으며 측면의 융희 2년으로 보아 190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賢哲心天 川德淵淵 어질고 밝은 마음 하늘이 내린 것이니 하천에 베푼 덕은 연연이 이어지도다.
宣業靑氈 帝友丹田 의관으로서의 선업은 대를 이은 유산이며 임금의 벗으로 단전을 이루었네
綜睦不偏 憐窮又延 온화한 덕은 치우치지 않았고 가난한 자 불쌍히 여겨 두루 살폈왔네
焉何報然 千口石遷 사람마다 어찌 그 덕에 보답할까 말하니 그 사람들의 말이 돌에 새겨지게 되었네.

 

 

 

 

 


2019.4.4. 북면 하천리 안신천마을 입구에 있는 손기성 불망비각


김형대영세불망비(金炯大永世不忘碑)를 뒤로 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계속 오르면 북면 하천리 안신천마을 입구에 도착하는데 이곳 의창구 북면 하천리 159번지에서 『전홍릉참봉손기성혜덕불망비(前洪陵參奉孫基晟惠德不忘碑)』를 만난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13m이며 「위도 35°22′23″N 경도 128°36′52″E」이다. 천마산의 끝자락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옛길 가장자리에 세운 이 비는 북면 신기리 바깥신천마을에서 낙동강 변을 따라 천주로를 오다보면 북면 하천리 안신천마을 입구에 있다. 이 비와 비각은 출입문인 협문을 두 개의 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돌로 가첨석처럼 다듬어 올렸고 빙 둘러 시멘트 블록으로 담장을 했다. 양 기둥에는 “衆口稱譽 뭇사람들이 칭송하니 片石堪語 한 조각 돌에 새겨 두노라.”라는 글귀가 있다. 비각의 모양은 김형대영세불망비(金炯大永世不忘碑)와 흡사하다. 이 비와 각은 1923년 세운 것이다.

 

 

 

 

 

2019.4.4. 명촌마을 당숲 풍경


이곳에서 낙동강 둑방을 따라 계속가면 강변의 바람을 막고 마을이 외부에 직접 노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숲인 『북면 외산리 명촌마을 당숲』을 보게 된다. 지금은 둑방의 밖에 위치해 있지만 둑이 없었을 때 홍수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숲속에 당집은 없지만 당산제를 폐기한 지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는다.
마을숲이란 일반의 산야에 자연 상태로 이루어진 산림이나, 단순히 목재생산을 위해 조림된 숲을 뜻하지 않는다. 마을숲은 오랜 인류의 역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삶이 축적되어 형성된 문화적 상징물로 마을의 특정한 장소에 조성되어 특별한 목적아래 보호되거나, 특별한 용도로 활용되어 온 마을 문화의 요체이다. 즉 마을의 문화가 녹아 있는 성격을 지닌 숲을 한정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마을숲에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제례 등 특별한 행위가 있고 경외심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곳 『북면 외산리 명촌마을 당숲』 역시 예전에는 가장 큰 소나무에 명촌마을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차리고 제례를 지냈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삼탕, 자반 등을 마련했고, 제례가 끝나면 돼지머리는 땅속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는 흔적도 없어진 문화이다. 그러다 보니 명촌 숲도 쉽게 파괴되고 있다.

 

 

 

 


2019.4.4. 명촌에서 바라본 주물연진 소공관터


명촌 마을에서 600m상류 낙동강이 굽어지는 곳을 사람들은 “공관(公館)터”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산천조(山川條)〗의 주물연진(主勿淵津)에 기록한 언덕 위에 작은 소공관(小公館)을 개설하여 배를 타고 왕래하는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한다. 【岸上設小公館以待倭使之乘舩往來】는 기록속의 장소인 것이다.

 

 

 

 


2009.10.14. 청학로에서 본 주물연진


지금은 아무른 흔적도 없는 산야처럼 보인다.
주물연진 맞은편은 축산군(鷲山郡;지금의 창녕군 영산면) 임해진(臨海津)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임해진(臨海津)의 마을은 사라지고 벽진이씨 소우정(消憂亭)만이 옛 영화를 기억하듯 홀로 서 있다. 

 

 

 

 

 

출처 및 참조
신증동국여지승람Ⅳ-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광명인쇄공사(1971.2.20.)
역주 창원부읍지-창원문화원/민긍기(2005.12.30.)
신비의 샘 마금산 온천-디지털창원문화대전/김원경
자여도 세월을 거슬러 걷는다-한가람/최헌섭(2010.3.31.)
한국의 나무-김진석.김태영/돌베개(2014.9.1.)
창원시문화유적분포지도(2005년)-창원대학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