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 함안 군북면 서산서당 솟을 삼문 유입문
2019.7.2. 함안 군북면 서산서당
서산서당(西山書堂)은 군북면 사촌리 948번지에 위치한다. 백이산(伯夷山: 해발 369m)의 동쪽방향 산기슭에 숨겨 두었다. 군북면에서 1029번 지방도로(의산삼일로)를 따라 가다보면 사촌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곡방향으로 일직선의 도로가 이어진다. 490m를 가면 우측으로 가는 소로를 만나고 서산서당의 안내 비석을 만난다. 우측으로 가면 석교천을 건너게 되는데 원계처사함안조공추모비(源溪處士咸安趙公追慕碑), 미헌처사함안조공유적비(薇軒處士咸安趙公遺蹟碑), 뢰산처사함안조공추모비(雷山處士咸安趙公追慕碑)를 만난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서산서당(西山書堂)을 만난다.
서산서당은 어계선생의 유맥(儒脈)을 계승키 위하여 영남유림에 의해 1713년(癸巳年) 숙종 39년에 건립되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02년(壬寅年) 대한제국 광무 6년에 본당을 건축하고, 1962년에 개축(숭정 기원후 五壬寅 七月)하고, 1991년에 중수하였다. 서당 정문인 유입문(由入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백세청풍(百世淸風)' 과 '서산서당(西山書堂)'이란 현판과 어계선생(漁溪先生)의 구일등고(九日登高) 시(詩)와 숙종 사제문 및 서산서당(書山書堂) 관련 시편들이 걸려있다.
어계선생(漁溪先生) 을 비롯한 육선생(六先生)을 서원의 전례에 따라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에 생육신에게 미천제를 거행한다.
서산서당 백세청풍 편액
서산서당 주련
九月九日是重九 九月이라 九日날은 중양절을 이름이라
欲酬佳節登高岡 아름다운 계절을 보내려 높은 산에 오르네.
義軒遠矣悲何極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華勛不見心自傷 요순시절 못 보니 마음 절로 서글프네.
嗟哉潦倒生苦晩 가없어라 이내신세 삶이 어이 고달픈 고
懷佳人兮不能忘 그리운 가인이여 회포 끝내 잊지 못할 네라.
서산서당중수기
[原文]
西山書堂重修記
咸州治西距二十里有山曰伯夷棟宇輪奐甍詹翬飛於雲宵卽漁溪先生藏修播馥之所也先生生於文獻之世能文章中進士士望甚重適丁莊光禪受之際若能降志以就新朝則萬鍾靑紫一朝可俯拾芥也而抗節還鄕抱照乘之璧韞櫝而掩其輝遯世無悶老死而不悔筍非豪傑之士信道篤而取義深者能若是哉則知先生之心卽夷齊登彼西山採其薇矣之心也其所秉大義卽所謂撑天地亘萬世而不能易者先生雖自泯其不可泯者天也先生其如天何肅廟己卯復莊陵嶺儒以先生節竹聞於朝特贈吏曹參判遣官賜祭癸未就此建祠享先生及李耕隱孟專元直提學昊金梅月堂時習成進士聃壽南秋江孝溫諸先生世稱生六臣也越十年癸巳賜額西山書院中緸滄來祠院墟矣尸祝廢而絃誦絶兎葵燕麥翳然興喟者久矣往在光武壬寅僉議院址不可荒乃鳩材募工創建書堂於遺其以寓羹墻之慕矣伊後又易九十星霜風雨侵尋重修之不可緩歲辛未孟春始役季秋竣工登斯堂也嶂嵐滴楹江山呈輝想像得先生當日風範神彩於川聲嶽色之間疇不斂袵而起敬興感而仰慕哉始役也始終周旋監董及發帑輸誠者別有記焉重修實碑文.
檀紀四千三百二十四年辛未十月
後學 竹溪安龍鎬 謹記
[해문]
서산서당중수기(西山書堂重修記)
함주(咸州:함안) 관아(官衙)에서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산이 있으니 7)백이산(伯夷山)이라고 한다, 건물이 산듯하고 용마루와 처마가 구름 낀 하늘에 날아오르듯 한 것은 어계선생(漁溪先生)께서 깃들어 공부하시고 향기를 남기신 곳이다.
선생은 글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문장에 능하여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선비들의 기대가 매우 컸다. 마침 세조(世祖)가 왕위를 물려받는 때를 만났는데 만약 자신의 뜻을 굽히고 새 조정에 나아갔다면 많은 녹봉과 높은 벼슬도 구부려 지푸라기 줍듯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조(節操)를 지켜 저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주 큰 보배를 끌어안고 상자에 넣어 그 빛을 가렸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숨어살면서도 답답해하지 않았고 늙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후회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호걸다운 선비였다, 도를 믿는 것이 돈독하였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 깊은 사람으로 이런 분이 있겠는가? 선생의 마음은 백이(伯夷) 숙제(叔弟)가 저 8)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캐던 그 마음이다, 그 잡은 바의 대의(大義)는 이른바 “천지를 받치고서 만고에 걸쳐 바뀌지 않는 것” 이다. 선생께서 비록 그 자취를 없애시고자 했으나 없앨 수 없었던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다, 선생이 하늘을 어떻게 하겠는가?
숙종(肅宗) 기묘(己卯:1699)년에 장릉(莊陵:端宗陵)을 복원했다, 영남의 선비들이 선생의 절행(節行)을 조정에 아뢰니 특별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하고 관원을 보내어 국왕의 명의로 제사를 내렸다, 계미(癸未:1703)년에 사당(祠堂)을 세워 선생 및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진사(進士) 성담수(成聃壽)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 여러 선생 곧 세상에서 일컫는 생육신(生六臣)을 향사(享祀) 지냈다, 10년이 지난 계사(癸巳:1713)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다.
중간에 변고가 있어 사당과 서원은 폐허가 되고 향사도 폐지되고 글 읽는 소리도 끊어졌다, 여러 가지 잡초와 귀리 등이 우거져 사람들이 탄식을 일으킨 지 오래 되었다, 지난 광무 임인년(光武:高宗年號:壬寅:1902)에 여러분들의 논의가 서원터를 황폐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목재를 모으고 목수를 구해 그 터에다 서당을 건립하여 흠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그 뒤 또 90성상이 지나 비바람이 침범하여 중수하는 일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신미년(辛未:1991) 초봄에 일을 시작하여 늦가을에 공사를 끝냈다, 이 서당에 오르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봉우리들이 기둥 앞에 떨어질 듯하고 강산은 빛을 발한다, 시냇물 소리와 산의 빛 속에서 선생의 그 당시의 풍모(風貌)와 정신을 상상한다면 누가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마음과 느낌을 일으켜 우러러 흠모하지 않겠는가?
일을 시작할 때부터 시종 주선하고 감독하고 돈을 내거나 정성을 바친 사람들은 따로 기록이 있다.
단기 4324년 신미년 10월
후학(後學) 죽계(竹溪:順興) 안용호(安龍鎬)는 삼가 기문을 짓는다.
【주석】
1) 東麓 : 西山書院이 伯夷山 東麓에 있었다하나 이는 잘 못된 記錄이다. 伯夷山의 西쪽이다.
2) 金道和 : 1825年(純祖25)-1912年 朝鮮後期의 義兵長, 本貫은 義城, 字는 達民 號는 拓庵, 1893年 義禁府 都事를 지내고 뒤에 義兵長으로 活躍하여 1983年 大韓民國 建國褒章, 1990年 大韓民國 建國勳章 愛國章이 追敍됨.
3) 子規樓 : 端宗(1452-1455)이 世祖(1455-1468)에게 王位를 빼앗기고 流配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端宗이 이 樓閣에 올라 子規詩를 지였다. 子規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端宗의 子規詩가 너무 슬퍼 樓閣 이름을 梅竹樓에서 子規樓로 고쳤다 한다. 江原道 寧越郡 寧越邑 永興里984에 있다.
4) 墨胎氏 : 孤竹國:伯夷之姓也
5) 祠宇 : 祠宇의 터에다 새로이 지었다고 하였는데 잘 못된 表現이다. 院北洞에 있었다.
6) 昺奎 : 本貫은 咸安, 號는 一山, 進士이며 執義公派로 入谷이 故鄕.
7) 伯夷山 : 咸安郡 郡北面 舍村里에 있는 山.
8) 西山 : 中國의 首陽山
[原文]
西山書堂記
堯舜作天下靜 湯武興天下轉 轉固天也 伯夷曰靜 乃天隻手持令 勿轉乃與西山立乎 宵漢以鎭天下 天下之山 山於西者萬曰華 玉帛之岳曰 岐鳴鳳之岡 獨首陽之山曰西山 天下一西山者 以伯夷之歌曰 登彼西山也 噫天地正直之氣不以古今 而或餒不以夷夏 而或間國亡 而不與之俱亡世變 而不與之俱變乃鍾 而復發乎 人自伯夷 而後作者能幾人矣 在漢有劉北地 在晉有陶靖節 在宋有文文祥 在明有方孝孺諸公 在麗有鄭文忠吉注書 在我端宗有生死六臣若 我漁溪先生一進士 而爲上王哭斂服喪已足 以風乎百世 又其胸次淵微無毫髮怨天地 意自安其命卒以岡僕 鳴呼先生伯夷 而得箕子之貞者也 咸安治之西二十里 有雙峰郡誌載以雙岸山 自先生出北曰伯夷南曰 叔齊二子之三千年久矣 天下亦大矣 復有一西山也 先生長於玆山之下 堯舜君民之 志竟與時違乃與玆山獨立不懼遯世無悶木石 我與天地參體者 其先生與玆山東麓 舊有先生書院起於 肅廟癸未越十年癸巳 天額曰西山者也 頃於壬寅僉謂院址 不可荒建此書堂 書堂傑於東南足 以容多士之聚講也 鳴呼先生之直道貫於九天 淸風灑於 六合使世之忠臣義士眞儒正人紹紹起起炳天之彛振 人之紀君臣以定天下 以靜則凡厥後人咸與蹈舞於 堯舜之世豈惟一家之 願亦天下之幸矣
黑鼠季秋上浣 後孫 貞奎 謹記
[해문]
서산서당기
요순(堯舜)은 천하를 안정케 하였고 탕무(湯武)는 천하를 더불어 이전(移轉)케 하였으니 이전은 참된 하늘의 뜻이다. 백이(伯夷)를 이르기를 정(靜)하다 하나. 이에 하늘은 척수(隻手) 지령(持令)으로 천전(遷轉)이 못됨에서 이에 더불어 서산의 특립(特立)이 있지 않았는지. 소한(天)은 천하를 다스리고 천하의 산에는 서산이라 이른다.
서쪽에 있는 천하의 많은 산중에 화산(華山)은 천자가 제사를 올리는 오악(五岳) 중의 한 진산(鎭山)이요, 기산(岐山)은 봉황새가 울고 있는 신령(神靈)스런 명산(名山)이다. 홀로 수양산만을 서산이라 부르며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서산이라고 하는 것은 백이의 채미가에 “저 서산에 올랐다.”는 노래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 천지는 생성(生成)의 근원이 정직하여서 고금과 다름이 없다. 설사(設或) 굶주려도 중화가 이적(夷狄)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간혹 국망(國亡)이 있어도 천지가 함께 망하는 것은 아니고 세상이 변해도 천지가 다함께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天地) 정직지기(正直之氣)가 모여져 현인이 다시 나랴. 백이로부터 이후에 그와 비견할 자 얼마나 있었을까? 한(漢)나라에 유북지(劉北地)요. 진(晉)나라에 도정절(陶靖節)이요. 송(宋)나라에 문문상(文文祥)이요. 명(明)나라에 방효유(方孝孺)가 제공(諸公)이다. 고려조(高麗)에는 정문충(鄭文忠) 길주서(吉注書)가 있고 이조(李朝)에는 단종 때 생·사육신이 있었다. 유아(唯我) 어계선생 같은 이는 일개 진사로 상황의 사사(賜死) 곡렴(哭斂)과 복상(服喪)을 다 했으니 백세에 이르는 풍교(風敎)가 아니랴. 또한 흉금(秉心)이 연색(寒淵)하였거나 조금도 상심이 없었고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가 안정으로 이끌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아! 선생께서 백이를 얻었었고 기자 같은 정절이었다. 함안 군성 서쪽 20리 지경에 쌍봉이 있는데 군지에는 쌍애산(雙岸山)이라 적혀 있다. 선생께서 나신 곳으로 북쪽은 백이 남쪽은 숙제인 바, 두 군자 분은 오랜 세월 3,000년이나 된다. 천하는 역시 크도다. 또 하나의 서산이 더 있으니 선생의 생장은 이산 밑이고 요순의 성세를 뜻했으나 마침내 때를 잘못만나 이에 이산과 더불어 특립독행 하였었고 은둔을 괴로워하였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석은 그를 더불어 살았고 어조는 그와 더불어 즐겼었다. 산은 그와 함께하고 그는 산과 함께하였도다.
유구히 흘흘함이여. 하늘과 더불어 일월(日月)같이 빛날 것이고 그 산과 더불어 역력(歷歷)함이여. 세상과 더불어 천지와 나란히 할 것이다. 선생과 더불어 이산 동록(東麓)에 옛 선생의 서원이 있었다. 세워지기는 숙종 계미년이고 10년이 지난 계사년에 사액된 서산서원이다.
지난(頃歲) 임오년(壬午年)에 사림(士林)이 이르기를 원지의 황폐는 불가하다 하여 이 서당을 세우게 되었다. 서당은 준걸(俊傑)로 동남(東南)이 넉넉하여 많은 선비 모여 강론토록 꾸며졌다. 아! 선생의 바른길은 구천(九天)에 이어지고 청풍이 쇄연(灑然)하여 육합(天地四方)이 된다면 세상으로 하여금 충신의사, 진유(眞儒) 정인(正人)이 일어나고 이어져 천륜을 빛나게 하고 인륜의 기강이 떨쳐져 군신의 강륜이 바르게 되고 천하가 안정하게 된다면 속세의 후인은 다 같이 도무(蹈舞)할 요순의 세상이 될 것인즉 어찌 다만 일가만의 원 이리요. 역유(亦有) 천하지 행이라.
임자(1912) 9월 상순 후손 정규(貞奎) 지음
【주석】
요[堯]중국 전설상의 성천자(聖天子).
史記등에 의하면 요는 성을 도당(陶唐), 이름을 방훈(放勳)이라고 한다. 오제(五帝)의 하나인 제곡(帝嚳)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제위에 오르자 희화(羲和) 등에게 명하여 역법(曆法)을 정하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순을 등용하여 자기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천하의 정치를 섭정(攝政)하게 하였다. 요가 죽은 뒤,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을 추대하므로 순이 천자에 올랐다
순(舜)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帝王)으로 5제(帝)의 한 사람
유덕한 성인으로서 선양(禪讓) 설화(說話)의 대표적 인물이며 요(堯)·우(禹)와 병칭되고 있다. 《사기(史記)>>
탕 [湯王]중국 고대 은(殷)나라를 창건한 왕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은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왕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亳)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 ‘혁명’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무 [武王 BC 1169 ?~BC 1116]
무왕은 문왕과 함께 성왕(聖王)으로 추앙되며, 그가 은나라를 친 군사행동은 포악한 군주를 응징하고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평가되며, 유교(儒敎)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정당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북지(劉北地), 촉한(蜀漢)後主의 아들 심(諶)을 이름. 후주가 진(晉)나라에 항복하자 자살하였음
문천상 [文天祥 , 1236~1282]중국 남송의 정치가, 시인.
자 송서(宋瑞) ·이선(履善). 호 문산(文山). 江西省 지수이현[吉水縣] 출생. 1255년 진사에 수석합격하였다. 1259년 몽골군의 쓰촨성[四川省] 침입으로 합주(合州)가 포위되고 천도설이 유력하게 대두되자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천도를 강경히 반대하는 글을 올려 그날로 면직되었다.후에 복직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
이듬해 원(元)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수도 임안(臨安)에 다다르자 문관으로서 근왕병(勤王兵) 1만을 이끌고 임안 방위에 급히 참가, 분전(奮戰)하였다. 송(宋)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공제(恭帝)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가서 강화를 청하였다. 원나라의 총수(總帥) 백안(伯顔)과 회견, 항론(抗論)하다가 구류되었다. 그 동안에 임안은 함락되고, 송나라는 멸망하였다. 포로가 되어 북송(北送)되던 중 탈주하여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에서 제왕을 칭하고 있던 탁종(度宗)의 장자 익왕(益王)을 받들었다. 잔병(殘兵)을 모아 싸웠으나 廣東省 오파령(五坡玲)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었다.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도(大都: 北京)로 송치되어 3년 간 감옥에 갇혔다.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벼슬을 간절히 권하였으나 끝내 거절, 사형되었다. 시(詩)에도 능하여 옥중(獄中)의 작 《정기가(正氣歌)》로 유명하다. 문집에《문산전집》이 있다.
방효유 [方孝孺, 1357~1402]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
자 희직(希直) ·희고(希古). 호 손지(遜志). 浙江省 닝하이현[寧海縣] 출생. 방정학(方正學)이라고도 한다. 송염(宋濂)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다. 평소부터 王道를 밝히고 태평(太平)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세속적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02년 연왕(燕王: 뒤의 永樂帝)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詔)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다.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고, 일족과 친우 ·제자 등 847명이 연좌되어 죽었다고 한다. 저술에 《주례변정(周禮辨正)》 등 몇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영락제에 의해 소각되고, 《손지재집(遜志齋集)》(24권)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7권)이 전할 뿐이다.
肅廟朝賜祭文
睠彼洛東 山號伯夷 事類讓粟 名符採徵 矧惟臣旅 玆土棲遲 地存遺躅 士挹餘徽 特賜華扁 俾煥柱楣 首陽淸風 萬古不裏
숙종이 내린 제문
저 낙동강을 바라보니 산 이름이 백이(伯夷)이라. 주(周)의 곡식 마다함과 사적이 같았으며, 고사리 캐던 것과 그 이름 부합했네. 하물며 조려는 이곳에 살았으니 끼친 자취 그 땅에 남아 있고 어진명성 선비들이 추앙하여 특별하게 내린 현판 주미(柱楣;집)이 빛났도다. 수양산(首陽山)의 맑은 바람 만고(萬古)에 전해가리.
西山書堂重建記
嶺之南有州曰咸安咸之西有山曰伯夷此何以稱焉地之相距萬有餘里歲之相後千有餘歲而山也謂是號而不辭豈其峰不拔之勢有似乎與世非之而獨行不顧者歟抑亦天作而地設以待千百世之其人也歟鳴呼異矣國家莊光之際漁溪先生趙公出於咸州而終老於玆山之下跡其終始盖所稱而伯夷之儔也當乙亥禪授天與人歸而有六臣者死而不悔又有六臣者生而自靖先生卽其一也先生之心卽夷齊之心而事之難處有甚焉者故一揖庠宮漁釣自托則隱然有周粟不食之義也九日登高慷慨悲吟則愾然有採薇作歌之懷也服上王三年而不顧人之是非約規樓相會而誓一片之心其則是又伯夷之所未有也幸而生於夫子之世則安知不曰求人而得人乎嘗有題其慕者曰使西山二子竝生於當日必將開心曲仰天長吁眞可謂之公知心矣噫玆山之名得先生而不虛先生之節與是山而無窮則 物所以施設於此而預其千百世之前者意豈偶然哉後世之人苟欲羹墻以寓其慕尸祝以其道則捨是山而更於何處也明陵癸未一省聞風之徒相率趨走直其地而建祠幷五先生而有之節所謂西山書院是也山空月白陟降之靈如在水動花落歎息之聲如聞將使天下之人灑然一變家淸節而戶卓行矣運泊元二毁籍延及明宮齋室榛莽於蕪沒斲桶倉楹尾礫於狼藉鳴呼天理人情有不當然者今爲朱夫子修復鹿社之意觀知則忍可以一日煙廢乎至今上辛丑制下而無廢賢躅東西爲堂凡數十架南北爲室亦數十架工殫力而增其飾象趨事而樂其成盖渠渠爾秩秩爾輿鷹岩則四尺斧堂宛在於寂歷之中顧聸漁臺則一絲淸風颯然乎髣髴之際先生烈烈之靈於此於彼而當日之若心貞節亦可以相見其萬一矣何必 待太史氏蚕室之傳而後知伯夷之爲伯夷也哉磋呼道和亦興起之徒也嘗有執鞭之願今於本孫諸君子之請謹書其所感作西山書堂重建記.
戊申 黃花節 金道和 謹記
서산서당중건기(西山書堂重建記)
嶺南의 咸安고을 郡城西쪽에 伯夷山이 있다. 이는 어찌하여 일컬어 졌는지 地境의 相距는 萬 餘里이고, 歲月은 互相前後 數千年이 되는 山이다. 이러한 이름으로 謂稱된 것은 不辭하고라도, 어찌하여 崙峰(崑崙山)처럼 確固한 모습이 그와 같아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아도, 獨行不顧한 者이다. 抑揚컨대 天作 地設이 千百世의 그 사람을 기다렸음이리라.
아아! 異哉로다 이 나라 莊光(端宗世祖)之際에 漁溪先生 趙公은 咸安에서 나셔서, 이 山 밑에 終老한 자취의 始終이 世上에서 敬稱하는 伯夷와 짝이 될 만하다. 乙亥年(1455) 端宗의 讓位는 天與人歸로 死六臣은 죽음을 後悔하지 않았었고, 生六臣은 살아 先王께 忠誠(靖獻)하였으니 先生은 卽 그 中의 한분이다. 先生의 마음이 伯夷叔齊의 마음으로 事君이 難處하고, 極甚하였던 까닭에 太學館을 下直하고, 스스로 漁釣를 稱託하고 隱遯하였음은 周나라 穀食을 먹지 않았던 伯夷叔齊의 義理이다.
九日登高詩는 慷慨하고 測隱하였던 슬픈 哀詠의 歎息으로 伯夷叔齊의 西山 采薇歌와 같은 懷抱였으리다. 上王의 服喪 三年은 人臣으로서의 是와 非는 不顧하드라도, 杜宇樓의 모임을 約束하고 盟誓한 一片丹心이야 말로 이 또한 伯夷에서는 있지 않았든 바다. 多幸이 聖世에 나셔서도 安逸을 뜻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사람을 求한다고 하며 더 얼마나 얻어 지리 늘 지녔던 글제는 西山 二子를 思慕하였었고, 아울러 이날에도 생각에 젖어 흉금을 터놓고 仰天痛哭하였음은 가히 眞實을 告白한 公의 마음임을 알겠노라.
아아! 이 山의 이름은 先生께서 얻은 것이고, 헛되지 않은 先生의 節槪와 더불어 이 山은 永遠할 것이다. 造物主의 施設이 이와 같이 千百世 以前에 豫定되었던 헤아림(商量)이 어찌 偶然하다하리. 後人은 참된 羹墻의 寓懷와 敬慕의 尸祝이 그를 따르는 길이니, 이를 버려두면 이 山이 다시 어느 곳에 또 있으랴, 肅宗 癸未年 일도내(一省)가 風聲을 듣고서는 相率趨向하고 卽時 그곳에 祠宇를 세워 다섯 先生을 並享함에 이가 卽 世上에서 이르는 西山書院이다.
山空月白에 如在 魂靈陟降하고, 流水花落에 如聞 歎息之聲이면, 장차 世上 사람으로 하여금 灑然一變하여 집집마다 淸節할거고, 戶口마다 行實이 敦篤할 것인데, 運泊元二로 毁撤되어 祠宇와 齋舍에는 雜草가 우거지고, 斲桶 및 倉楹의 塵芥등 礫石狼藉하였으니, 아! 가엽다 天理와 人情은 當然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朱子(朱憙)께서 白鹿書院을 修築한 眞意를 보고 알게 된 바에야 차마 가히 但 하루의 湮廢도 있을 수는 없으리라.
이르러 今上 辛丑年(1901高宗38)에 賢躅을 廢할 수 없어 새로이 지으니, 東西는 講堂으로 무릇 數十 間이 되고, 南北은 齋室로 또한 數十 間이된다. 公役에 힘을 다하여 增增하게 꾸며졌고, 뭇사람이 趨向하던일이 樂樂하게 이루어 졌는데, 大槪 建物은 渠渠하고 秩秩하도다. 鷹巖을 바라모니 四尺 墳墓는 完然히 寂寂하고, 뒤돌아보니 고기 낚던 자리는 若干의 淸風만 颯颯하도다. 비롯하여 區別하기 어려울 즈음(髣髴之際)에 先生의 烈烈하신 魂靈은 어차피 當時의 苦心과 貞節이 또한 서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그 萬分의 一이나 되는 것 같다 어찌 꼭 기다렸으리.
司馬遷이 傳(蠶室)하는 史記 以後에 알려진 伯夷의 伯夷 됨이라 할만하다. 아! 가엾어라 道和 이 사람도 興起하는 學徒로 늘 鞭撻하고저 함이 願이였는데, 이제야 本孫 여러 君子분의 請으로 삼가 그 소감을 지어 서산서당 중건기로 한다.
戊申(1908年) 의성 김도화(義城 金道和) 지음
【주석】
❍運泊元二:後漢書鄧⻏駦傳時遭元二之災 註:臣賢案元二則元元也, 古書字當再讀者則於上下爲小二字言此字兩度言之後人不曉遂讀爲元二
❍元元과 同一함, 古書에는 元元을 元二의 表記를 後人이 잘못 알고 元二를 일컬음을 이름
❍後漢光武紀下爲元元所歸賦害元元
❍元元愁恨惠玆元元
❍順紀元元被害
❍質紀元元嬰此困毒
❍桓起害及元元
❍運迫元二(時遭元二之災) 때에 賦害와 愁恨을 만나
❍困毒, 困苦는 근심, 後漢書順沖質帝紀元元嬰困毒..
漁溪先生九日登高詩
九月九日是重九 欲酬佳節登高岡
白雲飛兮雁南賓 蘭有秀兮菊有芳
山明水碧烟煙慘 風高日晶氣凄凉
荻花吐雪江之滸 楓粧紅錦山之陽
杜牧旣上翠微峀 陶潛悵望白衣郞
千載風流如昨日 至今豪氣凜秋霜
回頭擧目江山暮 地闊天高思渺茫
羲軒遠矣悲何極 華勳不見心自傷
沈吟筆下乾坤闊 爛醉樽前日月長
嗟哉潦倒生苦晩 懷佳人兮不能忘
어계선생 구일 등고시
구월의 구일날인 중구절 날 맞이하여 좋은 시절 읊고파서 높은 산에 올랐으라.
흰구름 뭉게뭉게 기러기 떼 날아가니 난초고운 산비탈에 국화 꽃 향기롭네.
맑고 푸른 산천경계 안개구름 자욱하니 가을바람 밝은 햇살 기상 또한 처량하네.
강 언덕 갈대꽃은 흰 눈을 토해내니 아름다운 단풍잎에 청산은 단장하네.
소 치는 목동아이 흥겨워 노래하고 도연명은 뜻이 높아 벼슬 두고 돌아오니
천년의 옛 풍류가 어제인양 생생한데. 오늘의 호협 기상 서리같이 엄숙 하네.
머리 돌려 바라보니 강산은 저무는데 땅 넓고 하늘 높아 생각만 아득하다.
복희 훤원 어디 갔소. 슬프기 그지없어 요순시절 못만 나서 마음절로 애달프다.
시를 찾는 붓끝에는 천지만이 넓고 넓어 흠뻑 취한 술잔 앞에 세월이 길다 한 되노라.
슬프다 이내신세 어인일로 괴로운고 님 그려 품은 회포 끝내 잊지 못할 네라.
[原文]
西山書堂 重建上樑文
東海仰仲連之末照彝性所同西山聞伯夷之淸風藏修勿替顧玆遯跡遺地仍其蒙額華楷恭惟我先祖貞節公漁溪圭璧令資典書公之山斗嵬望佔畢翁之秉執大義襲懿訓而服膺振作斯文彰華聞於榜目孝敎之行踐履之學務剛毅之氣和泰之容蘊實戒名以若手段中發外行將高風羽儀際玆九五君之聖明縱曰勛華禪德二六臣之生死實是比微同仁越捿寃禽鳴乎君王之恨漢揖嵬角凜然國士之盟未遂復位之忱蒼梧之雲縿宛降酹萬古之精靈泣齊夷之義塚役皆斧質如飴用伸臨葬之哭鼎湖之龍鬍莫攀服三年之喪恥殷士之裸將我亦軒冕若浼遂乃揖太學之多士伴小役之逸民鶴林服招魄辭東峰之腔血相弔雉岳巖題名字觀瀾之聲氣同求 山聳雙筠允符墨胎伯叔理我一倫七曜垂晦扶植乎傾芬至誠門對五柳不遠栗里神仙返吾初服九日登高頡顔乎採薇遺韻中庸得其憫山高水長允矣四海之準彛倫賴而不隳天覆地載展也百世之師公論復行昭揭良吏之日月卓腏潛德苴闡曠感異代之風雲楮頭六賢正合生同志士同行其奈絃誦之場二子盖寓因其之慕其仁久矣蕘牧之社凡爲章甫猶爲之嗟歎盡宮於堵大匠之繩墨矧伊雲仍盍圖其經始自塾而庠晟歲之模楷 不頗揆之以日瑤琴復理於龍門洋洋者峨峨者雙崖六里周環林木興未艾隆象先靈之陟降於昭將覩者之如雲廈屋重建於鹿洞渠渠焉岐岐焉七鉢五峰之齊案風水好子姓居後生之依歸得所遂爲修稧引曰
兒郞偉抛樑東 江漢宗宇碧海中也誠丹心猶不死朝朝擎出日輪紅
兒郞偉抛樑西 釣臺高出慕雲齊我家其業原頭是上有防山下流溪
兒郞偉抛樑南 五龍秀色與天參常時謝却攀鱗志培養孫枝多檬楠
兒郞偉抛樑北 鼎巖江水流無極康莊大道日天人四尺斧堂誰不式
兒郞偉抛樑上 常坐森嚴天日朗到宿也應朝北辰輝光萬古入聸望
兒郞偉抛樑下 森麻雨露見平野一絲正欲扶綱常不是出林忘世者
伏願上樑之後時用薇菊薦享地焉有中外人焉以西山有高義於二字佇見松竹茂笣春而敎詩書秋而敎禮樂育英於一堂.
壬寅 (1902年) 七月 下浣 後孫 趙昺奎 謹撰
[해문]
서산서당중건상량문(西山書堂重建上樑文)
東海에서 隱遁하셨던 魯仲連의 仰祈末照처럼, 彛倫을 지키신 바는 같았었고, 西山에서 採薇하셨던 伯夷叔弟의 百世淸風과 그 藏修遊息은 다를 바 없도다. 이에 隱遁하셨던 자취를 돌이켜 보건대, 朝家崇報의 褒賞 그대로 扁額이 빛나도다.
恭敬히 생각하건대, 貞節公漁溪先生께서는 印璧簪纓의 姿容이 凜凜하셨던 祖父 典書公이 계셨고, 佔畢齋 金宗直과 泰山北斗처럼 서로 尊敬하였도다. 지키신 大義는 이어진 懿訓의 服膺에서이고, 孝行의 敎訓을 實踐하고 篤實히 學文에 힘써 斯文의 振作에 功이 크셨으며, 科擧의 及第(榜目)로 聲華(名聲)가 들어 났었다. 剛直하고 굳센 氣質과 溫和하고, 泰然하신 자세의 蘊蓄으로 실로 節義의 高名이 지어졌도다.
이러한 手段에서 外行의 發露가 的中하시어, 마침내 그 高風이 一世의 儀表(儀表羽儀)로 이러를 즈음에 天子의 地位는 高名하신 聖德을 지녀야하는데, 제멋대로(縱逸) 이르기를 端宗의 禪位를 堯禪舜受의 聖德이라 하였고, 死六臣과 生六臣의 生과 死는 서로가 다르기는 하지만, 比干과 微子와 같은 殺身成仁의 忠義를 다 하였도다. 寧越 3)子規樓에서 寃禽이 되신 君王(端宗)이 가여워서 悲痛하였고, 太學館에서 圭角(冠冕)이 뛰어나 凜然히 國士들과 盟誓하였도다.
復位를 이루지 못한 至極한 誠心은 舜임금이 蒼梧에서 崩御함에 雲黻 旌과旗로 弔喪하듯 魂靈을 받들어 뫼시고, 萬古에 사무쳤던 冤魂의 神明에 祭祀를 드렸었고, 伯夷叔齊와 比喩할 哀痛으로 塚曠의 刑役을 따르시어 殺戮의 困辱을 다 感受하였었고, 用心伸雪로 葬禮에 臨하여 痛哭하였고, 皇帝 軒遠씨가 鼎湖에서 龍을 타고 登天할 때, 龍鬚를 잡고 따르지 못한 臣下처럼 애달파 3年 服喪 하였으며, 殷나라 臣下가 周나라를 섬겼음을 부끄러이 여겨 마침내 스스로 冠冕을 더럽히지 아니하였도다.
드디어 太學館 諸生들과 下直하고, 微子처럼 멀리 隱遁하였도다. 東鶴寺에서 招魂祭를 드리고, 金時習과 더불어 滿腔의 熱血(血淚)로 함께 弔喪하였고, 雉嶽山의 岩壁에다 名字를 새겼음은 元昊와 더불어 聲討한 기세의 證票였다. 높이 솟은 伯夷山과 叔弟峰(雙筠)은 4)墨胎氏의 두 아드님 伯夷叔弟와 하늘이 맺어주신 符信이였다고 돌아오신 正義는 彌縫經綸의 외길로 愚昧함을 가르치고, 天道외 人倫을 扶植하였음은 眞實한 葵傾(葵傾葵日向)의 至誠에서이며, 門前에는 五柳와 對가 되어 栗里에서 神仙의 道를 닦으신 陶淵明과 멀다할 수 없으며, 田園에 돌아와 冠服을 벗고 布衣를 다시 하여 읊었던 九日登高詩의 懷抱는 對抗과 不服의 굳센 志操로 採薇의 餘韻이 끼치셨도다.
中庸의 道를 取하시어 아무런 근심이 없었고, 山高水長의 先生之風이 참다워 四海의 模範이었고, 人倫의 扶植에 힘써 天倫이 崩壞하지 않았었고 天覆地載의 君臣之道가 펼쳐져 百世의 스승이었도다. 朝野의 公論으로 다시 褒賞하시어 歷史(良史)에 昭詳히 揭示되었음은, 日月처럼 卓越하였음이요, 潛德美行의 闡明한 자취는 永遠한 敬慕로 世上에 드물었던 風雲苦節이 史冊에 실렸도다.
六先生이 서로 合致되었음은 같은 때에 나셔서 節義(信乎志士)를 같이 하였음으로, 그와 같이 絃誦之場(祠宇)도 無可奈何이였고, 西山의 伯夷叔齊는 대개의 請託(寓話)이 그러한 敬慕로 그와 같은 仁義가 百世에 이를진대 樵夫牧童의 遊樂이 되리요. 대저 士林에서(章甫) 오직 이를 歎息하여 없어진 5)祠宇의 터에다 木手를 불러 새로이 짓게 하였었고, 항차 그 時(伊時)에 後孫이 圖謀한 經緯는 글방이었는데, 庠序(庠序學校)가 되었음은 聖世의 模範이었다.
揆策에 치우치지 않고 瑤池日月같이 다시 꾸며 놓으니, 龍宮처럼 아름답고 廣大하며 모습이 凜凜하여, 伯夷山과 叔齊峰의 두루 六마장(六里)안에 草木이 우거지고, 隆盛한 形象이 시들지 않아 先靈께서 昭然하게 오르내리는 것 같았었고, 장차 보는 者를 하여금 彩雲처럼 裝飾된 큰 建物을 다시 지어놓으니, 朱子의 白鹿洞書院처럼 廣大하고 雄壯하고 드높아, 食器(鉢)처럼 된 일곱 棟의 丘陵이 五峰과 相對하여 風景과 수세가 좋아 子孫의 居住와 後生의 依支가 適宜하게 얻어졌도다.
드디어 修稧를 하고 神將(引而伸之)을 爲해 이르건대,
兒郞偉 抛樑東하니, 五百年 漢陽社稷 碧海에 잠겼으되, 忠誠어린 一片丹心 死滅하지 않으시어 날로 높이 드러나시어 해와 같이 밝으리라.
兒郞偉 抛樑西하니, 漁釣의 높은 고대연군(戀君)의 懇切함이 暮雲에 春樹였고, 오문은 원래 그 事業(節義)에 비롯하여 防禦山 그 아래에 淸溪가 흐르도다.
兒郞偉 抛樑南하니, 五賢(五龍)秀色(俊秀)과 함께 하늘과 나란히 參하였고, 恒常 拒絶하고 물리쳐 舊君을 섬겼었고(守義罔僕) 後孫에 배양되어 喬木世臣 많았도다.
兒郞偉 抛樑北하니, 鼎巖江水 悠久하여 끊임없이 흘러있고, 昌盛하셨던 孤節의 大道는 나날이 天人이 讚揚할 것이고, 四尺封塋에 黼繡로 감춘 明堂 누구나 다 恭敬하지 않으리요.
兒郞偉 抛樑上하니, 嚴格한 擧動으로 계시오니 太陽은 늘 밝게 할 것이고, 숙사에 이르러서는 北極星과 마주 할 것이고, 萬古에 빛난 忠節 들며날며 瞻望하리로다.
兒郞偉 抛樑下하니, 雨露에 젖었었던 桑麻의 논과 밭은 眼前에 보여 지고, 正義의 외길로 나아가셔서 綱倫을 扶植하셨으니, 이에 나타나지 않아도 世上사람 잊지 않으리로다.
바라건대 上樑 後에도 철따라 薇薦과 菊薦을 薦享은 이곳 漁溪先生의 地緣이였으며, 그 중에 外人(生六臣中五賢)의 幷享은 伯夷叔弟와 같은 西山 採薇의 高風峻節을 敬慕함에서이고, 우두커니 바라보니 松竹같은 얼이 심어졌으니, 봄에는 詩書를 가르치고 가을에는 禮樂을 가르쳐 이 書堂에서 많은 英才가 기루어 졌으면 한다.
壬寅 (1902年) 七月 下浣 後孫 6)昺奎 謹撰
【주석】
❍山斗嵬望은 貞節公이 佔畢齋를 尊敬함인데 實은 佔畢齋는 成宗朝에 登第하였고 貞節公보다 十二歲 年下이다❍李薇撰 貞節公 墓碣銘에 佔畢齋榜下에서 온 所致로 思料됨. 異譯諒知바람 ❍魯仲連:戰國時代 齊나라 高士, 秦昭王이 使新垣衍으로 說趙하야 共尊秦爲하니 魯仲連이 往見衍曰彼秦者는 棄禮儀上首功之國也, 卽 肆然帝天下則連이 有蹈東海而死耳衍이 再拜曰 先生은 天下之士也이라 吾이 不敢復言帝秦이라하다, 秦法斬首多者爲上功斬首一賜爵一級❍上은 尙의 意❍仰祈末照:秦나라 亡하기를 빌었음을 이름, 祈願이 이루어지게 됨, 正義를 爲해 죽음을 이름❍用心伸雪: 伸寃雪恥의 마음이 懇切하였음을 이름❍寃禽:새가 나뭇가지를 물어와 바다를 메웠다고 함❍蒼梧:中國山名亦云九疑舜임금이 崩御한 곳❍雲縿:雲黻旐縿(旌旗, 喪旐❍鼎湖龍鬍:中國有荊山下黃帝가 龍을 타고 上天한 곳❍康莊:昌盛하셨던 高節의 大道라 表現할 수 밖에 없음❍斧質:死刑誅戮 屈하지 아니함❍伴少微:小壯之微子, 後世의 微子, 第二의 微子, 微子처럼❍傾芬葵傾向日:해바라기가 해를 따름 卽 忠義❍戒名:죽은 사람에게 지어준 이름(易名)❍九五君之:天子❍羽儀:훌륭한 態度로 朝廷에 出仕함, 儀表❍高風:거룩한 風度❍山聳雙筠:伯夷峰과 叔齊峰을 이름, 雙筠:두 개의 대나무❍五龍:俊才 五兄弟 卽 貞節公外 五賢指稱❍卓腏:뛰어남❍允符:眞實한 天符❍初服:初衣:벼슬하기전에 입던 옷❍蕘牧:樵夫牧童❍苴闡:闡明한 자취❍榜眼:科擧에 及第함❍北辰:北極星❍時用:철마다 春夏秋冬❍佇見:停止하여 봄, 佇立以見❍未艾:未凋 錐離霜而未凋❍垂晦:垂敎晦昧, 愚昧함을 가리킴❍檬楠:喬木世臣, 喬木世家를 이름❍良史:뛰어난 歷史者❍繩墨:먹줄 그림쇠❍曠感:曠古曠世, 世上에도 比較함이 없음을 느낌❍庠序:學校❍圭璧簪纓:官服과 佩印, 高官 大爵❍山斗嵬望:泰山北斗처럼 尊敬함❍斧堂:黼繡로 감추어진 明堂, 墳墓斧形으로 繡를 놓은 寶物, 黼繡로 屍身을 裝飾하였음을 이름, 四尺封塋❍上樑文:上樑告文, 後漢後六朝에서 비롯함, 騈儷體로 끝에 詩를 附하고 上下東西南北 六章으로 이룸, 每章詩首에 兒郞偉 三字를 冠함, 兒郞은 陳나라 徐起烏棲曲의 由來風流荀令好兒郞 卽 風流人荀令이 好兒郞荀令, 香은 後漢의 荀彧을 이름, 荀郁이 人家에 至하면 그 生處에 三日間 香氣가 풍겼다고 함, 偉는 上樑 偉擧로 告由奏樂을 뜻함❍裹麪::쌀과 밀가루, 국수❍以犒:犒勞 먹을 것을 주고 수고를 慰勞함❍騈儷文:四字句와 六字句에 對句로 쓴 文章 卽 四六文.
출처
함안조씨 역사연구회-함안조씨 선적지 탐방(함안...趙 旅) 어계선생/서산서당
함안누정지-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30.)
함안조씨두암공파종회-선조행적/정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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