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함양 병곡면 송평리 합천이씨 구사재 九思齋

천부인권 2019. 10. 10. 18:49



2017.2.12. 함양 병곡면 송평리 구사재(九思齋)


병곡면 송평리 547번지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1501∼1569)을 기리는 구사재(九思齋)가 있다. 마을과는 다소 떨어져 홀로 들판을 지나서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가인데 기와는 옛 기와이고 용마루가 조금 높아 보이는 게 특징인 재실이다. 방문 당시 이미 이용한 흔적은 오래 되었고 상당히 폐허가 진행 중에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구사재(九思齋) 편액과 상량문, 기문 등이 걸려 있고 시운(詩韻)의 편액도 그대로 있었다. 그 편액의 내용을 옮겨 둔다.




구사재 입구



구사재 정면



구사재 편액




九思齋上梁文[原文]
念惟聖罔惟狂旨訣重懸於遺扁作之先述之後嘉謨不替於肯堂觀厥 有成在玆無斁恭惟淸香堂先生儒林懿望聖世貞流孝友發機自早 歲爲家之政寬溫立德乃一生律己之符年心道德之四同曾被山海翁 傾詡隱處宦途之雙輾屢興隴雲子賞歎旣兌澤之潛滋竟賁園而幽媚 爰居處靜深於一室蓋本原涵養於九思審造次隱微至不睹不聞之際 去許多僞慢在勿忘勿助之間竹松霜菊之留吟逸韻渢渢然不歇龜惺 東岡之見顧流芳馥馥爾可捫奚亶瞻聳於當時擧切想欽於百世慨推 遷之迭變懼杳邈之難追顏氏巷餘忍彼榛汚而水廢鄭公鄕裏嗟哉杏 古而壇疎襟紳之莫效其誠過式蘆山之四尺苗裔之不常厥土傳來天 嶺之十家孝思致慤而于牆神氣隨存而如水詎合藏修之終泯秪憑善 繼之罔愆同合族之詢謀圖百載未遑之擧卽遺昆之棲息規數楹勿亟 之營龜墨周諏相地理於餘巖坪上鳩材齊作趨天時於寒食節中賢徒 釋卷而敦工貧戶捐金而佐役度崇庳之適辦突兀之新閭里相聯徵一 蠹玉爺之文獻風猷未沫攬孤雲畢老之徽芬眷故國而可忘聊揭紫陽 之舊署懷伊人而宛在不殊華表之今歸雲山同是隔塵埃池沼猶堪種 䓿萏怳接翀霄之鶴思題灌圃之魚工夫專靠於心官知古人之可踵顧諟 不離於聖訓冀後者之毋隳於焉得所歸依溯其本豈直爲裘冶箕弓之 子于以勃然興起聞其風庶幾奮懦頑鄙薄之夫是兩全於尊祖而親賢 將竝美於塾家而庠黨肆騰郞偉之懽用贊棟隆之吉抛梁東元氣陶山 碧未終變化雲龍相逐地炯然精爽也流通抛梁南壁立頭流萬仞巉想 像同言當日臭小盆深月暗香添抛梁西黌舍咸陽入遠睇訓導臯比緣 業定鄕髦今日耳堪提抛梁北霏霏海蜃昇瑤極隕天賞典孔監昭留與 來仍無忝德抛梁上雲臥高人眞足仰山壑漁磯逈獨超世間何處桃花 漲抛梁下渭川日夜泠泠瀉仁虛心實不欺予妙喩分明觀若火伏願上 梁之後山川呈瑞神鬼效靈瑟雨藍風宏構嗣功而永固升堂入室英材 續武而群興五車書只在無邪何人也爲之亦若一毫利正應難冒斯語 焉矢以靡他期屋漏之不慙賴根基之有立
苞山 郭鍾錫 頌


구사재상량문(九思齋上梁文)[해문]
오직 성(聖)을 생각하고 오직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나니 그 이치를 현판에 거듭 걸었으니 조선(祖先)은 짓고 후손(後孫)은 이었으니 아름다운 계책(計策)은 긍구(肯構)함에 불찬(不贊)하여 그 낙성(洛成)을 보니 이에 싫어함이 없도다. 공손히 생각건대 청향당선생(淸香堂先生)은 유림(儒林)의 명망(名望)이요. 성세(聖世)의 곧은 흐름이니 효우(孝友)로 발(發)하여 일찍부터 치가(治家)하는 규범(規範)을 삼아 관온(寬溫)하게 덕(德)을 세우니 이에 일생(日生) 자신(自身)을 규율(規律)하는 부(符)로 하였고 「연심도덕(年心道德)」의 사동(四同)으로 일찍이 남명(南冥)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은거(隱居)하고 벼슬함이 쌍전(雙傳)하여 여러 차례 롱운자(隴雲子-退溪)의 감탄을 일으켰도다. 이미 기꺼운 은택이 잠재(潛在)하여 붓게 되니 전원(田園)에 은거(隱居)함에 그윽하고 아름답도다. 거처(居處)하는 곳 일실(一室)이 고유하고 깊어 본원(本源)을 구사(九思)로 함양(涵養)했도다. 잠깐의 은미(隱微)함을 살펴 못보고 못듣는 즈음에 이르러 허다(許多)한 거짓과 겨울 개으름을 제거(除去)했으니 잊지 않고 도우지 못하는 사이에 죽송(竹松)과 상국(霜菊)을 읊는 운치(韻致) 다하지 않았으며 구암(龜岩-李楨)과 성재(惺齋-琴蘭秀) 및 동강(東岡-金宇顒)이 돌아봄에 꽃다운 향기(香氣) 느낄만 하도다. 가(可)이 어찌 당시에만 우러러 보았을 뿐이리오. 백세(百世)토록 흠모(欽慕)하는 생각 간절(懇切)하거늘 슬프다! 세월의 변화함이 안타깝도다. 안씨(顔氏)의 마을에 차마 가시나무가 우거져 물이 더러움을 쓸어 버렸네. 정공(鄭公-一蠹)의 고을에 슬프다! 은행나무 늙어 강단(講彖)이 거칠어져 선비들이 그 정성 바치지 못하니 여산(廬山;淸香堂山所)의 산소(山所)를 지나면서 경의(敬義)를 표(表)하노라. 후손의 그 고향에 상왕(常往)하지 못하고 천령(天嶺)의 작은 고을로 이사(移徙)했도다. 효성(孝誠) 스럽게 생각하며 담벽을 보면서도 그리워하나니 신기(神氣)는 따라서 존덕(存德)하여 수맥(水脈)과 같도다. 어찌 수학하던 곳이 끝네 사라져서야 되겠는가. 다만 잘 이어서 어김 없는 능도(能度)에 의지하니 온 종석의 의논이 일치 하면서 백년 동안 겨를 없던 일들을 도모하도다. 후손들이 살던 곳에 나아가 몇칸의 건축(建築)을 계획(計劃) 했도다. 날 자(字)를 점치고 여암강(餘巖降)에 땅을 살펴 자리를 잡아서 재목(材木)을 모으고 일재(一齋)히 기공(起工)하여 한식절(寒食節) 중 좋은 때에 짓기 시작하여서 어진 생도들 책(冊)을 덮고 공사를 감독하였고 가난한 집안들도 돈을 모아 역사(役事)를 도왔도다. 높고 낮음도 맞게 하여 우뚝 솟은 새집을 마련했도다. 여염집과 서로 연(聯)해 일두(一蠹)와 옥한(玉漢)의 문헌(文獻)을 상고(詳考)하도다. 유풍(遺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고운(孤雲)과 점필재(佔畢齋)의 아름다운 자취를 사모하노니 고향을 돌아보아 가(可)이 잊겠는가. 애오라지 자양(紫陽;朱子)의 옛 현판 이름을 게시(揭示)하도다. 그 사람을 생각하니 완연(宛然)히 있는 듯 신선(神仙)되어 돌아옴과 다르지 않도다.
백운산(白雲山)은 같이 이 진애(塵埃)를 멀리 했고 연(蓮)못에는 오히려 연꽃을 심을 만하네. 하늘 끝까지 나는 학(鶴)을 잡히는 듯 관포(灌圃)¹⁾의 시(詩)를 쓰기를 생각하도다. 공부(工夫)는 오로지 마음에 의지하여 고인의 발자취를 가이 알 수 있도다. 이 올바른 명을 돌아 보건데 성인의 가르침에 벗어나지 아니하고 후인들이 어기지 아니하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에 귀의(歸依)할 바를 얻으니 그 본원(本源)을 소급(遡及)하면 어찌 바로 치공(治工 )과 궁공(弓工)의 아들만 될 뿐인가. 그리하여 흥기(興起)하니 그 기풍을 듣고 나면 거의 나태(懶怠)하고 모질러 비루(卑陋)한 사람들을 분발(奮發)시키나니 이는 조선(祖先)을 높이고 어진이를 친하게 대하는 도리를 둘다 모두 온전(穩全)하게 함이여. 집안 서당(書堂)과 고을의 학교를 둘다 모두 아름답게 함이니라. 이에 랑위(郞偉)의 즐거움으로써 상량(上樑)하는 길일을 찬(贊)하노라
들보를 동(東)쪽에 올리니 도산(陶山)의 원기(元氣)는 아직도 푸르러 운용(雲龍)으로 변화하여 서로 추종(追從)하기에 멀리 정령(精靈)은 상쾌(爽快)하게 유통(流通)하네.
들보를 남(南)쪽에 올리니 원류산(元流山)의 뫼들은 만잉(萬仍)이 높았으니 같은 말씀 당일(當日)의 상상(想像)하는 향취(香臭)속 작은 독 깊은 달에 그윽한 향기 더했도다.
들보를 서(西)쪽에 올리니 함양(咸陽)의 향교(鄕校)가 멀리 힐긋 보이니 훈도(訓導)하는 스승하기 업보(業報)로 정(定)해 진 듯 오늘날 향제자(鄕第子)들 정담아 가르치네.
들보를 북(北)쪽에 올리니 뭉게구름 바다위의 신기루를 이루어 하늘에서 주는 상전(賞典) 너무나 밝으니 후손들께 전(傳)한들 끼친 덕은 더럽힘이 없나니
들보를 위쪽에 올리니 구름속의 높으신 선비 참으로 숭앙(崇仰)하네. 산골의 낚시터에 홀로 초연(超然)했으니 세간(世間)의 어디선지 복사꽃이 떠내리네.
들보를 아래로 올리니 위천수(渭川水)는 밤낮으로 차가웁게 쏟아지네. 인(仁)은 허(虛)하고  마음은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으니 오묘(奧妙)한 깨우침은 불보 듯이 분명하네.
엎드려 바라노니 상량(上樑)한 뒤에는 산천(山川)은 상서(祥瑞)로움 드러내고 신귀(神鬼)는 영험(靈驗)함을 보이며 비바람 속에도 큰집 지은 공(功)을 이어 길이길이 견고(堅固)하여 당(堂)에 올라 방(房)에 드는 영재(英才)들이 뒤를 이어 나게 하시고 다섯 차(車)난 되는 책은 다만 마음의 사사(私邪)로움 없으니 어느 누가 그러할 것인가. 일호(一毫)의 이익(利益)에도 正히 도모(圖謀)하지 않으리니 이 말을 무릅쓰고 맹서(盟誓)하기를 다름이 아니라 옥루(玉漏)의 부끄럽지 않기를 기양(期約)하여 근기(根基)가 서있음을 힘입었나니라.
포산 곽종석(郭鍾錫) 기림이라.


【주석】
관포(灌圃)¹⁾ : 어득강(魚得江)이니 450년 전의 학자.





九思齋移建記[原文]
在昔淸香堂 李先生就所居 丹城之培養里作讀書之室 名之曰九思齋 請記於吾先君退陶夫子先君以苦纏寒疾 未暇褠思辭之 其後先生後孫移于咸陽之海坪村。齋廢已久、今年春、晩華氏議于宗人、追建是齋于海坪、其意 則竊取乎橫渠及紫陽也。旣落、遣炳憲雨謂晩燾曰、君夫 子家孫須以夫子之意、卒嶪於吾祖之室可也。晩燾時在 某巖山中、凡在文字一切、以病辭之。而況是命責之尤重、則非不肖所敢承當也。以此恭揖送之、夫幾月、炳憲又以 書固請。不已、竊惟我淸香先生與吾先君及南冥先生同 辛酉降生、故先君詩曰、三人初度、有誰知先甲三年酉是 期。南冥詩曰、四同元不在新知、擬我曾於連子期。盖三先 生相與之情、於此可見。而清香先生又於雷龍堂上論及 理氣、而以吾先君四七說爲據。依南冥亟稱之、又觀言行錄中論戒懼謹獨未發已發勿忘勿助之說、皆與吾先君 之言不異。則其平白用工於九思之目、而躬行心得可知 也。然後人之欲學先生者、又將何所取則乎。盖古人設敎 多於動處、用工如九思之目、皆是動處思得。其當然之理 也。若就九思之中而提其要領、則事思敬之。敬字乃是通 動靜而貫入目也。先生其不曰、敬乃聖學、徹頭徹尾終始 事乎。此乃以先生之言反證先生之齋、欲與吾黨後生共 勉而已。非敢曰仰體吾先君之遺志也。
壬寅三月日 後學眞誠李晩燾謹記


구사재이건기(九思齋移建記)[해문]
옛날 청향당(淸香堂) 이선생(李先生)이 살던 단성(丹城)의 배양리(培養里)에다 글 읽는 집을 짓고 이름 하기를 구사재(九思齋)라 하여 우리 선군(先君) 퇴도부자(退陶夫子)에게 기문(記文)을 청하거늘 선군(先君)은 감기가 심(甚)하여 구상(構想)할 틈이 없다며 사양하였더니 그 뒤 선생 후손이 함양(咸陽)의 해평(海坪)으로 이사하여 재실(齋室)이 퇴폐(頹廢)한지 오래이더니 금년 늦은 봄에 만화씨(晩華氏)가 종인(宗人)들과 의논(議論)하고 이 서재(書齋)를 해평(海坪)에다 추건(追建)하였으니 그윽히 장행거(張橫渠) 및 주자양(朱紫陽)을 본받은 것이다. 이미 낙성(洛成)한 뒤 병헌보(炳憲甫)를 보내어 나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부자(夫子)집의 후손으로 모름지기 부자(夫子)의 뜻을 우리 선조(先祖)의 서실(書室)에 업(業)을 마침이 가함이니라. 나는 이 때 어느 암산(巖山) 속에 있어 무릇 문사(文辭)를 병(病)으로써 사양하였는바 하물며 이 부탁은 책임(責任)이 더욱 중함인즉 미족(未足)한 내가 감히 이어서 위(爲)할일이 아니기에 이로써 공손(恭遜)이 읍하고 보낸 지 몇 달 안 되어 병헌(炳憲)은 또 서(書)로써 굳이 청(請)하여 마지않으니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청향선생(淸香先生)은 나의 선군(先君) 및 남명선생(南冥先生)과 더불어 같이 신유년(辛酉年)에 誕生(탄생) 했음이라. 고로 선군(先君)의 시에 『3인의 생일을 누가 있어 알리오. 갑자(甲子)의 3년전 신유생(辛酉生)이라.』하였고 남명의 시(詩)에 왈(曰) 『사동(四同)은 원래(元來)부터 새로 아는데 있지 않고 일찍이 나에게 종자기(種子期)에 비하였네.』라 하였다. 대개 3선생의 서로 허여(許與)하는 정(情)이 이에 가(可)이 나타나고 청향선생(淸香先生)은 또 저 뇌룡당(雷龍堂) 위에서 이기(理氣)를 논급(論及)하면서 우리 선군(先君)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로써 근거(根據)를 삼았는바 남명(南冥)이 구차(苟且)히 찬동(贊同)하였다. 또 언행록(言行錄) 중에 계구(戒懼) 근독(謹獨) 미발(未發) 이발(已發) 물망(勿忘) 물조(勿助)의 설을 말함이 많았음을 보건대 모두 우리 선군(先君)의 말씀과 다르지 아니함인데 즉(則) 그 평백구사(平白九思)의 말에 힘쓰고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얻었음을 가(可)이 알지니라. 그러나 이후(以後)에 사람들이 구사(九思)로써 법도(法度)를 삼는다면 또한 어느 곳에서 본받음을 취(取) 하겠는가. 대개 고인의 설교(說敎)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알도록 함이니 그러므로 많이 움직이는 곳에 공부하는 방법(方法)을 제시하기를 구사(九思)의 조목(條目)과 같이 했으니 모두 이 움직이는 곳에서 그 당연한 이치(理致)를 사득(思得)함이니라. 선생이 말하길 『생각은 문득이 이발(已發)이라 하였으니 그러하지 아니함이랴. 만약 구사(九思)의 중에서 그 요령(要領)을 제시(提示)하면 사사경(思事敬)의 경자(敬字)는 곧 동정(動靜)과 입목(入目)을 통관(通貫)하는 것이니라.』 선생이 또 경(敬)은 이에 성학(聖學)의 철두철미한 시종(始終)의 일이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이 모두 선생의 말로써 선생의 재(齋)에 대해 반증(反證)한 것은 우리들 후생(後生)과 함께 힘쓰고자 하는 것이니 감히 우리 선군(先君)의 유지(遺志)를 우러러 체득(體得)했다는 말은 아니니라.
임인년 3월 후학 진성(眞誠) 이만도(李晩燾)가 삼가 기록하다.




근차구사재중건운(謹次九思齋重建韻)




九思齋重建韻-번역원
恭惟先祖錫齋名  생각건대 先祖께서 齋名을 지어주셨으니
十世傳家一日成  십대를 전해온 집이 하루 만에 완성되었네
老退微言嗟未發  퇴계선생의 은미한 말씀 발현하지 못하였으나
宣尼至訓揭分明  공자의 지극한 가르침을 분명히 걸어두었네
荒原舊砌留培養  황량한 언덕 옛 섬돌엔 수양한 흔적 남아있고
苦竹貞梅又渭城  대나무 매화나무엔 渭城에 있다네
萬事皆從思字得  만사는 모두 思자에 따라 이루어지니
只將此意勉餘生  그저 이 뜻을 가지고 여생을 힘써야 하리
淸香堂公十一世孫 晩華再拜 稿


*九思齋 : 함양에 있는 합천이씨 재실.
*渭城 : 함양읍의 옛 이름이라고 함.


출처
함양누정지-함양문화원/대보사(2001.10.30)
全州 柳秉勳의 사랑방(네이버 블로그)-향산집(響山集) 제10권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