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임곡리 창원황씨 석우당 石愚堂

천부인권 2019. 10. 7. 19:06



2019.9.16. 진전면 임곡리 석우당


진전면 임곡리 483번지에는 창원황씨의 재실인 석우당(石愚堂)이 있다. 석우당은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방문했을 때는 만나지 못했다. 석우당의 출입문 편액은 추모문(追慕門)이고 석우당(石愚堂)은 현대식 시멘트 벽돌건물이다. 지붕은 양철지붕이고 내부에는 기문과 몇 개의 편액이 보였지만 문이 잠겨있어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석우당(石愚堂)은 휘 병관(柄瓘) 자(字) 학여(學汝)의 호(號)인데 경상대학에서 운영하는 문천각(文泉閣)에는 이 재실의 주인공인 황병관(黃柄瓘)이 엮은 석우유고(石愚遺稿)에 석우당기(石愚堂記)와 석우당상량문(石愚堂上樑文) 등의 원문이 나온다.




석우당 출입문 추모문(追慕門) 편액




石愚堂記-[原文]
近古石愚先生黃公値世滄桑無求於世 韜晦林泉 固窮篤學 而深究奧徵 聲聞頗溢 隣近邑有請敎者 不顧小大說鈍 必使曉解以敎育後進爲己任 南鄕人士多稱 石愚先生也 公歿後三十有四年戊午春凡平日 所及門者 曁其子孫 懼遺芬之 或沫歎寓慕之無所 營建一堂以圖久遠 而卜擇其地不必他求乃入舊第之其 而新之可也 迺拓其址迺增其制 新資舊式五楹 巍然室房軒欞 瞻暢煥然於是乎 洞府益增采矣 山川益加輝矣 夫人之於賢者所過之地 猶想其光采 又況其賢父祖 生平所居處地乎 詩曰維桑輿略必恭敬止 其斯之謂歟 又曰無念爾祖聿修厥德 爲其後昆者升此之堂 肅然如見其形容 僾然如聞其警欬 則豈無感慕興想 而圖所以遹追先休也 哉於戲竊覵 石愚堂石爲物賤 愚爲人病 奚所名焉堅莫如石 謙莫如愚 志堅心謙 誠修其德 而以成其自進矣 乎堅以固守以圖久遠 謙以卑下以受不擇 而高不危滿不溢以法其後人矣 乎庸詎不煩詰 易曰良止也爲山爲小石 語曰寗武伯邦有道則智 邦無道則愚 其智可及也 其愚不可及也 君子居亂代外愚 而止善內明 而進道豈非貴乎 爲其後承者 敬恭誠信 于以仰慕其風 于以講讀其文篤實 孝悌敦行忠信永永 勿墮先徽 則庶斯堂之無窮矣 遂書此以爲石愚堂記
戊午 榴花節 安陵 李昊燮 謹識


석우당기(石愚堂記)-[해문]
근세에 석우선생(石愚先生) 황공(黃公)이 세상의 변천(變遷)이 극심(極甚)한 때를 만나 세상에서 명예(名譽)와 이욕(利慾)을 구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곤궁(困窮)하여도 지조(志操)를 지켜 학문에 독실(篤實)하여 심오(深奧)하고 은징(隱徵)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명성(名聲)이 근읍(近邑)에 널리 알려져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거나 작거나 둔(鈍)하거나 민첩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반드시 깨우쳐 주며 후진을 교육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任務)로 하였다. 그리하여 남쪽 고을의 인사들이 많이 석우(石愚) 선생이라 일컬었다.
공(公)이 돌아가신지 34년 되는 무오(戊午)년 봄에 평소(平素)에 다르던 문하생(門下生)과 자손들이 선생이 남기신 업적(業蹟)이 민멸(泯滅)될까 두려워하고 또 추모하는 정을 붙일 장소가 없음을 탄식(歎息)하여 집 한 채를 짓기로 도모(圖謀)한지 오래 되었다. 그리하여 집터를 잡는 데는 달리 구할 필요 없이 옛 집터에 새로 짓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옛터를 넓히고 그 규모(規模)를 키워 새 자재(資材)로 구식(舊式) 오간(五間)을 지으니 우뚝하고 집·방·난간(欄干)이 넉넉하고 앞이 탁 트이며 웅장(雄壯)하고 미려(美麗)하여 마을이 더욱 돋보이고 산천(山川)이 더욱 빛을 더하더라.
사람이 현자(賢者)가 지나간 곳이면 오히려 그 광채(光采)를 상상(想像)하게 되는데 하물며 현부조(賢父祖)가 평생(平生)에 살던 곳에 있었으랴. 시경(詩經)에서 ‘선조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한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또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덕(德)을 닦지 않으련가’하였으니 그 후손(後孫)된 사람들이 이 집에 오르면 당연히 그 모습을 본 것 같이 하고 어렴풋이 그 기침소리를 듣는 것처럼 하면 어찌 흠모(欽慕)의 정을 느끼고 생각이 일어남이 없겠으며 이것이 선세(先世)의 아름다움을 뒤따르기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곁눈질로 훔쳐 탄식해보니 석우당(石愚堂)의 석(石)은 물건 중(物件 中)에 천(賤)한 것이고 우(愚)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석우(石愚)를 이름으로 하였을까? 단단하기로는 돌만한 게 없고 겸손(謙遜)하기로는 어리석은 만한 것이 없으니 뜻은 굳세고 마음은 겸손하여 성실(誠實)하게 덕을 닦아 스스로 나아갈 바를 이루었다. 굳은 것을 고수(固守)함으로 구원(久遠)한 것을 도모하였고 겸손(謙遜)으로 자기를 낮추어 받는 것을 기리지 아니하여 높아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가득하여도 넘치지 않는 것으로 후인들에게 본보기로 삼았으니 어찌 번거로운 설명을 要하리요!
주역(周易)에서 ‘양(良)은 정지하는 도(道)이므로 산이 되고 소석(小石)도 된다.’라고 하였으며 논어(論語)에서 녕무백(寗武伯)이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으니,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으나 어리석음은 따를 수 없다.’라 하였다.
군자가 난세(亂世)에 살면서 밖으로는 어리석은 척하고 선(善)에 멈추면 안으로는 현명(賢明)하게 도에 나아가면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그 후손된 사람들은 공경(恭敬)하고 정성(精誠)스럽고 믿음이 있으면 이로써 그 덕화(德化)를 우러러 사모(思慕)하고 이로써 그 선조의 글을 강론(講論)하고 일거 효제(孝悌)에 독실하고 충신(忠信)에 행하며 길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이 집이 무궁(無窮)하리라. 이로써 석우당(石愚堂) 기문(記文)을 삼는다.
무오(戊午;1918) 5월에 재령 이호섭(李昊燮) 삼가 짓다.




석우당(石愚堂) 편액




석우당 주련[해문]-전문
山屹千年色 산은 우뚝하여 천년의 색을 띠었고
溪流萬古情 냇물은 흘러 만고의 정을 지녔네.
箇中眞樂在 그 중에 참다운 낙이 있으니
喚了我心惺 내 마음을 불러 깨우는 것일세.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