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함양 서하면 화림동계곡 동호정 東湖亭

천부인권 2019. 10. 29. 06:29



2019.6.12. 함양 황산리 화림동계곡 동호정


함양 서하면 황산리 842번지에는 화림동계곡의 팔담팔정(八潭八亭) 정자들 중 하나인 동호정(東湖亭)이 위치해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된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을 했다는 조선의 학자인 동호(東湖 ) 장만리(章萬里)가 관직에 오르기 전 고향 황산마을에서 낚시를 즐기며 노닐던 곳에 그의 9대 후손인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이 중심이 되어 1890년경에 지은 정자로 1936년에 중수가 있었고 정자의 중앙에 방이 있던 흔적인 판벽(板壁)을 볼 수 있다.
동호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 건물로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이 매력적이며 4면 모두 기둥의 바깥쪽으로 약 30cm 정도를 연장하여 계자난간을 둘렀다. 추녀의 끝에는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의 안정감을 높였고, 눈비가 정자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인 차일암(遮日岩)의 넉넉한 모습은 자연이 만든 예술이라 표현할 수 있다.
동호정의 내부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기문(記文)을 비롯해 시문(詩文)을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동호정의 측면에 만든 통나무 계단 모습



차일암의 넉넉한 모습



차일암에서 바라 본 동호정 모습



차일암의 돌개구멍




東湖亭記[原文]
花林山水鄕也 其峰巒蔚薈林壑深邃黃石山綃峴村也 水波明媚巖石奇絶玉女潭中遮日巖也 余曾莅是邑得聞古蹟之詳也 粵在 嘉靖丙子東湖處士章萬里卜築于村 遊釣于巖 傳學篤行若將終身逮 宣廟癸未北胡冠六鎭 朝庭選壯士 公自願赴戰 躬冒矢石 累立奇功 辛卯除箕子殿參奉移 定陵合龍蛇之燹 大駕避駐龍彎時 値療雨暴注賊鋒猝至 公負玉體走十餘里而得免 以癸巳六月 公年四十而卒于行在所 宣祖嘉之時 贈以及永世不忘者 敎旨策扈 聖功臣今上二十八年 贈通政大夫左承旨 命旌其閭鳴呼 公忠義特立萬夫 朝家恩褒勸獎 百世可謂無遺憾矣 公之孫大奎載憲東憲等 追慕其先祖遊賞之意 搆小亭於遮日巖傍要余記之 余觀夫人得山水 而樂山水因人 而重遮日巖上刻章處士釣臺 五宇遺蹟跡尙存 公之得水 水而識仁智之樂者也 搆亭遺址闡揚先懿用口 今與後遮日巖之因人 得山水之重者也 余有感於此因述舊聞 而書之如右云
上之三十三年仲夏上澣輔國判書崇祿大夫奉朝賀
光山金在顯謹記


동호정기(東湖亭記)[해문]
화림(花林)은 산수의 고을이니라. 그 봉우리가 우거지고 숲이 깊으니 황석산(黃石山) 아래 초현(綃峴)마을이 있고 물결이 아름답고 암석(嚴石)이 기이하니 옥녀담(玉女潭) 가운데 차일암(遮日巖)이니라. 나는 일찍 이 고을에 임해서 고적(古蹟)을 상세(詳細)히 듣고 가정(嘉靖) 병자(丙子)년에 동호처사 장만리(東湖處士 章萬里)께서 마을을 복축(卜築)하고 바위에 놀면서 낚시하며 널리 배우고 돈독한 행의로 장차 몸을 마치려 하더니 선조(宣祖) 때 계미년에 와서 북쪽의 오랑캐가 육진(六鎭)을 노략질 하니 조정(朝庭)에서는 장사(壯士)를 선발하는데 공(公)이 자원하여 전쟁터에 나아가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기이한 공을 세웠으므로 신묘년(辛卯年)에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제수하고 옮겨서 용사(龍蛇)의 난(亂)을 당하여 임금께서 용만(龍彎)에 피하여 주둔할 때 큰 비가 심하게 쏟아지고 적의 창날이 갑작스레 이르자 공은 임금을 업고 십여리(十餘里)를 달려가서 화(禍)를 면하였도다. 계사년 6월에 공(公)의 나이 40에 행재(行在)한 곳에서 돌아가시니 선조(宣祖)께서 가상(嘉尙)히 여겨 증(贈)하기를 영세불망자(永世不忘者)라 하니라. 교지에 성상(聖上)을 따르는 공신이라 하고 금상(今上) 28년에 통정대부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를 증하고 그 정려(旌閭)를 명하니라. 슬프다! 공의 충의는 만부(萬夫)에 특립(特立)했으니 조정에서 가정(家庭)에 은혜를 백세토록 포장(褒獎)하니 가히 유감없느니라. 공의 손 대규(大奎)와 재헌(載憲) 동헌(東憲) 등이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니 나는 보건대 대저 사람이 산수(山水)를 얻어서 산수를 즐기니 사람으로 인하여 차일암(遮日巖)도 중하게 되었으니 암상(巖上)에 장처사조대(章處士釣臺)라 각자(刻字)하고 다섯채의 유적(遺蹟)이 상존(尙存)하니 공이 물을 얻음은 물이 인지(仁智)의 낙(樂)을 아는바 이니라. 끼친 터에다 정자를 짓고 조선(祖先)의 아름다운 덕(德)을 찬양하여서 지금부터 후에 차일암(遮日巖)이 사람으로 인하여 산수가 중히 됨을 보임이니라. 나는 이에 느낌이 있어 옛날에 들은 것을 위와 같이 짓고 쓰니라.
상지(上之)30년 중하상한(仲夏上澣)에 보국판서숭록대부봉조하(輔國判書崇祿大夫奉朝賀)
김재현(金在鉉)은 삼가 기록하다.





東湖亭上樑文[原文]
君子筮遯擇林泉之勝 忠臣立節必如砥柱之堅 苟無刱建之宏 模曷稱出處之大義 窃惟先賢之高風威烈實非後人之能 言善形稟剛毅正直之性受 忠孝理義之學 早隱此洞自號東湖 東是海東湖則錦湖 白雲東脉屈曲 而開局黃石南脚逶邐 而且狀藏壺岩遮日巖 宣四時之遊 賞酒斝臺 琴笛臺偕象賓而登臨 綠苔磯上 漁歌互答 紅桃岸下 觥籌交錯 群峰擁立 開畵幛於雲外急流撞 回掛洪鍾於石上 軟草陽坡對麋鹿 而共眼落花平林 隨鶴猿而尋盟 遊玆幾年 若將終身 與其獨善 曷若弘濟伊尹 耕於莘野 而幡然就湯 孔明起於 草廬而遂 以輔漢登仕於萬曆年 而共隨鵷鷺之班 移拜終定陵合 而旋値龍蛇之變 身被鐵甲 能退千兵 背負玉體 力走十里 風塵一夢 未返杖屨之所 日月孤忠不泯 竹帛之名 鐫石不沥 堪語千載之後 綽楔有典 樹風於百世之下 槐院崇品 天恩腆重 花林別區地名 益彰第觀遊釣之某 邱尙稽經始之斯 亭固緣時勢之未 遑幾興輿情之永 嘆子孫之榘矱經年不謀 而同辭溪山之企 待多日亦從 而黙佑天慳地 秘胥得明其鬼輸神運 利成巨役棼棟榱桷象村 各得其宣規矩準繩良工 咸盡厥技飛翬鳥革檼勢高哉美矣 鳳蹲龍舞簷角翼然臨于 攸躋攸宇 庶其靈神之陟降 爰笑爰語宣乎 後人之瞻仰 山川草木復生 今日之精彩 風月煙霞 摠依昔年之形勝 湖水改觀 可相濯纓之淸趣 雲物增價 宛挹賦之詩逸興 遇此亭者孰無雲仍之慶幸 是亦鄕黨之欣賀 恭獻拙句助擧脩樑抛樑東 湖水洋洋朝海 中依舊釣臺 無恙在一絲扶鼎子陵風
抛樑西德裕蒼嵐望欲 迷灣出其間 淸活水永歌臺下作深溪
抛樑南九節仙笻 玉女潭遯世忠君 皆好事兼之然後是豪男
抛樑北黃石嵯峨 零翠色其下 鷄鳴犬哭 村舊廬應在雲林間
抛樑上玉宇寥寥 星斗朗在野 安志拱極 誠空山夜夜聊瞻仰
抛樑下爲誰群峰 好相迓時人 不敢北移 文竭力龍灣扈玉駕
伏願上樑之後 賢人輩出 祚胤永錫 學道崇文 家敦孝悌之行 砥石礪節 俗成正直之風 高尙之士 比肩於前忠亮之人 接武於後修之 於門庭之內 達之於朝庭之上 以繼忠臣凜烈之義 庸報聖朝褒揚之恩
上之三十二年乙未至月下澣 草溪人司馬鄭介石然甲 述


동호정상량문(東湖亭上樑文)[해문]
군자(君子)가 숨어 살 곳을 점(占)할 때에는 먼저 임천(林泉)이 좋은 곳을 택(擇)하고 충신이 절기(節氣)를 세울 때는 반듯이 지주(砥柱)가 굳세어야 함이니 진실로 창건(刱建)의 넓은 본받음이 없다면 어찌 출처(出處)의 대의를 칭하리요. 그윽히 생각건대 높은 풍채(風彩)와 위열()은 참으로 후인의 능히 선함을 말할 바 아니니라. 품형(稟形)은 강의하고 정직하며 성품은 충효와 이의(理義)의 학(學)을 받아 일찍이 이 마을에 은거(隱居)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동호(東湖)라 하니 동(東)은 이 해동(海東)이요 호(湖)는 곧 금호(錦湖)니라. 백운산(白雲山)의 동쪽 맥(脈)이 구비 쳐서 형국(形局)을 열었으니 황석산(黃石山)의 남쪽 다리가 구불구불 이어진 모양이 장호암(藏壺岩)과 차일암(遮日巖)이라 사시(四時)에 노닐고 구경하기 알맞고 주가대(酒斝臺)와 금적대(琴笛臺)에는 여러 뭇 손님이 등임(登臨)하니 푸른 이끼 대조(臺釣) 위에 어가(漁歌)를 서로 화답(和答)하고 복사꽃 기슭 아래 술잔이 마주치며 여러 봉우리 끼고 서서 그림의 주렴을 구름밖에 펼쳤으며 급히 흐르는 물 부딪치며 돌아서는 큰 종(鍾)을 석상에 걸쳤으며 부드러운 풀 양지쪽에 미록(麋鹿)들과 같이 잠들고 꽃 지는 평림에는 학과 원을 따라 맹서하니 여기서 노닌지 몇 해만에 장차 이 몸을 마치고자 하여 더불어 홀로 선(善)함이 어찌 홍제이윤(弘濟伊尹)이 신야(莘野)에서 밭 갈고 번연이 탕(湯) 임금에게 나아가서 크게 밝았으며 초막(草幕)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漢)나라를 도우사 벼슬에 올라서 만력년(萬曆年)에 같이 원로(鵷鷺)의 반(班)을 따라 정릉(定陵)에 이배(移拜)하여 합하고 돌아서 진사(辰巳)년의 변(變)을 만나 몸에 쇠옷을 입고 능히 천병(千兵)을 물리쳐 임금을 등에 업고 십리를 달렸으니 풍진(風塵)의 한 꿈이 장구(杖屨)의 곳으로 돌아오지 아니하여 일월(日月)의 외로운 충성(忠誠) 잠들지 아니하고 죽백(竹帛)의 이름을 돌에 새겨도 견디어 부스러지지 아니하니 천재(千載)의 후(後)를 말할진대 작설(綽楔)¹⁾의 전법(典法)이 있어 백세(百世)의 아래에 괴원(槐院)²⁾에 품격(品格)을 높이고 임금의 은혜가 전중(腆重)하니 화림별구(花林別區)에 지명(地名)이 더욱 빛나니라. 다음에 노닐고 낚시 하던 어느 언덕을 보니 오히려 경시(經始)하는 이 정자(亭子)를 상고하여 진실로 시세(時勢)의 틈을 내지 못함을 인연(因緣)으로 몇 번이나 여정(輿情)³⁾의 긴 탄식(歎息)을 일게 했음이랴. 자손의 구확(榘矱)⁴⁾이 경년(經年)토록 꾀하지 아니하고 계산(溪山)의 바라고 기다림을 많은 날에 같이 사양(辭讓)하고 또한 따르되 침묵(沈默)하니 하늘이 도우고 땅이 아껴서 감추어둔 밝은 터를 얻으니 귀신(鬼神)이 운수(運輸)하여 거역(巨役)을 이루니 들보, 기둥, 서까래 등 여러 재목(材木)이 각각 그 마땅하고 규구(規矩)⁵⁾와 준승(準繩)⁶⁾의 좋은 공인(工人)이 그 온전한 모양이 높고 아름답도다. 봉(鳳)과 용(龍)이 춤을 추는 첨하(簷下)⁷⁾에 나는 듯 이에 가지런히 임하여 이에 오르고 이에 집을 하니 거의 신령(神靈)께서 척강(陟降)⁸⁾하사 이에 이야기 하고 이에 웃는 듯 후인(後人)의 첨앙(瞻仰)⁹⁾하기에 마땅하고 산천의 초목이 다시 살아나 오늘의 정채(精彩)¹⁰⁾와 풍월연하(風月煙霞)가 모두 옛적의 형승(形勝)을 의지(依支)했고 호수(湖水)의 보기가 달라졌으니 가히 탁영선생(濯纓先生)의 맑은 뜻을 생각함이라. 운물(雲物)이 값을 더하니 부시(賦詩)는 일흥(逸興)을 완연(宛然)히 읍(挹)하듯 이 정자를 지나는 이 누군들 자손(子孫)된 큰 다행(多幸)함이 없으리요. 이는 또한 향당(鄕黨)에서 기꺼이 하례(賀禮)하고 공손(恭遜)히 졸(拙)한 글귀를 드려서 수설(修楔)을 도웁느니라.
들보를 동쪽에 얹으니 호수(湖水)는 넓고 넓어 아침의 해중(海中)에 낚시대는 의구(依舊)히 별탈 없으니 한 가닥 실을 풀어서 던지니 엄자릉(嚴子陵)¹¹⁾의 풍(風)이로구나
들보를 서쪽에 얹으니 덕유산(德裕山)의 아지랑이 전망(展望)이 흐리니 그사이서 쏟아나는 말고 힘찬 물 영가대(永歌臺) 아래서 깊은 시내 만들었네.
들보를 남쪽에 얹으니 아홉마디 신선(神仙)의 지팡이는 세상을 마다하여 임금에게 충성(忠誠)하는 모든 좋은 일 겸한 연후(然後) 에라야 호걸(豪傑)의 남자가 되는니라.
들보를 북쪽에 얹으니 황석산(黃石山)이 높아서 푸른 빛 영롱(零濃)하니 그 아래 개 짖고 닭이 우니 옛 집은 빽빽한 운림(雲林) 사이 있으리라.
들보를 위에 얹으니 하늘은 고요하고 북두성(北斗星)은 밝은데 들에는 편안한 뜻 지극(至極)한 정성을 드리오니 공산(空山)의 밤마다 애오라지 우러르네.
들보를 아래에 얹으니 그 누가 여러 봉을 서로 마지하리요.
그 때의 사람들이 감히 글을 임금에게 못 드리니 힘을 다해 용만(龍灣)에 임금의 수레를 따랐더니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어진 사람이 이어나며 길이길이 복되어서 도(道)를 배우고 글을 높혀 집은 돈독(敦篤)한 효제(孝弟)의 행(行)이 숫돌에 갈 듯 풍습(風習)은 정직한 풍(風)을 이루고 고상한 선비들은 앞선 분과 어깨를 견주며 충성(忠誠)하고 진실한 사람은 후대(後代)를 접(接)하고 이어서 문정(門庭)의 안에서 닦아 조정(朝庭)에까지 사모쳐서 임금이 써 충신(忠臣)과 늠열(凜烈)한 의(義)를 이어서 성묘(聖廟)에서 포양(褒揚)하는 은혜(恩惠)를 갚을지어다.
상지(上之) 32년 을미(乙未) 11월 하한(下澣)
초계인(草溪人) 사마생(司馬生) 정개석연갑(鄭介石然甲)은 짓다.


【주석】
작설(綽楔)¹⁾ : 효자나 의사(義士)들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臺)
괴원(槐院)²⁾ : 삼공(三公)의 원(院)
여정(輿情)³⁾ : 가마의 정(情)
구확(榘矱)⁴ : 모범
규구(規矩)⁵⁾ : 잣대의 규격
준승(準繩)⁶⁾ : 먹줄의 준측
첨하(簷下)⁷⁾ : 처마(도리의 바깥부분을 구성하며 지붕의 밑 부분을 이루는 것)
척강(陟降)⁸⁾ : 오르고 내림. ‘陟明降晦’라는 뜻
첨앙(瞻仰)⁹⁾ : 우러러 사모함
정채(精彩)¹⁰⁾ :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는 상태 , 뛰어나다
엄자릉(嚴子陵)¹¹⁾ : 자릉은 동한(東漢)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의 자이다.




東湖公原韻三首


綃峴卜居 초현에서 엎드려 살다.
東流湖水水之濱 동으로 흐르는 호수(湖水)의 물가에다
尋得名區卜築新 이름난 곳 찾아 얻어 새롭게 집 지었네.
泉石有緣光看手 천석(泉石)에 인연(因緣)있어 먼저 간수(看手)하였고
雲林無辱可終身 운림(雲林)에 욕(辱)됨 없이 가히 이 몸 마칠까하네.
釣臺蒻立烟波雨 낚시 대에 도롱이 입고 연파우(烟波雨)를 맞고서니
絶壁桃花玉洞春 절벽의 복사꽃은 옥동의 봄이로다.
巖穴許爲猿鶴友 굴 바위에 허락(許諾)하길 원학(猿鶴)과 벗을 하니
聖明天地一閒人 성스러운 밝은 천지(天地)에 한가할 사람이더라.





遊遮日岩 차일암에서 노닐다.
獨來嚴上坐 홀로 바위에 와서 앉으니
山靜白雲濃 산은 고요한데 흰 구름만 짙어가네.
積水盈其下 물은 꽉차서 그 밑에 쌓이니
眞源在此中 참된 근원은 이 가운데 있도다.
輞川開別業 망천(輞川)의 냇가에 별업을 열었고
箕峀仰餘風 기산(箕山)이 뫼뿌리에 남은 풍치를 우러르네.
一曲芝謌歇 한 곡조 풀꾼들의 노래 소리 그치니
仙翁庶可逢 신선의 늙은이를 거의 옳게 만나리라.


被召出山 부름을 입고 山을 나다.
遯跡花林歲七過 자취를 화림(花林)에 감춘지 7년이 지나가니
幡然今日解烟簑 번연히 오늘은 연기(烟氣)낀 도롱이를 풀게 되었네.
詩人莫使文稱北 시(詩)하는 사람들아 문(文)이 임금께 아뢨다 하지마오
王事多艱復柰何 국왕(國王)의 일이 어려움 많은데 어찌 하리요.


花林章君大震作亭於其先祖處士公遺址請余題詩遂和其原韻
화림 장군대진(章君大震)은 정자를 그 선조 처사공의 끼친 터에 짓고 나에게 시를 짓기를 청하거늘 더디어 그 원운에 화답 하니라.





謹次東湖公卜居韻 幷序 삼가 동호공(東湖公)의 복거운(卜居韻)을 차운하고 아울러 서함.
安陰之綃峴洞昔東湖章公之所簻軸也 裔孫承其先志就舊址 而葺其遺亭足見孝思維則亭成敢次公卜居韻以寓高景之思云
안음의 초현동(綃峴洞)은 옛날 동호장공(東湖章公)의 수레가 머문 곳이라 후손이 그 선조의 뜻을 이어 옛터에 그 끼치신 정자를 수즙(修葺)하니 족히 효도의 생각이 본받음을 보임이라. 정자가 이루어짐에 감히 공의 복거운(卜居韻)은 차운하고 써 높이 경모(景慕)하는 생각 우모(寓慕)하나니라.


往賢高躅印 옛날에 높으신 발자취 찍혔으니
淸濱晩拾遺 맑은 냇가에 늦게 끼친 유운(遺韻) 거두네.
芬寓感新始 향기롭게 머무르는 새로운 시작을 느끼고
括坤囊貞所 땅을 묶어 곧은 곳에 챙겼도다.
志意從王事 뜻은 마침내 임금의 일을 따름이요
致其身林塘 그 몸은 숲의 못에 이를지니라.
水記杜翁錦 물은 두옹(杜翁)의 비단에 기록케 하고
耕釣坮傳巖 경작하고 낚시하는 대에는 엄자릉(嚴子陵)을 전했도다.
嚴子春今得 엄자릉(嚴子陵)의 봄은 이제야 맞이하니
肖孫能肯搆 어진 자손들이 능히 얽어 지었으니
餘風煩覺起吾人 여풍(餘風)은 번거로이 우리의 깨달음을 알게 하네.
서하(西河) 후학(後學) 노무현(盧武鉉)





朱甍斯翼澗之濱 붉은 기와 나래펴듯 간수(澗水) 물가에
處士遺踪自此新 처사(處士)가 끼친 흔적 이로부터 새롭구나.
白石浪舂平作面 흰돌과 물살홈은 평평한 면을 짓고
玉峰雲斂削成身 옥봉(玉峰)에 구름 걷히니 깎아 이룬 몸이더라.
四年南國還山夢 4년 만에 남쪽 나라 山 꿈으로 돌아가고
三月東湖上岸春 3월의 동호정 위 언덕에 봄이 찾아 왔네.
朱至誰能居右筆 이르지 못했는데 누가 능히 붓을 잡고 사리요.
謾將短?愧前人 부질없이 단뉴(短?)을 잡으니 앞 사람이 부끄럽네.
목사(牧使)이은(二隱) 백천(白川) 조원식(趙元植)






亭在東湖水一濱 동호 정자가 있는 한쪽 물가에
昔聞今上感懷新 예전에 듣고 이제 오르니 감회(感懷)가 새롭구나.
檻外波通仲連海 남간 밖의 물결은 바다를 어이 통하고
庭前花守大明春 뜰 앞의 꽃은 대명춘(大明春)을 지켰도다.
窮鄕隱德綠誰闡 궁벽한 고을 숨은덕은 누가 푸르다 밝히겠으며
有是賢孫善述人 어진 자손이 업을 받아 이어가는 사람 있도다.
담양(潭陽) 정학순(田鶴淳)





東湖亭子水之濱 동호의 정자 흐르는 물가에
此址烟霞更爲新 이 땅에 연하는 다시 새로워지네
賁趾曾年不謀身 충신과 죽음은 당세에 몸을 꾀하지 않도다.
漁樵落日千峰雨 고기잡고 나무하니 해 저문 일천봉에 비가 내리고
花鳥番風萬樹春 꽃과 새들 바람부는 일만나무 봄이로다.
雲端一片蒼苔石 구름 끝에 한 조각 푸른 이끼 돌에는
往蹟伊今證野人 지난 자취 이제야 들사람이 증인하네.
문화(文化) 류석룡(柳錫龍) 치운(致雲)


※주1-1960년대 까지 풍류를 아시는 양반가의 선조들은 전국의 유명한 풍수를 감상하며 친분을 교류하기 위하여 지방 문장가의 집을 방문하여 며칠씩 먹고 자며 여러 날을 입을 수 없는 한복 특성상 묵객으로 있는 집에서 한복을 세탁하여 입고 떠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어머니께서는 1950년대 할아버지의 손님 접대와 묵객의 옷 세탁에 많은 노고를 하셨습니다). 지금처럼 파와 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柳씨는 모두 일가 친족이었으며 사돈, 고모를 중심으로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는데, 誠齊 柳錫龍(1839~1914) 선조는 지금부터 약 100~150여년 전에 짚신을 신고 걸어서 함양에 가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東湖隱士宅 동호공의 숨은 선비 집에는
滿地烟震濃 땅에 가득히 연진(烟震)이 짙었구나.
桐栢靑山裏 동백(桐栢)은 푸른 산속에도 푸르고
桃花紅水中 복사꽃은 불속에서도 붉구나.
深感迷世路 깊이 세상 길이 미혹(迷惑)되기에
肯構述家風 긍구(肯構)하여서 가풍(家風)을 지었네.
何日携樽酒 어느 날에 두루미 술 이끌고 와서
與君亭上逢 그대와 더불어 정자 위에 만나리.
어은(漁殷) 승지(承旨) 은진(恩津) 송병찬(宋秉瓚)


章氏亭成錦水濱 장씨의 정자가 금호(錦湖)의 물가에 이루게 되니
炳然高義久悠新 빛나는 높은 의절(義節) 오래토록 새롭구나.
鰈域八年忠舊淚 접역(鰈域)에서 팔년이나 충구(忠舊)의 눈물 흘렸고
龍灣千里扈從身 용만(龍灣)의 천리 길을 임금을 따른 몸이더라.
閭稧彌明家國典 마을의 계는 더욱 밝아 가문과 나라의 법전(法典)이요
園蔡長發古今春 원채(園蔡)가 길이 피는 고금의 봄이더라.
雲山泉石多精彩 운산(雲山)과 천석(泉石)에는 많은 정채(精彩)가 이니
能使遺風勉後人 능히 유풍(遺風)은 후인으로 하여금 힘쓰게 하네.
국포(菊圃) 분성(盆城) 김현주(金顯周) 문욱(文郁)


錦泓如畵匯斯濱 비단 같은 물속 그림 같은 회수(匯水) 물가에
倍覺賢公蕩軸新 배(倍)나 깨달음은 현공(賢公)의 수레바퀴 새로웁구나.
滄浪一曲留名地 푸른 물결 한 구비가 이름난 땅에 머물고
白日千秋報國身 백일(白日)의 천추(千秋) 아래에 보국(報國)하는 몸이로다.
楣端月滿文章局 미액(楣額) 끝에 달이 차니 문장(文章)의 국량(局量)이요
檻外花明雨露春 난간 밖의 꽃이 밝으니 비오고 이슬 내린 봄이로다.
繼有肖孫能接武 이어온 자손(子孫) 있어 능히 무예(武藝)를 접하여서
登臨懷古又覺人 등림(登臨)하니 옛 생각 또한 사람의 마음 사로잡네.
도은(桃隱) 풍천(豐川) 노창수(盧彰壽) 순화(舜華)


東湖亭子錦之濱 동호의 정자는 비단 같은 물가에
丹雘翬如入眼新 단청(丹靑)이 날듯 눈에 띠여 새롭네.
泉石頻留經過客 천석(泉石)에 자주 머무르는 지나가는 손님이요
烟霞來護隱接身 연하(烟霞)가 보호하니 숨어 머무는 몸이더라.
吾行未及嚴花節 나의 감은 바위에 꽃피는 시절에 미치지 못했고
嶺雪還埋洞府春 영설(嶺雪)이 감돌아서 마을의 봄이 묻혔구나.
壯蹟龍蛇三百後 장한 사적(事蹟) 임진왜란 일어난 3백년 후에
雲孫多有繼先人 자손들이 많아서 선인(先人)을 이었도다.
서산(筮山) 풍산(豐山) 유인영(柳寅榮) 무경(懋卿)


遊遮日巖 차일암에서 노닐다.
信美花林洞 참으로 아름다운 화림동을
殘春忽此行 지는 봄에 문득 이렇게 찾았네.
山風琴自響 산바람에 거문고 소리 절로 울리니
溪鷺句還成 골짜기의 해오라기가 날아와 시구를 이루네.
冷石能醒酒 차가운 바위는 술을 깨게 하고
淸流可濯纓 맑은 물은 갓끈을 씻을 만하다.
歸時有餘興 돌아갈 무렵에 여흥이 이는데
落日聽簫聲 저무는 해에 퉁소 소리 들리는구나.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 산 92번지 농월정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81-2 군자정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36 거연정


출처
함양누정지-함양문화원/대보사(200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