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웅동 마천리 인천이씨 소성재 小成齋

천부인권 2019. 10. 5. 15:57



2019.10.4. 웅동1동 인천이씨 소성재 전경


진해구 마천동 48번지에는 인천이씨의 재실인 소성재(小成齋)가 있다. 소성재(小成齋) 앞에는 220년 된 팽나무 노거수가 그 위용을 자리하고 그 아래에 인천이공휘임·박유적비(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가 세워져 있으며 비문에는 인천이씨의 웅동 입향조와 소성재(小成齋)의 건립 연혁이 짤막하게 기술되어 있다.
인천이씨는 소성백(邵城伯) 휘(諱)허겸(許謙)으로부터 기원(起源)하고 13대손(十三代孫) 휘(諱)문화(文和)가 공도공(恭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아 공도공파(恭度公派)가 중시조로 탄생한다. 마천리 인천이씨의 입향조는 소성재(小成齋) 입구에 세운 유적비의 주인공이다.
소성재(小成齋)는 현대식 2층 콘크리드 벽돌집으로 지붕은 일본식 시멘트기와를 얹어 옛 전통 모습은 없다. 2층은 제향공간이고 1층은 제향준비와 회합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 입구에 걸린 편액은 소성재(小成齋)이고 기문과 주련 등은 없고 90여권이나 되는 다량의 책이 있지만 관리가 부실하여 썩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대략 책의 제목을 살펴보니 南坡集, 角干先生實記, 尤菴先生言行錄, 詩傳, 攀龍, 堯山堂記, 高麗史, 周易, 論語, 綱目, 疑課 精選, 中庸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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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재 1층 모습



소성재와 입향조 유적비


아래에는 웅동 마천리 입향조인 『인천이공휘임·박유적비(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의 내용을 옮긴다.





인천이공휘림·박유적비(仁川李公諱琳·珀遺蹟碑)
인천이씨는 소성백(邵城伯) 휘(諱)허겸(許謙)으로부터 기원(起源)하니 거금(距今) 970여년(餘年)전(前)으로 그 근원(根源)이 심원(深遠)하고 유구(悠久)하여 조선(祖先)들은 고려(高麗) 조선(朝鮮) 양조(兩朝)에 걸쳐 현관(顯官)거유(巨儒)가 대대(代代)로 속출(續出) 나라에 공헌(貢獻)하고 가성(家聲)도 크게 떨쳤거니와 13대손(十三代孫) 휘(諱)문화(文和)는 이조(李朝) 태종(太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큰 공(功)을 세워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공도공(恭度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나라에서는 산지(山地)를 하사(下賜) 공신(功臣)으로 예장(禮葬)하였으니 이토록 예우(禮遇) 받은 우리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이로부터 공도공파(恭度公派)가 되었느니라. 공도공(恭度公)의 9대손(九代孫) 휘(諱)회근(晦根)은 소년기(少年期)에 임진난(壬辰亂)을 피(避)하였으며 아들 휘(諱) 임·박형제(琳·珀兄弟)는 315년(三百十五年)전(前) 1669년에 정(精)든 고향(故鄕)과 선영(先塋)을 뒤로 하고 대구(大邱)로부터 점차(漸次)남하(南下) 마침내 산숭수명(山崇水明)한 웅천(熊川)고을 마봉산하(馬峯山下) 이곳 마천(馬川)에 이주(移住)정착(定着)하니 두 어른이 입(入)웅천(熊川)조(祖)이시다. 형제(兄弟)는 우애가 깊고 화합(和合)하여 객리(客里)살이의 모든 고난(苦難)을 극복(克服)하여 근면성실(勤勉誠實)히 가업(家業)을 일으켜 형임(兄琳)께서는 동주(東柱) 동상(東相) 동익(東榏) 삼자(三子)를 두신 선비였고 제박(弟珀)께서는 동표(東杓) 동채(東采) 이자(二子)를 두신 통정대부(通政大夫)였다. 위 다섯분의 후손(後孫)이 흥성(興盛)하여 250여년(餘年)전(前) 이곳에 재실(齋室)을 세워 학당(學堂)을 겸(兼)하고 소성재(小成齋)라 이름하여 문중자제(門中子弟)는 물론(勿論) 타문중(他門中) 자제(子弟)도 포용(包容)수학(修學)케하여 많은 학도(學徒)를 배출(輩出) 그들이 성장(成長)하여 향사(鄕士) 또는 향재(鄕才)가되었으니 소성재(小成齋)야 말로 유서(由緖)깊은 전당(殿堂)으로 창립이래(創立以來) 연금장장(連錦長長) 200여년(二百餘年) 전통(傳統)을 자랑하며 그 명맥(命脈)을 찬연(燦然)히 유지(維持) 학당(學堂)으로서의 본분(本分)과 사명(使命)을 다하였으니 그 빛나는 사적(事蹟)기록(記錄)에 남을지며 입웅산조(入熊山祖)의 5대손(五代孫) 유(洧)는 출천지효자(出天之孝子)로 나라로부터 포창(褒彰)받고 6대손(六代孫) 기회(基諙)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이요 7대손(七代孫) 몽희(夢熺)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사우(士友)를 창도(唱導)하여 주자(朱子)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춘추회(春秋會)서 강문(講文)하였고 제(弟)석열(錫烈)은 행내부주사(行內部主事)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당시(當時)의 세사(世事)를 통열(痛烈)히 비판(批判) 나라에 상소(上疏)하고 광주(廣州)의 선영위토(仙塋位土)가 실권(失權)된 것을 법정(法廷)에 누정(累呈)하여 복권(復權)하였다. 이렇듯 후손(後孫)들의 영달(榮達)은 모두가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으로 감읍(感泣)하고 높은 긍지(矜持)를 가지는 바이다. 그러나 소성재(小成齋)가 퇴락소멸(頹落消滅)된 후(後)로는 그 다감(多感)하고 정서(情緖)어린 옛 모습을 잊지 못하여 지난날의 영화(榮華)를 회상(回想)하며 깊은 감회(感懷)에 젖어 매양(每樣) 애탄(哀嘆)하던 바 드디어 문중(門中)이 합의(合意)하여 1975년(一九七五年)에 제당(薺當)을 재축(再築)하니 실(實)로 다행(多幸)이로다. 뿌리없는 나무가 없고 강(江)물도 원천(原泉)이 있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조상(祖上)을 잊을손가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길이 추모(追慕)코자 여기에 비(碑)를 세우노니 모름지기 후손들은 세웅(世熊)가 불고(不古)하여 비록 산거(散居)할 지라도 세세연연(歲歲年年) 이곳에 회동(會同)하여 효우목족(孝友睦族)하고 지성(至誠)으로 향사(享祀)하고 재실(薺室)을 보존(保存)하여 자손된 도리(道理)를 다 할것이며 그 영화가 천추만대(千秋萬代) 영세무궁(永世無窮)할 지어다.
갑자(甲子)1984년(一九八四年) 만추(晩秋) 건립(建立)
九代孫 병철(柄哲) 撰
慶州人 이영환(李英煥)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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