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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일암리 대방마을 김해허씨 경모재 敬慕齋

천부인권 2019. 11. 1. 08:04

 

2019.10.30. 일암리 대방마을의 모습

진전면 일암리 1090번지는 위치 기반고도계가 해발 높이 225m로 표시하고 「위도 35°07′02″N 경도 128°21′39″E」라 기록한다. 이곳은 김해허씨의 집성촌으로 창원시의 오지마을 중 한곳이며 특별히 찾아가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는 갈 일이 없는 숨겨진 마을이다. 창원에서는 산행으로 알려진 적석산(積石山,492m)을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대방마을에는 가본 적이 없다. 그만큼 창원시의 오지 중 한 곳이라 할만하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옛날 영산현감을 지낸 김해허씨의 허의(許偯)가 경기도 양지면에서 함안군으로 왔다가 최종적으로 대방산(大芳山=깃대봉) 아래의 이곳 일암리 대방마을에 정착한 것을 기리기 위해 1944년에 창건한 경모재(敬慕齋)와 1991년 5월에 건립한 저전사(著奠祠)를 보기 위함이다.
일암리 위쪽에 위치한 일암소류지에서 우측으로 가는 좁은 길과 일암소류지 방향으로 가는 소로가 있는데 등산객에게 물으니 일암소류지 방향이라 해서 계속 올랐더니 대방마을은 우측으로 가야 했던 것임을 산 중턱에 올라서야 알게 됐다. 덕분에 적석산에서 적석산 깃대봉(528.6m) 아래에 있는 대방마을을 보게 됐다.

 

 

2019.10.30 저전사와 경모재를 길에서 본 모습
담장 넘어서 본 경모재
저전사 영역에서 본 저전사 著奠祠
저전사 著奠祠 편액
저전사 著奠祠 기문


著奠祠記
一日에 許君 道寧이 그 族兄 斗寧 族弟 壹寧과 같이 나에게 와서 하는 말인 즉 五十四代祖 縣監公 諱 偯을 追慕하여 敬慕齊를 建立하였더니 世俗이 모두 先代 先靈이 墓祭를 齋舍에 合祭하는지라 吾族도 亦是 時俗을 따라 敬慕齊에 合祭하여 오던바 制度가 合當찮고 또한 狹小하여 後孫들의 不平이 많은지라 一日에 不肖 道寧이 이 事實를 族叔 南昔氏에게 말하고 創建一屋을 勸告하니 叔氏께서 拒絶치 않고 巨額을 專擔하여 己巳 春에 施工하고 當年 中秋에 竣工하니 집 이름은 著奠祠라 屋宇가 廣煖하고 制度가 亦是 合當한지라 우리 后孫들이 어찌 族叔의 厚意를 感服하지 않으리요 記文을 걸어 百歲에 芳名이 消滅치 않도록 할 것이라 하고 記文을 請하거늘 나 비록 글을 할 줄 모르나 한 말을 記錄하여 어찌 世上 사람의 耳目을 깨우지 않으리요. 三君의 口頭陳述에 依하면 氏는 貧寒한 家庭에 生長하여 窮困을 退治코저 故鄕을 떠나 四方에 奔走하여 千辛萬苦로 風霜을 지내던 中 마침 한 사업을 붙잡아 悠久한 歲月中에 天佑神助로 事業이 繁昌하여 生活이 自足하고 年當七十六歲로 安享中이라 한다. 슬프다 世間에 不勞所得으로 父祖遺産 巨資를 가지고 豪華生活을 하는 사람이 許多하나 窮家貧族도 모르고 先代事業도 모르고 社會事業도 모르니 運數가 물러가면 물위에 거품처럼 忽然히 사라지고 없는데 이제 南昔氏는 無限한 辛苦 끝에 事業이 繁昌하여 그 運數 山海처럼 無窮하리라.
檀紀 四三二三年 庚午 五月 夏至節 文泰瓘撰

 

저존사기(著奠祠記)
하루는 허도영(許道寧) 군이 그 집안 형인 두영(斗寧), 아우 일령(壹寧)과 같이 나에게 와서 말하였다. 나의 14대조 현감공(縣監公) 휘(諱) 의(偯)를 추모하여 경모재(敬慕齊)를 지었더니 근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선대의 영령을 모시는 묘제(墓祭)를 재실에서 합하여 모시는 상황이다. 우리 문중도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라 경모재에서 합제(合祭)하여 오던 바 제도(制度)가 합당하지 않고 또한 협소하여 후손들이 풀명이 많았다. 하루는 불초(不肖) 도령(道寧)이 이 사실을 집안 아저씨인 남석(南昔) 씨에게 말하고 재실을 한 채 창건할 것을 권고하니 아저씨는 거절하지 않고 거액을 전담하기로 하였다. 기사(己巳)년 봄에 시공하여 그해 8월에 준공하니 그 집을 저존사(著奠祠)라 이름하였다. 집이 밝고 따뜻하며 모든 법도가 합당하니 우리 후손들이 어찌 집안 아저씨의 넉넉한 마음에 감복하지 않으리오. 이에 기문(記文)을 걸어 영원토록 그 아름다운 이름이 소멸치 않아야 된다고 하며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비록 글재주가 없으나 한 말을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의 식견을 어찌 깨우치지 않겠는가. 세 사람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 집안 아저씨인 남석 씨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 곤궁함을 이겨내려고 고향을 떠나 천지 사방에서 분주히 다니며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던 중에 마침 한 사업으로 일으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사업이 번창하고 생활이 넉넉하게 되었는데 올해 76세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슬프다 세간에는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또는 조상들의 유산으로 큰 돈을 가지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나 집안의 가난한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고 선대 조상들에 대한 사업도 모를뿐만 아니라 사회사업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운수(運數)가 물러가면 물 위의 거품처럼 홀연히 사라지고 없을 것인데 이제 남석(南昔) 씨는 무한한 고생끝에 사업이 번창하여 선행을 베풀었으니 그 운수가 산과 바다처럼 무궁할 것이다.
단기(檀紀) 4323년 경오(庚午) 5월 하지절(夏至節) 문태관(文泰瓘) 쓰다.

 

 

길에서 본 경모재 대문
명성문 明誠門 편액

 

집안에서 본 경모재 敬慕齋

 

敬慕齋原韻-번역원
吾祖南來奠此區 우리 조상 남쪽으로 와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慕齋爲築壟東頭 언덕 동쪽 머리에 경모재를 지었다네.
芳山相拱村常靜 아름다운 산 감싸 안아 마을은 늘 조용하고
磧石還圍勢更幽 너덜 바위 둘러 있어 형세 더욱 그윽하네.
祭我先靈齊敬盡 재계하고 공경을 다해 우리 선조에 제사하고
會諸宗族話情遊 여러 종족들 모여서 정담 나누고 노니니
搆堂豈畢後孫事 재실 지었다고 어찌 후손의 일 끝났으리오.
願把遺謨須講求 원하건대 남기신 유훈을 반드시 강구하기 바라네.
後孫度寧 謹稿 후손 도녕이 삼가 씀.

 

 

재실 방의 위에 걸린 저존실 著存室 편액

敬慕齋記 [原文]
齋於晉東之大芳山 金官許氏先世之墳庵也 許氏故有靈山縣監 磷 正憲公伯琦玄孫也 始自陽智移居咸安中 又移于大芳前後爲 十有餘世而代各有墓 墓各異原墓不可以闕其祭 祭不可以無其所欲遂隨其墓之所在 爲齋而春秋奉其香火則 非惟貧弱而力有 所不及亦恐禮煩 而誠意易懈於是遵 退陶李先生墓祭不於墓而 祭於其墓室之說 爲齋以合祭之蓋 祖先雖遠不忘其所 本無遠近也 墳墓雖異有誠 則有神無彼此也 且夫宗族會聚各敬爾儀胥告 胥勉一以思曾氏 追遠歸厚之明訓一以 爲韋家月朔花樹之故事 是雖出於力不及而爲此不得已之擧 而誠無不盡禮無不合許氏 其殆庶幾乎 齋凡三間 中爲祭室榜曰 著存門曰明誠總而名之曰 敬慕經始於往歲甲申之春至 秋而成董 其役者度寧萬墰南注 來請文者南注其人
歲乙酉五月下浣 晋山 河謙鎭記

 

경모재기(敬慕齋記)[해문]
경모재(敬慕齋)는 진주에서 동쪽의 대방산(大芳山)에 있으며 김관허씨(金官許氏) 선대(先代)의 재실이다. 허씨(許氏)의 옛날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낸 린(磷)은 정헌공 백기(正憲公 伯琦)의 현손(玄孫)이다. 비로소 양지(陽智)¹⁾로부터 함안(咸安)으로 이주(移住)하였다가 또 대방(大芳)으로 이사(移徙)하니 전후(前後)로 십수대(十數代)가 되었는데 대대로 묘(墓)가 따로 따로 있고 묘가 각각 언덕이 달라도 제사(祭祀)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제사를 받들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므로 묘소(墓所)가 있는 곳에 재실을 지어 봄·가을에 제사를 받들면 후손들이 빈약하여 힘이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가 번거롭다고 성의가 쉽게 해이해질까 두려워한다.
이에 퇴계 이선생(退溪 李先生)이 묘제(墓祭)를 묘에서 아니 하고 묘실(墓室)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설에 따라 재실을 지어 합제(合祭)를 하였으니 대개 조상은 비록 그 대가 멀어도 그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므로 멀고 가까움이 없다. 또 분묘가 비록 다르나 정성이 있으면 귀신이 있어서 네 조상 내 조상이 따로 없다.
또한 종족(宗族)이 모여 서로 예로서 공경하고 서로 알리고 힘써서 한편으로는 증자(曾子)가 말한 추원귀후(追遠歸厚)²⁾의 명훈(明訓)을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위위가월삭화수지고사(爲韋家月朔花樹之故事)³⁾처럼 하면 비록 힘이 미치지 못한다할 지라도 재실을 짓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 정성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예(禮)가 합당(合當)치 않음이 없으니 허씨(許氏)는 거의 위에서 논(論)한 바에 부합(符合)될 것이다.
재실은 무려 3칸인데 가운데는 제실(祭室)로 「저존(著存)」이라 현판(懸板)하고 문의 이름은 「명성(明誠)」이라 하며 전체를 이름 하여 「경모(敬慕)」라 하였다.
경영은 지난 갑신(甲申;1944)년 봄에 시작하여 금년 가을에 준공하였으니 공사를 감독(監督)한 사람은 도녕(度寧) 만담(萬墰) 남주(南注)이고 와서 기문을 청한 사람은 남주(南注) 그 사람이다.
을유(乙酉;1945)년 5월 하순에 진산 하겸진(河謙鎭) 쓰다.

 

【주석】
양지(陽智)¹⁾ :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양지면(陽智面)
추원귀후(追遠歸厚)²⁾ : 논어 학이 9장에 「曾子曰 愼終追遠이면 民德이 歸厚矣니라.」 즉 “상(喪)에 슬픔을 다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시면 사람들의 덕성이 한결 후해 질 것이다.”에서 나온 말.
위위가월삭화수지고사(爲韋家月朔花樹之故事)³⁾ : 당(唐)나라 때 위씨(韋氏) 가문의 사람들이 매월 초하루마다 9족이 모여 즐겁게 노는 모습이 꽃나무가 춤을 추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유래된 말.

 

 

 

 

 

[해문] 김정현
飛甍高出管全區 날 듯한 용마루가 전 구역에서 높은데
비맹고출관전구
雲物呈奇入賞頭 景物도 경치도 기이하니 구경할 만한 곳이다.
운물정기입상두
翠壁幻屛當戶展 푸른 벽은 환상의 병풍으로 문호를 대하여 펼쳐졌고
취벽환병당호전
寒流曳布抱軒幽 추운流波 당겨온 베는 헌함을 안아 그윽하다.
한류예포포헌유
誠深芬享神如在 誠心의 奉祭祀에 神이 계신 듯 하고
성심분향신여재
情敘天倫族合遊 情으로 펼친 天倫에 집안이 모여 놀이한다.
정서천륜족합유
爲賀諸君純繼述 諸君들의 繼志述事를 펼침을 하례하니
위하제군순계술
承先規範此中求 先代를 받드는 규모를 이 가운데서 찾으리라.
승선규범차중구
苞山 郭鍾千 謹稿
포산 곽종천 근고

 

 

 

 

 

謹次 [해문] 김정현
근차

大芳山秀擅名區 대방산의 빼어남이 명구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방산수 천명구
伊昔哲人卜址頭 옛날 哲人이 이곳에서 터를 정했다.
이석철인 복지두
宿霧常凝邨靜肅 묵은 안개는 항상 잠겨 마을은 정숙 정숙한데.
숙무상응 촌정숙
囂塵不到谷淸幽 시끄러운 俗塵이 아니 와서 골짜기는 맑고 그윽하다.
효진부도 곡청유
風聲有樹長時感 風化를 세움이 있으니 오랜 세월 감동 있고
풍성유수 장시감
肄業在勤或暇遊 修業은 부지런함에 있건만 혹 여가엔 놀기도 한다네.
이업재근 혹가유
今我看君齋一築 이제 내가 그대의 재실 건축을 보니.
금아간군 재일축
爲先始覺自心求 爲先事業은 마음에 求해야 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위선시각 자심구
鐵城  李明奎   謹稿
철성   이명규   근고

 

 

 

 

敬慕齋柱聯


吾祖南來奠此區 우리 조상 남쪽으로 와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慕齋爲築壟東頭 언덕 동쪽 머리에 경모재를 지었다네.
芳山相拱村常靜 아름다운 산 감싸 안아 마을은 늘 조용하고
磧石還圍勢更幽 너덜 바위 둘러 있어 형세 더욱 그윽하네.
祭我先靈齊敬盡 재계하고 공경을 다해 우리 선조에 제사하고
會諸宗族話情遊 여러 종족들 모여서 정담 나누고 노니니
搆堂豈畢後孫事 재실 지었다고 어찌 후손의 일 끝났으리오.
願把遺謨須講求 원하건대 남기신 유훈을 반드시 강구하기 바라네.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