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일암리 초계변씨 아석정 我石亭

천부인권 2019. 11. 2. 21:40

 

2019.10.30.진전면 일암리 초계변씨 아석정

 

진전면 일암리 871번지는 위치 기반고도계가 해발 높이 97m로 표시하고 「위도 35°07′11″N 경도 128°22′13″E」라 기록한다. 이곳은 일암리에 있는 초계변씨의 누정 중하나로 아석정(我石亭)이라 이름 했는데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은 없는 상태이나 기문(記文)과 상량문(上樑文) 등이 남아 있어 아석정(我石亭)의 연혁(沿革)을 살펴 볼 수 있다. 
아석정은 일암리 대방마을로 가다가 도로에서 집의 모양만 보고 누정일 것으로 짐작했다. 김해허씨의 저전사(著奠詞)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집 앞에 당도하니 담장을 쌓은 축성방법도 훌륭하고 높이도 대단했다. 아석정 마당에서 보니 흙돌담장을 지지하고 있는 두 개의 지주대를 보면서 담장을 높이 쌓은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아석정의 오른쪽 대문 옆에는 제법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어 이집 주인의 예사롭지 않는 풍류를 느끼게 한다.

 

 

아석정 대문

 

 

아석정과 매화나무

 

 

 

 

我石堂記 [原文]
余嘗過晋之積山下得卞君 子中之爲 人而相交 甚歡自是每間歲相從 一日見君所居之堂 有扁以我石者指 而問曰奚以石君曰 斯堂之環皆山 而山之左右 有大石林立 故吾以名吾堂然非取諸 其形勝實有所以也 余又問其所以則曰 中天下之物 而頑愚者莫如石中天下之人 而愚莫如我 以我之愚遇石之愚 二愚相得可謂石其我矣 我其石矣 是正如柳柳州之得 愚溪以自識也 余曰此乃君之自道也 然以余所見 則盖石之爲物也 其體質其堅確雖洪流震盪 而屹立不頹雖 風霜隕籜 而容色弗渝寧靜 自守無占物之累氣類相感有引鍼之力 而韞藏美玉能使山岳 生輝則物之負美者亦莫如石 而余惟君之稟 資旣美立志亦固雖擧 世波奔而脚跟不蹉 是猶石之屹立也 見今冠裳變易而法服不改 是猶石之不渝也 捿心淡泊而不爲外物所勝 是猶石之無欲也 聲氣相同 有朋友之信 從是猶石之引鍼也 多聞前言往蹟 以蓄德於中 而自有英華之發 外者是猶石之韞玉而輝暎也 則大易之其介如石 小雅之其人如玉非君 而誰亦可謂二美相得 而宜乎堂名之爲我石也 君愀然而曰 我實昏愚無以發蒙 而吾子因物善喩亹亹不己可不用 是以自勵乎 願吾子輔吾志函惠德音 余於是作而對曰 君之好善 吾知之稔矣 夫苟好善 則吾林之賢 師益友疇不樂告 以善道哉 噫余以他山之石 而互相攻磨要同歸于玉成之地 云爾
昭陽協洽之歲㽔賓之月載生明
一菴友人文鳳鎬記

 

아석당기(我石堂記) [해문]
내가 일찍이 진주(晋州)를 지나 적석산(積石山) 아래에서 변군(卞君)을 만났는데 사람됨이 군자라 서로 심(甚)히 반갑게 교제하였다.
이로부터 한해를 걸러 가면서 상종을 하였다. 어느 날 군(君)이 살고 있는 집에 「아석(我石)」이라고 현판(懸板)한 것을 보고 가리켜 묻기를 「어찌하여 돌석(石)자를 썼느냐」하였더니 변군(卞君)이 말하기를 「이 집을 둘러싼 것이 다 산이고 산의 좌우에 큰 돌이 숲처럼 서있으므로 내가 나의 집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세(氣勢)가 뛰어남을 취한 것이 아니고 그 까닭이 있습니다.」하여 내가 또 그 까닭을 물으니 「천하의 사물(事物) 중에 완고(頑固)하고 미련하기가 돌만한 것이 없고 천하의 사람 가운데 어리석기가 나 같은 사람이 없어 어리석은 나와 돌의 어리석음이 만나 두 어리석음이 서로 맞아 돌은 내같이 미련하고 나는 돌같이 미련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버들 숲이 물가에 있으면 개천은 어두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그대 스스로의 도(道)이니라. 그러나 나의 소견(所見)은 돌의 물건(物件) 됨이 그 체질(體質)이 심(甚)히 튼튼하여 비록 큰 파도에 부딪쳐도 우뚝 솟아 무너지지 않고 바람과 서리에 초목(草木)이 말라 떨어져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편안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지키며 타물(他物)을 차지하여 더하지도 않으니 마음이 맞는 사람과 서로 감응(感應)하여 자석(磁石)이 바늘(鍼)을 당기는 힘이 있는 것과 같고 감추어진 미옥(美玉)이 산악(山岳)으로 하여금 빛을 내게 하면은 물건(物件)이 아름다움을 내포(內包)한 것이 또한 돌만한 것이 없으니 내가 생각하기를 군의 성품(性稟)과 자질(資質)이 이미 아름답고 뜻을 세움이 또한 견고(堅固)하여 비록 온 세상에 파도가 일어도 꿋꿋하게 서서 요동하지 않는 것은 돌이 우뚝 솟은것과 같다. 이제 보건대 의관 정제함이 법도(法度)에 어김이 없으니 이는 돌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고 마음 씀이 담박(淡泊)하여 외물에 유혹(誘惑)되지 아니함은 돌이 욕심(慾心)이 없는 것과 같고 성세(聲勢)가 서로 같아 붕우(朋友)가 믿음을 따르는 것은 자석(磁石)이 침(鍼)을 당기는 것과 같다.
전인(前人)의 말을 들은바가 많아서 지난날의 업적과 마음속에 덕(德)을 쌓아 스스로 영화(英華)가 밖으로 나타난 것은 감추어졌던 옥이 스스로 빛나는 것과 같으니 주역(周易)에 큰 절개(節介)는 돌과 같고 시경(詩經) 소아(小雅)에서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옥과 같다고 하였으니 군(君)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이 두 아름다움을 서로 얻었으니 당(堂)의 이름이 아석(我石)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군(君)이 안색(顔色)이 달라지며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사람됨이 어리석어 깨달을 수 없는데 그대가 사물을 인용(引用)하여 잘 비유(比喩)하여 아름다움이 그치지 않으니 아석당(我石堂)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힘쓰겠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는 내 뜻을 도와 자주 덕음(德音)을 주옵소서」하였다.
내가 이에 몸을 가다듬고 대답하기를 「군이 선을 좋아하는 것은 내 들은 지 오래 되었다. 진실로 선(善)을 좋아 하면 우리 사림(士林)의 어진 스승과 유익(有益)한 벗을 짝하면서 착한 도리를 일러 주면 즐겁지 않겠는가? 아아! 나로서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나 이미 아석당(我石堂)이 서로를 갈고 닦는데 필요(必要)한 좋은 곳이라 하고 함께 돌아 왔노라.」
계미(癸未;1943)년 5월 초3일에 남평(南平)우인(友人) 문봉호(文鳳鎬)가 기록하다.

 

 

 

 

 

我石亭上樑文
翁樂者山林衡門 遂肥遯之志 我居然泉石亭榭 愜望臨之情 作亭者誰遇石則我 竊惟主人試觀此磊磊之氣 稟節 彼巖巖之資 先述 太史公家風 仰杜門采薇高節 久擅歐陽氏 鄕望想古宅 文藻精華睥睨一世 與造物逍遙 儼然山中宰相 呼吸二氣 求室人 彷佛宛爾地上神仙 第席上有儒珍之譽 而楣間揭我石之號 學時習亦悅 戒靡懈於如琢如磨 老將至不知寓微 意於益堅益壯 斯須身不可去樂 如聞夔擊八音之諧 存其心所以事天 常思媧鍊五色之補 蓋欲供考盤親堂之樂 迺有此子舍起亭之謀 錦里芋園之收 縱未貪於甘旨 養體靈壁蘭皐之作 竊有取於昭曠怡神 蹟步不可暫忘 起經綸於心上事功 豈容少緩 期突兀於眼前 遂占隟地爽塏之區 爰命料匠建築之役 運斤操鉨 各殫是斷是度之工 定礎竪楹式遵 苟完苟美之制 凉宜軒而燠宜室 適我願兮 雲爲籬而山爲屛 昭其儉也 屬當用申天休之歲 何幸 適丁日吉之辰 虹樑駕碧落之衢 星河動色翬甍割翠微之境 草木生輝山若接飮食超居不許三公之換 此地最勝 宴酣遊衍 奚啻二客之從 余苟欲望斯亭而命名 莫若因自號而志喜題 品列釼戟之狀 待之如賓 當拜 具袍笏之儀呼 以爲丈與爾 將適楚笑甯戚飯牛之歌 欣然庶遇仙慕初平叱羊之術 是所以坐而忘我 孰不曰孝哉 若人東皐嘯臨流詩興 無邊於四時花鳥 南極老恒河佛壽 願上於千歲蓮龜 寒山逗兮雲深 尙喜離家無遠 高峯廩兮露積 佇見比屋 可封聊倩一片之堪言 用陳六偉之善頌
兒郞偉抛樑東 一面金剛揷半空 獨立飄飄如羽化 蓬萊只在此山中
兒郞偉抛樑西 積石峯前曉色迷 無向高堂勤問寢 斑衣盥漱趁初鷄
兒郞偉抛樑南 巴陵水色碧於藍 洞庭煙月應如此 勝狀何須慕遠探
兒郞偉抛樑北 春峰秀出天然色 蒼岩下有丹砂泉 一歃令人躋壽域
兒郞偉抛樑上 仰看長空雲日朗 百世羹牆誠久祠 松杉氣肅增悽愴
兒郞偉抛樑下 花樹相逢棄柘野 情話琴書互往來 一室和氣酒盈斝
惟願上樑之後 洞府依舊 棟宇長新 白雲贈君 不堪已被 此心之留 住碧山問余何事 恐與俗耳之傳聞 樂未央於斯間 從所好 爰居爰處 戒丁寧於來後 須勿替肯構肯堂
歲甲申秀葽月上浣鶴田金誠鎭撰

 

아석정상량문(我石亭上樑文)
옹이 좋아하는 것이 산림(山林)에서 소박하게 사는 것이라 드디어 물러나 편히 살 뜻으로 유연히 물 맑은 개울 가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즐겨 바라보고 감상하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정자를 지은 사람으로 누가 바위(石)와 합치되어 곧 나(我)인가. 생각건대 주인은 아마도 저 바위의 높이 쌓인 것 같은 빼어난 절의를 보고 또 저 우뚝히 솟은 자질로 선대를 계승하는 마음을 본 것이리라. 태사공(太史公)의 가풍(家風)으로 두문동(杜門洞)에서 고려를 끝까지 섬긴 높은 절의를 앙모하니 오래도록 구양씨의 고을로 천거되어 바라보이는 고택이 되었다. 문장의 아름다움과 정화로 한 시대의 촉망을 받았고 자연과 더불어 소요하니 엄연히 산 중의 재상이었다. 음양의 기운을 호흡하여 부인을 구하였으니 완연하게 지상의 신선이었다. 항상 생활함에 유학(儒學)의 보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문설주 위에 아석(我石)이라는 당호를 걸고 배우고 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게으른 것을 경계하고 절차탁마하니 나이가 들어 늙어 갈수록 미약해지지 않고 더욱 강하고 견고하게 뜻을 세웠다. 스스로 그 즐거움을 버리지 않으니 마치 순임금 때 기(夔)가 8음을 완성한 음악을 들은 것과 같았다. 또한 그 마음을 항상 하늘을 섬기는 것에 두니 항상 여와씨가 오색의 돌을 다듬어 하늘을 보수하여 천지를 안정시킨 것을 생각하였다. 대개 선고를 받들고 어버이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려 한 것이니 이에 그 아들이 있어 이 정자를 지으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금리(錦里)의 우원(芋園)에서 거두어들인 것을 비록 단맛을 탐한 것은 아니지만 장씨가 영벽(靈壁)현에 난고정(蘭皐亭)을 짓고 부모를 봉양한 것을 체득한 것이다. 가만히 밝고 넓은 경지로 정신을 기쁘게 하는 이치를 취한 것이다. 그 행적을 잠시도 있을 수 없으니 마음에 윤리를 바르게 세우고 그 공적을 일삼으면 어찌 잠시라도 느슨함이 있겠는가. 눈앞에 바로 우뚝함을 기약할 것이다. 드디어 넓고 높다란 곳에 땅을 골라서 목수에게 건축할 일을 맞기고 도끼와 먹줄을 잡고 각기 그 정성을 다하며 자르고 헤아리는 공사를 행하였다. 기초를 정하고 기둥을 세우는 것이 기준에 맞고 진실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법제를 갖추었다. 마루는 시원하고 방은 따뜻하니 내가 원하는 바에 적합하다. 구름은 울타리가 되고 산은 병풍이 되니 그 검소함이 더 빛난다. 마땅히 하늘의 아름다운 때에 펼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마침 좋은 날 좋은 때에 무지게 같은 들보를 하늘 위로 돌리게 되니 별과 은하수가 그 빛을 더하니 용마루는 날개를 펼친 듯이 좌우로 푸른 산빛을 가르고 초목은 산의 빛을 발하며 만약 음식을 접하고 높이 앉으면 삼공(三公)과 바꾸는 것도 허락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이 최고의 명승지가 되니 연회하고 유람하면 어찌 다만 달과 그림자 이객(二客)이 자신을 따르는 풍류뿐이겠는가. 내 질실로 이 정자를 바라보고 이름 지으니 스스로의 호로 인한 것이 아니고 기뻐하는 뜻으로 이름지은 것이다. 그 품계의 차례가 칼날이나 창과 같이 삼엄하니 그를 대접할 때는 손님과 같이 맞이하여 절하고 홀기를 안고 의례를 갖추어 부르는 소리에 따라 어른이 되고 또한 젊은이가 된다. 장차 마침 영척(甯戚)이 소뿔을 두드리며 부른 노래에 적합하고 흔연히 신선을 만나 초평(初平)이 돌을 양으로 바꾼 술법을 사모하는 것이로다. 이것이 앉아서 나를 잊어버리는 까닭이다. 누가 효(孝)라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동고(東皐)에서 휘파람 불고 흐르는 물을 보고 시를 지으면 그 흥이 사계절 화조월석에 끝이 없을 것이다. 남극노성(南極老星)과 항하(恒河)와 불수(佛壽)처럼 원컨대 위로는 천년 연꽃이나 거북이 되리라. 한산(한산?)에 머물러 있음이여 구름이 깊어서로다. 집을 떠나도 멀지 않음을 기뻐하니 높은 봉우리의 늠름함이여 봉우리가 쌓여서 그러리라. 가만히 즐비한 지붕을 보고 애오라지 좋은 한마디 축원을 더하여 아랑위 6위의 송축을 펼치노라.
어랑차 들보 동으로 던져라. 금강산 하늘 한편에 솟아 홀로 표표히 신선이 된 듯 봉래산도 이 산에 있는 듯
어랑차 들보 서편으로 던져라. 적석산에 새벽빛 희미한데 고당에 가지않고 삼가 문안 올리러 가네 의관정제 관세 양수함이 첫닭 울음 때이라.
어랑차 들보 남으로 던져라. 파릉 물빛은 쪽보다 푸르니 동정호 맑은 달도 이러하리라 아름다운 형상 멀리서 사모하여 찾아간다네
어랑차 들보 북으로 던져라 춘봉(春峰) 우뚝히 천연스런 색인데 창암(蒼岩)아래 단사(丹砂) 샘 있네. 한번 마신 사람들 영원히 살리라.
어랑차 들보 위로 던져라. 창공을 보니 구름 햇살 청량한 곳에 영원한 제사 모시는 성구사있네 삼나무 숲 삼엄하듯 처창함 더하네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화수의 후손들 뽕밭 들판에서 만나. 정담을 나누고 노래하고 책읽으며 왕래하니, 한 가문의 화락한 기운 술이 잔에 가득하네
원컨대 이 들보 올린 후에 고을은 옛 그대로이고 집들은 새롭게 영원하며 흰구름이 그대에게 더해져 차마 그침이 없으면 이 마음이 그대로 머물러 푸른 산에 무슨 일로 사느냐고 묻게 하고 속인들의 말을 귀에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즐거움이 이 곳에서 그침이 없으며 좋아하는 것을 따르고 이곳에 거처하여 살도록 후손들에게 정녕 경계하며 이 건물과 이 아석당이 폐함이 없도록 하소서
갑신(甲申) 7월(秀葽月) 상완(上浣) 학전(鶴田) 김성진(金誠鎭) 짓다.

 

 

 

 


민병승(閔丙承)이 쓴 단운집 권지7(丹雲集 卷之七)에 실려 있는 아석정기(我石亭記)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我石亭記
嶺之右晉之東 固多形勝 而積石山 爲最著者 以我石卞翁之所廬也 翁之文行 爲鄕邦所稱 而嘗少日廣交域中多士及 其年暮世革遂息交絶遊若將終 身於松桂磵石之間 而其志益固其名益重山之下 有日巖里里之南有誠久祠 翁之先評理判書承旨三賢俎豆之所也 翁乃扁其所居之堂 日我石讀書 其中慕先烈之彌 先尋往哲之遺 緖不肯作山外一步 而懼夫勢利之昜 以溺人矢諸心常目于扁 翁之如石其介槪可想已 余甚偉之又聞其胤嗣光燮君 孝養其親善繼其志 爲築一亭於里上克廣厥緖移揭玆扁 翁之業亭之傳地 之名其將未艾於無窮也
甲子後八十年仲秋日 驪興 閔丙承 記

 

아석정기 我石亭記
조령의 서쪽 진주 동쪽에 진실로 명승지가 많다. 그 중 적석산(積石山)이 가장 뛰어나다. 그 아래 아석(我石) 변옹(卞翁)이 기거하는 집이다. 옹(翁)의 문행은 고을에서 칭송하는 바이다. 일찍이 젊었을 때는 널리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고 늙어서는 문득 교류를 모두 끊었다. 그리고 솔과 계수나무 숲, 시냇물과 돌들을 오가며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그 뜻은 더욱 공고하였고 그 명성은 더욱 추중(推重)되었다. 산 아래에 일암리(日巖里)가 있고 그 마을 남쪽에 성구사(誠久祠)가 있는데 공의 선대 평리(評理) 판서(判書) 승지(承旨) 3 현인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이로 인하여 공이 자신이 사는 집의 편액을 아석이라고 하고 이곳에서 책을 읽고 선열(先烈)의 아름다운 행적을 사모하고 옛 철인(哲人)이 남긴 행적을 찾으며 산 밖으로 한발도 나서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또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시류에 휩쓸려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항상 마음에 굳게 새긴 의미를 담은 그 편액을 항상 바라보았다. 마치 옹(翁)과 돌이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을 가히 상상할만 하다. 내가 그것을 매우 위대하게 여겼다. 또한 들으니 그의 장자인 광섭(光燮) 군이 그 부모를 효로써 봉양하고 그 뜻을 잘 계승하여 그 마을 옆에 정자 하나를 짓고 그 가르침의 실마리를 확대하고 아석(我石)이라는 편액을 옮겨 걸었으니 공의 유업(遺業) 정자에 전해지고 그 땅의 이름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갑자후(甲子後) 80년(八十年) 중추일(仲秋日)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 쓰다.

 

 

 

 

 

我石亭
思將爽塏悅親堂  장차 좋은 곳에 부모위한 정자 생각하며
劣構新亭積石陽  적석의 양지 바른 곳에 새로이 정자 세웠소.
經度費心爲日久  경영에 마음 허비한지 이미 오랜 세월
起居移氣願年長  새로 이사하니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구나.
憑軒每感瞻先廟  난간에 기대어 매양 느껴 선묘 배알했고
掃徑邀懽命客觴  길 쓸고 손님 맞아 술상 차리네.
杖屨盤旋情話穩  머물던 곳 돌아보니 정담이 편안하여
一門花樹四隣芳  한 문중의 화수가 사방 이웃까지 향기 나구나.
子 光燮 謹稿   아들 광섭 삼가 적다.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