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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일암리 초계변씨 사효재 思孝齋

천부인권 2019. 11. 4. 06:35



2019.10.30. 일암리 초계변씨 재실 사효재(思孝齋)


진전면 일암리 612-1번지는 초계변씨 재실인 사효재(思孝齋)가 있는 곳으로 대정리(大井里)에서 일암리(日岩里)로 가는 적석산길이 일암리에 당도하는 초입에 위치해 있다. 보통 일암리로 갈 때는 양촌리에서 일암1길을 이용하여 일암리로 들어가는데 그때는 삼진의거의 발상지라 말하는 성구사(誠久祠)를 거쳐서 가게 된다. 일암리를 방문한 이 날도 성구사(誠久祠)는 문이 잠겨있어 곧장 사효재(思孝齋)로 향했다. 마침 사효재(思孝齋)에는 11월의 묘제(墓祭)를 위해 청소를 하고 있는 사효재(思孝齋)를 관리하고 있는 분을 만나 인사를 하고 구경할 수 있었다.
사효재에는 주련은 없고 음식을 장만하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건물을 따로 두었는데 현판은 없다. 아래에는 상량문과 기문을 옮겨 둔다.




사효재의 대문에는 현판이 없다.



사효재 모습



사효재 관리사



사효재(思孝齋) 편액




思孝齋上樑文 [原文]
墳庵을 營築하니 方欽仰宗族之團合이요 堪興을 案圖하니 事見養子孫之得地라 我亀日止하니 斯翬如飛라 恭惟齋肅以享하고 環坐讘世라 兄弟叔姪前呼後應하야 以鍾以車로 鑿高塡陷하고 男女老少總動出員하야 以筐篚로 助力補工이라 位正面平에 可以堂可以宇라 匠氏技師가 自西自東으로 刀鋸繩墨으로 斷長斲突하야 方圓曲直이 各得其制라 向陽障風하니 豈非天藏之地며 左水右谷은 乃是自然之勢라 坐戌이 向辰하니 道山食峯이 如損如哉하고 左丑이 右未하니 積石金岡이 乃護乃衛라 歌於斯哭於斯는 衛氏之居室可法이요 抛樑東抛樑西하니 張老之善頌이 在玆라 亭爾都料斧하고 聴我郞之頌하라
我郞衛抛樑東하니 浮桑朝日이 至今紅이라 天開地闢萬千年에 海上日輪이 上這東이라
我郞衛抛樑西하니 桑楡山上에 夕陽低라 合目暗思千古史하나 西山千載에 隱夷齊라.
我郞衛抛樑南하니 藏兵芳草碧如藍이라 積石三峯이 來守執하니 長長餘氣鎭吾南이라.
我郞衛抛樑北하니 勝水巴陵이 來自北이라 問渠邦得朝宗海나 晝夜直工이 流不息이라.
我郞衛抛樑上하니 萬物之中에 人最上이라 飛飛䞚皆低下라 人有五倫其以上이라.
我郞衛抛樑下하니 上達元來皆自下라 勤勤不己事無難커늘 遊息其人이 終在下라 伏願上樑之後에 雨順風調하야 稻熟桼垂하야 勤於祭祀하고 兄友弟敬하야 於事於論에 式相好矣요 母相猶矣라
己巳年十月十五日二十九世孫笑山吉燮著
昊澹 金尙洙書





사효재상량문(思孝齋上樑文) [해문]
이 묘 지키는 집을 지으니 이는 우리 피붙이의 단합(團合)을 흠앙(欽仰)함이며 명당(明堂)을 그려내니 이는 자손의 길지(吉地)을 얻고자 함이더라. 점쳐 집터 정하였으니 추녀는 날아가는 꿩처럼 색깔 곱구나. 공송하고 엄숙히 제향(祭享)모시고 일족들이 둘러 앉아 집안 이야기 나누는도다. 형제와 숙질(叔姪) 모두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응답하여 삽과 수레로 높은 곳 깎아내고 낮은 곳 메우며 남녀노소가 모두들 울역하여 대광주리 들고서 힘을 합하였네. 방향은 바르고 땅은 고르니 당(堂)이라 우(宇)라 부를 만 하도다. 목수와 일꾼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칼과 톱과 자로 긴 것은 잘라내고 솟은 것은 골라서 모든 규격이 제도에 맞게 되었다네.
양지쪽 향하여 바람을 막아주니 그 어찌 하늘이 이 감추어둔 길지(吉地)가 아닐 것인가. 왼쪽에는 강물이요 오른쪽은 계곡이 있나니 이는 바로 자연의 형세라 술방(戌方)에 자리 잡아 진방(辰方)을 향하였으니 좌우의 산봉우리가 공손히 절하는 듯 좌측은 축방(丑方)이며 우측은 미방(未方)이니 적석봉과 금강봉이 에워싸 호위하는 듯 하여라.
여기에서 노래하고 여기에서 곡함은 위씨(衛氏)의 집을 본받음이요 대들보 올리며 상량(上樑) 노래 부르니 장노(張老)의 좋은 노래 여기에 있음이라 이제 잠시 연장질 멈추고 상량 노래 들어라
어기영차 대들보 동쪽을 바라보니 동쪽 바다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는 도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되고 천만년이 지난 뒤 바다위에 둥근 해 동편에서 오르네.
어기영차 대들보 서쪽을 바라보니 서쪽 땅 산위에 석양이 저물어도 눈감고 곰곰이 옛일 헤어보니 천년전 서산에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은거했네.
어기영차 대들보 남쪽을 바라보니 남쪽 산 향기로운 초목들 푸르기가 쪽빛이라 적석산(積石山) 세 봉우리가 외호(外護)하니 오랜 그 남은 기운 남방을 지켜주네.
어기영차 대들보 북쪽을 바라보니 파릉(巴陵)의 좋은 산수(山水) 북으로부터 흘러온다. 묻노리 흘러가 돌아갈 바다 어디메뇨. 밤낮으로 곧게 흘러 쉬지 않는다네.
어기영차 대들보 위를 바라보니 세상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높도다. 날짐승 길짐승 모두가 그 아랫니 사람에겐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라네.
어기영차 대들보 아래를 바라보니 위로 올라가는 것 원래가 모두 밑으로부터 오르는 것이라 쉬지 않고 힘쓰면 어려운 것이 없거늘 놀기만 하는 사람은 늘 아래 있을 것이로세.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들보 올린 뒤에는 우순풍조(雨順風調)하여서 모든 곡식 잘 여물어 조상제사 힘쓰고 형제는 우애하여 일과 의논에 서로 화기 넘치고 다툼 없게 하소서.
기사년(己巳年) 10월 15일 29세손 소산(笑山) 길섭(吉燮) 지음
호담(昊澹) 김상수(金尙洙) 글씨를 쓰다.





思孝齋記 [原文]
晋東七拾里 有鞠秀峯 羅烈峯可謂東南雄鎭也 峯之北有亭山 向陽障風 人家自成一部落曰日岩村之 左有一齋舍乃 是思孝齋也 則吾十世祖通政公諱崤 高麗侍中八溪郡諱庭實之裔孫 尙公諱延壽之子也 當穆陵龍蛇之難 父君創義出戰 公豈無出戰之意 父命之曰汝守家保眷 公龜勉從之內保家 眷外探戰地連落 丁酉之年 忽聞父君之戰沒 即赴戰地牧劒遺体內而皈葬 子大松田丑坐之原 自是以后未靈君父之恥至 通折心不出山外一步 忍痛含寃而終匹入 北後東山谷子坐之原 而子孫徵弱歷四百年之久 末有墳庵一間子孫之通 無極庚申之冬 末多子孫合席慕議 機良村所在假齋合 而添財添間成四間一棟設 祭堂二間子中 東西各一房 僅成樣子 而己每歲十月之中 篤歲一祭子此禮 雖未擧義 則還新惟願 吾子孫鑑前徵後 憑左戒右入室 如仰祖先出門 如見大賓一步羊踐無妄忽易 孟子曰鷄鳴起孶孶爲善者 舜之徒也 今吾子孫皆舜徒何忠之 有百歲千秋思孝不匱庶幾 斯齋永存 而先靈安意歆享矣 不亦善呼勉勵勉勵
己巳十月日昊澹書





사효재기(思孝齋記) [해문]
진주로부터 동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국수봉(鞠秀峯)이 있는데 쭉 늘어선 산봉우리들이 가히 동남방의 웅진(雄鎭)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봉우리 북쪽에는 정산(亭山)이 있으며 그 남쪽은 병풍처럼 둘러 인가들이 한 마을(部落)¹⁾을 이루었으니 가로되 일암촌(日岩村)이라고 한다. 그 왼쪽에 한 재사(一齋舍)가 있으니 이곳이 바로 사효재(思孝齋)이다. 나의 10세조 통정공(通政公)의 휘는 효(崤)로서 고려시중을 지내셨던 팔계군 휘 정실(庭實)의 원손이시며 상공(尙公) 휘 연수(延壽)의 아들이시다. 선조대왕 때 인진왜란을 당함에 아버지 되시는 연수공(延壽公)이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가시니 아들 되시는 통정공께서 어찌 따라 나갈 마음이 없었으랴. 그러나 아버지께서 명령하시기를 너는 집안을 지키고 가권을 보하라고 하니 공께서는 힘써 그 말씀을 좇아 안으로는 가권을 보호하고 밖으로는 싸움터를 탐지하여 연락하시었다. 정유재란 때에 아버지의 전몰 소식을 홀연히 전해 듣고 즉시 전장 터에 나아가 유체(遺体)를 수습하여 돌아와 대송전축좌(大松田丑坐)향에 장례지내였다. 이때부터 공께서는 아버지의 원혼을 설치하지 못함을 통분히 여기시어 산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가시지 아니하고 인통원함(忍痛含寃) 하여 세상을 하직하시니 동산의 자좌에 장사지내였다. 그러나 자손이 미약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분묘 한 칸을 마련치 못하여 자손들의 애통함은 다함이 없었던 것이다.
경신년(庚申年) 겨울에 몇몇 자손들이 합심하여 의논하기를 양촌(良村)에 자리한 가제사를 수리하자 하였으니 이에 재물을 보아 네 칸 한동의 건물을 이루어 가운데에 제당(祭堂) 두 칸을 짓고 동과 서에 각방 하나씩을 지어 겨우 엉성하게나마 모양이 이루어 졌다. 그리하여 매해 10월 중에 여기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는바 예는 비록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의논 다시 새로워졌으니 오직 바라건대 앞으로 우리 자손들이 항시 이 뜻을 거울삼아 제실에 들 때는 마치 선조를 눈으로 뵙는 듯이 하고 제실문을 나설 때에는 마치 큰 손님을 보듯이 하여 행동 하나에도 망령되고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첫 닭이 울면 일어나 열심히 선을 행하는 자는 바로 순임금의 무리이다.」 라고 하셨는데 지금 우리의 자손들이 모두 순임금의 무리라면 무슨 걱정이 있으리요. 백세천추토록 사효(思孝)가 다함이 없어 거의 이 재실이 영구히 보존되고 선영께서 편안히 흠향(歆享)하시게 된다면 또한 그것이 선행이 아니겠는가. 후손들이여 힘쓰고 또 힘쓸지어다.
기사년(己巳年) 10월 일 호담(昊澹) 쓰다.


【주석】
한 마을(部落)¹⁾ : 부락(部落)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 때 왜구가 정리한 용어로 장애가 있거나 지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둔 곳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왜구가 우리민족을 폄훼하여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 표현한 의미이므로 우리 언어로 순화하여 마을이라 표현했다.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