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임곡리 진목마을 창원황씨 초은정 樵隱亭

천부인권 2019. 11. 6. 06:16

 

 

2019.10.30. 국도에서 바라 본 회산황씨 초은정

 

진전면 임곡리 310번지는 창원황씨의 재실인 초은정(樵隱亭)이 있는 곳이다. 초은정은 진목IC를 내려와 옛 국도 2호선으로 나오면 우측 임곡리 진목마을 입구 동쪽 끝에 있다. 솟을삼문 형태의 대문에는 이화문(二和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재실(齋室)에는 초은정(樵隱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옛 건물은 6.25사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했으나 노후화되었고 1981년 11월 증축했으나 붕괴될 처지라 지금의 초은정이 건축되었다. 시멘트건축물이지만 전통 한옥의 형식으로 지었고 상량에는 경인 2010년(庚寅 二千十年)이라 적었으며 팔작지붕 와가이다.
내부에는 권재규(權載奎)가 쓴 초은정기(樵隱亭記)를 비롯하여 초은공세계급유사(樵隱公世系及遺事),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이 남긴 초은정중수기(樵隱亭重修記), 이강선(李康揎)이 찬한 초은정상량문(樵隱亭上樑文) 뿐만 아니라 초은정중수운(樵隱亭重修韻)을 비롯하여 6개의 차운시판(次韻詩板)이 곱게 걸려 있다.
초은정의 연혁에 관해서는 기문과 유사의 내용을 읽어 보면 그 대략을 알게 된다. 아래에 주련을 비롯하여 그 내용을 남긴다.

 

 

 

이화문(二和門) 모습

 

 

이화문(二和門) 편액

 

 

대문에서 본 초은정(樵隱亭) 모습

 

 

초은정(樵隱亭) 모습

 

 

초은정(樵隱亭) 편액

 

 

 

樵隱亭 주련 [해문]-번역원
牛山桑拓風煙淨 牛山에 가득한 뽕나무는 풍광이 깨끗한데
玉洞楸杉歲月深 玉洞의 楸나무 杉나무에는 세월이 깊어라
源遠流長先祖蔭 아득히 멀리 전해 내려온 선조의 음덕이여
霜悽雨怵后孫心 서리에 슬프고 비에 슬픈 것은 후손의 마음일세.
夕迎東溟新月 저녁엔 동쪽 바다의 새달을 맞이하고
朝挹西峀淸風 아침엔 서쪽 봉우리의 청풍을 끌어오네.
架詩書庭花木 시렁에는 詩書 있고 뜰에는 꽃과 나무 있네.

 

*牛山 : 樵隱亭이 있는 곳의 산이름인 듯.
*玉洞 : 樵隱亭이 있는 곳의 골짝 이름인 듯.
*霜悽雨怵 :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렸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슬픈 마음이 일어나니,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봄에 우로가 내려 적셨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어버이를 다시 뵈올 듯이 한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하였다.

 

 

 

 

 

樵隱亭記 [原文]
日吾宗鶴煕氏與黃君致鍾造 余于仁谷山中而曰 黃君爲其先祖樵隱公築一亭而介 余欲得吾子文以記之幸 不孤余辭以老廢文墨 則曰吾於黃氏有難忘之誼 不得此請 無以謝黃氏固懇不已 余乃按公遺事之載 其譜牒者公昌原人諱後命 高麗侍中忠俊之後 自麗及我簪組不絶 公生而賦性淸雅淡泊 弱冠遭壬燹 避寓昌原之匡山甘泉洞 耕樵爲業亂已 而亦無當世意築數間精舍 經籍自娛 敎育鄕里子弟 多有成就云 余謂人於先父祖大率日遠則 日忘今黃氏於樵隱公 爲十世之遠祖 而猶能不忘置亭而寓慕可謂孝矣 然旣置亭而寓慕則 須求其平日志事 而勉勉繼述欲 其不墜是爲盡孝之道也 公以耕樵經籍爲一生志事蓋人也 非耕樵則無以資 其生非經籍則 無以明其心資 其生而明其心然後可 以立世可以處事 而無愧乎人之名矣 世或有不事耕樵 而經營乎 分外之利 不務經籍 而浸淫乎非聖之書者鮮有不喪 其身心焉然則 公之所志事者雖曰拙約 而隨分得正足 以爲垂統於子孫矣 惟黃氏無徒以置亭而寓慕必求 其志事之實 勉勉繼述而不墜焉 則不惟盡孝之道 其將爲興衰振微之基本也 歟是 爲記
邵陽協洽之秀葽月 安東權載奎記

 

초은정기(樵隱亭記)[해문]
하루는 나의 종친(宗親)인 학희씨(鶴煕氏)가 황군치종(黃君致鍾)과 함께 인곡산중(仁谷山中)의 나를 찾아와서 「황군(黃君)이 그 선조 초은공(樵隱公)을 위하여 정자(亭子) 한 채를 짓고 나를 통하여 그대의 기문(記文)을 얻기를 바라니 져버리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내가 늙어서 문묵(文墨)을 폐하여 사양(辭讓)하였더니 「나와 황씨(黃氏)는 잊기 어려운 의(誼)가 있어서 이 청(請)을 거절할 수 없으니 사절()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황씨의 간청(懇請)이 끊어지지 않아 내가 공의 유사(遺事)에 실린 것과 보첩(譜牒)을 살펴보니 공은 관향(貫鄕)이 창원이고 휘는 후명(後命)이다. 고려시중 충준(忠俊)의 후예로 고려부터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공은 천성(天性)이 청아(淸雅)하고 담백(淡白)하였으나 약관(弱冠)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창원(昌原)의 광산(匡山) 감천동(甘泉洞)으로 피난(避難)와서 밭 갈고 나무하는 것을 업(業)으로 하다가 난(亂)이 평정된 후에도 세상사에 뜻이 없어서 수간(數間)의 정사(精舍)를 지어놓고 경적(經籍)을 스스로 즐겨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들을 교육시켜 성취(成就)한 사람이 많았다.
내가 말하기를 「사람은 선부조(先父祖)가 대개 시대가 멀어지면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데 지금 황씨(黃氏)는 초은공(樵隱公)이 십세(十世)의 원조(遠祖)가 되는데 오히려 잊지 않고 정자(亭子)를 지어 사모(思慕)하는 정을 붙이니 효자(孝子)라고 이를 만 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정자(亭子)를 지어 사모(思慕)하는 정을 붙이 면은 모름지기 그 평일(平日)에 뜻하였던 일을 찾아서 부지런히 선대(先代)의 업적(業蹟)을 이어서 펴고 또 그 업적(業蹟)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효를 다하는 도리(道理)일 것이다.
공은 밭 갈고 나무하며 책보는 것이 한 평생의 사업(事業)이니 사람은 밭 갈고 나무하지 않으면 생계(生計)를 유지(維持)할 수 없고 책을 읽어 공부하지 않으면서 분수(分數) 밖의 영리(營利)를 경영(經營)하고 경서(經書)와 전적(典籍)에 힘쓰지 않으면 성현(聖賢)의 글이 아닌데 차츰차츰 배어 들어가는 사람은 그 몸과 마음을 망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니 공(公)의 지사(志事)가 비록 졸열(拙劣)하고 간약(簡約)하여도 분수(分數)를 따라 정도(正道)를 얻어 자손(子孫)에게 계승(繼承)할 사업을 시작(始作)하는데 충분(充分)하였다. 황씨(黃氏)는 한갓 헛되게 정자를 짓는데 힘 쓰지 말고 사모(思慕)하는 정을 붙여 반드시 그 선조가 마음 먹었던 일의 실상(實相)을 구(求)하는데 힘 써니 선대(先代)의 업적(業蹟)을 이어서 펴고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않으며 효성(孝誠)을 다할 뿐만 아니라 장차(將次)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이름을 떨치느냐 떨치지 못하느냐의 기본이 될 것이다. 이로서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계미년(癸未年;1943) 4월에 안동 권재규(權載奎)는 기록한다.

 

 

 

 

 

樵隱公世系及遺事(초은공세계급유사)
공(公)의 휘(諱)는 후명(後命)이요 자(字)는 경수(敬叟)이며 초은(樵隱)은 자호(自號)요 성(姓)은 창원황씨(昌原黃氏)이시다. 시조(始祖)는 고려시중(高麗侍中)이며 광록대부찬성사휘충준(光祿大夫贊成事諱忠俊)이요 삼전지휘신(三伝至諱信)은 보계(譜系)에 일세(一世)로 기두(起頭)되었으며 여이(麗李)에 정의대부공부상서(正義大夫工部尙書) 및 정토장군(征討將軍)이시니 강원도(江原道) 철원군(鉃原郡) 동송면(東松面) 오덕리(五德里) 봉학동(鳳鶴洞)에 유구묘재사(有丘墓齋舍)하니라 이세거정(二世居正)은 이조개국공신(李朝開國功臣)이요 가정대부형조판서(嘉靖大夫刑曹判書)며 의원군(義原君)을 수봉(受封)하시니 즉공(即公)의 십대조(十代祖)가 되시니라. 증조휘위(曾祖諱瑋)는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요 조휘처중(祖諱處中)은 호(號)가 거산(巨山)이요 증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贈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이며 시(諡)는 문충(文忠)이요 고휘협(考諱浹)의 호(號)는 유암(有菴)이니 광해주정난시(光海主政乱時)에 독처산림(独處山林)하여 은거면학(隱居勉學)하시고 불출사(不出仕)하시다.
묘소(墓所)는 충북청원군강서면용정리선고거산공묘하(忠北淸原郡江西面竜井里先考巨山公墓下)에 안안(安眼)하시니라. 공(公)은 서기일육이삼년(西紀一六二三年) 광해오년이월십구일(光海五年二月十九日) 충북청원(忠北淸原)에서 출생(出生)하셨고 인조십사년일육삼육년(仁祖十四年一六三六年) 병자호란(丙子胡乱)을 만나 금의창군내서면옥수동(今義昌君內西面玉水洞)으로 피우정착(避寓定着)하시니 즉아중시조(即我中始祖)이시다. 공은 천품(天品)이 관후(寬厚)하시고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신 도학문장(道學文章)이라 당세(當世)에 국내(國內) 많은 석덕홍유(碩德弘儒)로 더불어 종유(從遊)하셨고 또한 삼남재사(三南才士)를 모아 교육에 여념(餘念)이 없는지라 기후공(其後公)의 증손휘한적(曾孫諱漢迪)이 진전면진목동(鎭田面眞木洞)에 이거(移居)하셨는데 점차자손번창(漸次子孫繁昌)하고 문호(門戶)가 대발(大発)하므로 보본(報本)을 위주(爲主)로 이곳 후산하(後山下)에다 일구사이년(一九四二年) 재사(齋舍)를 찬건(創建)하였으나 경인일구오십년(庚寅一九五〇年) 재화(哉火)로 본정(本亭)은 대파(大破)되고 랑사삼간(廊舍三間)과 관리사이동(管理使二棟)은 소실(燒失)되었다. 일구육십년(一九六〇年) 이곳에다 본정(本亭)을 보수이건(補修移建)하였던바 광음(光陰)이 여류(如流)하여 어언이십여성상(於焉二十餘星霜)을 경과(經過)함에 중수(重修)의 손길이 늦은지라 일구육구년십월종회시(一九六九年十月宗會時)에 중수결의(重修決議)가 되어 본정중수(本亭重修)는 물론랑사삼간(勿論廊舍三間)도 증축(增築)하여 오늘에 준공(竣工)케 되었으니 다같이 흔연(欣然)한 마음 한량(限量)없는지라 자(玆)에 모든 혈손(血孫)은 존조경종(尊祖敬宗)의 대지(大旨)로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길이 후대(後代)에 파급(波及)할 지어다.
辛酉一九六一年十一月(1961년 11월)
중수추진위원회(重修推進委員會) 근직(謹識)

 

 

 

 

樵隱亭重修記
古昌原鎭田玉女峰下眞木里 有穹然五楹之奐翬者 即黃氏丙舍 而慕厥祖樵隱公諱後命肯構也 歲久頹圮且經庚寅兵燹幾不支 後孫鳩謀重修仍建門庫三間 制頗宏緻 於是門老遣致薰道其事而請記于余 按黃氏 以高麗侍中忠俊之肖裔 內而舘閣侍從之臣 外而州郡守牧之官 前後相望亦可謂簪組閥閱之族也 公承襲文蔭富有蘊蓄 而弱冠遭龍蛇之亂 流離于嶺之檜山甘泉洞 晦影山林 泊然無當世意築數間 莬裘散迪髦俊多有成就 噫公目擊寰宇腥羶 南徙千里 甘自枯馘于草澤間 盖其有傷於世道之變 時潮之盪 而欲以漁樵耕讀 保裕子孫計歟 夫旣如是則其子孫之世 守儒素不謀榮塗者 亦其勢然也 第其虔護桑梓 安分書農而孝悌惇行爲一方華族者 亦已十世矣 則視世之爭趍名利 役役于風埃之途 喪厥天彛荒墜先懿者 賢愚得失果何如也 公以卜基之祖養德林川貽厥孫謨者 足以垂統於後裔則爲子孫者 可不思追遠報本之道乎 其亦可以益殫厥誠 以體先志 報祀彌虔 無忝先靈而已 昔甄氏築思亭 以篤慕先德爲千古美譚 今黃氏於此作鑑戒則有以知所用心之方矣 聞是亭也 群巒拱護 如芙蓉之獻 媚風灣浩濶 如洞庭之淸曠 可占一方之勝 而足以供碩人眺望之趣矣 余將膏秣訪賢主於是亭 挹山川泓崢之氣 追論嘉遯之義 守成之方 尙未晩也 姑先此以記之
辛酉立夏節完山李雨燮撰
傍外孫完山李完燮謹書

 

초은정중수기(樵隱亭重修記)
옛 창원(昌原) 진전(鎭田)의 옥녀봉(玉女峰) 아래 진목리(眞木里)에 우뚝한 다섯기둥 4칸의 집이 훤칠한데 이 집은 황씨들의 재실로 그 선조 초은공(樵隱公)을 사모하여 후손들이 지은 집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담장이 무너지고 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병화에 거의 지탱하지 못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의논을 모아 중건하기로 하고 이에 문과 창고 등 세 칸을 세우니 그 규모가 자못 크고 아름다웠다. 이에 집안 노인들이 치훈(致薰)을 나에게 보내어 그 일을 말하고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살펴보니 황씨는 고려 시중(高麗侍中) 충준(忠俊)의 후손들이다. 조정 안으로는 문장이 뛰어난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있고 밖으로는 고을의 수령이나 목사의 관직을 맡았으니 선대와 후대가 서로 이어지니 가히 관직을 이은 벌열(閥閱) 가문이라 할 것이다. 공은 문장을 세습하고 부(富)를 물려받아 온축함이 있었는데 약관에 임진왜란을 만나 영남의 회산(檜山) 감천동(甘泉洞)으로 흘러들어와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추고 머물러 당시 세상에 뜻이 없었다. 노나라 토구(菟裘)와 같은 이곳에 몇 칸의 집을 지어 뛰어난 재능으로 나아가니 성취한 것이 많았다. 아! 공은 온 세상이 비린내와 누린내로 덮히는 것을 보고 남쪽으로 천리를 내려와 숲이 우거진 시골에서 스스로 메마르게 함을 달게 여긴 것은 대개 세상의 도덕과 시류의 흐름이 방탕함을 상심한 까닭이다. 이것이 고기잡고 나무하며 주경야독하여 자손들을 넉넉하게 보존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무릇 이미 이와 같으니 그 자손의 세대에 유교를 지키고 벼슬을 꾀하지 않았던 것은 그 또한 시대의 대세를 따른 것이다. 이에 그 고향을 정성으로 지키고 책 읽기와 농사일에 분수를 다하며 편히 여기니 효도와 공경 돈독한 행실로 한 고을의 뛰어난 가문이 된 것이 이미 10세대가 되었다. 세상이 명리를 다투며 쫒으며 세상의 풍파에 온 힘을 다하여 매달리는 것을 보고 하늘의 떳떳한 도가 황폐해지고 선대의 아름다운 의로움이 무너지는 것을 상심하였으니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은 처음 터를 닦은 입향조로써 농촌에서 덕을 기르고 후손들을 넉넉히 할 계획을 세운 것은 먼 조상을 미루어 추모하고 그 근본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또한 더욱 정성을 다하여 선조의 뜻을 체화(體化)하고 보본하고 제사를 드리는 일에 더욱 정성을 쏟아 선대의 영령을 더럽힘이 없을 뿐이다. 옛날 겸씨(甄氏)가 사정(思亭)을 지어 그 선대의 덕을 돈독히 사모한 것은 천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지금 황씨가 이곳에 감계(鑑戒)할 일을 하였으니 그 마음씀의 방편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자에 대하여 들어보니 여러 봉우리가 옹위하여 마치 연꽃이 봉오리진 듯하고 아름다운 바람이 해안의 넓은 호수에 불어오니 동정호에 맑은 기운이 비치는 듯하니 가히 한 고을의 명승지가 될 것이며 족히 큰 학자들이 우러러 바라보는 정취가 될 것이다. 내가 장차 수레에 기름칠하고 말에게 꼴을 먹여 길을 나서 이 정자에서 어진 주인을 만나서 산천이 깊고 우뚝한 기운에 읍하고 아름다운 은둔의 의리와 스스로를 지켜 가업을 이룬 방편을 논하면 오히려 그리 늦지도 않을 것이다. 우선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신유(辛酉) 입하절(立夏節) 완산(完山) 이우섭(李雨燮) 짓다.
방외손(傍外孫) 완산(完山) 이완섭(李完燮) 삼가 쓰다

 

 

 

 

 

 

 

 

 


樵隱亭幽是賦 초은정의 그윽한 문채
玉女峯 精氣 받고
鎭海灣 감싼 이곳
眞木洞 花樹村에
樵隱亭 우뚝 섰네.
風而露 모라쳐도
累世代 保全하리.
十世孫 致薰謹識(10세손 치훈 삼가 적음)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