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창선도 적량진성, 적량굴항의 흔적과 첨사 김정필 불망비

천부인권 2019. 11. 11. 09:07



2019.11.10창선도 국사봉자락에서 바라 본 적량마을 풍경


모처럼 기술봉사단의 봉사활동 장소인 남해 창선도 적량마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더니 뜻하지 않게 적량진성을 만나게 됐다. 대략의 활동 모습을 촬영하고 적량진성을 따라 마을 구경을 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적량진성과 적량굴항의 모습이 많이 훼손 됐지만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적량진성의 외곽 성벽을 따라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니 옛 진영으로서의 진성의 모습을 상상할 정도는 남아있다. 원거리에서 진성의 모습을 담아볼 요량으로 국사봉 중턱과 마을 앞으로 길게 벋어있는 등대로 가서 마을 풍경을 남겼다. 등대에서 만난 낚시를 하는 부부는 작은 문어 1마리와 갑오징어 2마리를 낚아 놓았다. 선착장 앞 바다를 매립한 공원에는 1889년에 군졸과 주민이 세운 절충장군행첨사김후정필선정불망비(折衝將軍行僉使金侯廷泌善政不忘碑)가 있어 적량진성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충무공 전서에 의하면 적량만호 권전(權銓)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아장(亞將)으로 선조 31년(1589) 11월 19일 임진왜란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9.11.10창선도 적량마을 등대에서 바라 본 적량마을 모습


「조선수군 주둔지 척량성(朝鮮水軍 駐屯地 赤梁城)」이라는 제목 하에 새긴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해 두었다.
적량성(赤梁城)은 세종 2년(1420)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량진(赤梁鎭)은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으로 때로는 무관계(武官系)의 최고 품계인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이 첨사(僉使)로 부임하기도 했던 대단히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다. 또한 많은 고지도에서도 미조항진성(彌助項鎭城), 평산진성(平山鎭城)과 더불어 남해를 방어하는 대표적인 성곽(城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도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진주목읍지(晉州牧邑誌)에 진주 남쪽 1백 10리 적량면의 석성으로 둘레가 1,182척(尺)(553m), 너비가 405척, 길이가 407척, 전선1척(戰船1隻), 병선1척(兵船1隻), 사후선2척(伺候船2隻), 감관(監官)1명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原文] 鎭堡赤梁鎭
在州南一百十里 赤梁面石城 周回一千一百八十二尺 廣四百五尺 長四百七尺 戰船一隻 兵船一隻 伺候船二隻 監官一人』
그리고 노젓는 병사 145명, 사수 28명, 화포수 10명, 포수 34명 등 217명이 주둔했으며 율포방군(栗浦防軍) 1,452명, 당포방군(唐浦防軍) 548명, 사량방군(蛇梁防軍) 360명, 가배량방군(加背梁防軍) 544명이 있다고 했으니 그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다.
『[原文]
赤梁鎮戰船能櫓軍一百四十五名 射夫二十八名 火砲手十名 砲手三十四名 栗浦防軍一千四百五十二名 唐浦防軍五百四十八名 蛇梁防軍三百六十名 加背梁防軍五百四十四名』


특히 창선면 진동리 1071-1번지 남문 옆에 전선을 감추어 둔 적량굴항(赤梁掘港)이 있었지만 지금은 농토로 개간되어 사라지고 석축의 흔적만 남아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국사봉(國祀峰)이 우뚝 솟은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쪽에 3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10여채의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적량진도()에 그려져 있다. 현재 성곽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지만 상당한 부분의 석축이 민가의 담장이나 논밭의 경계로 남아 있어 후일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창선도 적량진성 외곽 채성 풍경



또 다른 풍경의 적량진성 모습



적량진성 성곽 위에서 본 모습



동문지 모습



적량굴항의 흔적



조선수군 주둔지 척량성(朝鮮水軍 駐屯地 赤梁城) 안내 비와 절충장군행첨사김후정필선정불망비(折衝將軍行僉使金侯廷泌善政不忘碑) 모습




折衝將軍行僉使金侯廷泌善政不忘碑
절충장군행첨사김후정필선정불망비
來何其暮 오신 것이 어찌 그리 늦었나.
蘇我民斯 우리 주민들이 소생했으니
隨公補弊 폐단을 고쳐서 공평하게 하니 따르고
益賑恤飢 굶주림을 불쌍히 여겨 구휼을 도왔네.
柴木自備 땔감을 몸소 마련해 주시고
廩金惠貽 녹미와 금전으로 은혜를 베푸셨다.
千秋遺德 천추에 남기신 큰 덕은
山水共之 자연도 이를 함께 누렸네.
光緖十五年己丑六月 광서 15년(1889) 기축년 6월
軍民立 군졸과 주민이 세우다.
監役 金文洪 감역 김문홍
首民 朴斗洽 주민대표 박두흡



1872년 지도-적량진도



적량진도 명문 확대


1872년지방도에 기록된 적량진도(赤梁鎭圖)의 내용에는 아래와 같다.
陸路
自鎭東距大芳津三十里 진에서 동쪽으로 거리는 대방진이 30리이다.
    西距只簇津二十里              서쪽으로 거리는 지족진이 20리이다.
    西距昌善牧十里                 서쪽으로 거리는 창선목이 10리이다.
水路
自鎭東距蛇梁鎭五十里 진에서 동쪽으로 거리는 사량진이 50리이다.
    西距彌勒項鎭八十里           서쪽으로 거리는 미륵항진이 80리이다.
    東距晋州船所十五里           동쪽으로 거리는 진주선소가 15리이다.
    北距露梁五十里                  북쪽으로 거리는 노량에서 50리이다.
    東距泗川場基十七里           동쪽으로 거리는 사천장기가 17리이다.
    西南距欲智島一百五十里     서남쪽으로 거리는 욕지도가 150리이다.
    西南距柒里島一百里           서남쪽으로 거리는 칠리도가 100리이다.
鎭下三洞一百二十戶               진의 아래 3마을은 110호가 있다.




1872년지도 적량진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