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북면 내곡 현천마을 김해김씨 덕양재 德陽齋

천부인권 2019. 11. 23. 09:17



2019.2.1. 북면 김해김씨 유인사와 덕양재 모습


의창구 북면 내곡리 559번지에는 김해김씨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의 현손인 행와(杏窩) 김석우(金碩佑)공을 모신 사우(祠宇) 유인사(由仁祠)와 재실(齋室)로 사용하는 덕양재(德陽齋)가 있다.
유인사(由仁祠)의 대문에는 숭의문(崇義門)이라 현판 했고 덕양재(德陽齋)의 솟을삼문의 현판은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사우인 유인사(由仁祠)는 동쪽에 있고 재실인 덕양재(德陽齋)는 서쪽에 있는 다소 특이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덕양재(德陽齋)에는 주련과 덕양재기(德陽齋記), 덕양재상량문(德陽齋上樑文) 차운시(次韻詩) 등 다수의 편액이 걸려 있다. 아래에는 안종두(安鍾斗) 기록한 덕양재기(德陽齋記)와 9세손 김진곤(金震坤)이 적은 덕양재상량문(德陽齋上樑文) 등의 원문과 해문을 적어 둔다.




2019.2.1 북면 내곡 현천마을 김해김씨 숭의문(崇義門)



숭의문(崇義門) 현판



사우(祠宇) 유인사(由仁祠)



유인사(由仁祠) 현판



재실(齋室) 덕양재(德陽齋)



덕양재(德陽齋) 현판



덕양재(德陽齋) 주련



德陽齋 柱聯-전문
精靈如在蘋藻虔薦 정령(精靈)이 계시는 듯하니 제수를 경건히 올리고
정령여재빈조건천
苗裔漸繁花樹自成 후손들 점점 번성하니 화수(花樹)¹⁾가 절로 이루어지네
묘예점번화수자성
入孝出恭弟子之職 입효출공(入孝出恭)²⁾은 弟子들의 직분이요
입효출공제자지직
左旋右抽賓主所行 좌선우추(左旋右抽)³⁾는 손님과 주인이 행할 바이네
좌선우추빈주소행
源桃含笑喜傳春信 도원의 복숭아꽃 웃음 머금어 봄소식을 전하니
원도함소희전춘신
園竹衝寒恐受秋刑 동산의 대나무 추위에도 솟으니 가을에 형벌을 받을까 두렵구나.
원죽충한공수추형


【주석】
화수(花樹)¹⁾ : 친족끼리의 모임을 뜻한다.
입효출공(入孝出恭)²⁾ :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함.
좌선우추(左旋右抽)³⁾ : 《시경》 〈청인(淸人)〉의 “왼쪽 사람은 수레를 돌리고 오른쪽 사람은 칼을 뽑으며, 중군의 장수는 그 모습 의젓하도다.〔左旋右抽 中軍作戶〕”에서 나온 것이다. 抽는 원본에 ‘扌+号’라고 적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다.






德陽齋記
文昌郡之治北十里 餘有所謂德溪里 者峯巒拱揖環抱洞 壑窃廓幽靚可隱者之盤旋 故杏窩金公諱碩佑之所居也 公三足先生之來孫也 自先生之遯 于雲門世家道州公之徙 于此者愛其山水之淸麗 民俗之淳古 而亦有契扵嘉遯貞吉之義也 自後氏乗繁衍昌熾環溪 而居者可累十戶 忠信才德世不乏傳 而或憊於貧約不能 自挀於是闔門老少相與 合議揖金別立 爲門貲竭心拮据積歲秊所 蓄貯者
足以供凢需以之修儀物 而劃祭田又相與議曰 吾祖之胥宇玆土己餘二百年矣 諸裔之保有今曰 者莫非積德攸曁 而岡阡之下迄無䖏香寓慕之所 惡在其追遠而報本也 度時量力今可擧矣 遂鳩材命工大創齋舍於 德溪之陽扁曰 德陽請余一言以記之 余固訥於言者 而辞不獲焉 則乃復之曰 齋以德陽稱者豈其因地 而命之耶 噫令天地不交 而駸駸然入於重陰九宇 沉晦萬戶昏閉 而陽之德幾乎息矣彜倫於是乎 不叙綱紀於是乎 不振人之知有奉先之道者盖鮮矣 是齋之興於今日 殆若有陰啓之者乎 金氏之羣居于 是者惟能念甭祖 而聿修厥德 又能軆天行 而自强不息 以復其陽德之 本然則小徃大來 而晦者復明閉者 復開而民德可歸於厚矣 然則是齋也 不惟金氏之永於孝思 而己亦豈非修 德君子之所 共陽陽而喜者耶 德陽之義其在是 歎齋之建也 殫誠經紀者后孫容舞容元震坤也 玆索 余言者嗣嗣孫鍾鍵也
屠維赤奮若仲秋月下澣 廣陵安鍾斗記


덕양재기(德陽齋記)
문창군(文昌郡)의 치소에서 북으로 10여리에 덕계리(德溪里)라는 마을이 있다. 산봉우리가 마을을 향해 읍을 하듯 둘러쳐 있으니 공 안이 그윽하고도 넓게 트여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다. 은거하는 사람이 기거하며 살만한 곳이다. 그르므로 행와(杏窩) 김석우(金碩佑)공께서 이곳에 은거하셨다. 공은 삼족당(三足堂)선생의 현손(玄孫)이시다. 선생께서 운문(雲門)에 은거하신 뒤 대대로 도주(道州) 즉 청도에서 살았다. 공이 이곳으로 이사하신 것은 산수의 맑고 아름다움과 민속이 순박하고 후덕함을 좋아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은둔생활이 아름다우니 정절을 고수하는 것이 길하다는 주역의 쾌상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후로 자손들이 번창하고 흥성하여 개울을 둘러서 사는 집이 수십호가 되었고 충신(忠信)과 재덕(才德)이 대대로 전해졌다. 간혹 가난과 검약으로 고달프게 살아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가문의 어른과 젊은이 들이 의논하여 돈을 모아서 따로 가문의 자산으로 삼고 마음을 다해 노력하여 몇 해가 지나면서 저축된 것이 공급하고 수급하는데 충분하게 되어 의례에 사용될 물품을 마련하고 제사를 위한 밭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에 또한 서로 의논하였다. “우리 선조께서 이곳에 살게 된 것이 거의 이백년이 되었다. 여러 후손들이 오늘처럼 있게 된 것은 서조께서 덕을 쌓고 공을 닦으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언덕 아래에 정성으로 향을 피우고 선조를 흠모할 장소가 없으니 어찌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함이 있으리오. 그 시기를 헤아리고 우리의 역량을 생각하니 지금이 그 일을 할 때이다.” 드디어 재목을 모으고 장인들을 불러 명하여 덕계(德溪)의 남쪽에 크게 재실을 창건하고 그 편액을 덕양(德陽)이라고 하였다.
나에게 기문(記文)으로 한마디 말을 청하니 내가 진실로 말이 어눌한 것으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에 그것에 답하였다. “재실의 이름을 덕양(德陽)이라 한 것은 어찌 그 땅의 이름만으로 인하여 그렇게 명명한 것이겠는가. 아아! 지금 천지가 순환하지 못하고 급속하게 첩첩 쌓인 어둠 속으로 들어가니 온 세상이 어둠에 가라앉고 집집마다 어둠에 폐쇄되니 양기(陽氣)의 덕(德)이 거의 침식되어 버렸다. 이에 떳떳한 윤상(倫常)이 차례가 없고 기강이 떨쳐지지 못하니 사람들 중에서 선조를 받드는 도(道)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게 되었다. 이 재실이 오늘에 서게 된 것은 아마도 어두운 데에서 밝은 빛이 생기게 되는 것이리라. 김씨들이 이곳에 군집하여 사는 것은 오직 능히 그 조상을 생각하고 그 덕을 이어서 닦는 것이다. 또한 하늘의 운행을 능히 체득하여 스스로 강성하게 하여 쉼이 없는 것이다. 이로써 덕양(德陽)의 본래 그러한 의미를 회복하여 작게 갔다가 크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것은 다시 밝아지고 막혔던 것은 다시 열리고 백성들의 덕이 후덕한 곳으로 복귀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재실은 오직 김씨들이 조상을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생각을 영원히 할 뿐만이 아닌 것이니 또한 덕을 닦는 군자들이 밝은 양기를 같이 공유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양(德陽)의 의미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재실을 세우는 데에 그 정성을 다하여 경영한 사람은 후손 용순(容舞)과 용원(容元) 진곤(震坤)이다. 나에게 기문을 청한 사람은 후손인 종건(鍾鍵)이다.
屠維赤奮若[己丑;기축, 1949] 음력 8월, 하한 광릉 안종두(安鍾斗) 기록하다.





德陽齋記
金海之氏自龜旨肇國之後 氏
葉漸繁而衍布各省 其麗不億
其在昌原之德溪者乃 其一焉
德溪之氏 以三足先生爲大祖
而先生甞遯 世雲門遂世家道
州逮來孫杏窩碩佑公獨愛德
溪山水因 以遷居者今二百餘
禩矣 故言德溪之 故必以杏窩
爲先◆溪 而居累十戶者 奐不
以杏窩爲入鄕之初祖 而中世
力展尊祖述先之亊 有或不備
則遂與之詢謀醵 以銀鈔倥傯
拮据者有年劃罝祭田崇 以儀
物旣又鳩材招工樹儈儈一宇
於阡隴之下 爲會薦寓慕之所
扁之曰德陽齋 以其就乎 德溪
之陽也 於是后孫震坤氏 使其
從弟鐵坤駿坤間記 於家源噫
當此山野騷然之世 而人且自
憂其身不遑追念其所 由生者
有之矣 顧德溪氏 無視於兹不
忘爾祖欲明厥德 苟循此心而
往其子姓之克熾 而昌◆有日
矣 如吾困◆棲屑 於雲濤蛋烟
之間者尤不能無愧於德溪氏
也 乃畧書所感者以復之
庚寅陽春月眞寶李家源記1950





德陽齋記
德陽齋在昌原郡北乃谷之畤川里 卽吾宗人諸金君之先室也 日金君容寶訪 余於花山病廢之中 而致言曰 越吾先祖三足堂先生 當戊午己卯之際 方憸小肆凶善類 遰禍殆盡於是焉投紱賦帰隱遯于道州之雲門山中韜晦以卒歲 而其隱德高行足爲百世所 表率先生之五世孫杏窩諱碩佑 克體先祖幽貞之義自道州轉徙卜居于玆土 而歲月寢久家世中徵無以述先業箕裘之緖 不肖等惟是之懼往在某甲爰搆數椽齋舍于川上面陽之地 以爲此近累世丘墓歲祭齊宿之所 而扁之曰德陽齋願有以記之也 齋據爽塏處 而武陵山崔嵬磅礡 爲乃谷之鎭 而其一脉北走 而復東折蜒蜿逶迤至畤川之後 而展開一局且泉甘土肥宜於耕讀允 爲遐遯者之可以盤旋也 余惟人本乎 祖祖其可忘乎記曰 不忘所本此以其自出而言也 書曰 無念甭祖此以其可法而言也 以自出而兼可法則其慕也 尤不有逈別者乎 今夫置齋於此 而奉先也 牖後也 惇親也 延賓也 從而俱擧焉人事日用當行殆乎備矣 杏窩翁之絶意外慕奠基于玆土者其意豈徒然也 哉請從玆以往爲後昆之居息於斯齋者克念乃祖貽謨之遠父父子子兄兄弟弟 孝友敦睦之風 洋溢於門巷 而於出處行藏一從時宜之如何庶不肖乃祖之遺意矣諸君勉之哉
宗人 金柄璘 記





德陽齋上樑文
述夫祖宗之精靈如在見於羹見於墻 齋廬之制度孔新美哉輪美哉奐 玆今寓慕之有所 寧敢虔香之不誠 伏惟我九代祖杏窩府君 金陸古家 檜郡宿望 肇自駕洛國而展拓赫赫乎二千年 繼以三足翁而恢張繩繩乎十數年 乃趾厥美永垂裕於後昆 不顯其章尤有光於前烈 自道州而轉徙 胥德溪而棲遲 無悶於不見人知 惟樂乎爰得我所我泉我石允宜閑界優遊 相其阡岡之側 營玆齋宿齋宿之廬 材有鳩僝何不取諸大壯 卜云龜吉又其協于同人 細爲桷大爲杗各適其用 茂如松苞如竹惟懷永圖 非敢曰遑於先人 有似乎必待於今日 左爲房右爲室以時序之燠凉 東有所西有階將賓主之升降 境與俱適美哉山媚而水姸 事乃易成倏若神輸而鬼運 可是苟完苟美 豈不攸芋攸寧 盍勉旃而齊心 有貽厥乎燕翼 于以湘于以採薦蘋藻之吉蠲 於斯聚於斯歌敍花樹之樂事 在古曾聞有陳君之思亭 於今豈云無張氏之靈壁 可不如豺獺之報本 於以見燕雀之賀新 載擧脩樑 庸助偉唱
兒郞偉抛樑東 天馬峰頭曉旭紅 大野新開登黃稷 坊人歲歲樂年豊
兒郞偉抛樑西 國秀峰色與天齊 寄言當日登臨子 努力要順上頂躋
兒郞偉抛樑南 達川春草碧毶毶 舊時眉老經行處 欲採遺芬悵不堪
兒郞偉抛樑北 洛水滔滔流不極 歎息如今國紀夷 遙瞻漢樹中心惻
兒郞偉抛樑上 日月星辰懸有象 古昔聖人取譬詳 能令後學知方向
兒郞偉抛樑下 德溪流水循除瀉 欲知道體本無窮 逝者如斯不暫舍
伏願上樑之後 棟宇永鞏 邱壑增輝 自天佑而介以福祥 因地靈而降以髦俊 或弦或誦或飮或射將見多士之濟濟奔趨 以亭以祀以妥以娞尙冀英靈之洋洋陟降
歲己丑仲秋月上浣九世孫震坤謹撰


덕양재상량문(德陽齋上樑文)
무릇 조상과 선조들의 정령이 제사상의 국그릇과 집의 담장에 뚜렷이 보이는 듯하며 재실 제도(制度)가 크고 새로우니 아름답고도 환하게 빛난다. 이제 정성으로 조상을 흠모할 장소가 있게 되었으니 어찌 향을 피워 제사드리는 일에 정성을 다핮비 않으리오 생각건대 나의 9조대이신 행와부군(杏窩府君)께서는 김해의 옛 성씨로서 회산군을 오래도록 갈망하여 오셨다. 가락국이 개국항 이래로 개척해온 일들이 이천년 세월토록 밝게 빛난다. 삼족옹(三足翁)을 이어 계승한 것이 십 수세대에 이르니 이에 후손에게 그 아름다운 덕이 영원히 계승됨이 넉넉하도다. 그러나 그것을 꾸며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니 전대의 선열들이 더욱 빛난다. 청도에서 이주하여 이곳 덕계(德溪)에 자리 잡고 사시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으셨다. 오직 스스로 자연 속 바위와 냇물을 즐기시며 한가로운 경계에서 도도하게 노는 것을 즐기셨다. 그림과 글이 있어 좋아하며 그곳에서 탐색하셨다. 시대와 세태가 변하여 풍속과 도리가 가라 앉아 봄가을 서리와 이슬이 내릴 때 후손들이 우러러 사모하는 재사가 끊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서로 그 고향 언덕 가에 재숙(齋宿)할 집을 경영하게 되었다. 재료가 다 갖추어졌으니 어찌 장대한 것을 치하지 않으리오. 그 일이 길하다는 점괘가 있으니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힘을 합하였다. 가는 나무는 서까래로 하고 큰나무는 들보로 삼아 각각 그 쓰임새에 적합하게 하고 무성하게 소나무를 심고 빽빽하게 대나무를 심어 영원히 도모할 것을 생각하였다. 선대의 사람들이 겨를이 없어서 못했다고 감히 말할 것이 아니라 아마도 반드시 오늘을 기다린 것이리라. 왼쪽은 방으로 하고 오른쪽은 실(室)로 하여 계절에 따라 따뜻하게나 시원하게 하고 동쪽으로 섬돌이 있고 서쪽으로 계단이 있어 장차 주인과 빈객들이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주변의 경관은 모두 아름다우니 산은 곱고 물을 맑도다. 일이 이에 쉽게 이루어지니 그 빠르기가 신령이 물건을 옮기고 귀신이 도와서 운반하는 듯하다. 이렇듯 진실로 아름다움이 갖추어졌으니 어찌 성대하고 편안하지 않으리오. 오 어찌 정성으로 힘을 다하여 마음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리오. 또한 조상이 자손을 편안히 살도록 보우함(燕翼)이 있을 것이다. 강이나 산에서 나물을 따서 조상에게 소박한 제사를 드리는 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모여서 노래하며 종족간의 즐거운 일들을 베풀 것이다. 옛날에는 진군(陳君)이 정자를 생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에 어찌 장씨(張氏)의 영벽(靈璧)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면 시랑과 수달이 근본에 보답하는 것보다 못한 것이리라. 이에 미물인 제비와 참새도 새로운 것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이니 들보를 다듬어 들어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아랑위 노래를 짓노라.
어랑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져라. 천마봉(天馬峰) 머리에 아침 햇살 붉으면 넓은 들엔 새롭게 황금물결 넘실되니 골마다 사람들 풍년을 기뻐하네.
어랑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져라. 국수봉(國秀峰) 푸른 빛 하늘이 우뚝한데 말하노니 그곳의 당일에 오르자면 애써 노력해야 정상을 밟으리.
어랑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져라. 달천동(達川洞) 푸른 봄풀 예쁜 그곳은 옛날 허미수옹 지나셨던 곳이지 그 남기신 향기 따르려 하니 사모하는 마음에 슬픔이 이네.
어랑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져라. 낙동강(洛東江) 물 질펀히 덧없이 흐름이 나라의 기강 해이함을 탄식하는 듯 멀리 한양의 나무 바라며 가슴을 적시네.
어랑차 들보를 위로 던져라. 해와 달과 별이 뭇 형상으로 걸렸으니 옛 성인들 자세히 비유해 깨우쳐서 후학들의 학문방향 알려 주셨네.
어랑차 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덕계(德溪)의 물이 길을 따라 흐르듯 도의 본체가 무궁함을 알려고 하면 흘러가기 이와 같아 잠시도 쉼 없으리.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한 뒤에 기둥과 지붕이 영원히 공고하고 언덕과 골이 더욱 빛나게 하소서. 하늘의 도움으로 복록이 쌓이고 땅신령의 덕으로 연재 준재 내려서 거문고 타고 글을 외고 술마시고 활쏘면서 장차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이곳에 모이게 하소서. 향사 드리고 제사 드리고 신령을 편하게 모셔서 아름다운 영령들이 이 재실 제단으로 어엿하게 오르고 내리게 하소서.
기축(己丑:1949)년 중추월 상완에 9세손 진곤(震坤) 삼가 짓다.





杏翁南渡寶源長  행옹이 남으로 오신지 근원이 기나니
誰識遐鄕舊閥光  누가 서울에서 먼 촌락 옛 가문의 빛남을 알리요.
追慕年深恭梓址  추모하는 뜻은 해마다 공경하는 터에 깊고
胎謨書積揷藝床  끼친 법 시서는 서가에 가득히 쌓였네.
雨洗澄潭來夜月  비는 맑은 못에 뿌려 달빛 새롭고
寒經老木動春陽  겨울지난 노목은 봄 양지에 움트는 고야.
憑軒倍覺同根誼  마루에 기대에 배나 같은 근본의 옳음을 깨달으니
炳葉靈枝帶鬱蒼  빛나는 잎과 영험한 가지는 울창하게 띠를 이루구나.
族後生 鶴斗  謹稿  같은 일가 학두 삼가적음





追思先世遠而長  선대를 추모하는 뜻은 멀고도 기나니
南渡門楣久不光  남쪽 있는 정자 오래도록 빛나지 않았네.
薄德難承垂諸業  덕행 적어 전해오는 선업 계승하기 어렵고
嘉謨惟在貯書床  좋은 법은 오직 서가에 있는 서적에 있으니
百年梓樹依山處  백년의 벽오동나무는 산을 의지하여 푸르고
一日成茅向水陽  하루에 띠 집을 물가 양지쪽에 이루었노라.
露怵霜悽瞻眺際  이슬과 서리 밟아 슬프고 선후를 바라볼 즈음*
松杉自老人蒼蒼  솔과 삼나무는 스스로 자라 푸르고 무성하구나.

八世孫 容禎    팔세손 용정


*露怵霜悽 :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그리는 마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렸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슬픈 마음이 일어나니,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봄에 우로가 내려 적셨을 때 군자가 그것을 밟게 되면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있어서 장차 어버이를 다시 뵈올 듯이 한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