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창원 북면 내곡 밀양박씨 모본재 慕本齋

천부인권 2019. 11. 24. 17:49



2019.2.1. 송촌마을 밀양박씨 모본재(慕本齋)


북면 내곡리 686번지는 약 400년 전 밀양박씨 입향조인 박세충(朴世忠)이 송촌마을에 입주한 이래 집성촌을 이루어 생활해 오다 그 후손 들이 1915년 모본재(慕本齋)을 세운 곳이다. 대문채인 유성문(由誠門)과 재실인 모본재(慕本齋) 그리고 뒤뜰의 5개 제단비는 흙돌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제단비는 1978년에 밀성박씨 박맹번(朴孟蕃), 박계은(朴繼誾), 박무성(朴戊成), 박승휴(朴承休), 박홍우(朴弘右) 등 다섯 선조의 것으로 매년 10월 19일에 제사를 지낸다.
유성문(由誠門), 모본재(慕本齋), 주련(柱聯) 등의 현판 글씨는 독립운동가 추서가 필요한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의 작품들이다. 아래에는 모본재의 상량문, 주련, 기문 등을 올려 둔다.




모본재의 대문인 유성문(由誠門)의 모습



백당 정기헌이 쓴 유성문(由誠門) 편액



송촌마을 밀양박씨의 재실인 모본재 모습



백당이 쓴 모본재 편액



백당의 글씨 모본재 주련



[해문-生生之心]
精禋常蔫¹⁾籩豆有椘 정성스러운 제사에서 제물을 올릴 때 제기는 가지런히 늘어 놓아야한다
行必孝于親友于弟  반드시 부모님께는 효로써 행하고 아랫사람(아우)에게는 우애로써 행한다.
學惟立於禮興於詩¹⁾ 배움은 오로지 예로써 바로 서고, 시로써 흥기한다.
遠者益追德歸厚矣  먼 조상을 더욱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진다
格斯可度誠感深兮  깊이 연구하면 헤아릴 수 있고 정성스러운 마음에 느끼는 바가 깊을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 것-本-이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末-인지)


【주석】
精禋常蔫¹⁾ : 정인精禋의 상천常薦은 제기는 가지런함에서 시작한다
立於禮興於詩²⁾: “립어례흥어시”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立: 여기서는 이룬다는 뜻보다 용모와 거동을 바로 한다는 뜻으로 쓰인 듯
興: 詩는 기본적으로 멜로디를 동반한 노래이다.
-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전환되는 배움의 계기에 대한 흥취를 흥기시킴(도올선생)
-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흥기시킴(주자집주)





慕本齋上樑文
前人遺箕裘之業肇立其基 後孫切堂構之誠不忘其本 肆玆營之經始 宜爾永言孝思 竊惟黙隱朴公 以重厚之姿 加質實之行 入則孝出則悌不矯性於秉彛 義以行惠以施恒存心於愛物 贏金匪寶韋氏遺敎子之經 廚甘不空董子供養親之旨 著工夫於忍黙言志有篇 奇風致於逍遙放懷無地 盖嘗潛深伏隩 不欲求達于譽 身計一任閒矢寤寢於澗阿簻軸 世事休相問付是非於流水浮雲 惟是八耋年無憂天降報善之福 亦越三命爵有隕國用優老之恩 何恨不試於時足有垂裕于後 閭巷漸廣孰不由積德累仁 翰墨相承愈可見績文種學 是所謂基之者遠矣 尙可以沒焉而忘乎 不但精神氣脈之流通 矧且廣狹高下之底定 酒於岡阡瞻望之地 輒有齋閣結構之圖 松杉苑然豈直曰衣履是托 桑梓敬止抑亦爲宅里攸居 爰協同人之謀 遂倡大壯之制 獻圖殫巧工匠亟鉅彼而斧斯 合膂幷心後昆忘力短而財詘 始也屠維秋設役 居然仲呂夏告功 洞府增輝闡秘一區靈境 溪山呈態想像百年前塵 寔由愛慤之心 匪爲觀玩之美 聊寄贊偉 用助擧樑
抛樑東 月岳依微霧靄中 待得天晴陰翳掃 光輝烔烔射窓櫳
抛樑西 國士峰靑下有磎 猶記相公臺榭處 當時勳烈孰攀躋
抛樑南 武陵山色與天參 羅峰簇立兒孫衆 來自千年淑氣含
抛樑北 星斗遙看臨屋極 耕鑿熙熙仁壽躋 至今不忘先王德
抛樑上 天宇廓然貿片障 自警詩中發省深 不欺寧或須臾放
抛樑下 一道飛泉石磵瀉 揖取澄瀅可濯湘 堂庭登降洋洋者
伏願上樑之後 神鬼永護 風雨不撓 花樹同歡父兄宗族無胥遠邇 芬芯登薦溪沚澗沼靡不具焉 見於羹見於墻指遺躅某邱某水 敎以詩敎以禮述先謨于夏于冬 勿替引之 永垂來許
歲玄黓困敦秀葽月上浣盆城金柄璘撰


모본재상량문(慕本齋上樑文)[해문 – 박태성]
옛 사람은 가업(家業)을 남겨 그 기틀을 처음 세우고 후손은 사당과 재실을 지어 정성을 다하여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처럼 조상을 위하여 재실을 짓고 효성스러운 생각을 노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생각건대 묵은(黙隱) 박옹(朴翁)은 중후(重厚)한 자태에 실질적 행동을 하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경하며 떳떳한 윤리를 지키는데 성심을 다하였다. 행동은 의로웠고 은혜를 베풀어 항상 사물을 아끼는 마음을 지녔다. 돈과 보물을 쌓은 것은 복희씨 때 문적을 관리한 위씨(韋氏)가 자식을 가르치는 도리를 따르기 위함이며 부엌에 항상 맛있는 것을 두는 것은 동자(董子)가 부모를 봉양하는 뜻을 기리는 것이다. 참고 침묵하는 공부를 드러내어 그 뜻을 밝히는 글이 남았고 소요하는 풍류에 기탁하여 그 품은 정을 풀어보려 하였으나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대개 깊이 침잠하고 어둑한 곳에 은거하여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은 한가로움을 오로지 하여 냇물과 산골의 수풀 속에서 생활 하였고 세상일을 묻지도 않고 흐르는 물과 떠다니는 구름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의심치 않았고 또 세 번씩이나 관직을 내리는 명을 거쳐서 나라에서 노인을 우대하여 내리는 은전을 받게 되었다.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때에 맞게 쓰이지 않음을 다만 족히 후손에게 넉넉한 덕을 남기게 되었으니 마을이 점차 넓어지나 누군들 덕을 쌓고 어짊을 쌓는데서 비롯하지 않겠는가. 문필이 대를 이어 계승하니 오히려 문장을 짓고 학문의 씨앗을 뿌림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그 기반을 닦음이 멀고도 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잊혀 지겠는가. 다만 정신과 기맥(氣脈)이 서로 통할뿐만 아니며 또한 넓고 좁음,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 것이다. 선생이 살던 언덕이 우러러 바라보이는 곳에 문득 재실을 지으려는 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소나무 무성한 숲을 어찌 다만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고만 할 것이며 고향마을을 공경함이 어찌 또한 거처하던 집이 있었던 곳이라고만 하겠는가. 이에 사람들이 협동하여 드디어 장대한 규모의 재실이 서게 되었다. 자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장인들이 기교를 다 바쳐 톱질하고 끌로 다듬어서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후손들은 힘이 없고 재물이 모자란다는 생각초차 잊어버렸다. 처음 공사가 시작 될 때는 도유(屠維)¹⁾ 해 즉 기해(己亥) 가을이었는데 어느 듯 음력 4월 중려(仲呂) 여름에 낙성을 고하였다. 고을이 빛을 더하고 한 고을의 신령스러운 경계가 그 신비로움을 떨치게 되었다. 계곡과 산이 그 자태를 뽐내며 100년 전의 먼지를 깨끗이 쓸어버린 듯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는 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바라보고 완상(玩賞)²⁾하는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애오라지 찬양하는 아랑위 노래를 불러 들보 올리는 것을 돕고자 하노라.
어랑차 들보 동쪽으로 던져라. 월악(月岳)은 옅은 안개 속에 있는데 하늘이 맑게 개어 그늘을 쓸어버렸으니 밝은 빛이 찬란하게 창문으로 비쳐드네.
어랑차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푸른 국사봉(國士峰) 아래 개울물은 상공(相公)이 활 쏘던 누대가 있었던 곳인데 당시의 큰 공훈을 누가 따라 잡으리.
어랑차 들보 남쪽으로 던져라. 무릉산(武陵山) 빛은 하늘에 우뚝한데 줄지어 솟은 봉우리 수많은 자손 같이 천년토록 맑은 기운 머금은 듯 하여라.
어랑차 들보 북쪽으로 던져라. 북두성은 아득히 하늘 한 가운데 있으니 밭 갈고 우물파 물마시며 즐거이 어진 덕과 수명을 다하니 지금에도 선왕의 덕을 잊지 않는다.
어랑차 들보 위쪽으로 던져라. 하늘은 활짝 열려 조금도 가려지지 않은데 스스로 경계하는 자경시(自警詩)에 그 깊은 자성(自省)을 밝혀 스스로 속이지 않고 잠시라도 방심하지 않으리.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한 줄기 샘솟는 물 바위틈에 흐르니 맑고 맑은 물 부어 갓끈 씻고 집 뜰에 그 영령이 오르내리는 듯하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를 올린 후에 귀신이 보호하고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자손들이 함께 기뻐하고 아버지와 형과 종족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친하고 향기로운 제물을 드릴 때 냇물도 맑고 깨끗하여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고 선조의 모습이 국그릇에도 보이고 담장에도 보이듯 저 언덕 저 개울에 계시든 곳임을 가르치고 시와 예를 교육하여 여름이나 겨울이나 선조의 가업 이어 후손들에게 전하며 제사를 빠트림 없이 지내고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이어지게 하소서.
임자(壬子;1912)년 수요월 상완(4月 上浣) 분성 김병린(金柄璘) 짓다.


【주석】
도유(屠維)¹⁾ : 고갑자(古甲子)에서, 천간(天干)의 여섯째인 ‘기10(己)’를 달리 이르는 말.
완상(玩賞)²⁾ : 어떤 대상을 취미로 즐기며 구경함






慕本齋記
檜山之北二十許里 有乃谷 卽故朴黙隱公攸居之地也 日其曾孫禎圭等來言 吾曾祖黙隱公隱居行義多所 施惠遐享壽筭至 爲天爵之貴 而終焉衣冠之 藏在於家後麓從平日 逍遙嘯詠處也 居常著述草呇之弆在巾 箱者酷被鬱攸之厄 片言隻字旣無遺諸所 可影響者 祗公之自 警詩家間傳 誦者一頁與夫墓 前竪碣銘一度 而已不肖輩痛恨 當奚若所以於封瑩之 側數赤之外谿澗之上結小屋子名之 以慕本齋幸乞 一言之記三字之扁 以光楣顔余問 而嘉之又辭不獲已乃曰 夫木之於本人之於祖莫不由之 而生焉則祖乃人之本子孫 爲本之支培 而達晦而敷此物理人事之所問 得於天彛者也 須知自己之所 從來孰無油然生厚本之孝 思或有物不從心者 事與時違者 鮮能盡子孫之道 而今者僉賢之盛 擧規劃於零殘之中營幹於板蕩之際功已告訖其所追慕報本之誠逈出尋常萬萬者也 善哉言乎乃就其詩與銘 而莊閱則詩有猶難不自女欺句銘有孝友和睦之句槩可以認公之持身謹飭操心忠厚洵林下白靖之士也雖未得需于世積累餘慶宜乎食報於後昆而麻蔭所及後昆之圖報自當有別矣 然借或世代疏遠 爲先之誠漸弛 敦睦之風寢衰嗣 而不葺則甚非所 以慕本之本義也 若迺各自惕勵 以今日慕本之心爲心居斯 而惠公政家之規陟彼而仰公禔躬之方春雨秋霜必有如將之敬夏詩冬禮不廢肄業之課孜孜服膺遵而勿替則於是乎黙隱公之餘韻厚澤不斬在玆而于黙隱公尤有光焉惟僉賢勉之哉禎圭曰唯遂書其說以爲記
歲躔重光大淵獻陽復之下澣族後生崇穆記


[해문-文山]
회산(창원의 옛 지명) 북쪽 20여리에 있는 내곡(乃谷)은 박묵은공(朴黙隱公)이 오래 전부터 거주해서 살았던 땅이다. 어느 날 증손 정규(禎圭) 등이 찾아와 말하기를 그곳은 “나의 증조부인 묵은공(黙隱公)이 은거하여 많은 의로운 일을 행한 곳이다.”라 했다. 베푼 은혜로 나이를 늘려서 장수하시리라 생각했으며 남에게 존경받을 만큼 귀하게-중략-

목은 박수(穆隱 朴脩)의 증손 정규(曾孫 禎圭) 등이 묵은공(黙隱公)이 살았던 계곡가에 그를 추모(追慕)하는 모본재( 慕本齋)를 짓고 그 記文을 박숭목(朴崇穆)에게 짓게 하여 나무판에 새긴 내용입니다. 소재(素齋) : 박숭목(朴崇穆, 1846~1926)

重光(辛)大淵獻(亥) 辛亥(1911년)
陽復之下澣(11월 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