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북면 영학리 성주이씨 영추재 永追齋

천부인권 2019. 12. 28. 21:57

 

 

2019.12.21. 진북면 영학리 성주이씨 영추재(永追齋)

 

합포구 진북면 영학리 198번지는 성주이씨 재실인 영추재(永追齋)가 있다. 서북산이 만든 골짝 아래 학동이란 마을에 성주이씨 이명림(李命林)이 입향(入鄕)하면서 세거지가 된 곳이다.
이웃하여 있는 심씨 재실과도 건물의 배치나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이곳 재실과 주변에는 다양한 나무들에 이름표를 붙여 둔 것이 이채롭다.

 

 

 

 

 

대문의 편액은 무첨문(無忝門)으로 ‘이 문을 지나는 자는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무첨문(無忝門) 편액

 

 

 

영추재(永追齋) 전경

 

 

 

영추재(永追齋) 편액

 

 

 

 

永追齋 柱聯
遵甄家之住模
效韋氏之故事
〇但寓慕有云
恒思先徽無墜

 

 

 

 

 

永追齋記
舊鎭海治北二十里 鎭北面永鶴里鷲山之下 靠山臨野 爲四楹三架之屋 而牓之以永追齋者 故星州李公通政諱命林墓齋也 通政公而開國元勳 興安府院君之後裔 自南沙典居于梨木 卽永鶴之一區也 公隱居行義貽謨 後世以壽陞通政資 沒而葬於斯至 今五六世之下子姓蕃衍 可以驗公之餘陰矣 其胄孫珦圭來 余病席請揭楣之文甚勸 余辭以老昏不獲 而第念今天下彛綱日淪 人多不知 篤近遑論於追慕乎 今梨木諸族之 爲此豈不令人起感哉 乃縯其扁義曰 人之情多因聲客之所接 觀感之所發 則孝於在侍之父母易也 追孝於風微影象邈焉 泯焉之遠祖則難矣 人皆克念 吾之生由父祖 而曾高而推之至於十世百世 而皆吾之所自出 則曷可以世之遠 而漸忘乎 是以報本追遠之禮作 而有永言追思之訓也 然則子孫之於 先祖墓儀不容不俱也 齋舍不容不置也 邊豆不容不潔精 將事不容不躋蹌無所歉於孝思可矣 其惟是哉 常遡念先祖之心法事行 每與諸族講誦規戒戰兢 自持不墜所傳之嘉謀然後 斯可謂盡其子孫之道 而無愧乎 扁齋之義矣 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 又曰夙興夜寐無忝爾所生修德無忝 卽尊祖之實事也 惟諸族勉乎哉 是齋之役珦圭 主其事始終戮力者 炳玉炳祚炳道大圭元圭鍾圭諸君皆可書也
辛酉仲春 族後生 炳穆 撰

 

영추재기(永追齋記)
옛 진해관아 북쪽 20리 진북면 영학리 취산(鷲山)아래 들(野)에 임한 고산(靠山)에 기둥이 4개인 3칸의 재실이 있고 현판을 영추재(永追齋)라 하였으니 고 성주이씨(星州李氏) 통정공(通政公) 휘 명림(命林)의 묘재(墓齋)이다. 통정공은 개국원훈으로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의 후예로 남사(南沙)로부터 이사해 이목(梨木)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즉 영학(永鶴)의 한구역이니라. 공이 은거생활을 해도 행의(行義)가 모범을 끼쳐 후세에 수승통정자(壽陞通政資)가 되었고 세상을 떠나 장례함도 이곳이다.
지금 5~6세에 내려 이르러 자손이 넓게 번성하였으니 가히 공께서 남긴 음덕의 증험이다. 그 집안 증손 향규(珦圭)가 병석에 있는 나에게 문주방에 걸 기문을 청하고 심히 권하기에 나는 늙어 혼미하여 사양하였으나 거두지 않아 다만 생각해보니 지금 천하는 인륜과 강상이 나날이 침몰해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많은데 독실하게 추원을 논하면서 가까이 하더라. 지금 이목(梨木)의 여러 씨족들은 이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손가. 이내 그 편액의 의(義)를 당겨 말하나니 사람이 정이 많음으로 인해 객(客)이 접하고 소문이 나고 봄으로서 느낌이 발(發)하는 까닭으로 효도로 부모를 섬겨 모시게 되느니라. 추모(追募)와 효도의 풍속은 쇠약해져 부모의 영상(影像)은 아득해졌는데 먼 조상은 곧 추모하기 어려워졌음이라. 사람 모두가 극히 생각해 보면 내가 태어남은 부조(父祖)에 말미암아 증조고조(曾祖高祖)로 옮아져 있고 십세백세(十世百世)라도 모두 내 자신이 태어난 이유(理由)에 이르니 곧 어찌 세대가 멀다고 점점 잊을 손가. 이에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예를 지어 기리 말하여 추모를 생각하도록 가르침이니라. 그런즉 자손은 선조의 산소에 석물을 갖추어 꾸미지 아니함이 없고 재실을 지어 꾸미지 아니함이 없고 제례를 정결하게 꾸미지 아니함이 없고 장차 섬김에 나아가지 아니함이 없어 뜻에 차지 않는 바가 없으니 효도를 가히 생각하고 그것이 오직 효도 이니라 항상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심법(心法)과 사행(事行)을 생각하고 매양 제족(諸族)과 더불어 읽고 외어 법과 계율을 두려워 떨며 스스로 떨어뜨리지 않고 유지하여 아름다운 계책을 후세에 전한 연후에 이 가히 자손의 도리를 다했다고 일컬을 것이요. 재실 편액인 영추(永追)의 의(義)에 부끄러움 없음 인저. 시(詩)에 이르기를 그대의 조상을 아니 잊으려거든 항상 덕(德)을 닦아 키워야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새벽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잠에 욕됨 없고 너의 삶에 덕을 닦아 욕됨 없으면 즉 조상을 존중하는 실제(實除)의 일이니라. 오직 모든 종친들은 힘쓸지어다. 이 재실 역사에 향규(珦圭)가 그 일을 주관하였고 시종(始終) 힘 기울인 자는 병옥(炳玉), 병조(炳祚), 병도(炳道), 대규(大圭), 원규(元圭), 종규(鍾圭) 여러분 모두를 가히 기록하노라.
신유년 중춘 족후생 병목 지음.

 

 

 

 

永追齋上樑文
追遠報本 天彛固然 矧玆筮土奠居之祖 睦族敦倫 人情所係 孰若同堂袒免之親 爰構歲祭之堂 兼爲月會之所 於惟通政大夫副護軍李公 星州古閥 景武遠孫 詩禮着工早承家庭之敎訓 簞瓢寓樂素厭世俗之繁華 自晉康而遷搬忽成鴻飛高舉 卜牛山而肥遯剩喜龜足潜藏 亨黃耈之遐齡 得緋玉之恩典 念當日行義完備用工在於求仁 寔至今子姓連綿餘慶由於修善 霜悽露怵縱饋奠之有儀 歲引月拕尙齋舍之未就 肆詢謀之歸一 亦事力之克敷 聚穀貨而排族中番家勢之優劣 舍邱壟而占里側爲守護之便宜 冒雨陽而董役于炳玉炳祚之誠膂殫竭 執券簿而主庶務珦圭大圭之幹辦優餘 幾費心上經營雲窓霧戶納日月而淸明 遽見眼前突兀竹逕松門掃塵埃而通敞 中央廳事甚便禮祝之周旋 左右室房亦宜老少之齊宿 既竣土本之役 盍思維持之方 聚宗族而敘倫忽忘范公均視之語 奉祭祀而致慤恒思孔聖如在之言 有朋友自遠方種蔬果辦鷄黍 養子孫以正術敎禮樂誦詩書 謹述六偉之詞 庸助雙欐之揭
抛梁東 有岩綠水入塋中 斧堂四尺崇其下 魂氣惟應晝夜通
抛梁南 湖光一帶碧如藍 魚鱗萬族知多産 供薦年年必此潭
抛梁西 尼丘山屹與天齊 昔公嶽降於斯在 遺躅而今上可稽
抛梁北 院宇安山高且侐 二十二賢真影存 尋常行路過之式
抛梁上 精靈陟降如聞響 聿修厥德詩人詞 夙夜居斯也不忘
抛梁下 稻粱千畒是平野 春耕夏耨人如雲 收穫自多勤若者
伏願上梁之後 岳靈拱護 海神來臨 雲仍益蕃不讓江州之陳河東之柳 棟宇永保有同靈光之殿五奉之樓 名士四來乘靑牛之異釆 里俗一變興白鹿之遺規
庚申六月日 同宗李晉洛謹撰

 

영추재상량문(永追齋上樑文)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것은 하늘의 떳떳한 법도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하물며 터를 잡고 처음 마을을 이룬 조상이겠는가. 종중이 화목하고 인륜에 돈독하며 인정이 계승되는 바는 누군들 같은 제당의 단문(袒免)의 친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해마다 제를 올릴 제당을 짓고 달마다 친족이 모일 장소가 된다. 아아 통정대부 부호군 이공(李公)은 성주(星州)의 옛 문벌로 경무(景武)의 먼 자손이다. 시와 예절을 익혔고 일찍이 가문의 교훈을 계승하였다. 가난한 살림도 청빈하게 즐겼고 세속의 번화한 것을 싫어하였다. 편안하게 살던 진주에서 홀연히 큰기러기가 높이 날 듯 옮겨와 우산(牛山)에 자리잡고 은거하며 거북이가 자취를 감추는 것을 매우 즐겨하였다. 머리가 황발이 되도록 천수를 형수하면서 나라의 은전을 입었다. 생각하니 당일 의를 행함이 완비되고 어진 것을 구하는데 공을 들인 것이 지금에 이것으로 자손들에게 경사가 이어지니 선을 닦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슬과 서리 내릴 때 슬퍼하며 제사를 드리는 의례를 다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재실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서로 논의하는 것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또한 일과 힘이 드디어 부합되고 곡식과 돈을 모으는데 집안사정이 좋고 나쁨에 따라 분배하였다. 마을 옆 구릉에 자리를 잡아 보살피기 편하게 하였다. 비와 볕을 무릅쓰고 노역을 감독함에 병옥(炳玉) 병조(炳祚)가 정성을 다하였다. 장부를 잡고 업무를 주관한 것은 형규(珦圭) 대규(大圭)로 주간하고 판단함이 뛰어났다. 마음을 다하여 경영하여 구름같은 창을 내고 높다란 문을 달아 해와 달을 맞이하니 맑고도 밝았다. 문득 눈앞에 우뚝히 대나무 숲길과 솔나무 오솔길의 있는 먼지를 쓸어낸 듯 하니 탁 트여 화창하였다. 가운데 마루는 손님을 맞고 제사를 주선하기 매우 편리하고 좌우의 방은 노인과 젊은이들이 재숙하기에 적합하다. 이미 땅과 본체의 공역이 준공이 되니 대개 그것을 유지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종친이 모여 항렬의 차례가 있으니 범공(范公)이 먼친척과 가까운 친척을 고루 보라는 말을 홀연히 잃어버렸고 제사를 받들어 정성을 다하니 공자가 항상 조상이 있듯이 하라는 말을 깊이 생각한다. 벗들이 멀리서 찾아와 체소와 과일을 심고 닭과 기장을 구분하고 자손을 올바른 재능으로 기르되 예악을 가르치고 시서를 외우게 한다. 삼가 육위(六偉)의 사(詞)를 베풀어 한 쌍의 들보를 걸어올리는 것을 돕고자 한다.
들보 동으로 던져라. 큰 바위 푸른 물 묘역에서 보이니, 4척 무덤 우뚝 그 아래 솟았네, 혼백이 곧은 기운 밤낮으로 오르내리네.
들보 남으로 던져라. 호수같은 바닷빛 쪽빛 같은데, 수많은 자손들 물고기 비늘같이 연이었네, 해마다 반드시 이 물가에서 제사 올리리라.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이구산(尼丘山) 우뚝 하늘에 닿았는데, 옛 공(公)은 높은 기상 품고 이곳으로 내려왔네, 남기신 행적 지금도 살필 수 있다네.
들보 북으로 던져라. 서원을 품은 산 높고 고요한데, 스물 두분의 현인의 진영(眞影)이곳에 있어서, 항상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네.
들보 위로 던져라. 정령이 오르내림이 직접 보고 듣는 듯, 닦으신 그 큰 덕은 시인의 시에 있다네, 밤낮으로 이곳에 거처하며 잊지 말아야지.
들보 아래로 던져라. 곡식 천이랑 심은 이 넓은 들에, 봄갈이 여름 김매기 사람들이 구름같네, 가을 수확은 노력한 만큼 풍성하리.
엎드려 바라건대 들보 올린 후에 산신령이 보호하고 바다 신령 와서 도와 후손들은 더욱 번성하여 한 가족이 칠백인 (강주진씨(江州陳氏)나 가훈이 아름다운 하동유씨(河東柳氏)집안에 양보함이 없고, 재실이 영원히 보존되어 영광전(靈光殿)이나 오봉루(五奉樓)와 같이 되고 이름난 선비가 사방에서 푸른 소를 타고오는 이적이 생기고 마을의 풍속이 일변하여 백록동 규범이 일어나게 하소서.
경신(庚申) 6월 일 동종(同宗) 이진락(李晉洛) 삼가 쓰다.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