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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북면 영학리 청주심씨 청학재 靑鶴齋

천부인권 2019. 12. 29. 19:28

 

 

 

2019.12.21. 진북 학동마을 청주심씨 청학재(靑鶴齋)

 

합포구 진북면 영학리 197번지는 학동마을 청주심씨(靑州沈氏)의 재실인 청학재(靑鶴齋)가 위치한다. 이웃하여 성주이씨 재실인 영추재(永追齋)가 있으며 위치기반 고도계로는 높이 111m이고 「위도 35°09′05″N 경도 128°26′22″E」라 표시한다. 청송심씨가 이곳 영학리에 거주한 것은 족보상 시조인 홍부(洪孚)로부터 19세에 이르러 연제공 선주(宣柱)의 아들 취암공 지철(之喆)께서 고성 명동(明洞)으로부터 처음 학동으로 이주하여 살게 됨으로써 세거지가 되는데 지금부터 135년 전이다.

 

 

 

 

대문은 인지문

 

 

 

인지문 편액

 

 

 

2019.12.21 청송심씨 청학재 모습

 

 

 

청학재 편액

 

 

 

 

 

 

靑鶴齋上樑文
擧日仰着하니 鷲峰이 聳立하고 囬首俯察하니 沃野가 肥美로다. 左迤烽岳은 靑龍이 分明하고 右屹南山은 白虎가 確實하네. 後環屛山은 四時長春蒼荿하고 前展谷野는 春秋稼穡豐饒롭네. 嶠南之名區요 萬古之吉址라. 靑沈鷲公此地에 奠居하니 子子孫孫綿綿히 熾盛하다. 恭惟蓮齋處士諱宜柱公은 文林郞衛尉寺丞之苗裔요 安孝公之肖孫이시다. 厥遵先規하고 仍貽後謨로다. 詩禮忠孝家學삼고 敦行雍睦相資하여 赫世人物輩出하니 東邦華閥稱頌이라. 後孫들 血誠모아 齋堂을 肯構하니 日月이 增廣하고 洞壑이 改觀이라 先靈이 陟降하고 後蔭이 永昌하리 이에 擧梁을 돕기 爲해 六偉 노래를 불러보세.
東쪽을 바라보니 鎭海 바다 蒼茫하고 旭日昇天 燦爛하네. 一枝萬葉子孫들아 忠孝世議 밝혀보세.
西쪽을 바라보니 方丈山 嵬峨하니 蓮齋公 氣槪로다. 扶植綱常 이어받아 孝友敦睦 잊지마세.
南쪽을 바라보니 無際太空廣闊한데 一点浮雲閑遊하네. 萬里長空 바라보니 浩然氣像 길러보세.
北쪽을 바라보니 北邔山川蒼遠한데 先靈幽宅永安하네. 春秋霜露佳時節에 省掃封塋 잊지마세.
위쪽을 바라보니 天綱恢恢疎不漏라 哉哉兢兢自重하세. 積善積德人心사고 仁義禮智自修하세
아래로 바라보니 淸淨大湖 거울같네 萬藏世塵 씻어보세. 汚辱俗心 물에 씻어 淸心寡慾 가져보세.
伏願上梁之後에 天佑神助하시와 齋宇가 鞏安하고 先靈冥府安慰하고 諸孫福祿永遠하소.
檀紀四三二六年 癸酉三月二十日
全州 李文揆 謹記

 

청학재상량문(靑鶴齋上樑文)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리봉이 우뚝하고 고개돌려 살펴보니 살진 옥토가 아름답다. 왼쪽의 굽이진 봉화산은 청룡이 분명하고 오른쪽에 솟은 남산은 백호가 확실하다. 뒤를 두른 병풍산은 사시사철 푸른 솔이 무성하고 눈앞에 펼친 골과 들판은 봄가을 농사가 풍요롭다. 영남의 이름난 고을이요 만고의 길지(吉地)로다. 청송 심씨 취암공이 이곳에 입향하니 자자손손 면면히 번성하다. 생각건대 연재처사(蓮齋處士) 휘(諱) 의주공(宜柱公)은 문림랑위(文林郞衛)위사승(尉寺丞)의 후예요 안효공(安孝公)의 손자이시다. 그 선대의 규범을 좇아 이에 후세를 위한 계획을 남겼도다. 시례충효(詩禮忠孝)를 가학(家學)으로 삼고 돈독한 행실과 화목함으로 서로를 돋우어 세상을 빛낼 인물들을 배출하니 동방의 큰 문벌이라 칭송하더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재당을 지으니 해와달이 더욱 빛나고 혼 골짜기가 모습을 바꾸었다. 선대의 영령이 오르내리고 후세에 그 음덕이 영원히 창성하리니 이에 상량을 돕기 위하여 육위(六偉)의 노래를 불러보세.
東쪽을 바라보니 진해(鎭海)바다 푸르고 넓은데 맑은해 돋으니 찬란하네. 한가지에서 난 수많은 자손들아, 충효로 이어온 가문의 덕을 밝혀보세.
西쪽을 바라보니 방장산(方丈山) 우뚝하니 연재공(蓮齋公)의 기개로다. 영원한 윤리를 지탱한 정신 이어받아, 효도 우애와 가문이 돈독하고 화목함을 잊지마세.
南쪽을 바라보니 끝없이 저 창공 광활한데, 한조각 구름이 한가로이 떠가네, 만리 창공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길러보세.
北쪽을 바라보니 북망산천 푸르고 멀지만, 선대의 묘소가 영원히 봉안된 곳이니, 봄가을 서리이슬 좋은 시절에 성묘하고 묘사올리는 일 잊지마세.
위쪽을 바라보니 하늘의 그물 넓고넓어도 새는 틈이 없으니, 선을 쌓고 덕을 쌓아 인심을 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스스로 닦아보세.
아래로 바라보니 맑고 밝은 큰 호수 거울 같으니 만첩으로 쌓인 세속 티끌 깨끗이 씻어보세. 오염된 속된 마음을 모두 물에 씻어 맑은 마음으로 적은 욕심 가져보세.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하늘이 보우하고 신이 도우사 재신이 공고하고 편안하여 선대의 영령이 저승에서도 편안히 위로가 되고 여러 자손들의 복록이 영원하게 하소서.
단기 4326년 계유(癸酉) 3월 20일
전주(全州) 이문규(李文揆) 삼가 쓰다.

 

 

 

 

 


靑鶴齋刱建記
方丈峻嶺이 東馳百餘里許에 鷲峰이 聳立하고 左右龍虎가 南으로 迄迄接海하니 其奧地에 有里曰 鶴洞이라 此則靑松沈氏의 世居之鄕也로다. 蓋松沈之源은 高麗朝에 文林郞衛尉寺丞을 지낸 諱洪孚를 譜上始祖로 하고 四世에 至하여 虛江公 諱德符는 李朝正宗 때 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을 지내다가 晩年에 靑城伯으로 策封되었다. 其弟岳隱公 諱元符는 文忠公李齊賢門下에서 修學하고 典理判書로 歷任하다가 麗亡에 致任하고 入杜門洞하여 殉節하다. 爾後歷世로 文武碩德이 續出不節하니 我邦名閥로 著하다. 至十九世하여 蓮齋公 諱宣柱 之子鷲菴公 諱之喆께서 固城明洞으로부터 始移鶴洞하니 鶴洞靑沈之始也오. 距今百有十數年前이다. 이곳은 山水泉甘하고 土肥氣淸하여 鼎居養孫之地로 宜可라. 以是로 之喆公後가 日將繁衍하고 各德學功하여 忠孝世家之裔로 一無遜違라. 出恭入孝之道와 奉先敦宗之誼가 至篤有別이러니 今玆에 宗議를 合謀하여 古里之陽에 一齋를 築建하니 扁曰 靑鶴이요 門曰仁智라 靑鶴者는 鶴洞에 居住하는 靑松沈氏先齋란 뜻이요. 仁智者는 祖上의 稟性이 仁과 智로 繼承되었기에 凡子孫도 仁智를 效得하라는 뜻이니 其義가 深且重이라. 一九九三年 癸酉 春에 經始하여 翌甲戌 春에 訖工하니 眞可謂不日成之로다. 是는 唯由奉先之篤誠과 諸孫之敦合의 結晶이라 豈不偉裁아 夫今世之相이 歐風이 東來에 斯道가 滅影하니 崇祖孝親之道가 漸弛하는 時際에 鶴洞靑沈之一門이 築齋爲先하고 睦宗會心하니 非獨沈氏一門之譽라. 凡社會之龜範이로다. 비록 構制가 三間이나 建材가 堅美하고 周境治粧이 非華非朴이라 中備祭壇하고 左右各室하니 齊明會宗之所로 無遜無缺이라 日에 知友容燮이 訪余書室하여 建立經緯를 敍陳하고 仍而請記어늘 余之不文으로 固辭타가 不獲하고 略敍如右라. 切願컨대 沈門僉位는 是齋告落을 契機로 加一層 戮力協心하여 先徽를 發揚하고 操身을 謹行하여 華閥名家의 矜持를 承襲함에 自勵할지니라. 是役也에 所要資金은 全宗員이 稱力出損하고 始終監役은 容燮이 玆에 添記하노라.
西紀 一九九四年 甲戌六月 下旬
金海 許宗業 謹識

 

청학재창건기(靑鶴齋刱建記)
방장(方丈)의 준령이 높은 고개 동(東)으로 백리쯤 달려 취봉이 높이 솟았고 좌우용호(左右龍虎 : 풍수지리로 산의 모양이 좌측은 용의 모습으로 우측은 호랑이처럼 뻗은 모습)가 남으로 이르고 바다에 접하여 그 그윽한 땅에 학동(鶴洞 : 학의 모습을 한 마을)이란 마을이 있다. 바로 이곳이 청송심씨가 대대로 사는 고향이다. 대개 청송심씨의 근원은 고려조정 문림낭위(文林郞衛) 위사승을 지낸 홍부(洪孚)를 족보상 시조로 하고 4세대에 이르러서 허강공(虛江公) 덕부(德符)는 이조정종 때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정승을 지내다 늘그막에 청성백(靑城伯)으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우 악은공(岳隱公) 원부(元符)는 문충공 이제현(李齊賢) 문하에서 수학하고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역임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그만 두고 두문동에 들어가 순절하였다. 이후 대대로 내려오며 문무의 큰 덕인이 계속 배출되어 끊임이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집안으로 나타났었다. 19세에 이르러 연제공 선주(宣柱)의 아들 취암공 지철(之喆)께서 고성 명동(明洞)으로부터 처음 학동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니 청송심시들이 처음 살게 된 곳으로 지금부터 110여 년 전이다.
이곳은 산이 빼어나고 물맛도 좋고 토지가 비옥하고 공기가 맑아 바야흐로 자손을 기르기에 가히 마땅한 곳이다. 이로써 지철공(之喆公) 후예가 나날이 번성하고 각각 공부하여 학문을 얻었고 대대로 충효 집안 후예로서 조금도 겸손함을 어기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공손하고 집에서는 효도의 도로써 선조를 받들고 종중의 의로움이 두터웠으며 지독히 유별하더니 지금 이곳에 종중 사람들이 의논하여 합의해서 옛 마을 양지쪽에 한 채의 재실을 지어 세우고 편액을 청학(靑鶴)이라 하고 문을 인지(仁智)라 하였다. 청학이란 것은 청학동에 거주하는 청송심시의 재실이란 뜻이요, 인지(仁智)는 조상의 성품이 인지로 계승되었기에 뭇 자손도 인지를 본받아 얻으라는 뜻이니 그 뜻이 깊고 또 무거우니라. 1993년 계유년 봄에 처음 터를 닦아 고루어 다음해 갑술년 봄에 공사를 마쳤으니 참으로 빠른 시일에 이루었다고 가히 이를 만하다. 이는 오직 선조를 받드는 두터운 정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후손들이 두텁게 합쳐진 결정이라 어찌 위대하다아니하랴. 지금 세상 형편이 서구의 풍속이 우리나라에 와서 선비의 도는 그림자조차 없어지고 선조를 숭상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도가 점점 쇠퇴하는 이즈음 학동 심씨의 온 집안이 선조를 위해 정성들여 재실을 지었고 화목한 종중 마음 합하였으니 이는 심씨 한 집안 명예가 아니라 범 사회의 귀감이 되는 규범이로다. 비록 지은 집은 3칸이나 건립한 재목은 단단하고 아름다워 주위 경역의 고움을 다스리니 화려함도 아니고 소박함도 아니하더라. 준간에는 제단을 설비하고 좌우로 각각 방을 두었으니 밝게 제계하고 종중회의 장소로 부족함이 없음이라. 하루는 아는 벗 용섭(容燮)이 나의 서실로 찾아와서 건립경위를 말하고 이내 기문을 청하거늘 내 문장이 부족하여 굳게 사양했으나 거두지 아니해 위와 같이 대략을 펴내었고 간절히 원하건대 심씨 집안 모든 분들은 이 재실 낙성을 계기로 한층 더 서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선조의 아름다움을 떨쳐내고 마음과 몸을 근신하여 화려하고 이름난 집안의 긍지를 계승함에 스스로 힘쓸지어다. 이 일에 소요자금은 전 종친이 힘에 따라 출연하였고 시종 감독한 사람은 용섭이니 이에 더하여 기록하노라.
서기 1994년 갑술 6월 하순
김해 허종업(許宗業) 삼가 짓다.

 

 

 

 

 


原韻
肯構先齋鶴洞天
增光澗壑發祥烟
昔年賢祖爰居地
今日雲孫感慕筵
湖畔奇花咲檻外
鷲峰輪月照門前
諸昆共勵修忠孝
遺德淸風萬世傳
七世孫 載云 謹稿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