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북면 이목리 전주이씨 원천서원 源川書院

천부인권 2019. 12. 25. 14:05

 

2019.12.21. 원천서원 대문인 방지문(方至門)

 

합포구 진북면 이목리 192번지는 전주이씨 원천서원(源川書院)이 있는 곳인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천서원의 좌우에는 숙야재(夙夜齋)와 염수재(念修齋)가 마주보며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재실(齋室)이 노후화 되어 문중에서 철거 시켰다.
옛 진해현(鎭海縣)으로 이주한 전주이씨의 입향조(入鄕祖)는 이훤(李暄)으로 진전면 율티리의 경사재(敬思齋)에 모시고 있으며 그 다음은 옛 구산면 구복리에 있던 재실을 지금은 진동면 도만마을로 옮긴 모담재(慕潭齋)이며, 진북면 이목리(梨木里)의 원천서원(源川書院)은 3번째 이주한 전주이씨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원천서원(源川書院)은 방문할 때 마다 문이 잠겨있어 내부로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담장 너머에서 사진을 찍었으나 금산리 서강재(西岡齋)에 들렀다가 열쇠를 가진 분을 만나 다시 돌아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진 찍느라 현판은 찍지 못했다.
원천서원에는 원천서당기(源川書堂記), 원천서당명(源川書堂銘), 원천서당상량문(源川書堂上樑文) 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초고를 잡는 대로 올릴 예정이다.

 

 

방지문(方至門) 편액

 

원천서당(源川書堂) 전경

 

원천서당(源川書堂) 주련

 


源川書堂記
堂以源川名 其和推本之道 者乎夫接續 而方至溒溒 而不渴益大 而行放之 而爲江爲海 者惟是川矣 而必其發於源者深 而後遠於流者長 苟爲無源是溝澮之益 而其痼可待 豈川云云乎哉 故見流可知其源 而源必由川 而達人之於有家其道 亦猶是也 祖先垂統於前 而子孫纘緖於後 是固源流之理 而謀猷心法之傳 盛衰隆贊之機 英不於是焉 啓夫積於幽潛之中 而發於以遠之後者惟德 爲然故源之深者 亦莫尙於德 此韓子所謂孰川豊 而不源者 而周人述文武之功業 必推本太王 王之德者 亦以是也 家國豈有二道哉 鎭海之舊族鉅閥者 必稱梨木之李氏 其源遠出於天潢 而自南徙后雖名位少 遜猶以文學行儀 世其家中世 尺山公諱世甲有 文行隱德孝友著於鄕 享年九十蒙優老之副護軍 秩其子梨村公諱國魯 以格天至孝 聞於國蒙旌贈之典 其玄孫素山公諱康歡 以厚德雅望儀表一方 而篤於繼述 先徽益闡家聲 亦益以昌矣 於是爲三公後者 築室於所居之側爲堂者 凡四架顔曰源川 爲寓慕尺山公也 爲齋於東西 而東曰夙夜所 以志梨村公之孝思也 西曰念修志素山公之繼述也 素山公之次子乙宰爲余道其事 而求記堂余曰是固無待於記也 觀於扁意 而其義已備蓋尺山公之潛德 其源之已深矣 梨村素山二公之纘緖益恢張之也 又豊御爲川矣 而纘緖之道 亦不過曰夙夜念修 而已則三公之實 豈有外此而可述哉 抑源川之義 惟之而有無窮 夙夜念修之道 引之而可無替 則固將世世用之而有餘 而豈直三公之寓慕而已哉 余觀李氏有方進 未艾之將 苟因此而益引 而達之顧諟乎 玆扁而克充之 則溒溒之川 其將放之而爲江爲海也 必有曰矣
丙申菊秋 花山 權龍鉉記

 

원천서당기(源川書堂記)
당(堂)의 이름을 원천(源川)으로 함으로써 그 도를 추구하는 근본을 알겠노라. 대저 물이 끊이지 않고 성하게 흐름에 이르게 되어 마르지 않고 더욱 커서 멋대로 흘러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천(川)이니 반드시 그 발생한 원인이 깊으면 뒤로 멀리 흘러가는 것이요 진실로 근원이 없으면 이 도랑에 많은 물을 가히 기대할 만한 천(川)이라고 이르고 이르겠는가. 그런고로 그 흐름은 그 근원을 알 수 있고 근원은 반드시 천(川)에 다다르는 까닭이다. 사람도 그 집안에 도(道)가 있음은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라. 선조(祖先)깨서 앞날에 전통이 드리워 이후 자손(子孫)들이 계승함이 이것이 근원이 흘러내리는 이치요. 계책한 심법(心法)의 전함이니라. 성했다 쇠하고 성했다 폐하는 기간에는 꽃답지 않은 것이 이런 것 이니라. 열린다는 것은 대저 깊숙이 잠겨 쌓인 가운데 뒤로 멀리 뻗은 것이 오직 덕(德)이니라. 그런고로 근원이 깊숙한 것은 더할 수 없는 덕(德)이니 이에 한비자(韓非子)는 소위 누가 내(川)가 흐름이 풍성한 것에 근원이 없다하랴 하였다. 주(周)나라 사람들이 문왕무왕(文王武王)의 공업(功業)을 펴내는 것은 반드시 대왕(大王)의 근본이 미쳐졌고 왕(王)의 덕(德)도 역시 이것이다. 나라에는 어찌 두 가지 도(道)가 있으랴. 진해(鎭海)고을에서 오래된 씨족 큰 집안이란 것은 반드시 이목(梨木) 이씨(李氏)를 칭할 것이다. 그 근원은 멀리 천황(天潢)에서 나타나 남쪽으로 이사한 후 비록 명위(名位)는 적으나 가히 문학행의(文學行儀)로서 쫓아 나아갔다. 그 집안에 중세(中世)에 척산공(尺山公) 휘 세갑(世甲)이란 분이 계셨는데 문행은덕효우(文行隱德孝友)함이 있어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다. 90수를 누려 살아 장수하였다 하여 부호군(副護軍) 벼슬을 입었다. 그의 아들 이촌공(梨村公) 휘 국노(國魯)께서도 하늘에 이를 만한 지극한 효(孝)로 나라에 소문이나 정려를 내리는 은전을 입었다. 그의 효손(孝孫) 소산공(素山公) 휘 강환(康歡)께서도 두터운 선조의 뜻을 이어 닦으니 선조의 아름다움이 더욱 밝아졌고 집안의 명성도 또한 번창해 졌다. 이에 있어서 삼공(三公) 후손된 자들이 살고 있는 옆에 집을 지어 당(堂)은 네간(四間)인데 편액을 원천(源川)이라 하고 척산공(尺山公)을 우모(寓慕)하기 위한 것이다. 재실을 동서(東西)에 지어두고 동쪽 재실을 숙야재(夙夜齋)라 하고 소위 이촌공(梨村公)의 효(孝)를 생각하는 뜻이요. 서쪽 재실을 념수재(念修齋)라 하고 소산공(素山公)의 선조 업을 이으신 뜻이다. 소산공(素山公)의 둘째 아들인 을재(乙宰)가 나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기문당문(記文堂文)을 구(求)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기다리지 아니해도 기문이 되어있다 하였다. 보건대 편액(源川)의 뜻에 그 의(義)가 갖추어졌으니 대개 척산공(尺山公)의 숨어 있는 덕(德)이 그 근원이 된 것이 깊었고 이촌·소산(梨村·素山) 두 공께서 대업을 이어 받아 더욱 크게 넓혔고 또 풍부한 내(川)가 되었으니 이어 받은 도(道)로 숙야·념수(夙夜·念修)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이미 삼공(三公)의 실(實)에 어찌 바깥에서 기술(記述)하겠는가. 어라 원천(源川)의 의(義)는 오직 무궁(無窮)함이 있을 것이요. 숙야·념수(夙夜·念修)의 도(道)를 인용(引用)함이 변함없으니 장래에 대대로 세상에 쓰도 남음이 있으니 바로 삼공(三公)을 우모(寓慕)함 이로다. 내가 보건대 이씨(李氏)들이 방정하게 나아감이 있음은 기르는 장계가 아니었다면 진실로 근원에 인한 이런 것을 많이 끌어당겨 다다랐겠는가. 이를 돌아 보건대 이 편액에 극충(克充)하면 뭉글뭉글 흘러가는 시내는 장차 멋대로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것을 말해 두는 것이다.
병신(1956)년 음력 9월 화산 권용현 쓰다.

 

 

원천서당명(源川書堂銘)

 

원천서당상량문(源川書堂上樑文)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