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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한강 정구 노닐던 관해정 觀海亭

천부인권 2019. 12. 24. 07:49

 

2019.10.11. 합포구 서원곡의 관해정 모습

 

 

합포구 교방동 237번지는 창원에서 유림들이 선비로써 모습을 갖추게 한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이 노닐며 강학했던 관해정(觀海亭)이 있는 곳이다. 이 관해정은 임진왜란 이전에 건축하려 했으나 병화로 세월이 흘렀고 또 왜란 이후 황폐화된 이 땅의 상황으로 10년이 넘어서 장문재(長文載)의 도움으로 아주 힘들게 건설됐다. 두척산 물줄기가 창원만으로 향하는 산의 가장자리에 편평한 암반을 소요처로 삼아 건설된 관해정은 그 시대를 뛰어 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소가 되었다. 관해정과 회원서원의 존재로 인해 이 계곡의 이름도 ‘선비가 공부하고 강학했다’는 뜻을 담은 서원곡(書院谷)이라 불린다. 또한 한강선생도 밝혔듯이 신라에서 탄생한 비운의 천재 고운 최치운(崔致雲)선생의 별서(別墅)가 있었고 그가 소요했던 고운봉(孤雲峯)이 학봉(鶴峯)이란 이름으로 관해정 앞에 우뚝 솟아 있다.

 

 

2019.10.11 관해정 대문

 

 

관해정에는 한강(寒岡)선생이 쓴 『관해정기(觀海亭記)』, 부사 이정(李瀞)이 쓴 『차정한강술판상운병소서(次鄭寒岡述板上韻幷小序)』, 최병교(崔秉敎)가 쓴 『관해정중수기(觀海亭重修記)』, 안두유(安斗維)가 쓴 『회원서원관해정중수기(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 김인섭(金麟燮)이 쓴 『관해정행단회기(觀海亭杏壇會記)』, 허전(許傳)이 쓴 『관해정중수기(觀海亭重修記)』 등의 편액이 걸려 있고 편액으로는 없지만 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와 글들이 남아 있다.

 

 

관해정(觀海亭)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창원 합포구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명소를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관해정을 꼽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그리하여 1983년 1월 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 받은 문화재이다. 그런데 관해정이 지금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관리사에 살면서 관리를 하고 있는데 관해정의 소유주인 창원향교도 그 사람들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있고 향교의 재산을 관리한다는 경상남도향교재단도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며 등달아 공무원들도 모른 척하면서 관리의 주체 자들이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해정(觀海亭)  편액

 

 

 

 

觀海亭記
余於丁卯冬 侍曺先生函文於盆城之山海亭 喜其兼山海之趣 而合幽貞之吉也 窃有慕焉 丁亥秋始得此地 又愛其儒仙舊跡之親切也 偶因朋友會叙 酒且半 題此詩「我欲爲亭近海灣 坐中誰作蔡西山 梔橘梅筠須早植 莫敎風雨六年間」坐中有取以爲坦當之計者 謂好事可以旣就 未幾 時世多事 旋遭壬辰兵火 十六七歲月 忽然飄過矣 癸卯冬 余始返故山 越明年 咸州士友輩 相與結茅數緣 長文載 適假居其傍 協力成就 纔十年而屋又傾頹 則勢將還爲路傍之棄地 文載 更闢址列礎架樑覆瓦經營數載費盡辛苦 余因沿海而來 輪奐之美 結構之精 不惟不啻前之草舍 而又非余當初所望也 窃幸三十年宿願 畢竟得遂 而顧余衰敗己甚 方在積病瀕死之中 又安得窮山海之勝 極幽遐之壯觀 有如盛年期許也 只有終日杜門而己 然衿期之爽 仁智之樂 則何可與他境界比喩也 仍念舊時同遊 無一存焉 今所追隨 多是丁卯以後之人 寧不爲之府仰長懷 慨然興嗟也耶
文載 請刊此時 遂略序顚末 以志焉
寒岡鄭逑書

 

관해정기(觀海亭記)[해문]
내가 정묘(丁卯) 겨울에 분성(盆城)의 산해정(山海亭)에서 남명 조(曺)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을 때 그곳이 산과 바다의 정취를 겸하고 있어 즐겼고 그윽하고 곧은 예법에 합당하여 은근히 연모하였다.
정해(丁亥) 가을에 비로소 이 땅을 얻었는데 또한 최고운의 옛 행적이 절친하여 더욱 아꼈다. 우연히 벗들이 함께 모였을 때 술이 반이나 된 뒤 이 시를 지었다. 「내 정자를 바다 곁에 지으려니 이 자리에 누가 채서산(蔡西山)이 되리. 치자, 귤, 매화, 대는 일찍 심으리니 비바람 치는 육년간은 가르침이 없을 것이네.」 좌중의 사람들이 이것을 취하여 담당할만한 계획이라 여기고 좋은 일이니 성취될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지 않아 세상에 일이 많은데다 연이어 임진년의 병화를 만나면서 16, 17년의 세월이 홀연히 지나가 버렸다.
계묘(癸卯)년 겨울에 내 비로소 옛 산천으로 돌아와서 다음 해가 되었을 때 함주(咸州)의 선비 벗들과 서로 더불어 초가집을 몇 칸 엮었다. 장문재(長文載)가 마침 그 곁에 살아 협력하여 성취하였다. 겨우 10년 세월이 지나 집은 이미 기울어지고 무너져 그 정세가 마치 도로 길가에 버려진 땅과 같이 되었다. 문재(文載)가 다시 터를 닦고 초석을 세우고 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덮는데 일을 한지 몇 년에 비용은 다 없어지고 매우 고생을 하였다. 내가 바닷가를 따라서 돌아오니 그 외형의 맑고 아름다움과 엮은 구조의 정갈함이 뜻밖에 이전의 초가집뿐만이 아니었고 또한 당초에 내가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다행이 30년 숙원을 결국에는 이루게 되었다.
내가 몹시 늙고 쇠약해져서 바야흐로 오랜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것을 생각하면 또 어찌 산과 바다의 경승(景勝)을 다 감상하고 그윽하고 아득한 장관을 다 즐기겠는가. 만약에 젊은 나이라면 기약함이 있을 것이나 다만 종일 문만 걸어닫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벗과의 약속이 또렷하고 어진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이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이 연전하니 어찌 다른 곳의 경치와 비할 수 있겠는가. 인하여 옛날 같이 놀던 것을 생각하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따르는 사람들은 거의 정묘년 이후의 사람이 많으니 어찌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면서 길이 생각하고 강개(慷慨)하여 탄식하지 않으리오.
문재(文載)가 이 시간을 새길 것을 청하여 드디어 대략 그 전말을 서술하여 기록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씀

 

 

 

 

次鄭寒岡述板上韻幷小序
檜山之馬湖 南州名勝地 直湖之西五里 有所謂觀海亭 後靠崇山 前臨碧海 傍有巨川 從山谷中出 琴筑於庭階之足 川多自石 凹者凸者頎者盤子 隨步換形 令人目森 昔孤雲崔文昌 常決漪于盤石之縫 以爲流觴曲水 至今其遺跡宛然 洵仙人韻事也 憶余丁亥年間 從鄭寒岡 來遊於此 岡翁愛其勝有詩曰 我欲爲亭近海灣座中 誰作蔡西山 桅橘梅筠須早植莫敎 風雨六年間 咸昌諸彦遂發糚修之論鳩財立 亭于川上於是川聲海色一倍呈奇足以醒胃膻 而快胸襟又足以追隨杖履講性論理也 雖 然物之與 人緣亦有消長於其間迺者十年 兵革王事驅馳茫然置 亭于忘則亭豈負人哉 人固負亭者久矣 不圖年迫朝暮忝守玆壤公 事之暇斗起鴻泥之感 以便輿短壺率爾 登臨亭乎得無情乎 酒數行仍步原韻 一絶一詠 而罷同是約者州之某 某秀士也
憶昨岡翁過檜灣從遊如夢畵中山白首爲官重 到此梅筠風雨十年間
止之三十六年癸卯七月府使李瀞 稿

 

차정한강술판상운병소서(次鄭寒岡述板上韻幷小序)
회산(檜山)의 마호(馬湖)는 남쪽 고을의 명승지다. 마호(馬湖)에서 곧장 서쪽으로 오리를 가면 이른바 관해정(觀海亭)이 있다. 뒤로는 우뚝한 산이요. 앞에는 푸른 바다 마주했다. 옆으로는 큰 시내가 났는데 산골짜기에서 나와 뜨락의 계단 발치로 갖은 소리 울리며 흐른다. 이 개울에는 흰 돌이 많아 움푹 들어간 것, 튀어 나온 것, 길쭉한 것, 평평한 것이 걸음마다 모양이 달라져 눈을 어리게 한다.
옛날 문창후 최고운(文昌侯 崔孤雲)이 넓은 바위 틈새로 잔물결을 터서는 류상곡수(流觴曲水)로 삼았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완연하니 진실로 선인의 운치 있는 일이라.
생각건대 나는 정해(丁亥;1587) 년간(年間)에 정한강(鄭寒岡)을 따라 여기를 유람한 적이 있다. 그때 경치의 아름다움을 아끼시어 시를 지으셨다. “내가 바다 가까운 곳에 정자를 지으려니 이자이 그 누가 채서산(蔡西山)이 되리. 치자, 귤, 매화, 대를 일지감치 심으리니 비바람 육년 동안 못 불개 하여라.” 함안과 창원의 여러 선비들이 드디어 정자를 짓자는 논의가 있어 재물을 모아 냇가에 정자를 세웠다. 이에 하천의 물소리와 바다의 빛깔이 그 기이한 모습을 훨씬 더하였으니 족히 배속을 깨끗이 씻어 맑게하고 흉금을 쾌활하게 할 만하며 또 선생의 뒤를 좇아 성리학을 강론할 만 하였다. 비록 그러한 사물이던 사람이던 그 사이에 쇠퇴함과 성장함이 있으니 10년 동안 전쟁과 나라의 일로 내달리며 바쁘고 황망하여 이 정자를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정자가 어찌 사람을 의지하겠는가. 사람이 진실로 정자를 의지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햇수를 계산하지도 않고 세월만 지났는데 욕되게도 이 고을을 지키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 공무를 보는 사이에도 문득 그곳을 찾으려는 간절한 바램이 일어나 갑작스레 술병을 들고 몇 사람을 끌고 정자에 올랐으니 감회가 없을 것인가. 술이 몇 순배 돌고 인하여 원운(原韻) 일절(一絶)을 따라 한 수를 짓고 파하였다. 이때의 기약을 한 사람은 이 고을의 모모 수사(秀士)였다.
예날 강옹이 회산 바다 지날 때 유람한 곳이 꿈속 그림 산이런가.
늘그막 벼슬살이로 이곳에 오르니 매화, 대 비바람이 10년을 스쳤네.
선조(宣祖) 36년(1603) 계묘 칠월 부사 이정(李瀞) 짓다.

 

 

 

 

觀海亭重修記
寓之玩月山下 有亭觀海 卽鄭寒岡先生杖屨
〇晩而考槃處也 其海山之勝 越興任之顚末先
詩文言詳矣 陟斯亭而覽詩文悅若叨陪 函
親炙警 咳景仰山斗摩挲 古蹟蓋覺 伝山
泉之樂矣 然而海氣浸之山嵐濕之由來己
人倲字 巋然而椽礫傷朽頹砌欺璧不日將仆
賢遺韵餘馥幾歸之於 蕪〇有志齎恨
遠近同情 歲在己亥春余自五衛昵 侍之〇
〇命兮 符出爲知府來守是邦〇己歲 周朱墨
撓之暇時一厯尋悅仰今古〇先生之淸標
〇亭榭之將圯慨然有啚所以改構之則士人金
君昌臣以鄕中自好之士出而應曰諾是吾邦
之志而未就者敢不爲之同力以成 我侯尙賢義
〇〇之鳩材淘尾撤舊〇新而蕫是役其
〇架之濶狹制度之高下一遵先生舊觀母敊或
違盖寓屋隅瞻依之意也 閱數月而工告成佶
構之棈〇輪〇之修義非復前日將頹將圯之比
而山木不改幽鳥相嚶水石依舊〇景錯落山淂
之以爲佳水淂之心益〇想當日講詩經史冠童倘
佯之遐趔不覺神馳心往實有生晩〇歎倘諸君
子勿以亭臺之改觀爲春花秋月遊衍耽樂之勝
而勗一境之佳子英材深賾語旨於斯亭硏槧待 
史於斯亭克道先生當日之爲則爲賢者營構
之羲何梮專義於張文哉而己抑杰守慨然之啚其
不在是〇惟諸君勉之僉曰諾謹奉敎笑諸余爲
之記以勉諸君之語書而副之也
自鼠冬月 寧城後人 崔秉敎記

 

관해정중수기(觀海亭重修記)[해문]
창원의 완월산(玩月山) 아래에 관해(觀海)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은 정한강(鄭寒岡)선생께서 만년에 은둔하여 머무신 곳이다. 그 바다와 산의 아름다운 흥취와 정자를 지은 전말(顚末)과 선생의 시문에 이에 대한 말이 상세 하다. 이 정자에 올라 시문을 바라보니 잠시 만약 선생의 글상자를 받들어 옛 자취를 어루만지면 어진 자는 산과 같기를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 같기를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의 뜻을 더욱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바다의 짠 바람에 침식당하고 산의 습한 기운에 젖어든 지 오래되어 그 집은 우뚝하지만 서까래가 썩고 주춧돌이 상하고 벽이 무너지려하니 몇 날 지나지 않아 넘어지게 되었다. 장차 선현께서 남기신 시문(詩文)과 덕행(德行)이 거의 잡초더니 속에 묻히게 될 것이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은 한탄하며 멀고 가까운데 있는 동지들이 같은 생각을 가졌다. 세월이 흘러 이미 기해(己亥)년 봄 내가 오위닐(五衛昵)로부터 그를 모셨는데 나라의 명을 받고 창원부에 부임하여 이 지방의 경승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록 공사로 바빠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다. 한번 시간을 내어 지금과 옛날의 일을 가만히 생각하며 찾아보니 선생의 밝은 표상에 고개 숙일 뿐이다. 그러나 정자의 기둥이 장차 무너지려 하니 감개하여 이 정자를 다시 고쳐 지을 것을 도모하였다. 이 때 선비 김창신(金昌臣)군은 고을에서도 자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선뜻 나서서 말하였다. “좋습니다. 이 일은 우리 고을의 뜻인데도 아직 이루지 못했던 일입니다. 어찌 힘을 함께 하여 부사께서 현인을 숭상하시고 덕을 아름답게 여기시는 뜻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에 재료를 모으고 기와를 구우며 옛날 것을 철거하고 새롭게 짓기로 하고 이 공역(工役)의 감동(監董)을 맡았다. 기둥 간격이 넓고 좁은 것과 지붕과 서까래의 높낮이를 한결같이 진행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선생의 옛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 대게 선생께서 우거하시던 그 집을 앙모하여 우러러는 뜻이다. 여러 달이 지나서 공사를 마쳤음을 고하니 규모의 정치함과 장대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은 지난날 무너지고 쓰려지려고 한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산 속 나무에 깃 든 새들이 지저귀고 계곡의 물과 돌이 옛 모습 그대로의 풍경으로 산은 더욱 아름다움을 더하고 물은 맑음을 더하였으니 당일 시문(詩文)과 경사(經史)를 강학하던 젊은이들이 노닐며 그 아름다운 흥취를 즐기는 모습들을 상상하니 문득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정신이 내달리고 마음이 기울어져 실로 늦게 태어남을 한탄하게 된다. 여러 군자들께 이르노니 이 정자를 아름답게 고쳤다고 하여 봄에 꽃놀이 하고 가을에 달을 감상하며 즐거움만을 탐닉하는 명승으로 삼지 말고 한 고을의 가인과 영재들을 도와 이 정자에서 경서(經書)의 깊은 뜻을 탐구하게 하고 또 이 정자에서 시와 역사를 연구하게 하여 도를 새겨서 선생께서 이곳에 계실 때 하신 일을 하도록 하여라. 어진 군자가 정자를 다시 지은 아름다운 미덕이 어찌 장문재(張文哉)가 처음 지었을 때의 아름다운 미덕과 같다고 할 뿐이겠는가. 아! 태수의 개연한 도모가 이것에 있지 않겠는가.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노력하였도다. 모두들 맞다고 하니 삼가 교칙을 받들어 기문을 쓰면서 힘을 기울인 여러 군자들의 말을 덧붙인다.
自鼠(庚子;1780) 겨울 영성후인 최병교(崔秉敎) 쓰다.

 

 

 

 

 

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
愚嘗讀文穆公寒岡鄭先生觀海亭詩序 撮其大要曰 丁亥秋 始得此地 偶因朋友會叙 酒且半 題此詩 坐中有取以爲擔當之計者 而張文載適假居其傍 協力成就 窃幸三十年宿願 畢竟得遂 襟期之爽 仁智之樂 何可與他境界比喩也 文正公眉叟許先生 謁廟文 略曰先生 高厚之道 純一之德 其可見於言爲動作者 而令遭亂 遠來至南海上 謁先生之廟 始得其所依歸而從之 以是夫而暨 仁祖朝甲戌 鄕之先父老 議諸同志 質于文長 刱建廟宇妥 亭鄭文穆公而其浚 肅廟朝戊子追配 許文正公 此實陶山老先生書中所云 苟有先正遺塵播馥之地 莫不立書院 則將見吾東方文敎之大明也矣 鳴乎 斯亭之建 實爲本院刱設之關捩 則豈非吾林中爲一宮墻也歟 奧在 正廟辛丑 余之從王考 適爲任司於重修之時 告厥工而跋其文 以彰金公昌臣氏之美 其義也尙 其讓也厚矣 歲久而亭復傾頹 去乙卯 族員安斗喆甫 時以院首 謀諸鄕之士兪琦柱 琦柱 窃悶然先賢之遺韻幾歇 後學之藏修失所 迺獨捐銅而重葺焉 其尊賢衛院之誠 迨於時儒而罕覿矣 寧不偉哉 令年春 不侫 忝在齋席鄕之諸長老 嘉其事 付諸剞劂氏 而囑記于斗維 噫 斗維非其人也 詎其以藐然寂寥之談 自任其先後之耶 歸之於同任金斯文思彦甫 不自其文望而推之於余 余再辭不獲者 以若是從王考動勞之地 而重違諸長老謬託之意 强爲之贅一辭 然此皆兩先生遺稿中拈得 而有司重修槪略也而己 實非僣妄而傳會之云
歲在著雍敦牂端陽月下澣後學順興安斗維記

 

회원서원관해정중수기(檜原書院觀海亭重修記)[해문]
내 일찍이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관해정시(觀海亭詩) 서문을 읽었는데 그 대강을 발췌하였다. “정해(丁亥) 가을 비로소 이 땅을 얻어 우연히 벗들이 모이는 자리로 인하여 술이 반쯤 되었을 때 이 시를 지었는데 좌중에서 이것이 담당할만한 계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장문재(張文載)가 마침 옆에 살아 협력하여 성취하였다. 다행이 삼십년 숙원 했던 일이 드디어 이루게 되었으니 옛 약속의 또렷함과 인(仁)과 지(智)를 좋아함이 어느 다른 것의 경계가 이것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선생이 묘당에 알현한 글에 “선생의 높고 두터운 도(道)와 순정하고 전일한 덕(德)으로 그 말이 행동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혼란을 당하여 멀리 남해 바닷가에 와서 선생의 묘당을 배알하니 비로소 그 귀의하여 따를 바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인조() 갑술(甲戌;1643)년에 이르러 고을의 어른들 중 뜻이 같은 사람이 논의하여 문덕(文德)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물어서 허문정공(許文正公)을 배향하니 이는 실로 도산(陶山)선생 글 중에서 말한 바로 진실로 선조의 올바로 남긴 자취가 향기를 풍기는 자리이니 서원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우리 동방의 문교(文敎)가 크게 밝아짐을 볼 것이다. 아아! 이 정자를 세움은 진실로 본원의 창설에 관련 되는 것 이니 어찌 우리 사람의 한 울타리가 아니겠는가. 정조(正廟) 신축(辛丑;1781)년에 내가 조부를 따라 왔다가 마침 중수를 하였는데 유사를 맡았다. 공사가 끝나고 발문을 쓰는 것은 이창(以彰) 김창신(金昌臣)씨의 아름다움이다. 그 뜻이 고상하고 그 사양함이 두텁다.
세월이 오래 되어 정자가 다시 무너져 내리니 지난 을묘(乙卯;1795)년에 집안사람인 안두철(安斗喆)이 서원의 수장으로 있을 때 고을의 선비 유기주(兪琦柱)와 의논을 하니 기주(琦柱)가 선현들이 남기신 풍토가 거의 고갈되고 후학들이 학업을 닦을 장소가 없어짐을 민망히 여기고 혼자 돈을 내어 중수하니 그 현인을 존중하고 서원을 보존하려는 정성이 이 시대 유림에 보기 드문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금년 봄에 내가 재실의 자리에 있을 때 고을의 장로들이 그 일을 축하하며 판각을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두유(斗維)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아! 두유(斗維)가 비록 합당한 사람은 아니나 어찌 그 적막한 말을 하겠는가. 그 앞뒤에 일을 맡았던 김사문(金斯文) 사언(思彦)에게 돌리니 사언은 그 스스로의 문장이 볼 것이 없다고 나에게 미루었다. 내가 거듭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할아버지를 따라 힘써 노력한 때문으로 거듭 여러 장로들의 부탁하는 뜻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억지로 군더더기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선생의 문집에서 따온 것이며 유사와 중수의 계략일 뿐이니 실제 분수없이 내뱉는 말로 전하는 것은 아니다.
무오(戊午;1798)년 10월 하순 후학 순흥(順興) 안두유(安斗維)가 기록하다.

 

 

 

 

 

 

觀海亭杏壇會記
昔蘭亭之會 會者曰十二人惟謝太傳王右軍
爲見稱盖右軍以翰墨太傳以功名猶足自見
後世况有進於此有大於此者乎檜山府之觀
海亭卽文穆公寒岡鄭先生遺亭而先生歿後
思建院其傍以祀先生焉不幸徂玆院毁亭廢
行路〇息歲戊寅令十月望府之士三十六人
會於亭下故杏壇上相與謀曰吾州介在山海
間民俗稱美〇論歸一家家有詩禮之風人人
篤孝悌之行見椎於山南皆先賢遺澤也夫舍
菜先聖先師古禮也而院宇一欸顧今時不可
行獨就先生平日往來講息亭基攺建增修春
秋齋會於此朝夕從遊於此寓慕興起使鄭先
生遺芬剩馥百世不歇汞不墜於地不亦可乎
况斯亭者又吾鄕先輩所始終成就結構者也
其詳載先生記文中俛仰當時歲月今且過三
百年矣况我後人嗣而葺之煥焉攺歡不沒其
實又吾輩責也僉曰可出力拮据越十年而有
志竟成育英齋隨聲而唱和鄕射堂聞風而佽
助或以門物或自備納以至一鄕大小上下萬
口無異辭於此益服其人和可見先生之盛德
在人愈久不忘也於是定有司七人 金萬鉉 金
思栢 李樟煥 金吉元 安寅錫 金鎬源 曺仁煥 經
始於丙戌秋咔謀殫誠首尾八九朔工告訖而
亭復舊焉鎬源持會中書來溪上求余文以爲
記余惟廬山白廘洞唐山人李渤舊居也朱子
守南康日以其曾爲國庠事在先朝春春不置
悉恢前規其文曰亡釋經而敦事工彈巧而獻
圖曾日月之幾何汔廈屋之渠渠又曰曰名誠
其兩進柳敬義其偕立久莘摯之所懷謹巷顔
之攸執此兩句士之爲學大槩始終其盡之矣
余所稱有進有大於此者其在斯歟其在斯乎
鎬源字乃京與我同十三代祖好學而文願奉
斯語以歸與鄕人勉之克遂其所懷攸執焉則
是會也不泯於天壤間不但爲鄭先生一亭而
此其勉乎哉三十六人名姓列書下方俚來者考
焉先生始得此地之年六丁亥十月旣望商山
金麟燮謹記

 

重建觀海亭記
余少日東遊海上之盆城 登曺先生山海亭之合浦 登鄭先生觀海亭 二亭皆壓臨海澨山海背負泰山眼窮滄海三 叉七點分布排列 氣像意思雄深軒豁山海之勝 仁智之樂可端拱揖遜 而得焉曺先生命名有以也 觀海直不過據馬浦之上 海水眼前 自成一泓商旅 帆檣朝夕出沒邨落市聚上下彌望 亭左有流觴曲水後有崔學士 孤雲遺迹謂之閒暇窈窕 則有之而氣像意思終 是淺狹迫促迥遜 於山海徒以 其便於觀海鄭先生之有取 而名焉或以是夫雖然余之所 以寓慕興感 而不能已者不在乎 此曺先生生 有絶異之資道學蔚 然爲諸儒倡鄭先生 自弱冠摳衣往來於函丈之下所 以窮山海之勝 賞極幽遐之壯觀必 其心融神會目擊道存 有非言說所能 形容者矣 先生嘗出守巴陵郡始得 此地於合浦爲詩一絶以寄意 後三十年有府人張文哉者殫誠費力乃克遂先生之志其前後事 實先生自爲記詳矣其傍闢數仭宮墻祀先生而寓後學高山景行之思又以眉叟許文正公得先生嫡傳而嘗僑居往來于此也一體 俎豆享之不幸去戊辰秋入於朝家令甲祠撤而亭亦隨而不免 焉越明年鄕中物議以爲亭無關於院宇不可一任其頹圮蕪沒於 是定三有司金萬衡金思百曺儀鳳爲營建拮据之方而卽趨告于 知府尹侯永夏侯不以爲不可亟相與贊成其美經始於庚午九月 訖役于辛未二月規橅間架一遵舊制萬衡氏走書溪上請記噫吾 道之興喪繫天斯亭之成毁繫人繫天者吾無如之何繫人者吾得 以勉之後之覽此者其必重有感於斯文

端磎先生文集 金麟燮

 

觀海亭重修記
記言謁檜原廟文曰風雨霜露。無非天地之敎。而萬物沾被。各遂其生。此先生之德。至大而備。至簡而約。殆後賢後學所不可及者。某初從先生於泗上。後葬先生於新安。今至南海上。謁先生之廟。始得其所依歸而從之。卒而喪其所依歸而哭之。至今追其所依歸而慕之。其心如一日。欲竭力從之。至白首而不渝。輓鄭先生詞曰宜義精而仁熟。竆神化而自得。致廣大而精微。接陶山之正脉。記言序曰如天地之化育。日月星辰之運行。風雨寒暑之往來。傳讀是書。敢知寒岡眉叟兩先生之盛德大業。爲百世之宗師而已。更不敢以一辭贊之也。檜原先有觀海亭。在昌原府治西二十里。南臨大海。前有月影臺數里而近。其記所謂月萆山成影。月影在海中九十七億三萬八千尺有奇而極者是也。盖有崔孤雲遺蹟云。而兩先生杖屨所嘗逍遙。故立廟於觀海之東。以妥兩先生之靈。且爲諸生遊學之所。因其地以檜原爲額號。觀海屬焉。亭與講堂。相爲左右。其興也其廢也。實關吾道之盛衰。而年深世舊。亭將圮矣。鄕之士懼夫後生之瞻慕靡嚮。藏修失所。相與經紀。亟圖所以久遠者。使土木重新。丹靑改觀。廟貌因之以益嚴。士氣因之以復振。苟非尊德樂道之心。出於至誠。能如是乎。工旣訖。八百餘里而顓囑于傳。俾記之。嗚呼。寒岡先生生於嘉靖二十二年。少退溪先生若干歲。眉叟先生生於萬曆二十三年。少寒岡先生若干歲。相繼親炙。道統之傳。得其宗矣。而傳生乎此數百餘年之後。常恨未得爲先生徒。今以名附于先生之廟之廡爲幸。遂書之如此。
性齋 許傳記
性齋先生文集卷之十四 / 記

 

관해정중수기(觀海亭重修記)[해문]
기언(記言)에 회원(檜原) 묘당에 아뢰는 글에 “비바람 눈서리도 천지의 교화가 아닌 것이 없으니 만물을 적시어 각기 그 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선생의 덕화가 지극히 광대하여 두루 갖추어졌고 또한 지극히 간결하여 명약하니 후대의 현인이나 학자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穆:眉.穆)이 처음 사상(泗上)에서 선생을 따랐고 나중에 신안(新安)에서 선생을 장사를 지냈다.지금 남해 가에 이르러 선생의 묘당에 알현한다. 처음에 비로소 귀의하고 따를 바를 얻엇고 끝내는 그 귀의 했던 선생의 상을 치르고 곡하였다가 즈금 그 귀의했던 바를 따라서 그리워한다. 그 마음이 하루와 같아서 힘을 다하여 따르려 하나 머리가 하얗게 되어서도 달라짐이 없다. 정(鄭)선생 만사(輓詞)에 ‘마땅히 의는 정갈하고 인(仁)은 노숙하였고 신의 조화를 구궁하여 스스로 얻음이 있었다. 지극히 광대하고도 정미(精微)하니 도산(陶山)의 정맥을 접하였다.’고 하였다. 또 기언(記言)의 서문에 ‘천지가 화육(化育)하는 것과 같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운행하는 것과 같으며 풍우한서(風雨寒暑)가 왕래(往來)함과 같다.’고 하였다. 전(傳)의 이글을 보니 한강(寒岡)과 미수(眉叟) 두 선생의 성대한 덕과 큰 업적이 영원히 세상의 종사(宗師)가 됨을 감히 알 것 같으니 감히 한마디로 찬양할 수 없다.
회원(檜原)에 먼저 관해정(觀海亭)이 있었는데 창원부(昌原府) 관청에서 서쪽으로 20리이고 남쪽으로 큰 바다를 임하였고 앞에는 월영대(月影臺)가 몇 리 안에 있다. 그 기문(記文)에 이른바 달이 산 뒤에 숨어 오를 때 산 그림자가 바다 속에 97억 3만 8천척이나 되어 그 기이함이 지극하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대개 최고운이 남긴 자취라 한다. 두 선생의 발걸음이 이미 소요하던 곳이므로 관해정 동쪽에 묘당을 세워 두 선생의 영혼을 편히 모시고 또한 여러 유생들이 노닐며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 땅의 이름을 따서 회원(檜原)이라고 액호(額號)를 걸고 관해정(觀海亭)을 속하게 하였다. 정자와 강당이 좌우에 있으니 그것이 흥하고 폐하고는 실재 우리 유학의 성쇠와 연관 되는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정자가 장차 무너지려하니 고을의 선비들과 후생들이 우러르고 연모하는 것이 사하지고 공부하고 강학할 장소가 사라질까 두려워하여 서로 더불어 경영하여 오래고 낡은 것부터 빠르게 도모하였다. 토목을 모두 새롭게 하고 단청을 다시 칠하니 묘당의 모습이 더욱 엄숙해지고 선비들의 기상이 다시 진작되었으니 진실로 덕을 존중하고 도를 즐기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능히 이와 같았겠는가. 공사가 이미 마치고 주변 800여리에 알리고 내가 기문을 썼다.
아아! 한강(寒岡)선생은 가정(嘉靖) 22년(1543)에 태어나 어려서 퇴계(退溪)선생에게 몇 년을 배웠고 미수(眉叟)선생은 만력(萬曆) 23년(1595)에 태어나 어려서 한강 선생에게서 몇 년을 배웠으니 서로 친히 사숙함이 이어져 도의 계통이 전해졌으니 그 핵심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그 수백년 뒤 지금 우리에게 전하여 졌으나 항상 그 선생의 문도(門徒)가 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나 다만 지금 선생의 묘당 지붕 아래에 이름을 붙이게 된 것만도 다행스러운 것이다. 이에 이렇게 글을 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


觀海亭次寒岡鄭先生韻二首 姜永祉[해문-文山]
瀟灑孤亭俯碧灣 맑고 깨끗한 홀로 선 정자에 푸른 물결 굽어져 흐르고
水聲鳥語護名山 물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명산임을 돕는구나.
山南氛祲連天漲 산 남쪽 바다위의 짙은 안개는 하늘에 가득 차 서로 잇닿고
留取淸涼寄此間 맑고 서늘함을 취하여 머물며 이 사이에 보낸다.
秀木層巒壓海灣 아름다운 나무가 층층으로 겹친 산은 바다의 물굽이를 억누르고
前修遺蹟仰高山 앞서 익힌 유적(遺蹟)은 높은 산을 우러러 그리워한다.
當年曲水流觴處 올해 굽이굽이 휘어져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흐르게 하니
一道鳴泉瀉石間 한 가지 도(道)인 듯 샘물소리 바위틈에서 쏟아내네

 

강영지(姜永祉, 1857~1916) : 강영지(姜永祉)의 자는 낙중(洛中),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아버지는 강장회(姜章會)이고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를 증직 받았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강영지(姜永祉)는 1857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장중(莊重)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그는 효성도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는 작지주혈(斫指注血)하며 아버지를 모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1916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2이다. 묘소는 대초산 을좌 언덕에 있다. 
『남호유고(南湖遺稿)』는 5권 2책, 목판본이다. 서문은 하겸진(河謙鎭), 발문은 최경병(崔瓊秉), 강성수(姜聖秀)가 썼다. 『남호유고』권1에는 시(詩) 139수, 악부(樂府) 4편이 실려 있다. 권2에는 서(書) 48편, 권3에는 서(書) 22편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서(序), 기(記), 상량문(上梁文) 2편, 제문(祭文), 가장(家狀), 행장(行狀), 가전(家傳)이 실려 있다. 권5 부록에는 만장(挽章), 애사(哀辭), 제문(祭文), 행장(行狀), 묘지명(墓誌銘), 묘갈명(墓碣銘), 묘표(墓表)가 실려 있다.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

관해정 시굴조사 보고서/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