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강회백의 정당매 원운과 정당매각기 政堂梅閣記

천부인권 2020. 1. 22. 23:22

2016.3.16. 산청 단성면 운리 정당매각

 

2020년 1월 6일 지귀상가 노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진주강씨대동보(晉州姜氏大同譜) 통정공파(通亭公派)의 족보를 얻게 되었다. 2권 3권만 없는 전질이었지만 1권만 구입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니 산청삼매 중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선생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시절 심었다는 정당매(政堂梅)의 기록을 보게 됐다. 정당매각은 단성면 운리 339-1번지에 위치한다.

2016년 3월에 산청삼매(山淸三梅)라 불리는 매화나무를 찾아 갔을 때 매각(梅閣) 내에 걸려 있던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가 쓴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와 후손 강문회(姜文會)가 쓴 매화원운(梅花元韻) 그리고 매각을 중수한 후손 찬희(燦熙)와 대곤(大崑)의 차운(次韻) 등을 소개를 한다.
또한 1975년 강대곤(姜大崑)이 찬한 『정당매각중수기(政堂梅閣重修記)』가 족보에 실려 있어 이 또한 소개를 한다.

 

2016.3.16. 산청 단성면 운리 정당매의 매화
2016.3.16. 산청 단성면 운리 정당매

 

政堂梅閣重修記
政堂梅 在山淸斷俗寺舊址而 惟我先祖通亭先生 曾讀書此寺時 所種者也 先生 仕至政堂文學故 居人慕先生之德而 稱之者也 後寺廢而 閭 後孫築壇建碑時則 上之十四年丁未 後孫世周宅周所立 上之十四年丁未 叅照於歷代年表 可當於憲宗十三年丁未也 世周宅周兩公 必是周宇行而 周宇行通政公派司評公六世孫行則 右丁未距今百二十八年前 相必無遠矣 徃在乙卯 族大父文安公諱文會與近居諸宗 相議重建壇碑又建閣而 庇之築垣而園之 是謂之政堂梅閣也 以後年久歲深 未免頹廢徃在癸巳 當時國會議員族叔達秀氏 募京鄕 若干金而 重建之 又未幾風破椽朽 不蔽風雨嶺南宗人之 來京者 言必稱 政堂梅閣修理之及 余亦不勝憂懼而 身衰路遠 敢不生意矣 客秋族兄燦熙氏 來言梅閣修理之急曰 吾雖老矣 若有鳩財之方則 吾當躬徃 親監督役矣 余聞而起敬曰 吾雖老衰少 兄二年 兄旣如是則 弟何敢辞 乃通告于各門 同聲相應而 其中幸有如重熙桂重兩宗之特誠 先收合若干金 乃於今年仲春 與燦熙氏同伴 千里奉審政堂梅時 梅花爛漫 宛如笑迎 撫樹盤桓 感懷當何如也 周觀梅閣東頹西壞 果如所聞 乃決議試役 與中央宗會常務庸鎬宗 連絡京鄕諸宗 燦熙氏獨駐現地 喫若蕫役而 晋州宗人大珀 雲里宗人洛中兩君 左右之 一朔餘而工告訖燦熙氏 老年追遠之誠 眞可敬也 昔先生之賞梅時後 必有續和者而 不少槪見 自文案公始綴賡詩者 尙未刊布 今斯役之畢 又增募賡韻 總合成編 將刊于世 此其謂政堂梅詩集者也 子孫之登此閣者 不忘慕先之心則甄氏之思亭 奚獨專美於古哉 惟願僉宗 勉之哉勉之哉
檀紀四三〇八年乙卯 後孫 大崑 謹識

 

정당매각중수기(政堂梅閣重修記)
정당매(政堂梅)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340번지의 옛 단속사지(斷俗寺址)에 있는데 그 옛날 우리 선조 통정(通亭)선생께서 일찍이 소년시절에 이 사찰(寺刹)에서 독서하신 때에 손수 심으신 것이다. 그런데 통정(通亭)선생께서 그 뒤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시게 되었으므로 이 지방 주민들이 선생의 덕을 추모하고 이 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 뒤 단속사(斷俗寺)는 폐사(廢寺)가 되고 그 폐허일대(廢墟一帶)는 촌락(村落)이 되었다.
후손들이 단(壇)를 만들고 비를 세워 놓고 그 비에 「上之十四年丁未 後孫世周宅周所立」가 건립하였다고 새겨 놓았는데 이 「上之十四年丁未」를 「歷代年表」로 참조(叅照) 해 보니 이 해는 헌종 13년, 정미(丁未;1847)년에 해당하고 세주(世周) 택주(宅周) 두 어르신은 필시 주우행렬(周宇行列)일 것이니 주우항렬(周宇行列)은 통정공파(通政公派) 사평공(司評公;諱 鶴孫) 6세손인 즉 전술(前述)한 정미(丁未)는 지금으로부터 백이십팔년(百二十八年)전 이라 앞으로 올 일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을묘(乙卯;1915)년에 큰아버지 뻘이 되는 먼 일가인 문안공(文安公) 이름이 문회(文會)이신 분이 근처에 사는 모든 일가들과 상의(相議)하고 또 한 개의 비를 세우고 또 기념각을 세워 비석을 비호(庇護)하고 그 주위에 담장을 건조하여 놓고 이 각을 정당매각(政堂梅閣)이라 하였다. 그 뒤 세월이 매우 오래되어 매각(梅閣)이 무너져 못쓰게 되어 지난 계사(癸巳;1953)년에 당시 국회의원으로 먼 아저씨뻘 되는 달수(達秀)씨가 서울에 사는 모든 종씨에게 약간의 금액(金額)을 모금(募金)하여 중건(重建)했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안 되어 또 다시 개와(蓋瓦)는 파손되고 연목(椽木)은 폐후(廢朽)하여 풍우(風雨)를 불폐(不蔽)하게 되어서 영남의 종인(宗人)들로 내경(來京)하는 사람마다 모두들 정당매각(政堂梅閣)의 수리(修理)가 급하게 되었다고 말씀들을 하시므로 나 역시 걱정되고 송구(悚懼)스러움을 불승(不勝)하는 바이나 몸은 노쇠(老衰)하고 거리(距離)는 멀어서 그 보수작업을 힘에 부치어 감히 마음먹지 못하였던바 지난 가을 족형(族兄) 찬희(燦熙)씨가 오셔서 매각(梅閣)의 보수가 급하게 된 것을 말씀하시며 내가 비록 늙었으되 만약(萬若)에 그 보수비를 모금하는 방법을 세워준다면 내가 현지(現地)에 내려가서 직접 그 수리하는 역사(役事)를 감독(監督)할 터이니 자네가 서로 협력하여 이 위선사업(爲先事業)을 완수(完遂)해 주지 않겠는가 하시니 이 찬희(燦熙)씨는 바로 통정공(通亭公)의 직손(直孫)이시다.
나는 찬희(燦熙)씨의 그 말씀을 듣고 다시 일어나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저도 비록 노쇠(老衰) 하였으나 형보다는 2년이나 나이가 적은데 형께서 이미 그러한 각오(覺悟)를 가지셨는데 동생이 어찌 감히 사퇴(辭退) 하겠습니까. 그리고서 바로 각파문중(各派門中)에 통고하였더니 모두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여 주시고 그중에 다행(多幸)히 중희(重熙)씨와 계중(桂重)씨의 두 종인(宗人)은 특별성금도 내주셔서 우선 수금(收金)한 약간의 돈을 가지고 올해 봄에 찬희(燦熙)씨와 함께 천리(千里)길을 달려가서 정당매(政堂梅)를 봉심(奉審)하니 때마침 매화꽃은 만발(爛漫)하게 피어서 마치 웃으면서 맞아주는 것 같았다. 그 나무를 어루만져 주고 그 주위 언덕을 돌아보니 그 감회(感懷)는 어떠하다 형언(形言)하기 어려웠고 다시 매각(梅閣)을 둘러보니 동쪽도 퇴락하고 서쪽도 파괴(破壞)되어 과연 소문들은 바와 같았다. 그래서 바로 수리 공사를 시작할 것을 결의(決議)하고 중앙종회상무 용호현종(庸鎬賢宗)과 함께 서울 각지의 모든 일가(一家)에 연락하였다. 찬희(燦熙)씨는 홀로 현지에 남아 계시면서 여러 가지 고생을 하시면서 공사감독을 하시였는데 이때 진주종인(晋州宗人) 대박(大珀)씨와 운리종인(雲里宗人) 낙중(洛中)씨 두 분이 좌우에서 도와드리었다. 그렇게 하여 한달 여 만에 이 공사를 마치게 된 것이다. 찬희(燦熙)씨는 연세가 많으심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먼 선대(先代)를 추앙하는 사업에 바치신 그 정성은 가히 존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옛날 통정공(通亭公)께서 이 정당매(政堂梅)를 보시고 기리어 칭찬하신 시(詩)를 지어 남기신 이래(以來) 이 매화를 찾아와서 이 매화를 즐겁게 구경하고 통정선생(通亭先生)의 운자(韻字)에 따른 기념시(記念詩)를 모집(募集)하여 놓은 바 있었으나 아직까지 간행반포(刊行頒布)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번에 이 역사(役事)의 일을 마치는 동시에 또 다시 통정선생의 작시(作詩)하신 운자(韻字)에 따라 널리 기념시를 모집하여 전후양차(前後兩次)에 응모한 시를 총합하여 「정당매시집(政堂梅詩集)」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세상에 간행반포(刊行頒布)하는 바이다. 앞으로 자손 된 사람들이 이 매각(梅閣)에 오르게 되면 반드시 선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잊혀 지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옛날 견씨(甄氏)의 사정(思亭)만이 선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정자(亭子)라고 칭찬(稱讚)을 독차지하게 될 것인가 생각하는 바이다. 바라노니 여러 종인(宗人)들은 이 매각에 찾아와서 모선지심(慕先之心)을 함양(涵養)하기 바라고 또 바라는 바이다.
을묘(乙卯;1975)년 늦은 봄에 후손 대곤(大崑)이 삼가 기록하다.

 

 

정당매각 전경

 

정당매각( 政堂梅閣) 편액

 

 

 

政堂梅閣記
頭流之支 東騖四十里 而至錦溪之濱 有娟秀而亭峙者 曰玉女峯 峯之南平衍成區 舊有浮圖氏宅焉 爲域中大伽藍 世所傳斷俗寺者 是已寺廢 而爲民居燔榛闢翳 爲舍爲田漸成村落 中有一樹梅於荒原刦灰之餘盖 政堂姜先生之甞讀書于 是寺而手植者也 洞之黧老童孺以 爲是往昔賢大夫之所栽養者 相與戒勿剪愛護之母朁 是以閱累百禩於窮山絶壑樵牧之社 而芳馨尙未沫矣 我叔祖敬齋先生亦有手植柿于 餘沙世庄至今繁茂如 當日人以山南 兩絶稱焉盖兩賢 以通家懿親 同隣而居  同朝而仕位致卿相 澤被生靈遺蔭 所曁雖樹木猶爲愛 惜况德業之可久而可大者乎 中年姜氏某某以其祖先手澤幾乎泯沒 謹築壇以封之刻石以表之視 舊稍章章矣 今年夏姜文案文會氏猶憂 其寂寞而無所於瞻依以 七十五歲之衰馳四三百里之遙 謀于諸宗構一閣于 其傍不數月 而功告成乃延隣里觴以落之與 其座者咸曰 先生之有後 而先生之傳 其益永矣 山若增而高水若益 其淸茂林雜卉異巖奇石 莫不有精彩 閣不待飭而煥焉 梅不待春而榮焉 繼是而咸以文案公之志爲志 則是閣 之有成而無圮可執契俟也 敬書此以勖之
歲乙卯臘月 晉州后人 河龍濟 記
                             河元逵 書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
두류산의 한 갈래가 동쪽으로 40리를 휘달려 금계(錦溪)¹⁾ 변(邊)에 닿아 아름답고 빼어난 모습으로 누정처럼 우뚝 솟았으니 바로 옥녀봉(玉女峯)²⁾이다. 그 남쪽에 편평하고 넓은 지대가 펼쳐진 곳에 중들이 머물렀던 집들이 있었는데 지역 내의 커다란 가람(伽藍, 절)으로 세상에서 단속사(斷俗寺)라 전하는 곳이다. 절은 이미 폐사(廢寺)가 되어 민간인들이 들어와 덤불을 태우고 개간하여 집을 짓고 전답을 일궈 점차 촌락이 형성 되었다. 마을 가운데 손질하지 않은 땅에 매화 한그루가 겁회(刦灰)³⁾의 잔재처럼 서 있는데, 정당(政堂) 강선생⁴⁾이 일찍이 이 절에서 독서할 때 손수 심은 것이다. 동네의 노소 주민 모두가 이 나무는 옛 어진 대부(大夫)가 심고 가꾼 것이라 하면서 자르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며 아끼고 보호하여 마지않았다. 이로 인해 수백 년간 궁벽한 산속 깎아지른 골짜기에 자리하여 땔감을 장만하고 짐승을 치는 작은 마을에서 돌봐 온 것이며 향기가 아직도 여전하다.
나의 종조(宗祖) 경재(敬齋)⁵⁾선생 또한 감나무[柿]를 여사(餘沙, 남사마을)의 옛집에 손수 심었는데 지금도 마치 그 당시처럼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지리산 남녘 사람들은 (정당매와 이 감나무를) 양절(兩絶)이라 일컫는다. 통정, 경재 두 어른의 양 가문이 선대로부터 대를 이어 친밀하게 지내왔고 정의(情誼)가 두터운 친척으로 같은 마을 이웃으로 살면서 함께 조정에서 벼슬하여 경상(卿相)에까지 올랐으며 음덕을 남겨 덕택이 백성들에 두루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수목이긴 하지만 더욱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것이니 하물며 덕업이 오래가고 크다고 할 수 있음에야!
얼마 전에 강씨 모모(某某)가 그 선조의 손길이 거의 스러져 없어질 지경이 되자 조심스레 단을 쌓아 매화나무를 돋우고 바위에 글을 새겨 표(表)함으로써 옛 모습을 되찾아 약간 보기가 나아졌다. 금년 여름에 문안(文案) 강문회(姜文會)씨가 그 적막함과 우러르며 의지할 곳이 없음을 걱정하여 75세의 노쇠한 나이임에도 3~4백리의 먼 거리를 달려와 일족과 의논하고 매화나무 옆에 정각(亭閣)을 짓기로 하였다. 몇 달 만에 공사를 끝내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술잔을 권하며 낙성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통정(通亭)선생의 후손이 있음과 선생의 전한 바가 더욱 영원할 것이라’고 하였다.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은 더욱 맑아졌으며 우거진 수풀과 갖가지 꽃, 기암괴석 어느 하나 정채(精彩)를 띠지 않은 것이 없고 매각은 별달리 꾸미지 않아도 빛나며 매화는 봄이 아니어도 꽃다웠다. 이를 이어 받아 모두가 문안공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여긴다면 정당매각이 전재하여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족의(族誼)를 두터이 하는 계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글을 써서 힘쓰도록 권면한다.
을묘(乙卯;1815)년 음력 섣달 어느 날
진주 후학 하용제(河龍濟)⁶⁾ 짓고,
               하원규(河元逵) 쓰다.

 

【주석】
금계(錦溪)¹⁾ : 웅석봉에서 발원하여 청계, 운리, 입석리를 거쳐 남사에 이르며 도평 앞을 지나 경호강(鏡湖江)에 합류한다. 지도상에서는 남사천(南沙川)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상류에서 청계, 입석 쪽에서는 드물게 석계(石溪)로 쓴 예가 있다. 남사에서 사수(泗水), 도평 앞에서 문천(汶川)이란 별도의 이름이 있다.
옥녀봉(玉女峯)²⁾ : 단속사지 북쪽에 인접한 산으로 해발 414.4M이다.
겁회(刦灰)³⁾ : 세계가 파멸 될 때 크게 일어나는 불을 겁화(劫火)라 하고 그 남은 재를 겁회(劫灰)라 하는데 병란(兵亂)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정당(政堂) 강선생⁴⁾ : 강회백(姜淮伯;1357~1402)을 지칭한다. 진주인으로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공목공(恭睦公) 시(蓍)의 아들이다. 고려 말 공양왕 때 정당문학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지냈다. 문집으로 통정집(通亭集)이 있다.(한국민속문화대백과 요약 인용)
경재(敬齋)⁵⁾ : 하연(河演)을 일컫는다. 진주인으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이고 부윤(府尹)을 지낸 하자종(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태종 세종 문종조에서 대제학, 형조판서, 좌참찬 등 고위직을 거쳐 영의정 까지 올랐다.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 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다.(한국민속문화대백과 요약 인용)
하용제(河龍濟)⁶⁾ : 하용제(河龍濟;1854~1919)는 산청 사람으로 자는 은거(殷巨) 호는 약헌(約軒). 곽종석(郭鍾錫)의 문인. 남사마을 출신. 원정구려(元正舊廬)의 주인. 1919년 3월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중 한명

 

 

 

梅花原韻
偶然還訪故山來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滿院淸香一樹梅 뜰에 가득한 향기는 한그루 매화로구나
物性也能知舊意 매화가 옛 사람을 알기라도 하는 듯
慇懃更向雪中開 은근히 나를 향하며 눈 속에서 피었구나.
一氣循環往復來 한 기운이 돌고 돌아 다시 오고가니
天心可見臘前梅 하늘의 마음은 섣달의 매화에서 볼 수 있네
自將鼎鼐調羹實 스스로 큰 솥에 매실 골라 국 끓일 것인데
謾向山中落又開 부질없이 산중에서 떨어지고 또 열리네.

 

右二首詩卽先生當日 오른쪽의 두 시는 선생이 살아계실 때
所哦詠者也先生沒後 읊조려 지은 것으로 선생의 별세 후 
入乙卯臘月日 을묘(1975)년 섣달 어느 날에
後孫文會盥手謹揭 후손 강문회가 손을 씻고 삼가 걸었다.
    河弘逵書 하홍규가 글씨를 썼다.

 

 

 

 

 

敬次原韻
惟吾先蹟好傳來 생각건대 나의 선조 자취가 아름답게 전해오니
智異山前有古梅 지리산 앞에 오래된 매화 있었구나.
千里遠尋追慕地 천리 먼 곳 추모하러 찾아와 왔으니
撫花此日我心開 꽃을 어루만지듯 이날 내 마음 열었네.
爲問淸香何處來
居人指點政堂梅
于嗟先祖曾我植
不變淡容依舊開
檀紀四三〇八年乙卯孟夏  1975년 을묘년 이른 여름에
後孫 燦熙 후손 강찬희

 

聞香千里故山來  향기를 물어 천리 옛 산천으로 찾아오니
萬疊頭流一樹梅  겹겹으로 둘러싼 두류산에 한 그루 매화가 있네.
如答雲仍追慕意  먼 자손이 추모하는 뜻처럼 답하니
滿天風雪爛然開  하늘 가득 눈바람 속에서도 환하게 피었구나.
此地雲孫肯構來  이 땅으로 먼 자손이 업을 이어 왔더니
名山長護政堂梅  이름난 산이 정당매를 오래도록 보호하네.
讀碑半日摩挲立  반나절에 비석을 읽고 어루만져 세웠으니
舊貫丹靑一閣開  옛날 같이 단청한 여각이 열렸구나.
後孫 大崑  후손 강대곤

 

출처 및 참조
진주강씨대동보1권-진주강씨대동보편찬위원회/광일사(1994.12)
단성면지-단성면지편찬위원회/대보사(2019.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