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2.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와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
의창구 북면 상천리 435번지에는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와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가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36m를 가리키고 「위도 35°21′37″N 경도 128°35′04″E」라 알려 준다.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는 1942년 김해김씨 김현구(金顯昫)의 효행을 기려 세운 효행비(孝行碑)이고, 그 옆은 1962년 김해김씨 김현구(金顯昫)와 아우 현세(顯世), 현영(顯永) 3형제의 효행을 기려 세운 비로서 제목은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이라 새겼다. 이 비의 높이는 210cm, 비신은 폭 51cm, 두께는 20cm이다.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
화강암으로 만든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의 제목과 함께 비의 전면에 아래처럼 효자 현구(顯昫)를 기리는 글씨를 새겼다.
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
於虖至誠 天感神格 아! 지극한 정성이여 하늘이 감동하여 신의 격에 올랐다.
鶉兎與魚 合應來適 메추리·토끼·잉어가 베풀어 함께 응하여 맞이해 왔다.
實載儒論 名褒聖蹟 드디어 선비의 명부에 실어 성스런 자취 명성을 기리네.
扶植綱倫 永傳片石 인륜의 얼 바로 섰으니 한 조각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리.
壬午四月 日 1942년 4월 일
一慕契 立 일모계 세움.
【주석】
*虖-울부짖을 호,어조사 호 鶉-메추라기 순, 수리 단
與-주다, 베풀어주다 植-심을 식,둘 치
우측 비 전면의 제목은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라 음각했고, 비대와 가첨석은 화강암이지만 비신은 청석을 사용했다. 비문(碑文)는 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이 기록했으며 글씨는 유당(攸堂) 김종하(金宗河)가 썼다. 비문의 내용이 희미하여 그 내용은 유당선생이 쓴 창원군지(1962)에서 옮겼다.
金孝子三昆弟紀積碑
檜山近古 有孝子金公三昆季 伯諱顯昫 仲諱顯世 季諱顯永 以誠孝爲人所崇慕 前二十年辛巳 坊乃諸人士 觀聽三公之賢者 動議醵金 竪碑于里側 只書伯公之蹟 而紀述殊踈略爲欠 今年辛丑 內外諸孫 合謀協力 將更竪一碑于其側 以昭揭三公之行 伯公之子炳培君 來屬純永以鐫刻之文 而以其先師宗老訥齋先生所立傳 爲之據 純永 敬受以讀 傳所載 簡而盡 實不敢有所增減 乃謹按書之 而繁以銘 其傳曰 金孝子三人 爲昆弟 駕洛王之裔 少痊德承八世孫也 父曰周植 自圻之長湍流寓玆土 貧單業耕稼 孝子昆弟 自幼 於父母 克愛敬 晨昏 不發定省 有美味 必懷而進 盖其至性 若天植也 嘗遘疾淹數歲顯昫 嘗糞合藥 藥不効醫云 兎肝可 顯昫 手劍上山 號于天 忽 有兩兎自投遂用之 如其言立効 父又欲魚膾鶉炙 時 氷凍過江 有魚登舟 晨拓門扉 飛鶉入袖者三 父喪及葬 將廬墓 母力止之乃已 日上墓哀號 一日夢 父詔于顯昫曰 吾體魄不安 改葬也 遂改葬 父又來現曰 此亦未可 若至誠禱天 吉地可得 乃築壇祭天 期以百日齋沐 其季曰 二兄年衰 恐無以堪 顯永 竟卜日致潔 未及期 夢有一老人 指示一處顯永告于其兄 兄夢亦然 迎地師往求之 果得夢中所見 即安厝 自後子孫 蕃衍人以爲孝之報也 母病谹顯世 又禱神有應 亨壽八耋也 銘曰
至行古難 豈獨衰叔 所以欽誦 氷鯉幕雀 允矣三公 昆金李玉 聯床竭誠 神天是燭 訥翁大筆 有煥其蹟 自足千古 示警昏濁 我以之銘 述而不作 砥柱狂瀾 無曰片石
夏山 成純永 撰
壬寅四月日
盆城 金宗河 書
2019.4.2. 처사김해김공휘현구창효비(處士金海金公諱顯昫彰孝碑)와 김효자삼곤제기적비(金孝子三昆弟紀積碑) 뒤에서 본 전경
김현구묘(金顯昫墓) 풍경
위 비석이 세워진 곳에서 동으로 20m 떨어진 곳에는 효자 김현구(金顯昫)의 묘소(墓所)가 있는데 묘 앞에는 『회은처사김공지묘(檜隱處士金公之墓)』라 제목한 김현구묘갈명(金顯昫墓碣銘)이 세워져있다. 그 내용은 비문을 직접 읽어 옮겼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36m를 가리키고 「위도 35°21′37″N 경도 128°35′05″E」라 알려 준다.
檜隱處士金公之墓
公諱顯昫 字致聲 號檜隱 姓金氏 駕洛王之後也 生于丁巳十月十六日 以八十四歲之庚辰四月二十二日卒 葬于昌原郡北上川里峙川後山負戌原 今年春 胤子炳培 以狀來曰 吾父事蹟 先師已立傳 闡發無餘而墓道 尙閥儀衛 第念先兄 不幸夭逝 賤年且踰六十 深恐一朝溘然茲事之終於未就 方刻石表阡 乞子之銘之也 盖炳培君 早受學于余先人 故與余善 無庸辭爲 始 公之大人翁 早嬰家禍 自圻之長湍 流離南下 不恒厥居 生公于密陽之屯德里寓舍 自幼 孝友成性 及大人翁 卜居上川 則公亦長成矣 家計甚薄 而凡志體之養之力所能及者 靡不爲之 第擧其尤者 則親濟之時 山兎自投 氷鯉登舟 飛鶉墜地 苟非至誠之感格神天 庸詎有是哉 市肆 距家一舍 而親在之時 爲供甘旨 月必六往 不以寒暑雨晹 而或闕 親歿之後 爲其幽宅之不利 因夢兆而與其二弟 百日祈天 竟得吉地 鄕人士 擧實欲呈狀于府營 則公卽取其狀火之 事竟不徹 公歿後 輿論踵起 刻石表于里門焉 大人翁 諱周植 余曾撰墓銘 詳其先系 故不著 妣徐氏 配李氏男長赫培 早夭 次即炳培 女適朴起鵬 孫曾不錄 銘曰
亥會滔滔日趨下 綱淪法鼓喪彛天 氷鯉幕雀復見今 王孟千載與同肩
矧余先人曾立傳 安用區區作銘辭 然且刑珉樹墓道 俾後過者式於斯
癸丑三月 日
宗後人 金鍾河 譔
宗後生 金成學 謹書
[해문]
김현구묘갈명(金顯昫墓碣銘)
공의 휘는 현구(顯昫)요, 자는 취성(致聲)이며 호는 회은(檜隱)으로 성은 김씨이고 가락왕의 후손이다. 정사년(丁巳年) 10월16일에 출생하여 84세인 경진 4월22일 돌아가셨다. 창원군 북면 상천리 치천(峙川)마을 뒷산의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례했다. 금년 봄 맏아들 병배(炳培)가 글을 가지고 찾아 와서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사적은 이미 돌아가신 스승으로 세워 전하니 묘지의 도리로서 밝혀 드러낼 여지가 없다. 오히려 문벌의 법도를 지키려 먼저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간 불행을 겪은 형의 차례를 지내려는 생각에 –중략-
계축(1973)년 3월 어느 날
종 후손 김종하(金鍾河) 삼가 씀
김현구묘(金顯昫墓) 뒤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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