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퇴촌동 순흥안씨 세거지 첨소대 瞻掃臺

천부인권 2020. 1. 3. 05:42



2020.1.2.퇴촌동 퇴은처사소요지지 마애석



2020.1.2.퇴촌동 첨소대와 순흥안씨세장 이 기록 된 마애석


의창구 퇴촌동 산 73번지는 창원대학교 동력실 뒤편의 산인데 원주민들은 ‘똥메산’이라 부르지만 기록으로 적을 때는 ‘독뫼산(獨뫼산)’이라 쓴다. 이곳은 퇴촌동 순흥안씨들이 대대로 물려받아 이어 온 세거지로 선산이다. 이곳 일대의 큰 바위에는 퇴촌동 순흥안씨들과 관련된 마애각(磨崖刻)들이 산재하는데 창원대학교 동력실 바로 뒤에는 『퇴은처사순흥안공소요지지(退隱處士順興安公逍遙之地)』라 새긴 마애석이 있다. 이 마애석에서 110m남서쪽에 위치한 곳에는 커다란 암괴가 있는데 이곳에는 『순흥안씨세장(順興安氏世葬)』, 『첨소대(瞻掃臺)』라는 마애각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 모든 마애각들은 퇴은(退隱) 안두철(安斗喆)의 5세손인 운산(雲山) 안승달(安承達 : 1905-1980)이 새긴 것으로 파악된다. 『첨소대(瞻掃臺)』가 위치한 이곳은 위치기반 고도계가 높이 58m을 「위도 35°14′40″N 경도 128°41′21″E」로 표시한다.
유당(攸堂) 김종하(김종하(金鍾河))가 1962년에 발행한 창원군지(昌原郡誌)의 내용 중에는 첨소재기(瞻掃齋記)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 기록은 이곳 똥메산에 있는 『첨소대(瞻掃臺)』의 마애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라 소개를 한다.
‘첨소(瞻掃)’란 ‘살펴서 쓴다.’라는 뜻으로 ‘첨소봉영(瞻掃封塋)’ 즉 ‘조상의 무덤을 살펴본다.’라는 의미이다. 첨소대 아래에 있었던 첨소재의 기문 내용은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이 기록한 것이다.




2020.1.2 퇴촌동 순흥안씨세장(順興安氏世葬) 마애석




瞻掃齋記
州南二十里 有退村里 安氏集居之地 而聯世趾美 不隕令聞 有退隱處士諱斗喆 早抱經濟之志 頗若有爲於世 而生値衰世 莫可藉手 則遂絶意榮途 施政于家 而推及坊里 殖財以補民瘼 興學以導後秀 俗尙丕變 至有坊人之立碑以頌德焉 今距公之歿 殆將六十年餘 而凡人士之行過州南者 無不以公之事 誦說也 日 公之玄孫承達 訪余而言曰 退隱祖體魄之藏 在栴檀山麓上林村後先塋之下 而尙無齊宿之所 此實數世來齎恨者也 粤自曾王考以來 勤栽松檟 寔至于今不懈 而今則杲桷欂櫨 各稱其材 不肖肆遵先志 方營構屋 乞賜一言 俾不肖有所持循勉勵焉 余曰 不亦善乎 顧今俗尙大乖 人家子弟 類皆奔趨於新潮 凡屬舊日父祖之事 則一置不問 而子能有志此事 儘可謂知追先報本之道矣 然抑有大且重於是者 退隱公 積德貽基 家裕人昌 以逮于子之身 則子當繩武其業 孝悌成於家 信義孚於衆家聲益彰 則夫孰不曰退隱公之有後也 此余之所申囑於子者 而若徒止於歲時齊宿瞻掃而已 則非所以盡追先報本之道也 子其勉之哉
金柄璘


첨소재기(瞻掃齋記)
주의 남쪽 20리에 퇴촌리(退村里)가 있는데 안씨(安氏)의 집성촌이다. 대를 이어 그 터가 아름다우니 그 소문이 쇠락함이 없었다. 이는 퇴은처사(退隱處士) 휘(諱) 두철(斗喆)¹⁾로 인함이다. 그는 일찍이 제물을 경영하는데 뜻을 품었는데 자못 세상을 위함이 있는 듯하였다. 쇠락하는 세상에 태어나서도 남에게 손을 빌림이 없었다. 드디어 영달의 뜻을 버리고 가정에서 다스림을 베풀고 그것을 미루어 마을에 미치게 하였으니 제물을 불려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도왔고 학문을 진작시켜 후대의 수재들을 인도하였다. 시속(時俗)이 크게 변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지금 공께서 돌아가신지 60여년이 되었다. 무릇 사람들이 이곳 남면지방을 지날 때 공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루는 공의 현손(玄孫)인 승달(承達)이 나를 찾아와 말하였다. “퇴은(退隱) 할아버지의 무덤은 전단산(栴檀山) 기슭의 상림촌(上林村) 뒤의 선영(先塋) 아래에 있으나 지금껏 제숙(齊宿)을 하는 재실이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여러 대 동안 한탄하던 일입니다. 증조할아버지 이래로 솔과 오동나무를 가꾸어 지금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서까래와 두공과 동자기둥이 각기 그 재목이 될 만합니다. 불초가 감히 선대의 뜻을 좇아서 재실을 경영하였으니 한마디 말씀을 청합니다. 불초가 힘써 노력한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하였다. 내가 말하였다. “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지금의 풍속을 돌아보면 크게 어그러져서 세상 사람들의 자제들은 모두 새로운 사조에 몰려 달려가서 옛날 조부와 부친의 일을 한 구석으로 내쳐두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대는 능히 이 일에 뜻을 두었으니 참으로 선대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를 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큰 일이 있다. 그것은 퇴은공(退隱公)이 덕을 쌓아 그 기반을 닦아 준 것이다. 그 덕분에 집안이 넉넉하고 사람이 많아져서 그대에게 이르렀으니 그대는 또한 마땅히 그 가업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효도와 공경으로 집안을 이루고 신의와 의리로 여러 집안을 기쁘게 하면 집안의 명성이 더욱 빛날 것이다. 이리하면 누가 퇴은공에게 후손이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재실이 다만 제숙(齊宿)하고 조상을 우러러는 것에 그친다면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는 다하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명심하여 노력하기 바라노라.”
김병린(金柄璘)


【주석】
안두철(安斗喆 1799-1876)¹⁾ : 조선후기 학자로 창원 퇴촌인(退村人)으로 호는 퇴은(退隱)이다.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衷將軍僉知中樞府使) 안중현(安重玹)의 증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