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창원시 퇴촌동 상촌마을 어모장군 김중철 추모각 追慕閣

천부인권 2020. 1. 31. 08:11



2020.1.26 퇴촌동 상촌마을 어모장군 김중철공 비각 전경


창원대학교 학군단 뒤편 의창구 사림동 9번지의 고도는 위치기반고도계로 해발 93m이고 「위도 35°14′56″N 경도 128°41′34″E」라 표시한다. 이곳에는 어모장군 김중철(禦侮將軍 金重喆)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각이 위치해 있다. 원래는 창원대학교 인문대 뒤편에 있었으나 창원대학교 내의 시설용지(施設用地)로 편입됨에 따라 1987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 비각 내에는 1936년에 세운「禦侮將軍金海金公諱重喆遺墟碑(어모장군김해김공휘중철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비각(碑閣)은 1954년에 세운 것으로 육주식(六柱式)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이다. 제호는 추모각(追慕閣)이라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87년 이전 당시에 중수한 것이며, 이때 주춧돌, 지붕 등이 크게 수리되었다.
추모각(追慕閣)의 중앙에는 어모장군김해김공휘중철유허비(禦侮將軍金海金公諱重喆遺墟碑)가 있고, 비각에는 이현섭(李鉉燮)의 단산비각기(檀山碑閣記), 어모장군단산공사기(禦侮將軍檀山公史記), 영(詠)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2020.1.26 김해김씨 단산공파 중시조 추모각 追慕閣



추모각(追慕閣) 편액



禦侮將軍金海金公諱重喆遺墟碑(어모장군김해김공휘중철유허비) 전면



禦侮將軍金海金公諱重喆遺墟碑(어모장군김해김공휘중철유허비) 후


禦侮將軍金重喆碑銘(幷序)
祖先基業之地 孫子之所宜謹守 而罔敢忽焉者也 故周詩曰 維桑與梓 亦恭敬止 韓子之文曰 某水某邱 吾先人之所釣遊也 庸非後來可鑑者乎 禦侮金公 諱重喆 字德汝 自號檀山野叟 我駕洛王之後也 以明宗丁卯生 童年羈泊湖南際 値壬辰之訌 見兄亡於戰陣 懼氏姓之無傳 晝伏夜行 轉到昌原 投檀山巖竇而保性命 亂定 仍卜上村而居焉 今上村之金 皆其所自出也 盖自公以上 系牒無稽 而子姓蕃衍傳歷十一世 壹是安土樂業 或以翰墨有聞  寔公之遺蔭也 後孫海敬 見時事日非 憂先蹟之湮沒 方鑱石以示後 持狀錄謁文 辭不獲 則遂略叙如右 係之以銘曰: 戀舊林思舊淵 魚鳥猶然矧伊人矣 苟乃祖之有知 其必曰予有後不棄基矣
丙子臈月日 盆城 金柄璘 撰
                安陵 安周鎬 謹書
甲戌九月日 十二世孫 守銀
                十三世孫 海敬 建立


어모장군 김중철 비명을 지으면서 서문을 적다.
  선조가 기업한 땅은 자손들이 삼가 지키면서 감히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반(小弁)〉의 시에 이르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에는 반드시 공경하는 마음을 갖노라.”하였고, 한자의 글에 이르기를, “아무개 물과 언덕은 우리 선인들이 낚시하고 노닐던 곳이니, 어찌 후손들이 거울삼을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어모장군 김공의 이름은 중철(重喆)이요. 자(字)는 덕여(德汝)며, 스스로 호(號)를 단산야수(檀山野叟)라고 하였으니 우리 가락왕의 후손이다. 명종(明宗,1534-1567) 정묘(丁卯,1567)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 호남을 유람할 즈음에 임진년 난리를 만나 형님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보고, 성씨가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창원에 들어와서 전단산 구멍 뚤린 바위에 자면서 생명을 보존하였다. 난이 진정되자 바로 상촌에 복거하였다. 현재 상촌의 김씨는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대개 공의 윗 세대는 계첩을 상고할 길이 없고, 자손이 번성하여 전하여 11세까지 이르렀다. 모두 향토에서 편안하고 생업이 즐겁고, 더러는 문필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있으니, 진실로 공이 남긴 음덕이다.
  후손인 해경이 세상일이 날로 잘못되어가는 것을 보고, 선조의 발자취가 없어질 것을 걱정하여, 비로소 빗돌에 새겨서 후세에 보이고자 장록(狀錄)을 가지고 와서 묘갈문을 청하거늘 사양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대략 위와 같이 적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는 것은 / 戀舊林思舊淵
물고기나 새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임에랴 / 魚鳥猶然矧伊人矣
만일 그대의 선조가 지각이 있다면 / 苟乃祖之有知
그분이 반드시 “나는 후손이 있으니 기업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하리라 / 其必曰予有後不棄基矣

병자년(1936) 납월(12) 0일 분성 김병린이 짓고
경자년(2020) 1월 6일(20200130) 전의 이현호 초역하다.





檀山碑閣記 
我昭敬王時 禦侮將軍金公諱重喆 隨其兄寓居湖南 適値鳥夷之亂 其兄戰死於敵 自是 頓無依賴 且念兄其已沒 弟若不在 先人嗣續 無處可託 乃潛伏間行 幸避兵刃 而至昌原檀山下 隱居保命 亂稍定 乃定居于上村 自號檀山野叟 不復有意於斯世 耕讀爲業而終焉 噫 公之沒已三百餘載 而後孫之居於此地者 慕其先祖之遺蹟 經營一碑 已經累世而未果 乃於甲戌春 宗論齊發 醵金求石 招工磨治 丙子臘月日訖工 使海敬 謁文於訥齋先生 昭刻遺事 於是乎幽潛之德 庶幾闡揚 然歲去日久 一片碑面 難掩風雨之磨泐 行路猶嗟惜 矧伊雲仍乎 乃營一閣 惟克殫誠力 至於奐輪者 海權海哲海祚泰翰 始終周旋也 庚寅春告其落 宿願已畢 海敬君 累渡訪余 請記其實 余感其誠意 乃曰 世遠俗降 先祖有美事 不顧不念而之他者 往往有之矣 可勝歎哉 惟檀山翁之後裔 數百年未遑之事 合謀竪碑 而得巨筆以刻之 且建閣而庇覆之 以防後患 鳴乎盛矣 培其本 枝葉之必達 其理不差也 以是心戒後人 傳之無窮 則金之門 豈不昌大乎哉 略其顚趾如右云爾
甲午蜡月大寒節 安陵 李鉉燮 記


단산비각기(檀山碑閣記)  

우리 소경왕(昭敬王)¹⁾ 때에 어모장군(禦侮將軍)²⁾ 김중철(金重喆)³⁾공은 그의 형을 따라 호남(湖南)에서 거주지를 옮겨왔다. 마침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은 적에게 전사하였다. 이에 생각해도 의지할 곳이 없고 형 또한 전사한 뒤이고 아우도 없으니 선조들의 후예들 역시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에 몰래 길을 나섰는데 요행으로 적병을 만나지 않고 창원(昌原) 단산(檀山)³⁾ 아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목숨을 보전하고 있다가 난리가 점차 안정되자 이에 상촌(上村)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스스로의 호를 단산야수(檀山野叟)라 하고 세상에 나서는 일에는 다시는 뜻을 두지 않았고 주경야독을 업으로 평생을 마쳤다. 아아 공께서 돌아가신지 거의 300여년이나 되었다. 후손들이 이 땅에 거주하면서 그 선조의 남긴 자취를 그리워하여 비석 하나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미 몇 대가 지나도록 결과가 없다가 갑술(甲戌)년 봄에 종중의 논의가 일제히 일어나 돈을 추렴하여 돌을 구하고 장인을 불러 갈고 다듬어 병자(丙子)년 섣달(臘月)에 공사가 끝났다. 곧 해경(海敬)으로 하여금 그 일을 밝혀서 새길 유사(遺事)를 눌재(訥齋)에게 문장을 부탁하였다. 이에 선조의 깊이 잠겨있던 덕행이 거의 모두 드러나 알려졌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비석과 비석의 면에 새겨진 글이 비바람에 깎이는 것을 막기 힘드니 길을 지나는 사람마다 탄식하며 안타까워하였다. 그러하니 후손들은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이에 비각을 짓기로 하였다. 오직 정성을 다하여 힘을 기울여 훤칠한 모습으로 낙성하게 되니 해권(海權) 해철(海哲) 해조(海祚) 태한(泰翰)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선을 하였다. 경인(庚寅)년 봄에 그 낙성을 고하니 숙원 했던 일이 완성되었다. 해경(海敬)군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기록해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내가 그 성의에 감동하여 글을 지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풍속은 내려앉으니 선조의 아름다운 일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일들을 종종 보았으니 매우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단산옹(檀山翁)의 후예들은 수백 년 동안이나 겨를이 없었던 일에 뜻을 합하여 비석을 세우고 큰 선비의 글을 얻어 돌에 새겼다. 또 다시 비각을 세워 비바람을 막는 지붕을 덮어 후환을 예방하였다. 아아 성대하도다. 그 근본을 북돋우면 금지옥엽 같은 후손들이 반드시 뒤따른다고 하였으니 그 이치가 어긋남이 없도다. 이러한 마음으로써 후세들을 경계하여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김씨 가문이 어찌 창대해지지 않겠는가. 대략 그 전말을 이와 같이 쓰노라.
갑오(甲午;1894)년 음력12월 대한절(양력 1월 20일)
안릉 이현섭(李鉉燮)⁴⁾ 기록하다.


【주석】
소경왕(昭敬王)¹⁾ : 임진왜란 때의 조선왕 선조(宣祖)를 말한다.
어모장군(禦侮將軍)²⁾ : 조선시대 무신 정3품 당하관의 품계
김중철(金重喆)³⁾ : ‘어모장군김중철유허비’을 보호하는 추모각(追慕閣)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중철(金重喆;1567~?)은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왜적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군인이었던 형이 적과 싸우다 죽었다. 후손 보존을 위해 몸을 피하여 창원 전단산(栴檀山)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옛 창원군 상남면 퇴촌리 상촌마을에 세거하게 된 창원 입향조(入鄕祖)이다. 그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의 후손으로 전단산 아래에서 살았다하여 그 후손들을 단산공파(檀山公派)라 부른다. 김중철은 뒤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유당 김종하선생이 쓴 『창원군지』에는 이현섭이 지은 ‘단산비각기’, 김병린이 지은 ‘어모장군김중철유허비’, 노근용이 지은 ‘어모장군김중철묘갈명’이 실려 있다.
단산(檀山)³⁾ : 옛 지명 전단산(栴檀山)을 이르는 명칭이며 현재 정병산(精兵山 566.7m)이라 이름 한다. 전단산에서 정병산으로 불러지게 된 경위는 없고 정병산(精兵山)에 대한 이름 논란이 있었지만 정병산은 임진왜란 이전에 창원지역과 김해에서는 불렀던 명확한 기록이 있다.
이현섭(李鉉燮)⁴⁾ : 조선 후기의 순국자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서규(瑞圭), 호는 우헌(愚軒)이다. 1844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 원당에서 태어나 도산면 토계리로 옮겨 살았다. 묘는 2008년 5월 15일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그는 일찍이 학문에 힘써 18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는데, 1910년 나라를 잃자 자결을 결심하고 “내 차라리 목이 잘릴지언정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될까 보냐.”라는 글을 남기고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현섭은 자손들에게 자신의 혼백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단식한 지 21일 만인 11월 26일에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말한 뒤 의관을 갖추고 순절하였다.
『우헌실기(愚軒實記)』 2권이 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禦侮將軍檀山公史記(어모장군단산공사기)
丙子年臈月日 遺墟臺竪碑(병자년랍월일 유허대수비)
甲午年蜡月日 追慕閣建立(갑오년사월일 추모각건립)
戊辰年三月日 國家大計에 順應 國立昌原大學校用地에 編入하여 同敷地를 讓渡 同學校長朴東和 斡旋으로 昌原市士林洞六三番地에 移築乙巳年三月三日落成
靑山碧石屛山橫 청산벽석 병풍처럼 둘러진 정병산
屛前一閣檀公亭 오백년 유허지에 단산공 추모각
鷲峰月輪祖上影 매바위 뜨는 달은 조상님 얼굴
玉溪潺流伊唔聲 옥석천 흐르는 물은 자손들의 글소리다.
檀紀四三二二年己巳三月日
裔孫 彰翰 謹記





詠[해문-전문]
十三世祖肇墟開  13세 조부께서 이곳에 처음 터 잡으시니
弱介孱孫輔護來  잔약한 후손들이 도와서 보호하였네.
推念壬辰遺後跡  임진년 후손에 남긴 자취를 미루어 생각하니
微誠嗟晩記斯臺  미약한 성의 늦게 서야 이 누대에 기록한 것 탄식하네.
丙子菊秋            1936년 음력 9월
十三世孫海敬謹稿 13세손 해경 삼가 씀


출처 및 참조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이현섭/류현정
창원군지-김종하/국제신보출판사(1962)
문화유적분포지도 창원시-국립창원대학교박물관/나래종합인쇄사(2005.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