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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곡면 임해진 벽진이씨 소우정 消憂亭

천부인권 2020. 2. 26. 10:34



2020.2.18. 부곡면 청암리 임해진나루의 소우정消憂亭


낙동강 물 흘러와 부곡면 청암리 1046번지를 품은 비리산(300m) 암석층을 만나 단애를 이루면서 꺾어지는 곳에 벽진이씨碧珍李氏 이도일李道一이 남긴 소우정消憂亭이 있다. 소우消憂는 ‘근심과 걱정을 지우고 없앤다.’는 뜻으로 소우헌消憂軒이라는 이도일의 호에서 나온 말이다.
자연의 뜻을 망친 이명박이 4대강 사업을 하면서 청암리 임해진 나루에 터를 잡고 민물횟집을 운영하던 집들을 철거하여 마을이 사라진 지금은 오로지 소우정만 남아 그 흔적을 추억하고 있다. 옛 조선 때 대구 감영에서 창녕을 거쳐 임해진 나루를 건너 창원부로 돌아가던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는 임해진과 주물연진의 이야기는 옛 문화를 현재로 이어 줄 좋은 자료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소우정에는 소우정중건기와 용슬헌기 및 상량문과 많은 시詩가 걸려 있어 이들을 소개하고 해문이 되는대로 그 내용을 올려 두고자 한다.




2020.2.18 청암리 벽진이씨 소우정消憂亭 편액은 성재 허전이 쓴 것이다.



용슬헌容膝軒 편액




消憂亭重建記
鷲山臨海之岸 古有消憂亭 卽李公諱道一 隱居求志之所也 亭廢久不守 其后孫前亞憲承德甫 與其嗣孫愚甲謀所 以重新之旣 落弛書累百里 洛坡江屋屬 余以記之顧 余老舞文不足 以揄揚盛事 而亦有所不敢辭者 窃惟公以德巖之子 復齋之弟 早遊寒岡之門 時有一門九賢之稱 幼以擩染於家庭之訓長 而承襲於師友之傳 輕重內外之分辨之 以早故靑春廢缺白首扱緩 有若無意於斯世君民 而及其南漢城圍之日 北向痛哭 貲餉士繼有復雙之疏 無非出於忠君衛國之至 誠公之於世 亦非果忘者也 猶此自扱山海寂寞之濱 逍遙不返日 以消憂爲事 其詩回思桐瀨叟 只恨識劉皇 公之托意旣如 是則天下寧復 有可憂之事乎 然公聖人徒也 未必效潔身亂倫者 事盖其微志抑 或有在焉時當南城不守 神州陸沈擧 天地混入於旃裘推髻之俗 此誠有志者沫血飮泣之秋也 公之滿腔子一點熱血按住不得 强托消憂二字 以自排遣耳 公之所憂豈有他哉 然則斯亭之興廢 有關於春秋之大義 豈區區燕處之室宇 比哉宜其後人之重新 而肯搆之也 此箇義理 卽天地間一公物 不以古今 而或廢不以遠近而或間 則修而明之存乎 其人苟能顧名思義無忘乃祖之烈 世守勿替永樹風聲 惟嗣孫責諸君盍相 與勉之至 於江山之美 雲物之勝自有登臨者 目謀焉玆不暇論 是爲記
歲甲戌桃華節豊山柳厚祚記


소우정중건기消憂亭重建記
영축산 임해진臨海津 언덕에 옛적에 소우정消憂亭¹⁾이 있었으니 곧 이공李公 이름 도일道一²⁾이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던 곳이다. 정자가 황폐 된지 오래되어 수호하지 못하게 되니 그 후손인 집의 승덕承德씨가 사손嗣孫 우갑愚甲과 더불어 중건하여 새롭게 할 것을 계획하고 이미 낙성 되매 수 백리 거리 낙동강 집으로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내 늙고 글재주가 없어 이 성대한 일을 칭찬할 수가 없다고 생각 되지 마는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 할 바가 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은 덕암德巖의 아드님이요 복재復齋의 아우로서 일찍이 한강寒岡³⁾선생의 문하에서 배우니 당시에 일문구현一門九賢⁴⁾이라 일컬었다. 어려서는 가정 훈계에 감화되고 자라서는 스승과 벗의 전함을 이어 받아 경중과 내외의 구분을 일찍부터 분별하였으므로 청년시절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흰 머리의 노년에도 주는 벼슬도 받지 아니하여 이 세상의 임금과 백성에는 관심이 없는듯하였으나 후에 남한산성이 포위 되는 날에 이르러 북녘을 향해 통곡하고 재산을 기울여 군량을 대어주고 잇달아 원수 갚는 소를 올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지키는 지성에 나오지 않음이 없었으니 공은 또한 이 세상을 끝내 잊어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스스로 산해의 적막한 물가에 몸을 던져 소요하면서 돌아오지 않고 날마다 근심 없애는 것으로 일 삼았고 그 지은 시에서도 「동뢰수桐瀨叟⁵⁾(엄자릉)를 돌이켜 생각하니 다만 유황劉皇⁶⁾을 안 것이 한스럽도다.」 했으니 공의 마음 둔 곳이 이미 이러하였은즉 천하에 다시 어찌 다시 근심할 것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은 성인을 따르는 사람이니 반드시 자신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인륜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본받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대개 그 속뜻이 또한 다른데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남한산성을 지키지 못하고 신주神州가 오랑캐에게 멸망을 당하여 온 천지가 털옷입고 뭉치 상투 짜는 오랑캐풍속으로 섞어 들어갈 형편이었으니 이는 진실로 뜻있는 사람이 피를 뿌리고 눈물을 마실 때이었다.
공의 가슴속에 가득 찬 한 점 뜨거운 피를 억누르려고 해도 되지 못하여 억지로 소우消憂란 두 글자에 의탁하여 스스로 근심을 없앴을 뿐이었으니 공의 근심하는 바가 어찌 구구하게 한가히 거쳐하는 집에 비교 하겠는가. 마땅히 그 후손들은 중건하고 새롭게 하여 선대의 뜻을 계승해야 될 것이다. 이런 의리는 곧 천지사이의 한 공물公物이니 시대의 고금으로써 혹시라도 폐지해서는 안 될 것이요 종지宗支의 멀고 가까움으로써 혹시라도 한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집을 수리하여 이 의리를 밝히는 것은 계승하는 그 후손에게 달려 있다. 진실로 명성을 회고하고 의리를 생각하여 그대 조상의 공덕을 잊지 말고 대대로 지켜 폐기하지 말고 길이 선대의 교훈을 전하는 것은 사손들의 책무이니 제군들은 이에 서로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강산의 아름다움과 경치의 훌륭한 것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올라와 보는 사람들이 눈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논할 겨를이 없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세갑술 도화절 풍산 류후조柳厚祚⁷⁾ 기록하다.


【주석】
소우정消憂亭¹⁾ : 창녕군 부곡면 낙동로 1859에 위치한 벽진이씨 소유로 이도일(李道一 1581~1667)의 유적이다.
도일道一²⁾ : 이도일(李道一 1581~1667)은 1592년(선조 25) 12세 되던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피신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의병에 가담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 태종(淸太宗) 용골대(龍骨大)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창의(倡義)하여 그의 창고정곡(倉庫正穀) 400석을 군량미(軍糧米)로 수송(輸送)하고 의병(義兵)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다. 이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칠월현감(漆原縣監)을 제수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한강寒岡³⁾ : 정구(鄭逑 1543~1620)는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로 호는 도가道可, 한강寒岡, 문목文穆 등이며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정윤증(鄭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문구현一門九賢⁴⁾ :  「기묘사화일문구현」은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문중의 아홉 사람에 대한 기록이며, 이들은 이은(李誾)·이연경(李延慶)·이약수(李若水)·이약빙(李若氷)·이종경(李宗慶)·이윤경(李潤慶)·이영부(李英符)·이준경(李浚慶)·이승경(李承慶) 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뢰수桐瀨叟⁵⁾ : 엄자릉嚴子陵이 동문수학하던 광무제光武帝가 왕이 되자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 동려桐廬에 있는 여울 일명 엄릉뢰嚴陵瀨로 몸을 숨기고 낚시를 했다한다
유황劉皇⁶⁾ :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한경제(漢景帝) 각하의 현손(玄孫)으로 성은 유(劉)이고 이름은 비(備)이며, 자는 현덕(玄德)이다.
류후조柳厚祚⁷⁾ : 조선 후기 강릉 부사를 지낸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유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 도정(都正) 유심춘(柳尋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의수(李宜秀)의 딸이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이조참판·공조판서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남인계 인사 중용책에 따라 1866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중국에 와있는 서양인들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는 상주에 살던 아들 유주목(柳疇睦)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1867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1872년 중추부판사로 퇴임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






消憂亭重建上樑文
賢祖遺琴書之墟二百年江山依舊 後孫寓羹墻之慕數三椽亭榭重新 風流不湮 雲煙改覩 恭惟先祖消憂軒府君 碧珍華胄 靑邱古家 內有德考畏爺復齋之父兄樂哉家學 外資岡老眉翁澗松之師友蔚爲淵源 國步艱屯傾囷倒廩應募四百碩 君讐未復瀝血剖肝治疏數千言 鷄刀焉用縣宰之爲 鷗盟自有江湖之想 貪而樂富而禮優優乎丈席推嘆 伯氏壎仲氏箎洋洋焉一室和氣 分外之功名不願求正路於儒家 朔會之考講成規起後生於鄕黨 爰將遯世無㦖之志 特起臨海消憂之亭 開眼豁然動辭賦於江嶂 舒膝偃臥放記筆於軒楣 吾誰與歸范希文之先憂後樂 士固有志桐瀨叟之蠱上屯初 將期宇宙而將終 豈意陵谷之易變 泰山其頹矣忽驚巖石之崩 斯道將喪歟嗚咽市巷之哭 淸芬消歇傷心筆牀書架茶臼酒鎦 舊墟荒凉但見風帆沙島烟雲竹樹 竊念斯亭興廢大關吾門盛衰 過客爲之齎咨擧目桑田浩劫 多士莫不興感猶指李家遺庄 鷦鷯未借捿枝哀吾生也 豺獺亦知報本矧伊人哉 玆於歲在癸之初又是時適丁之運 登貽基而景仰九十年警咳若聞 嗣遺躅而圖功七八世經營已久 遑遑乎惟急於改建舊貫如之何 㦖㦖焉有懼於湮傳數間而已矣 際斯構翼然於江上而勝狀畢集於檻前 溯中流而沿洄與賢養心之亭閣相望 俯崇阿而騁眺君淵景釀之風月無邊 盡美賞於東南莫非滕閣賓主 託高詠於風浴宛是舞雩冠童 斯乃肯構而肯堂 敢曰善繼而善述 世代寢邈縱人事之匪今 山川倍輝感物色之如故 積年竣事慙愧孱孫之膚誠 暇日登臨歌詠君子之遺澤 玆敶六偉助擧雙虹
抛樑東靑巖日出滿軒櫳 下有龍淵深莫測 盈科多是發源功
抛樑西枕洛亭荒草色迷 惟有江禽來管領 夕陽無限下芳堤
抛樑南雲端出沒馬山岑 儒仙一去無消息 老樹蒼蒼滴晩嵐
抛樑北德峯認是先人宅 雙全孝烈一家肥 山下至今行路式
抛樑上江湖高枕動星象 不知何處是京華 目極南天勞遠望
抛樑下洛水泱泱流不舍 細雨漁竿明月琴 此間眞趣少知者
伏願上樑之後 鷲山不騫 洛江無恙 一花一石果非後人之愛惜者乎 某水某邱實是府君之釣遊處也 星移物換期勿替於永年 鬼噤神呵圖久傳於來世
崇禎紀元後四癸酉穀雨壬寅八世孫承德謹撰








容膝軒記
或有問於余曰昔于定國之閭能容後昆之車駟李校尉之門容接多士之屣履今子之居何所不容而 獨以容膝稱之耶余笑而應之曰觀夫古人之臺名亭號各隨其所處之位所尙之志而有萬不同故東 坡之快哉超然或取其快心目超俗累之意永叔之至喜豊樂或取其喜濟險樂與民之意也今吾卜築 於鷲山之地盡處臨海津上其地則東南隅之僻陋也其隣則兩三家之漁樵也旣非快心超俗之意又 非濟險與民之樂而嗟夫才疏性拙與世相違旣無 容人之量亦無容於人之資莫如退處江湖自容其 身而已三品之蔭一麾之榮分外非所願而抱膝長 嘯敢曰頡頏於宇宙促膝相對只問修鍊於刀圭松 竹蔭庭起我膝而彷徨雲月映戶舒我膝而偃臥與 彼伺侯趑趄於朱門之膝曷足以語是樂哉一區之 鷦棲已定百年之鷺盟相尋則抑何羨於于閭之容 車駟李門之容多士乎軒曰容膝職此之由而因以 消憂自號故竝揭兩扁於左右軒云
崇禎十二年辛巳秋七月消憂主人記





消憂亭 元韻      소우정 원운
江嶂南開眼豁然 강과 산봉우리 남으로 열려 눈앞이 시원하고
風軒俯壓鏡中天 바람 스치는 처마는 거울 속의 하늘 굽어 누르고
蒼扉削立千層石 깎아 세운 푸른 병풍은 천 층의 돌이요
鍊帶橫褒十里淵 옆으로 뻗은 비단 띠는 십리 모래톱이로다.
靜裡琴書塵不染 고요한 가운데 거문고와 책은 티끌에 물들이지 않고
邃初日月夢長縣 태고적 해와 달은 꿈을 길게 매달았네.
無限時憂消遺意 한없는 시대의 근심 지울 일을 생각하니
隔籬呼取野醪傳 울타리 넘어 막걸리 불러 퍼게 하는 일뿐이로다.
同中樞 李道一  동중추 이도일





次韻
閒來巾屨自翛然
山水東南別有天
千里輸功流馬壘
百年觀理躍魚淵
仙人樹老孤雲去
釣叟臺高夜月懸
無數庭花深鎖得
恐將幽趣世間傳
州南 李泰亨





次韻
重巒疊巘忽呀然
南坼平湖萬頃天
倦鳥知還元亮宅
披羊垂釣子陵淵
剡朋招隱琴論曲
海客談瀛榻解懸
銖視功名泥富貴
府銜郡紱莫謾傳
獨梧堂 黃悏





容膝軒元韻
老去求容膝 늙어 무릎 하나 허락할 곳 찾아
湖山寄小庄 고요한 강가 산기슭 작은 집에 의지했네.
名區從古罕 명승지는 예로부터 드물다고 하거늘
造物爲誰藏 조물주는 누굴 위해 감추어 두었는가.
朱紱休相促 높은 벼슬 서로 재촉하지 말게나
綠筠欣漸長 푸른 죽순은 기분 좋게 점점 자라나네.
回思桐瀨叟 엄자릉桐瀨叟를 돌이켜 생각하니
只恨識劉皇 다만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를 안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
 




次韻
容膝軒中老 용슬헌容膝軒의 중늙은이
江湖晩卜庄 고요한 강가에 늘그막에 거처를 마련했네.
漁樵爲産業 고기 잡고 땔나무 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水月任行藏 물과 달을 벗으로 삼아 살아가네.
夜靜琴聲遠 밤이 고요하니 거문고 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秋深醉興長 가을이 깊으니 취한 흥 끝이 없네
自今忘世事 이제부터 세속 일일랑 다 잊어버리고
敧枕夢羲皇 베개에 기대어 희황羲皇을 꿈꾸시게나.
趙任道





次韻 [文山]
箕頴千年後 기산 영수¹⁾에 은거한 천년 후에
李君有是莊 이군李君²⁾도 바르고 씩씩하게 있었다.
功名歸夢寐 공명은 꿈속으로 돌아가
漁釣付行藏 물고기 낚시로 행적을 감췄네.
閒中雙膝穩 한가한 가운데 두 무릎 편안하고
世外一竿長 속세 벗어나 긴 낚싯대 하나 펼쳤네.
尙有經邦志 오히려 나라 구할 뜻 있으니
終宵講帝皇 하룻밤에 제황帝皇을 외웠네.
進士 許堈  진사 허강


【주석】
기산 영수¹⁾ : 기산箕山 영수潁水에 은거한 소보巢父와 허유許由
이군李君²⁾ : 이도일(李道一 1581~1667)





次韻
十里淸江上
群山護淨莊
沙星隨水沒
風帆任壑藏
世外功名薄
閒中日月長
吁嗟天地晩
何處問 三皇
從子 涷





次韻
鷲山東絶勝
物外起倦莊
賓主俱閒趣
琴書卽寶藏
煙霞心已癖
鷗鷺夢何長
無媿湖天夜
恒瞻絳 節皇
反求堂 林汝栢



消憂集跋[承永]
尙論之士於先賢制行之方當究其立心之如何文章特餘事耳是故曾子曰士不可以不弘毅又曰臨大節而不可奪蓋弘毅志也不可奪節也若其徒能猷爲於章句之末而不着眼脚於志節之立則文雖多亦奚以哉惟我從先祖消憂軒公遺集豈非有德有言而兼有志節之可尙哉公以穎悟之資開明之質早得依歸於文穆之門而又有德巖畏老復齋三君子賢父兄矣其學問之純粹踐履之敦篤自得擩染於家庭之內而徧被師門之奬許者不止爲一才
一藝而同歸於成德達材之科然則公其爲聖人之徒者非耶及其皐音徹天恩命荐降而公則志有在也謝却方來之朱緩而竊附於以言事君之義忠腔血疏以復讐湔恥爲第一急務此則春秋紫陽筆也師門被誣群小羅織則倡率同志封章叫閽不畏燻天之勢焰而竟伸師門之寃枉復明斯道之廓如士趨以之而得正此則太學擧旛義也此皆公學問中做出來而非樹立之素所卓爾安能如是耶傳曰不爲威惕不爲利疚殆公之謂乎公之詩文屢經鬱攸百不存一後之人不得窺班豹之萬一雖若
可恨然讀其辭職一疏則我公始終本末備矣安用多乎哉不肖今老且死矣於是役也喜其附名其末而竊悲夫遐鄕殘裔登聞無路安得以此編于太史氏得列於我東高士之傳也噫
歲丁酉臘月下澣從八世孫承永謹識


登消憂亭賦
登玆亭而四望寫客子之閒愁頫十里之平蕪臨一帶 之長洲層岑合以日翳攢黛蹙以天浮菀千章之松檜 響萬壑之颼飀村居分於巖竇炊烟鎖於林陬開靑畇 於上下分白水於澮溝雜桑麻於墟里閙雞犬於街丘 村歌答以勸農禾麥棼其盈疇起黃雲於四郊走翠濤 之如流嘉耕鑿之樂業媺勤苦之獲秋詢風謠於故老
詰斯亭之肇修昔高曾之栽植今百年之殆周時會老 而絜壺或選勝而張帿輪蹄斷於地僻鮮高士之來遊 若天賜於吾亭今得子之停輈台聞言而不怡羌欲謝 而申惆曰余行之悽悽異物外之冥搜隔鄕關之消息 斷疇曩之朋儔逮羇旅之靡届又此地之遅留年華催 於逆旅歸夢溢於衾裯步春林之悽惻感時物之易遒 孤亭敞以樹陰晩景斜於淸湫離愁增於觸物花鳥愁 其雕鎪龍吟壯而破壁光怪菀於斗牛尙未央於英華 肯終老於鋤耰擥餘條而長欷空盡日而夷猶


출처 및 참조
창녕현지 축산군지 합본-창녕문화원/중앙인쇄사(2006.11.25.)
消憂亭(소우정) 관련 詩(시)/작성자 소백
경상대학교 문천각 남명학고문헌시스템[nmh.gnu.ac.kr]
벽진이씨(碧珍李氏)[blog.daum.net/milc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