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난포리 김해김씨 금산재 琴山齋

천부인권 2020. 2. 23. 08:15



2020.2.15. 난포리 김해김씨 금산재琴山齋


구산면 난포리 357-3(난포1길 21-1)에는 김해김씨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관管의 후손들이 세운 금산재琴山齋가 위치하고 옆에는 김극일金克一을 향사하는 봉향사奉香祠가 있다. 처음 난포리의 금산재의 기록을 보고 난포가 꽤 규모가 있는 어촌이라 여러 가문의 재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김해김씨 재실이 유일한 것이었다.
난포리의 입구에는 팽나무 노거수老巨樹가 동구 밖의 경계를 뜻하며 서 있고 그 뒤쪽에는 『효자 김봉주 포효비』가 있으며 마을 뒷산 정상에는 옛 여음포봉수가 위치했던 곳이다. 지금은 카톨릭연수관이 들어서 있다.
난포리藍浦里는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기록된 마을로 1592년 5월 7일 최초의 전투이면서 대승을 거둔 옥포해전을 마치고 영등포에서 숙영준비 중 웅천합포(진해구 비봉동 추증)에 왜대선 5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격파 후 난포(여음포)에서 1박을 하고 전라도로 돌아간 기록이 있다.




2020.2.15. 난포리 김해김씨 금산재琴山齋의 대문 여재문如在門



여재문如在門 편액



금산재琴山齋 전경



금산재琴山齋 편액




琴山齋記
紫陽先生之輯小學也 以秉彛之極 天岡墜題編首 其憂患後世 爲生民立極至矣 往倭夷之入據也 我邦之尺土一民 莫不淪於其籍 是以我人生無所 寄死亦無歸以其父母之體魄 納諸荒邙至 纍彼所勒定之坎 類倭者朝纔息絶 而晡已瘞火 或糯其殘灰颺飼山禽水魚 而悍然顙無泚焉 噫其此之忍 爲則相望樂石豊碑 在在成行 競相徵儒文 著先美其所躅蹶倍簁 古昔或慮有務籂之弊 然視今敎墺學倒之世 其爲心之出 幽遷喬則可知已 是不有彛性之尙 存烏能致此哉 日金君容鐸屬余記 其大宗所刱琴山之齋 曰齋之設 以我先祖進士公諱牧 墓在琴山也 公寔節孝先生之五世孫中 宣廟壬午進士壬辰之亂 自金海移寓 熊川之將軍川上扁 其堂曰寓川 不求聞達 專心經學 爲鄕黨矜式 及其歿而葬將軍坊 配宜人東萊鄭氏墓合封 勢經一運而熊川 爲倭夷之軍營 不得已往年癸未遷厝于 漆原龜山坊 彈琴山枕子之原 實由公之子觀瀾諱應珊 以下世葬 在琴山之諸麓 且後孫居密邇也 余喟然爲之復曰 有時不幸而有是遷厝申之 以齋宿之設爲 爲人子孫之職 而竣其實事無務飾之弊 有振衰之風不其偉矣 哉於是乎 深知紫陽一言不我欺也 然今倭夷則乍退 而人民之彛倫未敍 惟金氏諸彦曰 日聚是齋講先聖之餘 訣繼賢祖之遺謨 則懿德日就 而自有聞風 而興者矣
甲午二月中旬 凝川 朴正善 記


금산재기琴山齋記
주자선생이 소학小學을 편집함에 상도를 굳게 지킴은 하늘이 다하여도 없어지지 않고 제편題編 머리글에 그 우환이 지나면 후세에 생민은 지극히 바로 선다고 엮었다. 지난날 왜구倭寇 오랑캐들이 침략하여 우리나라 한척의 땅과 사람 한명에까지 문적을 남기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로써 우리들은 붙어 살 곳이 없었고 죽어도 또한 그 부모의 몸과 혼도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고 모두가 거친 산에 아무렇게나 매장 되었다. 왜놈들은 아침에 겨우 숨이 끊어졌는데 신시(오후 4시)쯤 되면 이미 불에 넣고 혹은 그 남은 재를 쌀에 섞어서 휘날려 산새나 물고기의 먹이로 하여 악독함이 이마에 땀도 나지 않을 지경이라 그런 것 저런 것을 참고 이제는 좋은 돌과 풍부한 비석들이 곳곳에 세워져 서로 바라보고 선비의 글을 구하여 서로 다투어 행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자취를 여러 곱절 나타내었도다. 옛날에 혹시 생각이 있더라도 절제에 힘쓰느라 폐지하였다. 그러나 지금 보니 섬사람의 글을 가르쳐 세상은 엎어졌어도 선조先祖에 대하여 깊숙하고 높게 나타내어도 곧 가히 알게 될 것이니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떳떳한 성품이 상존尙存해 있지 아니하며 어찌 이런 일을 능히 이루랴! 하루는 김용택金容鐸군이 나를 맞아 그 대종소인 금산재琴山齋를 창건하고 말하기를 재실은 우리 선조 진사공進士公이신 이름이 목牧을 위하여 세웠고 묘지는 금산琴山에 있다하였다. 공公은 절효선생節孝先生 5세손으로 선조 임오년에 진사를 하고 임진난壬辰亂에 김해로부터 옮겨와 웅천장군천熊川將軍川 위에 살면서 그 당을 우천寓川이라 하였다. 애써 구하지 않아도 명성이 높고 헌달하였다. 경학經學에 전심하여 향당에 본보기가 되었고 그가 죽음에 이르러 장사를 장군동 내에 드렸고 배우자인 의인宜人 동래정씨東萊鄭氏와 묘를 합봉 했다. 세월의 한 운기가 지나 웅천이 왜놈의 군영軍營이 되어 부득이 지난 계미癸未년에 묘를 옮겨 칠원 구산동 내 탄금산彈琴山 자좌언덕에 드리워졌다. 사실은 공의 아들인 호號가 관란觀瀾이고 이름이 응산應珊으로 그부터 이하로는 대대로 탄금산의 모든 기슭에 장사되어 있고 또 후손들이 빽빽하게 가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불행의 때가 있어 이 묘도 옮겨 두었고 재계하고 묵을 재실도 세워 사람의 자손 된 직분을 하였고 준공함에도 그 실사에 힘을 써 꾸밈을 폐하지 아니하고 쇠퇴한 풍속을 떨치니 그것이 위대하다 아니하랴! 아! 이에 주자선생의 한마디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깊이 알았도다. 그러나 지금 왜구 오랑캐들은 잠깐 물러섰으나 인민의 떳떳한 윤리는 퍼지지 않은데 오직 김씨들은 나날이 재실에 모여 선생의 남은 비결을 강의하고 이어 현명한 선조들이 끼친 교훈을 이은 즉 아름다운 덕은 날로 이룰 것이고 저절로 소문이나 흥해질 것이다.
갑오(1954)년 2월중순 응천 박정선朴正善 기록하다.




김해김씨 봉향사奉香祠 전경



봉향사奉香祠 편액




奉香祠記
昌原郡龜山面烽火山下 有藍浦里背山臨海 土肥甘泉 有饒耕桑麻魚鹽採薪之利 金海金氏世居之地 卽駕洛之後裔也 麗末版圖判書公諱管之玄孫 諱克一節孝公 長男諱健郡守 公之孫參奉諱仁良 子通政大夫通禮諱詢 兩府君墓在淸道 自進士公諱撤 自淸道來寓於此土其裔後也 居而繁衍世葬于此地 有齋曰琴山齋 西有彈琴山之由也 於是金氏之墓閣建築洞中 而兼以爲宗族修會之所 爲是先人之世葬據 其所傳有文行 好賓友 崇祖睦族 敎子義方 爲鄕中之著 姓然而今世代漸遠 崇先之誠 亦隨而日弛 當今之事矣 故靑少年之離 鄕漸次尤 甚歲遷一祭之墓所 香火祭禮儀 自然疏忽 眞是慨嘆之事也 去琴山齋之宗 議時其門宗長鍾守語之曰 吾門之祖先寓居此地 以後屢居十有餘代 而如此繁榮 皆蒙祖先之蔭德 奉先疏忽 爲子孫之道罪莫甚矣 新築祀屋 墓祭之儀 同所合祭 如何宗中之衆論 合一諸族 拔力乃築祀廟于 琴山齋境內而扁曰 奉香祠名其門曰 如在門如在者 焚香奉祠道有其誠 而有其神之謂也 於是桑梓之恭松楸之望 兩得其宜咨 嗟尊祖敬宗秋然不亂 吁其盛矣 夫世機一變民業無常 前日世傳之墓祀 擧不能保有 其舊而人各渾 於營生之故也 是祠三架刱建於辛未訖功 是役重責者奎元奎學奎碩鍾出等之積誠 其大玆來余請記者 榮甲累請而不敢辭如在摭實 以記以勉其後承
歲辛未雨水節 族熙韶 謹記


봉향사기奉香祠記
창원군 구산면 봉화산 아래에 난포리藍浦里가 있으니 산은 등지고 바다를 앞에 두고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좋아 농사 길쌈 어업 염업 땔나무 구하기가 이로운 곳으로서 김해김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땅이요 즉 가락의 후예들이다. 고려 말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관管의 현손玄孫 이름이 극일克一이가 절효공節孝公이요 공의 장남의 이름은 건健이며 군수요 손자참봉의 이름은 인량仁良이시고, 공의 아들은 통정대부 이름이 순詢이시다.
양부군의 묘는 청도淸道에 있고 아들인 진사공 철撤이 청도로부터 이 땅에 내려와 살아서 그 예손들이라 대대로 살면서 넓게 번성하여 이 땅에 장사葬事하였고 재실도 있어 이름 하여 금산재琴山齋라 하였다. 재실 서쪽에 탄금산彈琴山이 있어 연유하였다. 이에 김씨들이 묘각을 마을 안에 지어 종족들의 회의장소로 겸하고 선인들께서 이 땅에 대대로 농사짓고 살았던 근거에 위함이라
그 전하는 바에 문행文行이 있었고 손님과 벗을 좋아하고 선조를 숭모하고 종족끼리 화목하고 자식들에게 의방義方을 가르쳐 향중에 드러난 성씨들이라 지금 세대에 점점 선조를 숭묘함이 멀어지고 정성 또한 나날이 떨어짐이 지금의 세태라 그런고로 청소년은 점차 고향을 떠나고 더욱 심한 것은 한해에 한번 향을 피워 묘제를 지내는 예의도 자연 소홀해지니 참으로 이는 개탄할 일이라. 지난 금산재에서 종의 할 때 그 집안 종장 종수鍾守가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선조께서 이 땅에 사신 이후 10여대로서 이와 같이 번영하였음은 모두가 선조의 음덕이니 선조를 받듬이 소홀함은 자손 된 도리가 아니고 죄가 막심함이라 새로이 사옥을 지어 묘제의 예를 모든 선조를 함께 함이 어떠할까 하였더니 종중의 중론이 합일하였고 모든 일가들은 힘을 내어 금산재 구역 안에 사묘祀廟를 짓고 현판을 봉향사奉香祠라 명하고 그 문간을 여재문如在門이라 하였다. 여재란 것은 향을 사르고 제사를 받드는 도道와 그 정성이 신께서 임해 계시는 것같이 하라는 일컬음이라 이에 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받들고 대대로 묻힌 선산을 바라보는 양득에 합당하였고 조상을 존중하고 종중을 존경함에 질서가 어지럽지 않고 성성하도다. 대저 세상의 들이 한번 변하면 백성의 업이 무상하고 앞날에 대대로 전해져온 묘사를 받들고 옛것을 보호하기 불능하여 사람은 각각 혼미한 속에서 살아가고 이 제사도 그런 것임이라 3칸을 창건함이 신미년辛未年에 마쳤고 이 역사에 중책을 맡은 규원奎元 규학奎學 규석奎碩은 정성을 쌓음이 컸고 이내 나에게 와서 기문을 청한자는 영갑榮甲인데 여러 번 청하기에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이와 같이 사실을 모아서 기록하며 그 후손들은 뒤를 잇기를 힘쓸지어다.
신미년(1991) 우수절 족인 희소熙韶 삼가 기록함.




봉향사상량문奉香祠上樑文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