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도천면 우강리 홍의장군 곽재우 망우정 忘憂亭

천부인권 2020. 2. 24. 22:16

 

2020.2.18. 도천면 우강리 망우정 전경

낙동강洛東江 창암滄岩 절벽 위에 세운 충익공곽재우忠翼公郭再祐의 망우정忘憂亭은 도천면 우강리 932번지(우강창암1길 14-10)에 위치하며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2m을 표시하고 「위도 35°24′05″N 경도 128°30′48″E」를 기록한다.
우강리友江里 창암滄岩 앞에 주차를 하고 둥근 동산 같은 언덕을 오르면 낙동강을 마주하는 망우정과 충익공곽선생의 유허비가 나타난다. 낙동강을 마주하는 동쪽방향을 향하는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등록되었으며 이 비는 1789년에 이 고을의 유림 4명이 세운 것이라고 유허비의 뒷면에 기록하고 있다. 곽재우 장군은 의령 세간리 헌고수에 북을 매달아 울리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최초의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기강나루에서 모집 된 10명의 의병과 함께 왜군선 2척을 격파하면서 의병의 위대함을 나타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 전공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군대軍隊의 강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을 받아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가고 1602년 귀양에서 풀려나 비슬산에 머물다가 이곳 우강리友江里 창암滄岩에 망우정을 세우고 솔잎과 송홧가루만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죽기 전에 이 망우정을 이자수李子粹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사유는 조임도趙任道가 기록한 여현정기與賢亭記에 잘 나와 있다. 여현정與賢亭은 이자수李子粹의 호號이다. 이후 이 망우정의 편액은 여현정與賢亭으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는 두 편액이 나란히 붙어 있다.

 

 

2020.2.18 우강리 창암 위의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와 비각

동산을 오르면 먼저 충익공의 유허비각과 비를 보게 되며 그 옆에는 1991년에 세운 오석의 유허비도 만나게 된다. 
전면 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 새겼고,
뒷면 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日 後學 裵東錫 [1789년 4월 일 후학 배동석]
                                                有司 趙彦城 李基珹 辛永馥 辛啓東 [유사 조언성 이기성 신영복 신계동] 새겼다.

비각 안에 있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의 유허비각遺墟碑閣에는 배문준裵文準이 기록한 기문도 있다.

 

충익 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 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

滄巖遺墟碑銘
忘憂堂郭先生 當龍蛇之亂 身任江淮保障 率收中興之績 論當世之烈 無與居先生 右者 而先生不有其功 冠賊纔退 卽入山餐 即入山餐松 與張子房出處略同 蓋先生之道 本諸忠孝 而其發於事爲者 奇偉不常 方其把釣歧江 則其跡似乎果 亂未至而鉀夷先壟 其跡似乎恠 以匹夫而欲斬方伯 則人疑於狂 其役戈辟穀 則人疑於誕 及其義旗一奮 而人始知先生非果於忘世 冠賊所過 丘墓無不發掘 而人始服先生之先見 忠勇之士與先生同事者 多不保其終 而先生超然名利之外 昔之我欲斬者 爲我而荷釼夫而後 人乃知先生之明哲過人而忠義之服人心如此 然先生之奇 未盡見於世 紅衣白馬 出没若神 而狡虜不能測其所爲 牙纛山冠 往來倏忽而威武不能奪其所守 忠謨讜論 無所顧忌 骨骰之臣 相顧吐舌 而主上不怒其過 其出而從事雷轟風驅軒輕裳寓 而及歸而謝跡 則蕭然江上之一漁父 觀其平日所服履者 又確乎純儒之操也 世孰得而相之哉 夫子稱老氏猶龍 若先生者殆其然乎 靈之滄巖先生晚年之所寓也 所謂忘憂亭尚在巖上 江流滷湧其下 其左厓壁立萬仞 先生臨終 以亭屬李公道純曰 唐虞以天下舆人 大少雖異 異其心一也 亭屢易主 今爲先生外裔辛氏之居 靈之人士 欲立祠其上祀先生 既不得 則又相與謀伐石 載先生事 以其役屬之光庭 光庭騃不足以知先生 而亦喜載名其下 遂不敢辭先生諱再祐 字季綏 玄風人 肅廟朝贈大司馬 諡曰忠翼公 故刻曰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云 系之以詩曰
粤在宣廟 國運中圯 帝哀東土 鍚我卿士 迺捍迺拯 通薦膏公 其人謂誰 忠孝郭公 襲訓家庭 問學雷龍 蔚有神略 初笑于庸 襡其長袖 釣于江上 迨壬辰歲 海寇狂攘 守臣懾鼠 列郡糜潰 公奮斗膽 義旗先揭 收台散亡 作其罷寡 朱衣白馬 若從天下 神機焂翕 電掣雷奔 賊奪心魄 喘若驚麏 半血干江 餘望風遁 相顧脅息 震疊挫頓 旣解晉圍 旋收玄昌 蔽遮江右 以及湖疆 禾麻奮張 民妥于磐 為國根本 卒濟時艱 疇勳定次 孰居公先 公不自有 推與裨褊 死士樂忘 民勇於鬭 帥臣列將 須我指授 丁酉再跳 火旺事急 我義益壯 强不敢逼 遂全孤城 賊亦尋退 投去兜䥐 托跡方外 上眷孤忠 曰予干城 委以閑面 間牧罷氓 松术之場 教書頻繁 大纛龍幡 布衣山冠 往來翩翩 誰滯誰挽 有截滄巖 洛水之岸 擢出穹壁 走廻層瀾 我亭其間 魚鳥與羣 一片江月 鳴琴洄沄 仁義良朋 胥來盤旋 惟進退憂 煩不可紓 以揭以號 其欲忘諸 帝懷白天 下詔巫陽 時其大訌 憂不可忘 乃作雷師 紫氣以迎 公去巖空 江鳥悲鳴 六十六年 瓌偉磊落 燀爀其跡 泰山毫芒 雷鼓雲中 聲揭華夷 士尚餘風 有矗其樹 有卓其烈 有來過者 宜竪其髮
洗馬 李光庭 撰

창암유허비명(滄巖遺墟碑銘)
망우당(忘憂堂) 곽선생(郭先生)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자신이 낙동강 연안을 보호할 장벽으로 자임(自任)하여 마침내 국가 중흥의 업적을 거두었다. 당세의 열사(烈士)들을 논하건대 선생과 비견(比肩)할 사람이 없으나 선생은 자신의 공로에 대한 대가(代價)를 향유하지 않았다. 왜적이 물러나자 마자 즉시 산속으로 들어가 솔잎을 먹으면서 지냈으니 저 한(漢)나라의 건국공신 장양(張良)의 처세와 같도다. 대개 선생의 도리는 충효(忠孝)에 근본하였으니 그것이 사실로 나타났을 때는 기이하고 위대함이 범상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기강(岐江)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으니 그 사적은 과단성을 나타내주는 것 같으며, 왜란이 이르지 아니했는데도 선대묘(先代墓)의 봉분(封墳)을 낮추어 평지와 같이 만들어버렸으니 그 사적은 괴이한 것 같기도 하도다. 평민으로서 방백(方伯)의 목을 베고자 하였으니 남들은 미쳤는가를 의심하기도 했으며, 무기를 버린 뒤로는 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으니 남들은 도가(道家)의 허탄(虛誕)함을 의심하기도 하였도다. 그 충의(忠義)의 깃발을 한번 나부낌에 이르러서야남들은 비로서 선생의 결단이 속세를 망각하고자하는 과단이 아님을 알았으며, 왜적이 지나가고 난 지방에 분묘가 발굴되지 아니함이 없음을 본 다음에야 남들은 비로소 선생의 선견지명을 알았으며, 충성스럽고 용감한 무사들 가운데 선생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으나, 선생만이 명예와 이익 밖에 초연함으로써 옛날 자신을 죽이고자 하던 사람마저 도리어 자신을 대신하여 검(劍)을 메어 주는 것을 보고서야 남들은 비로서 선생의 명철과인(明哲過人) 함을 알게 되었으니, 충성과 의리가 남의 마음을 감복시킴이 이와 같았도다. 그러나 선생의 기이함은 세상에 다 알려지지 않았도다. 붉은 옷에 흰 말을 타고 신출귀몰(神出鬼沒)함에 교활한 왜적들도 그 계책을 추측할 수 없었으며, 대장군의 기를 산에 걸고 가고 옴을 재빨리 함에 위엄스러운 무력으로도 능히 그 지키는 바를 빼앗지 못했도다. 충성스러운 모책과 정당한 의론은 뒤 돌아보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음에 대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으며, 임금은 그의 지나침에 대해서 성내지 않으셨다. 그는 나와서 전쟁에 종사하고 관리생활을 누리다가, 돌아와 흔적을 감춤에 쓸쓸함 강가의 한 어부일뿐이었다. 그가 평일 감복하고 실천함을 보면 확실히 순수 유가(儒家)의 조행이었다. 세상에 누가 능히 그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는 노자(老子)를 일컫되 용(龍)과 같다고 했으니 선생과 같은 분이 거의 그러하지 아니하겠는가? 영산(靈山)의 창암강사(滄巖江舍)는 선생이 만년에 계시던 곳이다. 이른바 망우정(忘憂亭)은 아직도 창암(滄巖)위에 있는데 강물은 그아래서 세차게 흐르고 그 왼쪽에는 벼랑이 높이 깎아지르고 있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실 때 이 창암강사(滄巖江舍)를 이도순(李道純)공에게 주면서 말하되 「요순(堯舜)이 천하를 남에게 주는 것에 비하면 크고 적음에는 비록 차이가 있으나 그 주는 마음은 같으니라.」고 하였다. 이 정자는 여러번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선생 외손의 후손인 신(辛)씨가 거처하고 있다. 영산(靈山)의 인사들이 그 위에 사당을 지어 선생의 제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함에 또 서로 의논하여 비석을 마련하여 선생의사적을 기재하기로 하였다. 그 비석에 쓸 문장을 짓는 일을 나에게 맡기니 내 노둔하여 족히 선생을 알지도 못하지만 그밑에 이름 석자 기재함을 즐겨하여 감히 사양하지 아니한다. 선생의 이름은 재우(再祐)요, 자(字)는 계유(季綏)며, 현풍(玄風) 사람이다. 숙종조(肅宗朝)에 증대사마 (贈大司馬)가 되었으며 시호를 충익공(忠翼公)이라 하였다. 때문에 비의 제목을「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라 일컫고 이어서 시를 지어 이르노니 
지난달 선조(宣祖) 때에, 국운이 중도에 허물어짐에, 황제께서 조선을 가엾게 여겨, 조선에 경사(卿士)들을 보내셨도다. 이에 저항하고 이에 구원하며, 이에 큰 공훈(功勳)을 세웠으니, 그분은 누구였던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운 곽공이었도다. 교훈은 가정에서 계승하고 학문은 조남명(曺南冥)에게 배움에, 울연히 신묘한 책략이 있었으나, 처음에는 어리석다 비웃음을 사기도 했었네. 긴 소매 걷어붙이고, 강가에서 낚시질하더니, 임진년에 이르러, 바다 도적들이 미쳐 날뜀에, 수령방백들은 두려워 도망가고, 여러 고을이 무너졌도다. 공은 대담함을 떨쳐, 의리의 깃발을 먼저 세우고,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의병을 조직했도다. 붉은 옷에 흰 말을 타니,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같고, 신묘한 기능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천둥과 번개가 치는 것 같았도다. 적군들이 넋을 잃어 놀란 사슴처럼 헐떡이고, 성과 강이 피로 물듦에 소문만 듣고도 도망을 쳤네. 서로 돌아보며 두려워할 때, 크게 진노하여 무찔러서, 이미 진주성의 포위를 풀고, 연이어 현풍(玄風)과 창녕(昌寧)을 수복했도다. 낙동강 오른쪽과 호남의 강토를 방어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백성들을 평안케 함에, 국가의 기둥이 되어 마침내 당시의 국난을 구제했도다. 공훈을 매겨 차례를 결정한다면 그 누가 공보다 앞설 수 있을 것인고, 오히려 자신의 공로를 뽐내지 않고, 미루어 비장(裨將)과 편장(褊將)에게 돌렸다네. 군사들은 즐겨 죽음을 잊었고, 백성들은 전투에 용감했으며, 통솔하는 신하들과 여러장수들은 반드시 가르침을 받았도다. 정유년 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의 일이 다급했으나, 공의 의기가 더욱 장대함에 강한 적군들이 침범하지 못함으로, 외로운 성은 드디어 안전하고, 적군들은 물러날 길을 찾았다네. 투구를 던져버리고 방외(方外)에 흔적을 의탁함에, 임금님께서는 고신(孤身)의 충성을 권념(眷念)하시되 나의 간성(千城)이라 하셨으며, 수병사(水兵使)에 위임되기도 하고, 때때로 피폐한 백성들의 목사가 되기도 했도다. 솔잎과 창출(蒼朮)을 복용하는 곳에 교서(敎書)가 빈번히 전해졌으며, 장군의 큰 깃발을 나부끼다가 평민으로 산속에 돌아오니, 교서(敎書)를 전하는 사자(使者)의 왕래가 끊이지 아니했으나, 누가 체류(滯留)하거나 만류(挽留)할 수 있었을까? 창암(滄巖)에 정자 터를 마련하니, 낙동강의 언덕이요, 천인절벽(千仞絶壁)이 우뚝한데 거센 물결이 감돌아 흐르네. 그 사이의 공의 정자 어조(魚鳥)와 어울리며, 한 조각 강물에 비친 달 아래, 거문고를 타며 오르내리네. 어질고 정의로운 훌륭한 벗들은, 모두와 둘러앉아, 오로지 나아가고 물러남의 근심, 밝게 펴지 못해, 호로써 드날리니, 모든 것을 잊고저 함일세. 황제는 회포를 하늘에 알리고, 무양(巫陽)에게 명령을 내렸으니, 시대가 크게 혼란한지라 근심을 잊을 수 없음이었도다. 이에 우뢰를 일으켜, 자기(紫氣)로써 맞이했으니, 공이 떠남에 창암(滄巖)은 공허하고, 강의 새들은 슬피 울었도다. 66세 한평생이 위대하고 훤출하니, 문무(文武) 유(儒) 선(仙) 그 자취 황연히 빛이 나네. 태산이 미진(微塵)을 누르듯, 우뢰가 구름 속에서 울림에, 그 소리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에게 미치고, 선비들 여풍을 숭상했네. 그 비를 세움 바르고, 그 의열(義烈)은 우뚝하니, 이곳을 지나는 자 마땅히 그 정신을 가다듬을지로다.
세마 이광정 찬(洗馬 李光庭撰)

 

배문준이 기록한 충익공망우당곽선생유허비각기 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閣記

 

忠翼公忘憂堂郭先生遺墟碑閣記
余每讀邦史至 莊光之變龍蛇之亂 見輪忠立莭視死如歸之群雄成事未嘗不三復驚嘆也 抑想人之有生始受天地之正氣 而生焉終因地火之化氣 而歸焉何其○○謀生 而鄙焉之無所不至慹慹宜死 而義焉之造其極 其故何在可 嘆其鄙焉者之不嫻 於篤信好學守死善道之聖訓也 然則忘憂堂郭先生儘守死 善道之大君子也 先生當壬辰之訌 以白衣書生掩卷 而發憤傾資 而檄義彛衷所在不憤者其誰也 大聚義衆馳騁 於宜山紅衣 而設奇施疑橫陣走屯閃東閃西如鬼如神人 稱天降紅衣將軍 而賊不敢侵杞江左之生靈安堵 而營生者皆先生之頼也 然而亂靖避功不處 贈官而累謝取適江湖侶魚 而友鷺築亭於洛江上蒼壁間 與寒旅諸賢泛舟上下彷彿乎 蘇子瞻赤壁之遊 啮松吸露調息養生 恰若張子房願赤松子 從焉貴賤榮辱 先生存亡付之自然 惟義之是尙 而己非但我不怨尢 於天人天人亦非所怨尢 於先生者也 是故先生之歸也 令間三百七十五年之久矣 前有遺墟碑及亭榭之尙保存 而碑貌之朽 泐亭臺之頹 圮不可不更新 而造景 故有志人士之構成 推進會而旋力 則崔伯一鴻及 金守鎭伯之巨資支援 天一朴社長南守 亦捨金助之能使碑閣 及新碑之煥 然而亭榭 亦與之換面矣 是不其生感人之遺風 餘澤尙充溢守 宇宙空間觸處 而發祥者耶役將迄推進委員長李麟榷 與賢稧長李鎬龍甫 推進委員河在琪李愚省君代會 而奉先生遺集訪余 而求其記 以如文準之不侫 何可堪任而辭不擭 則乃閱之先生 與李道純江舍書有曰 唐虞 以天下與賢 吾以江舍與賢所 與之大小不侔 雖若天淵其所 以與之之意堯舜與我同也 噫先生之見 危倡義避功棄榮捨亭 與賢之精神氣脉物 我無關浩浩蕩蕩 任運騰騰遊神 於太虛之中 余氣於造物之外凡人之所 不可迸睹者 而能與千古 上人相頡頏也 道家所謂絶聖棄智者非先生 歟益不勝欽嘆而謹爲之記焉
先生易簀後三百七十五年 辛未肇月之望
後學盆城 裵文準 謹識
後學靈山 辛容出 謹書

 

 

1991년에 세운 유허비

忘憂堂郭公神道碑銘
公諱再祐。字季綏。姓郭氏。玄風人。成均司成之藩之孫。黃海道觀察使越之子。母晉陽姜氏。嘉靖三十一年八月廿一日公生。器識過人。好讀書。二十七。從先大夫如京師。有相者見之曰。當作巨人。名聞天下。三十四。擢庭試第二名。以所言。忤上意。命盡罷一榜及第。明年。先大夫歿。旣卒喪。因廢擧子業。釣於江上。壬辰之亂。賊連陷諸城長驅旬月。犯圻旬。上西幸。公傾則募壯士。起兵於宜寧。先據新繁粟。守要害。連戰連克。亦不以斬馘爲功。以初起兵。兵少賊強。設爲奇兵。得勇士數人。與公皆絳衣白馬。誘賊追我。匿入林麓。人各出沒山上。閃忽疑惑。詭謂曰。天降絳衣將軍。伏兵亂射。賊大驚。亦謂飛將軍。不敢近公。所領兵皆鄕兵烏合。不習於兵。又怯於攻戰。公每戰。必身先士卒。以激衆心。以故衆皆出死力。十戰十克。遠近響應。時以巡察軍常退守。多不快於公。及與兩湖諸將勤王兵潰奔。還召兵諸郡縣。擾亂人心。益不快。義兵思欲散去。公發憤罵曰。睟可斬。因數其八罪。欲移兵先擊之。巡察嚴兵自守。一以叛聞。一移招諭衙門。欲捕囚以聞。金公誠一謝曰。某果有叛謀。彼方據兵非一力士可捕。若無叛心。一書足以開悟。乃移書責之。曉以逆順。義兵將金沔。亦譬曉之甚力。公復書謝曰。公。上之所遣。公之言。乃上之言。敢不從。衙門卽啓上。某爲國無它意。因陳戰捷狀。上不問。下敎褒其義。兩軍之難解。公雪涕勵兵。日擊賊。兵勢益張。於是玄,靈,昌屯賊。悉燒倉粟而遁。江右農桑晏然。上下諭。嶺南士民。恨聞名之晩也。初賞爵幽谷道察訪。後改刑曹正郞。尋陞折衝將軍。連爲星,晉二州牧兼助防將。陞防禦使。諸義兵皆屬焉。時賊屯兵海上。體相李公元翼。令治嶽堅築石門。欲悉衆一戰。請楊元兵以爲聲勢。公曰。今日之勢。不如修城池。務積儲。待彼而動。猛虎在山則威。在野則怯。天兵在湖路。猛虎在山之勢也。秋。賊大至。築石門未完。移守火旺。令諸將士曰。愼毋與戰。堅守而已。賊不得戰。相守一日一夜。乃渡江西。屠黃石。進陷南原。於是列城皆潰。體相念兵少守城危。令下兵。公不從。城守益堅。尋以母憂去。上累召起復。終不起。明年。賊酋秀吉死。而諸賊兵撤歸。公避地東界之蔚珍。守喪三年。父子作業以販賣。旣除喪。召爲察理使。按南邊。仍爲節度使。啓請脩島山城。具陳城守形便。朝廷不從。公上疏言時事。卽棄歸。大司憲洪汝諄。論以瀆慢。付處靈巖。一年。上釋之。公遂入琵瑟山中。辟穀導引。學神仙之術。上復召爲察理使。築天生城。仍爲善山都護府使。不赴。拜安東大都護府使。又不赴。冬。陞嘉善大夫行龍驤衛上護軍。後復以察理使。改同中樞。遷右尹。皆辭不至。光海元年。復爲嶺南左節度使。明年。爲水軍統制使。皆不起。連有召命。夏。至京師。以副摠管。遷左尹。尋拜咸鏡道觀察使。時李相國謝病杜門。公直入見相國曰。將相和調。則內外一體。今相國杜門。吾且去矣。三上疏。遂去歸。光海宣諭者再。而終不至。四年。爲湖南節度使。不起。其年。光海殺永昌。公上疏言不可殺。不報。後五年。公卒。萬曆四十五年四月十日。年六十六。光海賜賻弔祭如儀。命立傳。其八月某日。葬于玄風縣南仇知山郭氏族葬。明年。鄕人爲之立祠。貞夫人商山金氏。曺南冥先生外孫也。生二男二女。男瀅,活。壻辛膺,成以道。瀅生汝櫓,汝楫。活生汝植,汝梓,汝樞,汝松。辛膺生東望,時望。成以道生萬江,萬河。公又有側室子二人。灘,沐。公平生非信不踐。非義不爲。身當大亂。率勵義士。誓心伐賊。忠義著於四方。旣事平。又不以功名自居。遺世遠引。以盛名。患害不及焉。公棲息之所鷲山倉嵒。有忘憂亭。銘曰。
處名難。居成功尤難。知微知幾。哲人高蹈。確而安。
記言別集 許穆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 신도비명
공의 휘는 재우(再祐), 자는 계수(季綏)이며, 성은 곽씨(郭氏)로 현풍(玄風)이 본관이다.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지번(之藩)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월(越)의 아들이다. 모친은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공은 가정(嘉靖) 31년(1552, 명종7) 8월 21일에 태어났다. 공은 기량과 식견이 출중하였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27세에 선친을 따라 경사(京師)에 갔는데, 관상을 보는 사람이 공을 보고는
“반드시 위대한 인물이 되어 천하에 그 명성을 날릴 것입니다.”
하였다.
34세에 정시(庭試) 제2명으로 급제하였으나 답안의 내용이 임금의 뜻에 거슬려 급제자 전원을 파방(罷榜)하라는 명이 내렸다.
이듬해에 선친이 별세하였으며, 상을 마친 후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연이어 성을 함락하고 진군하여 한 달도 되지 않아 경기 지역을 침범하자 상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
공이 재물을 털어 장사(壯士)를 모집하고 의령(宜寧)에서 기병하였다. 먼저 신번(新繁)의 곡식을 확보하여 요해처를 지키면서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며, 또한 참괵(斬䤋)으로 공을 삼지 않았다.
공이 처음에 기병할 때 군사는 적고 적은 막강하였으므로 돌격대를 조직하고 용맹한 장사 몇 명과 함께 모두 붉은 옷을 입고 하얀 말을 타고서 적이 추격해 오도록 유도한 다음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가 각자 산 위에 출몰하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저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거짓으로 ‘천강홍의장군(天降絳衣將軍)’이라 외치면 나머지 복병들이 화살을 난사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그들 또한 ‘비장군(飛將軍)’이라 하면서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이 이끄는 군대는 모두 오합지졸의 향병(鄕兵)들이어서 전투에 익숙하지 않고 또 공격전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공이 전투 때마다 반드시 사졸들보다 앞장서 나가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 때문에 군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움에 임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원근의 고을이 이에 호응하였다.
그때 순찰사(巡察使)의 군대가 늘 뒤로 물러나 수비만 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불쾌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양호(兩湖) 지방의 장수들과 함께 임금을 구원하러 가다가 군대만 궤멸당하고 도망쳐 돌아와 군대를 소집하니 군현들이 소란에 빠지고 인심이 더욱 불만을 가졌으며 의병들은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자 공이 분개하여,
“김수(金睟)란 놈의 목을 베야 하겠다.”
하고는 그의 여덟 가지 죄를 하나하나 성토한 후 군사를 이동시켜 선제공격을 하려고 하였다. 이에 순찰사가 군사들을 배치하여 스스로 지키는 한편 한쪽으로는 반란이 일어났다고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또 한쪽으로는 초유사(招諭使)에게 공문을 보내어 공을 잡아 가두어 보고토록 하려고 하였다.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답변하기를,
“곽재우가 과연 모반할 생각이 있다면 그가 현재 군대를 지니고 있으니 역사(力士) 한 사람 보낸다고 해서 체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편지 한 통만으로도 깨우칠 수가 있소.”
하고는 편지를 보내어 공을 책망하고 역순의 이치로써 설득하였다. 의병장 김면(金沔) 또한 매우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공이 초유사에게 답장을 보내 사과하기를,
“공은 상께서 파견한 분이시라 공의 말이 곧 상의 말이니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초유사 아문에서 즉시 상에게 장계를 올리기를,
“곽재우는 나라를 위하느라 그렇게 한 것일 뿐이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고는, 이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을 보고하였다. 상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전교를 내려 그 의기를 포상하였고, 두 군대의 대립도 해소되었다.
공이 눈물을 닦고 군사를 독려하여 날마다 왜적을 공격하니, 군대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에 현풍(玄風), 영산(靈山), 창녕(昌寧)에 주둔한 왜적이 창고의 곡식을 모두 불사르고 도망을 갔으나 강우(江右) 지역의 농사는 무사하였다. 상이 영남의 사민(士民)들에게 하유하면서 공의 이름을 뒤늦게 들은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처음에 포상으로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에 제수되었다가 뒤에 형조 정랑으로 옮겨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연이어 제수되었고 조방장(助防將)을 겸대(兼帶)하였으며, 방어사(防禦使)로 승진하자 의병들이 모두 공의 휘하에 소속되었다.
그때 왜적이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체찰사(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공에게 악견산성(嶽堅山城)과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수축하게 하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일전을 벌이려고 하면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의 군대에 지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전세는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저들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나운 호랑이는 산에 있으면 위엄이 있지만 들판에 나오면 겁을 먹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호남에 있는 것은 사나운 호랑이가 산에 있는 것과 같은 형세입니다.” 하였다.
가을에 왜적이 대대적으로 침략해 왔다. 석문산성을 축성하는 일이 완성되지 않아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이동하여 수비하고 장졸들에게 명령하기를, “신중하게 행동하여 적과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하였다. 
왜적이 싸울 수가 없게 되자 하루 낮 하루 밤을 서로 대치하여 지키다가 강을 건너가 서쪽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도륙하고 다시 진군하여 남원(南原)을 함락하자, 이에 여러 성들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체찰사가 공의 군사가 수가 적고 성을 지키는 것이 위험하다는 점을 염려하여 군대를 철수할 것을 명했으나 공은 이 명을 따르지 않고 더욱 굳게 성을 지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모친상을 당하자 관직을 떠났다. 상이 누차 소명을 내려 기복(起復)을 명했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에 왜적의 우두머리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죽고 왜적들이 철군하여 돌아가자 공은 세상을 피해 동계(東界)의 울진(蔚珍)으로 들어가 삼년상을 치르며 부자(父子)가 함께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소명을 받아 찰리사(察理使)에 제수되어 남쪽 변방을 안찰하였으며, 이어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장계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고 성을 지키고 있는 형편에 대하여 상세하게 개진하였으나 조정에서 따라 주지 않았다. 공이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말하고는 곧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오자,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이 임금을 모독했다고 논척하여 영암(靈巖)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는데, 1년 뒤에 상이 석방하였다. 공은 마침내 비슬산(琵瑟山)으로 들어가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導引)을 행하면서 신선술(神仙術)을 배웠다.
상이 다시 소명을 내려 찰리사에 제수하자 천생성(天生城)을 축성하였다. 이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으로 승진하였고 나중에 다시 찰리사로서 동중추(同中樞)로 자리를 바꿨다가 우윤(右尹)으로 옮겨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영남좌도 절도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연달아 소명이 내려오자 여름에 서울로 올라와 부총관(副摠管)을 거쳐 좌윤(左尹)으로 옮겼고 얼마 후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때 이 상국(李相國)이 병으로 사직하고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공이 들어가 상국을 뵙고 말하기를, “장수와 정승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안팎이 일체가 될 터인데 지금 상국께서 두문불출하고 계시니 저도 떠나야 하겠습니다.” 하고는 세 번 상소를 올리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광해군이 거듭 선유(宣諭)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광해군 4년(1612)에 호남 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에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는데 공이 상소를 올려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 후 5년이 지나 만력 45년(1617, 광해군9) 4월 10일에 공이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광해군이 의례에 따라 부의를 보내고 조제(弔祭)를 지내 준 다음 공의 전기(傳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해 8월 모일에 현풍현(玄風縣) 남쪽 구지산(仇知山)에 있는 곽씨의 선영(先塋)에 안장하였고 이듬해 그 지역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정부인(貞夫人)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조남명(曺南冥) 선생의 외손녀로서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은 형(瀅)과 활(活)이고, 사위는 신응(辛膺)과 성이도(成以道)이다. 형은 여로(汝櫓), 여즙(汝楫)을 낳았고, 활은 여식(汝植), 여재(汝梓), 여추(汝樞), 여송(汝松)을 낳았다. 신응은 동망(東望), 시망(時望)을 낳았고, 성이도는 만강(萬江), 만하(萬河)를 낳았다. 공은 또 측실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탄(灘)과 목(沐)이다.
공은 평소 신(信)이 아니면 실천하지 않았고, 의(義)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대란(大亂)을 당해서는 의병을 이끌고 왜적 토벌을 맹세하여 충의(忠義)가 온 나라에 알려졌으며, 난이 평정되고 나서는 또 공명(功名)을 자처하지 않고 세상을 버리고 멀리 물러났으므로 화려한 명성 때문에 화를 당하지는 않았다. 공이 은거하던 취산(鷲山)의 창암(倉碞)에 망우정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處名難         명성에 잘 처신하기란 어렵고 
居成功尤難  이룩한 공을 잘 누리기란 더욱 어렵다 
知微知幾     조짐이 은미할 때 기미를 알아서
哲人高蹈     철인이 세상 피해 고상하게 사니
確而安        그 형세 확고하고도 편안하도다

기언별집記言別集 허목許穆

[주-D001] 신도비명 : 1771년에 간행한 《망우집(忘憂集)》에는 묘지명으로 제목이 바뀌어 수록되어 있고, 그 뒤에 권유(權愈)가 지은 신도비명이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주-D002] 27세 : 대본에 ‘□十七’로 한 글자가 결락되어 있어 ‘二’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3] 경사(京師) :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주-D004] 신번(新繁) : 의령의 동북 지역에 있는 속현(屬縣) 이름이다.
[주-D005] 참괵(斬䤋) : 전쟁에서 적의 귀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을 이른다.
[주-D006] 동계(東界) : 강원도를 이른다.
[주-D007] 조남명(曺南冥) : 남명은 조식(曺植, 1501~1572)의 호이다.

 

2020.2.18.측면에서 본 여현정 망우정

 

축산군지에 실려 있는 망우정 원운과 기록들을 옮겨 둔다.

 

忘憂亭
忠翼公郭再祐江舍也 扁之以忘憂終老焉
以江亭與士人李道純書曰 唐虞以天下與賢 吾以江舍與賢所 與之大小不侔雖若天淵 而其所以與之之意堯舜 與我同也 吾觀作亭於江上者 鮮有能守者 其故何哉 不能與賢也 今吾不私一亭 與之於君者 知君有喜好山水之心 而可以守吾亭也 君能以吾之心 爲心與之後之賢者 後之賢者 亦以君之心 爲心傳之於可守之賢 可以永終不墜云

 

망우정忘憂亭
충익공 곽재우의 강변의 정자로서 망우당이 늙음을 마감한 곳.
강가의 정자를 사인士人 이도순李道純에게 주면서 기록한 글에 말하기를 「요순은 천하를 어진 이에게 주었는데 내가 강사江舍를 어진 이에게 주는 것은 그 크고 작음은 같지 않음이 하늘과 땅 같으나 그 주는바 뜻은 요순과 내가 같다. 내가 보기에 강상江上에 정자를 지으면 잘 지키는 일이 드무니 그 연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진 이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정자를 내 것으로 하지 않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그대가 산수를 좋아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나의 정자를 잘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능히 나의 마음을 그대의 마음으로 삼아 뒷날의 어진 이에게 주고 뒷날의 어진 이 또한 그대의 마음을 그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지켜 갈만한 사람에게 전해준다면 가히 오래도록 허물어지지 않으리라」 하였다.

 

忘憂亭 元韻
斥土治岩自成階 흙을 돋우고 바위를 다듬으니 절로 층계가 되어
層層如削路危傾 깎은 듯 층이 저서 길이 위태롭게 기울었네.
莫道此間無外護 이 사이에 밖의 보호 못한다 하지마소
李三蘇百玩空明 이태백과 소동파가 하늘의 달을 희롱하네.
岩間犬吠知聲應 바위틈에 개 짓는 소리 메아리로 알리니
水裡鷗飛見影孤 물 안에서 나는 물새는 그림자도 외롭구나.
江湖閒適無塵事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니 세속일 알바 없고
月夜磯邊酒一壺 달 밝은 낚시터엔 술이 한 단지로구나.
不有長江上有山 아래는 긴 강이요 위쪽에는 산인데
忘憂一舍在其間 망우정 한 채 집이 그 사이에 자리하네.
忘憂仙子忘憂臥 근심 잊은 신선이 근심 잊고 누웠으니
明月淸風相對閒 밝은 달 맑은 바람 맞대어 한가하네.
忘憂堂 郭再祐  망우당 곽재우

 


塵客仙曺道自殊 속세 사람 신선들과 길이 각각 다르거니
我求榮達子枯孤 나는 영화부귀 구하는데 그대 몸은 여위고 외롭구나.
欲知意味相從處 의취意趣가 서로 따르는 곳을 알고자 하니
秋月明時酒一壺 때마침 가을 달 밝고 술 한 동이 놓였구나.
梧里 李元翼    오리 이원익

 


千載蘇仙亦壁遊 천 년 전의 소동파는 적벽에서 노닐었고
吾儕此會亦風流 우리들 이 모임도 또한 풍류 아니런가.
淸江夜興渾如舊 맑은 강 밤 흥취가 옛일과 꼭 같은데
只欠當年七月秋 다만 빠진 것은 그 해 칠월 가을 일세.
澗松 趙任道    간송 조임도

 


憶昔忘憂仗義秋 망우당 의병장 옛 일을 생각하니
英風壯節擅東州 영걸한 풍채 굳센 절개 동주에서 첫째였네.
至今悵望泉原隔 지금은 한스럽게 천원이 막혀 있어
歎息無言俯碧流 탄식하며 말없이 푸른 누대 굽어보네.
葛庵 李玄逸    갈암 이현일

 

滄巖亭 卽忘憂亭 창암정 즉망우정
滄岩勝境冠東州 푸른 바위 좋은 경치 동쪽 모을 으뜸일세.
訪古層臺一繁舟 옛 층대 찾아와 작은 배 매었네.
湖上騎驪無舊隱 호숫가에 나귀타고 오니 옛날 숨은 이 없고
遼東化鶴幾眞遊 요동에서 학이 되니 거의 참 놀이이네.
魚龍夜水腥侵棹 고기는 밤물결 노에 비린 냄새 보내고
梅竹幽居翠拂樓 매화 대나무는 그윽하게 푸른 기운 떨쳐 오네.
醉後詩情更淸絶 취한 뒤에 시정은 더욱 밝아지고
不知人世有閒愁 인간세상에서 아는 것과 시름마저 잊었구나.

蒼雪 權斗經    창설 권두경

 

축산군지에는 망우당 곽선생을 찬양하는 시가 농암 김창흡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 소개하는 시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남긴 홍의장군가紅衣將軍歌 임을 밝혀 둔다. 본관이 안동으로 영의정을 지낸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고 세째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인데 축산군지를 기록할 때 이 분들을 착각하여 "농암 김창흡"으로 기록한 것임을 안동김씨 족보에 의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으로 수정했다.

 

紅衣將軍歌

壬辰討敵義士多 임진왜란 때 적 무찌른 의병 많았는데
紅衣將軍孰能過 홍의장군을 뉘라서 넘으리오.
將軍初自宜寧起 장군은 처음 의령에서 일어나
請誅邊撓奮干戈 주변 난을 벌주려고 창과 칼을 떨치었네.
登陣白馬以橫行 흰 말 타고 진에 나아가 종횡으로 달리니
一見紅衣衆冠驚 붉은 옷 한번보고 뭇 원수들 혼이 나네.
逡巡不敢與交鋒 뒤로 물러나며 감히 싸움 못하더니
及至相薄風火生 서로 맞닥뜨리게 되어서는 바람과 불이 일었구나.
炮丸雨落馬髥騰 총알은 비 오듯 한데 말갈기 날리며
鐵甲潮退霞袍輕 철갑은 조수같이 물러가고 노을 같은 도포 가볍다.
將軍跳岩盖有神 장군이 가파른 곳 달리면 귀신같아서
料敵設奇又殊倫 적들이 생각기에 기이한 재주 갖춘 별다른 사람인줄 알았도다.
成功則易處功難 공을 이루기는 쉬워도 처신하기 어려운데
善韜而藏公其人 잘 감추고 간직한 분 바로 망우당 그분 일세.
英雄自古少圓通 영웅은 옛날부터 모든 일 통달하기 어렵다는데
前有張良後有公 예전엔 장량 있고 뒷날엔 공이 있네.
韓彭葅醢道濟壞 한신은 죽임 당하고 팽조의 바라든바 무너지고
鳥盡何嘗不藏弓 새 맛봄을 다했는데 어찌 활 감추지 않으리오.
宜寧小築室如斗 의령에서 지은 작은 집은 방이라야 한 말들이
收名風雲返胸中 이름을 험한 세상에서 가슴속에 거둬 두었네.
綠沈金鎖委莓苔 짙푸른 쇠사슬 풀을 이끼에 맡겨두고
剩水殘山遶亭臺 나직막한 산들만 쓸쓸하게 둘러 있네.
半囊松花一繫船 반 주머니 송화 가루 배 맬 곳은 오직 하나
贊畵活計何蕭然 도와줄 살림살이 어찌 이리 쓸쓸한고.
持竿不是太公釣 잡은 낚시 대는 강태공 낚시 그 아니며
食松寧慕赤松仙 솔잎을 먹으면서 적송 선인 사모하네.
當時人未測淵深 그때의 사람들은 깊이를 몰랐던가
後來往往見其心 뒷사람 이따금씩 그 마음 살폈더라.
紅衣將軍可作歌 홍의장군 기리는 노래지어 부르며
立馬遺墟一長吟 남긴 옛터에 말 세우고 길게 한번 읊어 보네.
三淵 金昌翕     삼연 김창흡

 

2020.2.18.망우정 정면

滄巖亭下奉呈 申之悌
滄江一棹白沙涯 푸른 강 돛단배 흰 모래톱
日朗天明浪有花 날은 맑고 하늘 밝아 물결엔 꽃 비치네
回望巖亭不忍去 창암정 돌아보니 차마 떠나기 어려운데
紅塵客奈白鷗何 어지러운 속세 나그네에게 흰갈매기 어찌할꼬

奉呈忘憂亭僊丈 망우정 어른께 삼가 드리다
蒼山走入碧波中 청산이 푸른 파도 속으로 뛰어들고 
亭子蕭然影落空 고요한 정자 그림자 수면에 비치네
鶴氅僊翁揖謂我 학창의 입은 신선이 작별하며 하는 말 
異時重過聽枯桐 훗날 다시 들러 거문고 연주 듣세나

 

망우정 忘憂亭 편액

 

여현정  與賢亭 편액

 

 

與賢亭記
與賢亭在靈山縣治十餘里。北枕斷麓。南臨大江。蒼厓擁屛。白沙鋪雪。面面雲山。四望通敞。眞天作之絶勝。乃故郭相公忘憂精舍。而今爲吾友李君子粹之所有也。曷爲相公之舍而李君有之也。曷爲舊扁忘憂而易以新號歟。與賢故也。吾嘗讀相公與李君書曰。唐虞以天下與賢。吾以江舍與賢。所與之大小雖若天淵。其所以與之之意。堯舜與我同耳。吾觀作亭於江上者。鮮有能守之者。何哉。以不能與賢也。今吾不私一亭。與之於君者。以君有喜好山水之心。而可以守吾亭也。吾乃知相公之所以與。李君之所以得矣。相公嘉遯林泉。若將終身。逢時板蕩。倡義討賊。名震一世。位躋二品。而脫屣勇退。超然塵臼。託於仙術。辟穀餐松。終老江湖。無悔無悶。不明而能之乎。李君襲素風於平靖。沐餘休於忠簡。文彩氣岸。異乎他族。而居家躬孝弟之行。處世絶厓角之病。性好山水。超然有出塵之想。不賢而能之乎。余謂非相公之明。不能知李君之賢而託以江舍矣。非李君之賢。不能當相公之明而許爲知己矣。是知明與賢相孚。而成就得一箇好事。將爲千載不易得之美談矣。不然。李君於相公。外孫壻耳。相公子孫不爲不多。而江舍之託。不於彼而於此者。有是理耶。余於是益信相公之明而李君之賢也。名亭以與賢。不亦可乎。請以與賢換忘憂可乎。君蹙然曰。子欲以我爲玩戲之具耶。亭主自稱賢。則人有不笑我者乎。余又解之曰。與賢字出於相公之文。君何嫌之固避乎。君請不避小嫌。而務其實則善矣。君曰。何謂務實也。曰。相公鷗鷺之盟。君不可不尋也。相公煙水之遊。君不可不續也。風月不可閒也。詩酒不可廢也。凡相公釣磯漁艇琴罇筆床藥罏茶鼎。皆不得使之荒涼。則相公雖逝。而相公之遺跡。永久不替矣。付託之意其在斯歟。君其勉旃。君其勉旃。君曰諾。遂爲之記。
咸安 趙任道 記
己酉暮春者 後學 京山 李相虔 謹書

 

여현정기(與賢亭記)
여현정¹⁾은 영산현靈山縣 읍치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깎아지른 산기슭을 베고 있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백사장은 눈이 내린 듯 하얗다. 곳곳이 구름에 덮인 산이고, 사방이 확 뚫려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낸 절경이다. 이곳은 바로 옛날에 곽망우당(郭忘憂堂)²⁾의 정사였는데, 지금은 나의 벗 이자수(李子粹)³⁾ 군의 소유가 되었다. 어찌 곽 상공의 정사였던 것이 이군의 소유가 되었는가? 어찌 예전에는 ‘망우정’이라 편액 했던 것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었는가? 어진 이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곽 상공⁴⁾이 이군에게 준 편지를 읽어 보았는데, 그 편지에 “요순堯舜은 천하를 어진 이에게 주었고 나는 강가의 정사를 어진 이에게 준다. 주는 것의 크고 작음은 비록 천지 차이지만 그 주는 바의 의도는 요순과 내가 같다. 내가 보건대 강가에 정자를 지은 사람 중에 능히 그 정사를 지킨 사람이 드물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능히 어진 이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한 정자를 사사롭게 여기지 않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그대에게는 산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내 정자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제야 곽 상공이 정자를 준 까닭과 이군이 받은 까닭을 알았다. 곽 상공은 초야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그곳에서 장차 세상을 마칠 듯이 하였다. 난리가 일어나는 시대를 만나 의병을 창도해 왜적을 토벌하여 명성이 당대에 떨쳤고 지위가 2품⁵⁾에 올랐는데도 헌신짝 버리듯 벼슬에서 용감히 물러났다.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 신선술에 의탁하여 곡식을 물리치고 솔잎을 먹으며 강호에서 늙어가도 후회하거나 근심함이 없었으니, 명철하지 않고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군은 평정공(平靖公)⁶⁾에게서 소박한 기풍을 이어받았고 충간공(忠簡公)⁷⁾에게서 넉넉한 아름다움을 받아, 풍모와 기개가 다른 집안과 달랐다. 집안에 거처할 적에는 효성스럽고 공손한 행실을 몸소 실천했으며, 세상에 처신할 적에는 모나게 행동하는 병통을 끊어버렸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려는 생각이 있었으니, 어질지 않고서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곽 상공 같은 명철함이 아니라면 이군이 어진 줄을 알아서 강가의 정사를 부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군 같은 어짊이 아니라면 곽 상공의 명철함을 보고 자기를 알아주는 분이라고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명철함과 어짊이 서로 만나 한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루었고, 천년토록 쉽게 얻을 수 없는 미담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군은 곽 상공에게 외손서일따름이고, 곽 상공의 자손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강가의 정사를 부탁하기를 저 자손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이군에게 하였으니, 이런 이치가 있는가. 내가 여기에서 곽 상공은 명철하고 이군은 현명하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정자에 ‘여현(與賢)’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망우(忘憂)’를 ‘여현(與賢)’으로 바꿀 것을 청한 것이 옳은가? 이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대는 나를 희롱거리로 만들 셈인가? 정자 주인이 스스로 어질다고 일컬으면, 나를 비웃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또 설명하기를 “‘여현(與賢)’이란 글자는 곽 상공의 글에서 나왔으니, 그대는 어찌 꺼려서 굳이 피하려고 하는가? 그대는 청컨대 작은 혐의를 피하지 말고 그 실질을 힘쓰면 선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군이 “‘실질을 힘쓴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곽 상공이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고 한 맹세를 그대가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고, 곽 상공이 자연에서 유람한 것을 그대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네. 풍월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되고, 시와 술을 그만 두어서는 안 되네. 무릇 곽 상공의 낚시터와 고기잡이배, 거문고와 술항아리, 붓과 책상, 약탕기와 차 솥을 모두 황폐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곽 상공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곽 상공의 유적은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일세. 곽 상공이 그대에게 부탁한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일세. 그러니 그대는 힘쓰고 힘쓰시게.”라고 하자, 이군이 “알겠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기문으로 삼았다.
함안 조임도 기록하다
기유 모춘자 후학 경산 이상건 삼가 쓰다.

 

【주석】

여현정¹⁾ : 여현정은 현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다.
곽망우당(郭忘憂堂)²⁾ : 곽재우(郭再祐, 1552~1617)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이며, 현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조식에게 수학하였다. 저술로 《망우당집》이 있다.
이자수(李子粹)³⁾ : 이도순(李道純, 1585~1625)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자수, 호는 모재(慕齋)ㆍ청암(淸庵)ㆍ여현정(與賢亭)이다. 덕암(德巖) 이석경(李碩慶)의 종자이며, 곽재우(郭再祐)의 외손서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배웠다. 저술로 《모재집》이 있다.
곽 상공⁴⁾ : 《망우당전서(忘憂堂全書)》 권1에 실린 〈여이도순강사서(與李道純江舍書)〉를 말한다.
2품⁵⁾ : 곽재우는 동지중추부사(종2품, 1605년), 한성부 우윤(종2품, 1605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 1608년), 수군통제사(종2품), 부총관(정2품, 1610년), 한성부 좌윤(종2품, 1610년), 함경도 관찰사(종2품, 1610년) 등에 제수되었다.
평정공(平靖公)⁶⁾ : 이약동(李約東, 1416~1493)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시호는 평정이다. 이후경의 고조부이다.
충간공(忠簡公)⁷⁾ : 이숭원(李崇元, 1428~1491)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인(仲仁), 시호는 충간이다. 1453년(단종1) 문과에 장원하여 이조ㆍ형조ㆍ병조의 판서 등을 지냈다. 이도순의 모친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이숭원의 후손이다.

*여현정기 역〔與賢亭記 譯)은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김익재. 양기석. 구경아. 정현섭 (공역/2015) 원문을 옮겼습니다.

 

출처 및 참조
창녕현지 축산군지 합본-창녕문화원/중앙인쇄사(2006.11.25.)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 곽재우 의병장과 망우정(忘憂亭.與賢亭)(1)

국역 망우선생문집-경충재/신흥인쇄소(1996.4.5.) 홍우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