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의창구 동읍 용잠리 풍천노씨 무회재 無悔齋

천부인권 2020. 3. 1. 06:00



2020.2.29. 동읍 용잠리 풍천노씨 무회재無悔齋 전경


동읍 용잠리 779-48번지(동읍로71번길 14-10)에는 풍천노씨 재실인 무회재無悔齋가 위치해 있는데 원래 덕천리德川里에 있었으나 그곳에 육군종합정비창이 건설되어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현지에서 위치기반고도계로 위치를 확인해 보니 해발 20m이고 「위도 35°16′52″N 경도 128°40′57″E」를 기록한다.
무회재無悔齋의 문서상 기록은 1960년 김종하가 쓴 『창원군지』에 『무회재중건기無悔齋重建記』 원문이 실려 있고 이를 해문 한 기록이 『창원의 누정』에 실려 있어 무회재無悔齋를 찾게 되었다.
무회재無悔齋는 구룡산이 동으로 뻗어 토지산土地山을 맺었고 토지산이 마지막 끝자락을 펼쳐 평야를 이루는 곳 산 가장자리에 높게 지어졌다. 높다란 계단위의 솟을삼문에는 숭효문崇孝門이라 편액 했고 본채는 무회재無悔齋라 이름 했으며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와가로 2004년 4월 20일 상량上樑하여 지었다. 마당 안에는 현대식 관리사를 지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부에는 아래에 소개하는 중건기重建記의 편액扁額은 없고 기둥에 주련도 없다. 관리사와 무회재無悔齋 사이에 『무회재중건기념비無悔齋重建記念碑』가 세워져 있어 내력을 알게 한다. 먼저 옛 기록속의 무회재중건기無悔齋重建記를 소개한다. ‘무회無悔’란 “후회함이 없다.”라 생각되나 조선시대 노극신盧克愼의 자字가 또한 무회無悔이다.




2020.2.29. 동읍 용잠리 풍천노씨 무회재無悔齋 솟을대문 숭효문崇孝門



숭효문崇孝門 편액



무회재無悔齋 정면 모습


無悔齋重建記     
昌原府東土地山下佛川之里者 吾先祖參判府君之藏 而貞夫人金氏祔之 始勝國末 府君曾祖寺尹公 遭紅巾亂 奉母夫人落南 卜府東花木里居之 卒墓白里山 郡夫人朴氏墓在親峴 寺尹公之子參議公墓 在新劍 淑夫人閔氏墓 在草島毛三之麓 府君三子 仲爲松齋先生 先生 又從聘鄕移居咸陽 故先生以下世葬咸 其後 屢經兵燹 寺尹公與郡夫人墓 則失守 今所守者 參議公兩位 及府君之兆也 兩世之碣 皆先生所撰書 而折倒埋于墓階 先生曾孫文孝公 爲道伯 而重竪之 未幾龍蛇之亂 無餘存者 後孫總戎公 以統制 重修石物 且建書室 封植其草木 使僧徒守之 久而頹廢者 今且二百年矣 先父老 嘗慨恨於受胙之無所 頃年 宗議峻發 醵金鳩材 胥府君兆下而宇之 爲三架兩行之室 盖府君之兆 距花木爲五里而近 新劍之墓 則花木之後龍 草島 則爲二十餘里 然參議公 爲府君之先 則後孫之建齋 宜就草島若新劍 今不于彼而于此者 按府誌曰 德川精舍 在文房洞 松齋盧公早年讀書之所 德川者 卽佛川也 總戎公之重建 爲此故 今日之役 亦經于府君兆下也 亦將竣 門父老 以余爲識其顚末 顧德學之蔑 縱不敢承 亦不敢辭 夫有力者 未必有志 有志者 未必有力 此天下事卒於難辦也 吾族 盤居嶺湖 其麗千百 非盡無力 而有力者少 非盡無志 而有志者多 則今日之役 底于有成 盖志之所往 力或不逮 而亦未嘗不行 夫志者 鬼神可感 金石可透 爲吾族者 尙無曰吾事已畢 益勉其孝悌之行 則不惟斯齋之嗣葺有人 吾安知草島新劍之宮 不繼興於有志之人也耶
後孫 近漢 記


무회재중건기 無悔齋重建記     
창원부昌原府 동쪽 토지산土地山 아래에 불천리佛川里는 나의 선조이신 참판부군參判府君의 묘소가 있으며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도 합장하였다. 처음 고려말에 부군府君의 증조曾祖이신 시윤공寺尹公께서 홍건적의 난을 만나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남하하여 부府의 동쪽 화목리花木里에 자리를 잡고 사시다가 돌아가셔서 백리산白里山에 묘를 썼다. 군부인郡夫人 박씨朴氏의 묘는 친현親峴에 있으며 시윤공寺尹公의 아들 참의공參議公의 묘는 신검新劍에 있고 숙부인淑夫人 민씨閔氏의 묘는 초도草島 모삼毛三 산록에 있다. 부군府君의 세 아들 중 중간이 송재선생松齋先生인데 송재선생은 고향을 찾아 함양咸陽으로 이거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 이하로는 대대로 함양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여러 번 병란으로 소실되어 시윤공寺尹公과 군부인郡夫人의 묘는 잃어버렸고 지금 지키는 묘는 참의공參議公 양위兩位와 부군府君의 선영이다. 두 세대의 묘갈은 모두 선생이 지어 무덤 상석 아래에 묻어둔 것이다. 선생의 증손曾孫인 문효공文孝公이 도백道伯이 되어 다시 세웠으나 임진난壬辰亂을 지나면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후손인 총융공總戎公이 통제사統制使로 석물石物을 다시 세우고 서실書室을 지어 풀과 나무를 심고 스님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오래전에 또한 무너져 폐쇄된 것이 지금 어느 듯 이백 여년이 되었다. 선대의 부로父老들이 제사를 드릴 장소조차 없음을 개탄하여 지난해 종중의 의견이 일어나 돈을 각출하고 재물을 모아 부군府君의 묘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옆으로 세 칸이고 앞뒤로 두 칸이다. 대개 부군의 무덤은 화(花木에서 오리 거리이며, 신검新劍의 묘는 화목花木의 뒷 구릉이고, 초도草島는 이십여리 정도이다. 그러나 참의공參議公이 부군(府君)의 앞이니 후손들이 재실을 지으면 초도나 신거에 지어야 하나 지금 그곳에 짓지 않고 이곳에 짓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부지府誌에 “덕천정사德川精舍는 문방동文房洞에 있는데 송재松齋 노공盧公이 일찍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덕천德川은 곧 불천佛川이다.”라고 하였다. 총융공總戎公이 중건한 것도 이러한 이유이고 금일今日 다시 이곳 부군의 무덤 아래에 공사를 하는 이유이다. 준공이 되어 문중의 어른들이 나에게 그 전말顚末을 알고 있으니 기문을 쓰라고 하였다. 내 학문과 인덕이 미천함을 생각하면 감히 받들 수 없는 일이나 또한 감히 사양하지도 못하였다. “무릇 힘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뜻이 있지 않으며 뜻이 있다고하여 반드시 힘이 있는 것은 하니다. 천하의 일이란 이처럼 모두 갖추어지기 힘든 것이다. 우리 종족이 영남과 호남에 두루 살며 수천명을 넘어서니 모두 무력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는 사람이 적고 모두 뜻이 없지는 않으나 뜻이 있는 사람은 많다. 오늘의 일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은 뜻이 가는 바대로 간혹 힘이 미치지 못하였지만 행하지 않음도 없었다. 무릇 뜻이 있으면 귀신을 감동시키고 쇠와 돌도 뚫는다.  우리 종족들은 오리의 일이 이미 마쳤다고 말하지 마라. 더욱 힘써 효도와 공경을 행하면 오직 이 재실이 새롭게 지어지듯이 초도와 신검에 뜻있는 사람이 나타나 또다시 재실이 지어질지 어찌 알겠는가.
후손 근한近漢 기록하다.




무회재無悔齋 편액



측면에서 본 무회재無悔齋




『무회재중건기념비無悔齋重建記念碑』
昌原東邑은 松齋公의 증조曾祖 贈通訓大夫司僕寺 尹公諱天桂 兩位分設壇과 조부祖父 贈通政大夫吏曹參議 公諱興吉 兩位分과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公諱焉 兩位分의 墓地를 昌原東北栢里山東麓에 始卜한 곳으로 後孫들은 咸陽介坪을 根據地로 하여 全國各地에 살면서 들난 人物이 前後想望하고 門戶가 昌大한 것은 先墓의 發蔭이 아니겠는가 歲一祭時에 齋室宿所便宜를 爲하여 申未西紀一九三一年 先塋下에 齋室을 建立하고 後孫들이 世上을 참되게 後悔없이 살라는 뜻으로 齋名을 無悔齋로 하였다. 그後 齋室이 老朽되어 昌原地區宗會에서 推進全國宗員이 뜻을 모은 協贊金으로 癸亥一九八三年에 齋室을 重修하였으나 西紀一九九二年 政府施策에 따라 齋室 및 周邊敷地가 軍需基地로 編入需用되어 이곳 民家와 齋室이 이웃 洞里인 용잠리로 移住하게 되고 그 補償金이 支給되어 宗中總會에서 大宗中의 宿願事業인 會館建立과 無悔齋를 重建키로 決意하고 大宗會館은 咸陽邑龍坪里에 垈地를 確保西紀一九九三年度에 工事를 推進 同年十二月에 竣工하였으며 無悔齋建築은 여러 가지 事情에 의하여 敷地面積이 縮小調定되어 六十坪만을 換買 받고 보니 垈地面積不足으로 工事는 推進하지 못하고 國防部 및 關係機關에 敷地追加還賣를 數次陳情十餘年이 지난 西紀二千三年五月에 國防部에서 百四十坪의 敷地追加還賣가 承認되어 總二百坪敷地가 確保되어 工事推進課程에 어려운 問題를 解決하고 同年十一月에 昌原市의 建築許可를 받아 昌原市용잠리七七九의 九九番地明堂에 齋室을 建築하여 大望의 無悔齋 竣工을 이루게 되었다. 昌原市東邑栢里山下無悔齋는 東쪽에 神劒山이 對峙하여 秀麗하고 南쪽은 精兵山이 높게 솟아 神靈스러운 氣運이 넘치며 앞에는 佛川이 안고 흘러 天惠의 自然環境이 아름다운 곳이다. 格言에 이르기를 나무에 오르면 그 뿌리를 알고 샘물을 마시면 그 根源을 生覺하라 했거늘 子孫된 자 그 누구라도 自身의 핏줄과 根本을 알지니 先祖의 蔭德을 기리면서 山所 보살핌과 齋室管理에 誠敬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齋室竣工에 宗中의 뜻으로 이 事實을 大略 碑에 새겨 永傳코저함이다.
西紀二千四年甲申十一月二十四日
後孫 盧元相 지음
豐川盧氏大宗中세움


출처 및 참조
창원의 누정-박태성/불휘미디어(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