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북면 내곡리 도태마을 창원구씨 영모재 永慕齋

천부인권 2020. 2. 29. 06:00



2020.2.26. 북면 도태마을 창원구씨 영모재 대문


북면 내곡리 산 129(단내로475번길 31-13)에는 창원구씨의 중시조 구복한具復漢 공을 제향祭香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는 곳으로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10m을 표시하고 「위도 35°21′06″N 경도 128°34′16″E」를 기록한다. 이 영모재永慕齋에서 30m 우측에 구복한具復漢 공의 묘지가 있다.
예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사람들의 관리는 없어도 지금처럼 개판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재실에 개를 키우고 있어 개 냄새가 진동하는 곳으로 변했다. 또한 주변에도 개를 키우고 있어 신성한 분위는 전혀 없다. 모든 문중의 재실은 1년에 한두 번 이용하는 집이다 보니 관리가 엉망인 곳이 많은데 이런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하여 여행객들의 숙소가 되게 한다면 어떨까한다.
영모재永慕齋의 대문은 유당 김종하가 쓴 세심문洗心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본채에도 역시 유당선생이 쓴 영모재永慕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 마루에는 두 개의 영모재기永慕齋記와 영모재창건사실기永慕齋刱建事實記가 걸려 있다. 두 개의 영모재기 편액은 재작 시기가 다를 뿐 내용이 같은 것이다.




'마음을 씻는 문'이라는 세심문洗心門 편액



영모재永慕齋 전경



영모재永慕齋 편액




永慕齋記
檜鄕之北二里許 山水會精 作乃谷一區 而里之畔 巍然一閣 抱國士峰 夾郡事峙 顔之以永慕 是其國朝閫臣檜山具公之墳菴也 在昔昌辰 公生長于此里都事基 官忠淸都事 江界府使 全羅兵馬節度使 前後休蹟 縱不得史攷 與崔相國潤德比閈 又同時出仕 居人至今幷誦之 逮于季世 而子姓之散居城中者 懼先徽之從後愈泯 乞長德杠筆 闡潛光表隨道 繼以歲事之齊宿無所爲憂 衆謀同協 遂營一區 是役也 多少雲仍 無不齎誠以趨 而在鎬在道若而人 幹其事 功告成 在航君 與在益浩根 幷輿到問記於余 辭不獲 乃曰 盖人之於先祖 氣脈相貫 動輒思隨 雖等閒之地 輕微之事 莫不寓慕 矧乎斯齋 先公之舊基傍密邇體魄之藏修上臨 往時景色 杳然入想 幽明聲臭 若或接之矣 豈可造次釋念乎 每春秋霜露之節 粢盛之禮 省楸之事 不可不謹 外而揣摩萬象 彼兆內之 撮土卷石 無非爲塋增采也 當護之裨之 禦風雨淘汰之患 且察之於日用典常 一室之孝友 同族之敦睦 信之止恤之施 皆其先祖之心法 則以是而父詔子 子詔孫 垂世不已者 豈非永慕之道乎 今具氏之家 不待余言而能行此道矣 然余以傷時之人 聞此賢事 有所興起焉 不顧短拙 演俚言以酬之
歲戊戌 陽月上浣 交河 盧再洙 記


영모재기 永慕齋記
회산檜山¹⁾ 고을 북쪽 2리二里 정도에 산수의 정기가 모여서 한 골짜기를 이루니 내곡內谷²⁾이다. 마을 경계에 우뚝한 하나의 전각이 솟았고 국사봉國士峰이 둘러쳤고 도사都事 고개가 양쪽을 끼었다. 그 편액은 영모永慕라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기둥이던 신하 회산檜山 구공具公의 묘를 지키는 재실이다. 옛날 창진昌辰에 있었는데 공은 이 마을 도사터都事基³⁾에서 생장하였다. 관직이 충청도사忠淸都事 강계부사江界府使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전후前後의 아름다운 행적을 비록 역사에서 다 계고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상국윤덕崔相國潤德⁴⁾과 담장을 같이하고 살았으며 같은 시대에 벼슬에 나아갔으니 지금에까지 이곳사람들은 이들을 나란히 칭송하고 있다. 후대에 이르러 자손들이 창원 여기저기로 이거하여 살던 사람들이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가 후대로 갈수록 점차 민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덕이 높고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가려졌던 빛을 드러나게 하려고 신도神道를 표하였다. 또한 시사時祀를 모실 때 제숙齊宿할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하여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협력하여 드디어 집 한 채를 지었으니 바로 이 영모재이다. 여러 자손들이 정성을 기울여 좇아오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재호在鎬 재도在道와 몇몇 사람들이 그 일을 주간하고 공사를 마쳤다. 재항在航군이 재익在益 호근浩根과 더불어 차를 타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사양하였으나 어쩌지 못하고 이에 말한다. 대개 사람의 선조先祖는 그 기맥氣脈이 서로 관통하니 움직이면 문득 생각이 따르게 된다. 비록 등한等閒한 자리에서 일어났던 경미한 일에 대해서라도 선조에 대해 연모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다. 하물며 이 재실이랴. 선대 구공의 생장한 터가 바로 옆에 있고 바로 그 위에 혼백이 갈무리된 무덤이 임해 있으니 옛날 그 때의 경치와 모습이 상상 속에 아련하게 떠오르고 생전의 음성과 향기가 마치 지금에 접하는 것 같을 것이다. 그러하니 어찌 그리워하는 마음을 쉽게 놓을 수 있겠는가. 매년 봄가을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절기에 성대하게 제사를 올리고 산소를 돌보는 일에 삼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밖으로는 삼라만상을 살펴 미루어 짐작하면 그 징조가 안으로 내밀하게 인지될 것이다. 흙을 파고 돌을 다듬는 일조차도 선영先塋에 빛을 더하게 하는 일이다. 마땅히 보호하고 가꾸어서 비바람에 쓸려나가는 금심을 막아야 한다. 또한 일상의 법도를 잘 살펴서 한 집안이 우애롭고 효도하며 한 가문이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믿음에서 그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베풀어야 할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선조의 심법心法인 것이다. 이것으로써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자식은 손자를 가르쳐 대대손손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선조를 영원히 그리워함이 아니리.. 지금 구씨具氏 가문이 내가 이러한 말로 당부하기도 전에 이미 능히 이러한 도를 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쇠망하는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러한 어진 일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는 바가 있어 아는 것이 짧고 문장이 졸렬함을 돌아보지도 않고 속된말 몇 마디를 적어 그에 주노라.
세무술(1958) 양월 상완(10월 15일) 교하 노재수盧再洙 기록하다.


【주석】
회산檜山¹⁾ : 창원시昌原市의 옛 이름.
내곡內谷²⁾ : 창원시 북면 내곡리內谷里를 말하며 내곡리에는 도태, 송촌, 현촌, 중리마을이 있다.
도사터都事基³⁾ : 현재 북면 내곡리 도태마을을 뜻한다.
최상국윤덕崔相國潤德⁴⁾ :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이며 어머니는 청주양씨 지수之壽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문음으로 관직에 올라 1396년(태조 5) 아버지를 따라 영해寧海의 반포磻浦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400년(정종 2) 태종이 불러 특별히 훈련관부사직에 임명했으며, 1402년(태종 2)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35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영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통천 상렬사尙烈祠와 안주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영모재기 永慕齋記





永慕齋刱建事實記
창원昌原은 려조麗朝 혜종왕惠宗王께서 시조始祖 성길成吉 공公을 의창군義昌君으로 봉작식읍封爵食邑토록 한 아我 구씨具氏의 관향貫鄕으로 북역이리허北域二里許에 국사봉國士峰과 도사치都事峙의 영기靈氣를 받아 내곡일구內谷一區가 안오安奧하게 위치位置한 곳에 아我 선조先祖 복한공復漢公의 유택幽宅이 있고 재실齋室이 있어 액額을 영모永慕라 하였다. 옛날부터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명경달사名卿達士가 배출輩出 되었으니 복한조復漢祖께서는 차리此里에서 생장生長하셨서 충청도사忠淸都事 강계부사江界府使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역임歷任하셨으며 특特히 이조세종조李朝世宗朝 명신名臣 상국통천최윤덕相國通川崔潤德과 죽마지우竹馬之友로서 동시출사同時出仕하였음을 세인世人은 주지周知 도사지都事址라 칭稱하여 혁혁赫赫한 선현先賢의 유사遺事를 전송傳誦한다. 계세季世에 이르러 자성子姓이 미약微弱하고 각지各地에 산거미황散居未遑으로 명조名祖의 휘적徽蹟을 천발闡發치 못하고 재한기구齎恨己久러니 거정유춘회去丁酉春會에 제후손諸後孫이 동성창기同聲倡起하여 수갈건재竪碣建齋를 결의決議하였으나 사력미협事力未冾으로 부진난성不振難成하니 재호在鎬 재도在道 재항在航의 진성盡誠으로 구허舊虛에 삼가사영三架四楹의 재실齋室이 무술년戊戌年에 공흘工訖되었으니 선천先阡에 정민貞珉이 빛나고 선적先蹟이 유신維新하고 추강楸岡이 증채增彩로다. 오백년미황지사五百年未遑之事를 잔손孱孫의 적성赤誠으로 성치成致 되었으니 만시지감晩時之感은 불면不免이나 영모永慕의 도리道理를 행行함이 아니리요 이로서 민멸泯滅하기 쉬운 선휘先徽를 보존保存할 수 있으며 종족宗族이 모여서 화수지의花樹之誼를 돈독敦篤할 수 있으며 상로기강시감모세사霜露旣降時感慕歲祀에 제숙치엄지소齊宿致嚴之所가 되며 영빈접객迎賓接客에 흔객欣客할 수 있으며 교자육손敎子育孫에 강선습례지당講先習禮之堂이 될 수 있으니 실實로 오문창대吾門昌大의 전당殿堂이로다. 종백宗伯이 위선사衛先事에 솔선감간率先監幹하고 기후력년其後歷年에 수진秀鎭이 선인유지先人遺志를 받들어 사재斯齋의 관리管理에 특성特誠을 시발施發하였으며 미장게판美裝揭板은 상조相祚 수조秀祚 순조順祚 등等의 특성特誠으로 기성起誠하였으니 공찬표기共讚表記하면서 제족諸族이 경신敬信하는 바이다. 범사凡事는 경영성립經營成立도 어렵지만 영구유지永久維持는 우난尤難이니 유아동조지손惟我同祖之孫은 현조賢祖의 묘예苗裔된 영광榮光을 잊지말고 부조父祖의 모선열성慕先熱誠을 영세상념永世想念하여 사재수호斯齋守護에 각기면지各己勉之할 지어다. 상우商佑는 불인불문不人不文이요 또한 향이지격鄕異地隔으로 성미력졸誠微力拙에 참괴慚愧를 불면不免이나 제족諸族의 책명責命으로 사재창건斯齋刱建의 전말顚末을 쓰라하니 성심황공誠甚惶恐이라 래후來後에 휘시긍식徽示矜式하려는 바이다.
丁卯晩秋 后孫商佑 謹記 1987년 늦은 가을 후손 상우 삼가 기록하다.


출처 및 참조

창원의 누정-박태성/불휘미디어(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