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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대산면 함안조씨 합강정 合江亭

천부인권 2020. 3. 9. 17:59

2020.2.18. 함안 대산면 장암리 함안조씨 합강정合江亭 전경
2020.2.18. 함안 대산면 장암리 함안조씨 합강정合江亭 전경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708(구암로 469)에는 함안조씨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의 소요처이면서 문집을 보관했던 합강정合江亭이 위치한 곳이다.
합강정合江亭이 마을과 동떨어진 이곳 낙동강 변에 위치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의 결과물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사당이나 재실 장서고 등이 마을에 있었으나 왜구들이 그런 문집들을 빼앗아 갔기에 마을에서 떨어진 곳으로 집을 지어 숨겨 둔다는 생각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사람은 없고 책판과 서책들만 있다 보니 해방이후 도둑들이 훔쳐가 많은 기록물들이 암거래 되고 또 사라졌다.
함안군 장암리에서 낙동강 둑으로 해서 용화산의 좁은 임도 절벽 길을 가다보면 급경사로 내려가는 합강정 이정표가 나타난다. 낙동강 변에 임하여 나타나는 합강정은 옛 선인들의 회합장이면서 한강 정구선생이 나라의 제도를 유생들과 의논하여 탄생한 『소진시무14조疏陳時務十四條』의 산실이기도 하다.
강변에는 이정표 구실을 하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우뚝 서 있어 예부터 이곳에 정자가 자리 했음을 상기 시킨다. 솟을삼문의 입구 아래에는 『화경조재규사적기념비(華耕趙再奎事蹟記念碑)』에서 『낙문건립 봉정이축 치석원장(洛門建立鳳亭移築治石垣墻)』비 2기가 나란히 있다. 계단을 따라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합강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마루 안쪽에는 『합강정사合江精舍』라 적은 대형의 편이 이곳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래에는 합강정合江亭과 관련된 글귀나 편액의 내용을 옮겨 둔다.

 

위용을 자랑하는 합강정사合江精舍 편액
2020.2.18 합강정合江亭 대문 모습
합강정合江亭 편액
합강정合江亭의 측면 모습
사월루沙月樓 편액

合江亭重修記
余舊時聞咸州號稱爲東南山水鄕士大夫園林亭榭所在相望而 合江爲之最焉後又得澗松趙先生所爲龍華同泛錄後序讀之然 後益知夫江山臨眺之趣人物文彩之盛相照互暎曠絶今古論者 以其事追配落星之鳴舷濯纓之泛月蓋庶幾焉而先生之序極其 鋪張發揮令人三復而不能已則又落星濯纓之所未有也是時爲宣廟四十年之丁未而合江未有亭也先生方讀書長春禪寺陪 其大人立巖公往拜寒岡鄭先生旅軒張先生于龍華山下合江舟 中張先生自其爲童子時所從師也又有忘憂郭先生及咸安靈山 昌寧諸長少會者總三十五人是名爲同泛錄者也其後先生因事 避地漆原之柰內又自柰內移靈山之龍山村居焉蓋自是絶意名 塗朝廷屢以遺逸召不應將以滅跡湖山講學授徒爲終老之計 且以先墓在其地爲甚邇取便於歲時省拜也龍山之南數百步隔 一江卽咸州之龍華也遂就龍華東麓爲小亭先生前日爲同泛時 已有此志故其新創詩曰蒼蒼龍華山與我交契久者此也亭凡三 間中曰望慕庵左曰沙月樓右曰臥雲軒合而命之曰合江精舍童 土尹公舜擧爲題其額合江之水其源有二一水自頭流之德川一 水自淸凉之兎溪奔流數百里至是而合焉權佐郞江左翁爲是亭
抛樑之文有曰後人觀水之有術必求其淵源其意以爲先生以明 粹之姿躬爲己之學就正薰炙於寒旅二先生之門以成就其德而 求其淵源所自則兎溪德川爲其先河非可誣也是以一邊人議欲 投疏沮退溪廡享則引庾斯不以夫子之道反害夫子之語以絶之 有以南冥之不仕目之以一節則誦和花潭詩要把丹心蘇此世之 句以明之其義嚴矣噫非知道者孰能與語於此哉往年壬午諸裔 以亭之歷歲旣久患老而圮也募力改舊而新之鏞述鏞瓚二君實 幹其事請余爲一言記其楣謙鎭竊不遜久擬與同志諸人買舟一 至其亭追昔賢同泛故事旣老病不可得矣而其心則未嘗忘也今 而飾固陋之辭託名其間是亦不失爲先生之徒也雖僭知其榮不 敢辭也
河謙鎭

 

와운헌臥雲軒 편액

合江亭重建上梁文
碩人一去。林泉寂寥幾年。古亭重修。棟宇突兀今日。煙雲朝暮之態依舊。霜露歲時之感彌新。竊惟澗松堂先生。允矣漁溪翁後裔。避倻山之熾焰。遂去桑鄕。止武陵而冥棲。密邇楸壟。望望然若將浼。伯夷之山色增高。皇皇焉如有求。小連之孝思彌切。不以夫子 之道反害夫子。有辭斯文。恥立惡人之朝與言惡人。無意當世。爰就一區勝處。乃結數間精廬。若或見之。春夏秋冬之望慕。與其進也。詩書禮樂之討論。登臺則上天下淵。開軒而右雲左月。地似湘蒸二水之交會。扁自山斗五言中分題。念當日作亭而錫名。但取形勝。而後人觀水之有術。必求淵源。洛水沄沄。遙連退溪正派。菁江混混。只是德川下流。語道脈則私淑寒旅門墻。論水委而恰當南北津筏。師承授受之有自來。出處行藏之略相似。萬里之波浩蕩。泛泛浮鷗。千仞之岡岹嶢。冥冥翔鳳。蓋自登高作跋。偏慕餓西山之人。及聞下城尋盟。益礪蹈東海之操。君民素志。夫豈欲乎潔身亂倫。家世高風。誠有裨於廉頑立懦。嗟人事寄歸之有數。柰物理顯晦之無常。葵麥風凄。某丘莫辨其處。蒹葭露白。伊人宛在中洲。後學方慕淸芬。賢孫克追前烈。拾巾衍之舊藏。編摩整頓得七分。撫杖屨之餘痕。徘徊感慨者半世。顏亭之巷井俱在。忍使地廢而水荒。蔡墟之荊榛盡除。益見山高而川駛。事有待三四世而乃擧。亭之毀五十年而重新。游手爭來赴功。良工樂爲效用。制適奢儉。何必公倕之墨離婁之繩。材取堅貞。無待徂徠之松申甫之柏。雙軒遂仍舊貫。丈室稍增一間。雨颯風蕭。先靈陟降在上。夏絃春誦。子姓居處其中。泌水衡門。尙有棲遲之岸。滄洲石逕。如入寂歷之阿。澗響玎玲。想考槃之眞樂。松聲淅瀝。見聳壑之貞姿。瞻榱題而起思。緬羹墻之餘慕。蒼巖擡首於左界。邈矣從遊之仙蹤。華岫倒影於中流。懷哉同泛時勝躅。遙村隱映。斜掛入浦之風帆。絶磴縈紆。孤懸歸寺之雪衲。茲皆占弄之遺馥。彌增想慕之遐懷。和漁翁款乃之一聲。唱倪郞偉邪之六誦。
抛梁東。德岫煙嵐指點中。欲識當年相與義。泗陽門 下畏齋翁。
抛梁南。鑑湖流水水如藍。長眉老叟何年去。猶記靑 松寺裏參。
抛梁西。咫尺松楸下有蹊。終古流傳風樹詠。月沈花 落恨難低。
抛梁北。高高靈鷲撑天極。仙翁移棹武夷峯。猶有架 船巖釘黑。
抛梁上。萬古靑天靑一樣。丈夫心地本如斯。安事如 來斷百想。
抛梁下。檻外長江千里瀉。我欲乘舟出海門。從游海 上乘桴者。
伏願上梁之後。兒孫世守。學子來游。臨淸流而想襟懷。仰高山而得氣像。勑乃躬一乃衷。率乃祖持保乃 家。誦其詩讀其書。知其人高尙其事。收貯一江雲物。灑濯十里風聲。
佐郞權萬記
澗松先生別集卷之二

 

합강정중건상량문
석인碩人¹⁾이 한번 나가시니 물러나 은거하는 곳이 적적하고 고요한 것이 몇 해이던가. 옛 정자를 새로 건설하니 집이 오늘날에는 우뚝 솟았구나. 연기와 구름은 아침저녁의 형태形態가 옛날 같은데 서리와 찬이슬 내리는 계절이면 새해부터 감회感懷가 더욱 새롭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간송당선생澗松堂先生²⁾께서는 진실로 어계옹漁溪翁³⁾의 후예이셨네. 야산倻山의 뜨거운 모함을 피避하여 드디어 고향을 버리고 조릉阼陵에 머물며 가만히 서식棲息하셨으니 선영先塋이 매우 가까웠네. 바라고 기다리며 장차 더럽혀질까 염려하니 백이伯夷⁴⁾의 산색山色은 더욱 높았으며 황황皇皇한 구求함이 같이 있는듯하고 작은 것을 연이어서 효를 생각하니 더욱 간절懇切하구나 부자夫子의 도道로서 도리어 부자夫子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사문斯文⁵⁾들의 말씀이계셨고 악인惡人들의 조정朝廷에 서서 악인惡人들과 더불어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시어 당세當世에 벼슬할 뜻을 단념斷念하셨네. 드디어 일구一區의 아름다운 곳으로 나아가 그제야 수간數間짜리 정사精舍를 지으셨네. 마치 선조님이 보시는 듯이 4계절 바라보며 사모思慕하고 혹或 나아갈 경우에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을 토론討論하셨네.
대臺에 오르면 위에는 하늘이고 아래는 못인데 헌창軒窓을 열면 오른편은 구름이요 왼편은 달빛이로다. 땅의 형상은 상수湘水와 증수蒸水의 두 강이 합치는 곳이요. 현판懸板은 산두山斗의 오언중五言中에서 뽑았네. 생각해보니 당일當日에 정자亭子를 지어 이름을 붙인 것은 다만 아름다운 지형地形을 취한 것인데 후인들이 물어 보는 데는 방술方術이 있으므로 반드시 연원淵源을 구하였네
낙수洛水는 흘러흘러 멀리 퇴계退溪의 정맥正脈을 이었고 청강淸江은 넘실넘실 다만 이 덕천德川의 하류下流로다. 도파道派를 말한다면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문하에 사숙私淑하였고 수위水位를 따라 적당하게 남북南北의 나루터에 뗏목을 마련하였네. 스승님을 전승傳承하여 가르쳐주고 가르침을 받음이 어디로부터 내려옴이 있고 출사出仕나 처신處身과 행하고 장수藏修함이 대략大略 서로 비슷하네.
萬里의 파도波濤는 넓고 넘실넘실 한데 두둥실 백구白鷗는 떠있고 천길의 언덕은 높고 뾰족한데 까마득히 봉황鳳凰은 날고 있다네.
대개 스스로 높은 곳에 올라 발문跋文을 지어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은(伯夷叔齊)이를 치우치게 사모思慕하셨고 성城을 강복降伏하고 맹약盟約을 하였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동해東海에 빠져 죽은(魯仲連) 절조節操를 가다듬으셨네. 군민君民들의 본 뜻은 저 어찌 몸을 깨끗이 하여 인륜을 어지럽히고 싶었으리요? 세가世家의 고풍高風은 진실로 청렴淸廉과 완고頑固로 선 듯 나약懦弱함을 도우려는 것이더라.
아! 인사人事에 기착寄着하여 돌아감이 명수命數가 있는 것이며 어찌 만물萬物의 이치理致가 나타나고 묻힘이 무상無常하리요.
규맥葵麥에 처량凄凉한 바람은 어디가 구묘丘墓였는지 그 곳을 분변分辨치 못하겠으나 겸가蒹葭에 백로白露가 내렸으니 저 사람이 완연宛然히 중주中洲에 계시는 듯하구나. 후학들이 바야흐로 맑으신 향기香氣를 사모思慕하고 현손賢孫들도 능히 선조의 공렬功烈을 추모追慕하누나
상자 속에 갈무리하였던 구유고舊遺稿를 수습收拾하여 편마編摩하고 정돈整頓하여 7분 이나마 얻어냈으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던 유지遺址를 어루만지며 배회徘徊하고 감개感慨한지가 반세기나 되었네.
정자亭子의 현판懸板을 걸었던 거리가 모두 있는데 참아 땅이 황폐荒廢되도록 할 소냐. 제허祭墟에 가시덤불과 잡초를 모두 제거하니 더욱 산은 높고 물은 빨라 보이는 구나.
역사役事는 기다림이 있나니 3~4세世만에 그제야 거사擧事하게 되었고 정자亭子가 헐린지 50년에야 중신重新을 보았다네.
유수游手들도 다투어 찾아들고 량공良工도 공역功役에 부임赴任하였으며 즐거이 효용效用을 하였으니 제도制度는 사치로움과 검소함이 적합適合하였네 어찌하여 반드시 공수公倕의 먹물과 이루離婁의 먹줄이어야 하랴. 재목들은 견정堅貞함을 취하였으며 조래徂徠의 소나무나 신보申甫의 잣나무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쌍헌雙軒을 드디어 완성하였네.
옛 터의 당실堂室 보다 점차 일간一間을 증축增築하였으니 비바람 몰아치고 바람은 소슬한데 선조님의 령혼靈魂이 오르내리는 듯하구나. 정자亭子 위에는 여름이면 거문고 소리와 봄날의 글 읽는 소리가 나노니 자손들이 그 가운데 거처居處하기 때문이네
필수泌水의 형문衡門은 오히려 서식棲息하시던 언덕 위에 있는 듯하고 창주滄洲의 석경石逕은 마치 적막寂寞한 언덕에 들어가는 듯하였다. 간수澗水의 종을 치는 메아리는 고반考槃(머뭇거림)의 진악眞樂을 상상想像하겠으며 송성松聲의 새어나오는 찌거리는 용학聳壑(솟구치는 호수)의 정자貞姿를 보는 것 같더라.
서까래 위의 현판懸板을 바라보며 사모思慕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갱장羹墻의 여모餘慕를 바라보겠구나.
창암蒼巖은 영남嶺南의 좌계左界에서 으뜸으로 대두擡頭되었으며, 멀 구나! 선종仙蹤을 따르며 공부工夫함이여! 화수華岫는 중류中流에 그림자를 늘어뜨렸으니 감회感懷가 새롭구나. 함께 뱃놀이 할 때의 아름다운 족적이여.
멀리 마을들은 나루터에 들어오는 범선帆船들의 은은隱隱한 그림자가 석양夕陽에 걸려 있고 우뚝한 등燈불은 돌아가는 절간의 추녀 끝에 얽히어 외로이 매달렸구나.
이것이 모두 점령占領하여 즐기시던 유복遺馥들이니 더욱 상모想慕하는 머나먼 회포懷抱를 더하여 주는 구나 어옹漁翁의 애절한 일성一聲에 화답和答하여 예랑위倪郞偉의 육송六誦을 외치노라.
대들보를 들어서 동東으로 바라보니 덕수산德岫山의 연기와 아지랑이는 중심부를 지점指點하고 있는데  그 당시當時 서로 더불어 의義로웠던 일들을 알고자 하나 사양문泗陽門 아래에는 재옹齋翁이 두렵구나.
대들보를 들어서 남南으로 바라보니 거울 같은 호반湖畔의 흐르는 물은 맑기가 쪽빛 같은데 긴눈섭의 늙은 노인은 어느 해에 가셨는가. 오히려 청송靑松들은 기억記憶하며 절간 안에 참배參拜하노라
대들보를 들어서 서西쪽으로 바라보니 지척에는 송추松楸들이요 그 아래에는 시냇물인데 옛날부터 전하여 내려오며 풍수風樹를 읊조려 왔으니 달빛은 잠기고 꽃은 떨어지니 한恨스러움을 견디기 어렵구나.
대들보를 들어서 북北쪽으로 바라보니 높다란 영취산靈鷲山은 하늘 끝까지 지탱하고 있는데 신선神仙스러운 늙은이는 돛을 옮겨 무이봉武夷峯으로 가는데 아직까지도 가선架船이 있어서 암정巖釘함이 칠흑 같구려.
대들보를 들어서 위로 바라보니 만고萬古의 청천靑天은 푸르름이 한 모양인데 대장부大丈夫의 마음씨도 본래本來에는 이와 같나니 편안히 일하여 오며 백百가지 상념想念을 단념斷念하는 것 같구려.
대들보를 들어서 아래로 바라보니 난간 밖의 긴 강물은 천리를 쏟아져 내려가는데 나는 배를 타고서 해문海門을 벋어나고 싶은데 나를 따라서 해상海上에 유람하며 뗏목을 탈 사람이 있느냐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上梁한 후에는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가도 학자學者들이 찾아와서 공부工夫하며 청류淸流에 임臨하여 감겨드는 회포懷抱를 생각하기도 하고 고산高山을 우러러 보며 기상氣像을 얻을 것과 너의 몸을 신칙申飭하여 너의 충정衷情을 한결같이 하고 너의 조상祖上님을 거느리고 너의 가문을 유지보존維持保存하며 그분들의 시詩를 외우고 그분들의 책冊을 읽으며 그분들의 사람됨을 알고 그분들의 사적事蹟을 고상高尙하게 여길 것과 일강一江의 운물雲物들을 거두고 저장貯藏하여 10리의 풍성風聲을 깨끗이 씻어 주옵소서.
좌랑 권만權萬 기록하다.

 

【주석】
석인碩人¹⁾ : 덕이 크고 높은 사람
간송당선생澗松堂先生²⁾ : 조임도趙任道(1585~1664)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 조식(趙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병절교위(秉節校尉) 유상린(柳祥麟)의 딸이다. 김중청(金中淸)·고응척(高應陟)·장현광(張顯光) 등을 사사하였다.
함안의 송정서원(松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澗松集)』 7권 4책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계옹漁溪翁³⁾ : 조려趙旅(1420~1489)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시호 정절(貞節)로 경상남도 함안 출신. 할아버지는 고려 공조전서(工曹典書) 조열(趙悅)이고, 아버지는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조안(趙安)이다.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는 그를 비롯하여 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이 제향되어 있다. 1781년(정조 5)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어계집(漁溪集)』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이伯夷⁴⁾ : 중국 은나라 말ㆍ주나라 초(12세기경)의 전설적인 성인. 공자ㆍ사마천 등이 전한 이야기에 의하면 숙제(叔齊)와 함께 처음에 고죽국(孤竹國) 왕자였는데, 아버지가 죽을 때에 아우 숙제에게 왕의 자리를 물리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숙제는 형을 두고 왕이 될 수 없다고 형에게 사양하고 백이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고 서로 사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형제는 고죽 국을 떠나 주나라 문왕을 찾아 신하되기로 약속하였는데, 막상 찾아가 보니 문왕은 죽어 없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폐를 싣고 은왕을 치려고 하였다. 그것을 본 두 형제는 무왕이 도덕에 어긋났다고 충고했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자 주나라의 벼슬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그것조차도 주나라 땅의 것이라 하여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까지 청빈한 사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사문斯文⁵⁾ : 유교(儒敎)라는 말의 옛 표현이다.

 

 

江齋十二詠

 

망모암 望慕庵¹⁾
望慕何由見 바라보고 그리워한들 무슨 수로 볼 수 있을까
松間宿草荒 소나무 숲에 묵은 풀도 우거졌는데
空懷風樹恨 부질없이 풍수지탄을 품고
莊誦蓼莪章 비장하게 육아장²⁾을 읊어보네

 

【주석】
망모암 望慕庵¹⁾ : 간송이 아버지 산소를 바라보기 위하여 지은 암자.
육아장²⁾ :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시경》 〈육아(蓼莪)〉에 “길고 큰 아름다운 쑥이라 여겼더니, 아름다운 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로다.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몹시 수고롭고 병드셨도다.〔蓼蓼者莪, 匪莪伊蔚. 哀哀父母, 生我勞瘁.〕”라는 구절이 있다.

 

연어대 鳶魚臺
魚躍千尋水 천 길 물속에서 고기가 뛰고
鳶飛萬仞天 만 길 하늘에 솔개가 나네
天機能自動 천기는 저절로 움직일 수 있으니
至理此昭然 지극한 이치는 여기서 밝게 드러난다네.

 

석천와 石泉窩
石竇靈泉逬 돌구멍에 신령스런 샘이 솟으니
泓澄一鑑窪 깊고 맑아 거울 같은 웅덩이가 되었네.
僧來結茅舍 중이 와서 초가를 짓더니
漱玉臥煙霞 양치질 하고 산수 간에 누웠네.

 

사월루 沙月樓
皓月明如晝 휘영청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平沙白勝銀 넓은 모래밭이 은보다 더 하얗네.
神淸無夢寐 정신이 맑아 잠이 오지 않는데
眼界絶纖塵 눈앞엔 가는 티끌 한 점도 없네.

 

와운헌 臥雲軒
夜愛簷端宿 밤이면 처마 끝에 머무는 것이 좋고
朝憐隴上飛 아침이면 언덕 위를 나는 것이 예쁘지
夢驚衾枕泠 이불과 베개가 차가워 꿈을 깨니
窓壁滿霏微 창문과 벽이 안개로 가득 찼네.

 

농월담 弄月潭
潦盡潭澄後 장마 지나고 연못이 맑아진 뒤
天空月上時 하늘 위에 달이 뜬 때
片舟凌倒影 조각배가 물에 비친 그림자에 올라타 있으니
此樂也誰知 이 즐거움이야 말로 누가 알리오.

 

병풍바위 石屛
薜荔縈巖石 벽려¹⁾가 바위를 뒤덮었는데
高低斷復連 높고 낮게 끊어졌다 또 이어지네.
蒼屛開活畫 푸른 병풍이 살아 있는 그림을 펼쳐내니
影倒水中天 그림자가 물속 하늘에 거꾸로 비치네.

 

【주석】
벽려¹⁾ : 향기 나는 나무 덩굴 이름이다.

 

노암 鱸巖
張翰三吳興 장한이 지녔던 삼오의 흥취¹⁾
嚴陵七里風 엄광이 즐겼던 칠리탄의 바람²⁾
一竿忘世事 낚싯대 하나로 세상사를 잊었으니
誰似此閒翁 누가 이 한가한 늙은이와 비슷할까

 

【주석】
장한이 .... 흥취¹⁾ : 삼오는 장강(長江) 하류 지역으로, 장한의 고향이다. 장한은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人生貴得適意爾(인생귀득적의이) 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하능기환수천리이요명작)” 하고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엄광이 .... 바람²⁾ : 후한(後漢)의 엄광은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유학했던 친구였다. 광무제가 제업을 달성하고 그를 맞이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삼고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동려현(桐廬縣)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청아한 절개는 당시의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았다.

 

소나무 비파 松琴
松籟隨風散 솔바람 소리 바람 따라 흩어지니
泠然太古音 시원한 태고의 소리로다.
聽來襟韻爽 듣기만 해도 가슴속이 시원해지는데
何用七絃琴 칠현금이 무슨 소용 있으랴

 

장사배 商帆
帆急來何所 돛단배 황급히 어디서 오는가
東南賈客船 동남쪽 장사꾼의 배로다.
殘霞秋浦外 저녁노을 가을 포구 너머로 비치는데
細雨暮江邊 가랑비는 저무는 강변에 내리네.

 

먼 하늘 기러기 雲鴻
萬里雲霄外 아득히 구름 노니는 하늘 끝
冥冥一箇鴻 가물가물 보이는 한 마리 기러기여
莫愁腸未飽 배가 부르지 않다고 근심하지 말고
增擊避彊弓 더욱 힘차게 날아 센 활을 피하라.

 

물결 속 갈매기 波鷗
浩蕩滄波上 드넓고 푸른 물결 위
雙飛雪點鷗 짝지어 노니는 하얀 갈매기
吾頭同爾白 내 머리도 너와 같이 희니
來傍此虛舟 이 빈 배 곁으로 오려무나.

 

 

合江亭重修記
孔子曰仁者樂山智者樂水 仁智於山水 必有樂焉亭 在咸州治東西十里許 龍華山踞於後 洛南二江滙合於前 其山水之勝 可謂甲於嶠南 故澗松趙先生創起 此亭以合江命名者也 先生曾陪寒旅兩先生 泛冊同遊之時錄 而書之繪 而粧之今至 三百餘年墨色 惟新畵面猶鮮 皆可以歷歷指點於 當日杖屨登臨之處 耳何讓於摩詰輞川之圖也 盖武夷之九曲 得朱夫子之題咏 而擅喝於天下淸凉之諸峰 得退溪先生之署名 而著顯於後世想必勝地 山水待其賢人君子 而爲主也 恭惟先生以漁溪先生五世孫從遊 我旅軒先祖之門 親炙四十餘年 所傳襲者義理也 所服膺者道學也 故簞食瓢飮不改 其樂刺史遺逸之薦 聖主旋抬之望日 隆而終不以易其介 豈非吾黨百世之師乎 且當退溪先生廡亨時北人之勢 熖漲天而欲發 沮止之疏先生 獨憤不顧身引廋 斯不以夫子之道 反害夫子之言 據義絶之豈非孟子 所謂善養吾浩然之氣 而威武不能屈 富貴不能滛乎 後因事避居于 漆原之柰內 又移于靈山之龍山 龍山與龍華只隔一江相望之近 擬遂初志侵起 亭榭於山峩水洋之處 有望慕菴沙月樓卧雲軒之間 架而楤顔之曰 合江精舍 燕申於北 以爲講學 藏修之所矣 自先生沒後 士林尊仰之忱 益篤子孫幹盝之誠 尤勤繕而又繕修 而又修者斯累矣 而往昔辛巳 大加嘗理雖盡堅緻 然及今己未 則又閱四十年之風雨 且經無前有之兵燹 自不免毁損 欹歪之患肆乃協謀於子孫 求助於官府 自春及夏歷幾月 而功告訖可知先生入人之德 遺後之澤 不騫不渴譬如華山洛水 而高且深也 賢孫再奎不知余之膚 淺以余爲先師之裔 故來請顚委之記於炳逵 炳逵乃藐未後生也 生之時晩居之地 遠縱未得登先生之亭 以表後學尊慕之忱 然平曰 羹墻之思 則烏敢歇於人也 事同一家義不敢辭 故以犯僭踰之罪登亭他 日豈無靦然之愧也
庚申葽夏 後學仁州張炳逵謹記

 

 

望慕庵記
庵以望慕名。望慕我先人也。吾父之沒。廿有七歲。吾母之亡。十有三年。面目不可復見。聲音不可復聞。其可瞻望而想慕者。松楸與丘壟。草樹與煙雲也。不復見不復聞者勢也。吾無如之何矣。可望而可慕者。吾猶致力焉。此吾之所以名吾庵。而爲終身寓慕之地者也。噫。萬曆戊午秋。始自咸移柰內。崇禎癸酉春。再遷于岐江。岐江。靈山也。柰內。漆原也。柰內之去松楸十里許。岐江之去丘壟一牛鳴。柰戌與岐江。皆非我 桑梓也。而不靈漆其心。而心乎丘壟者。爲望慕故也。況戊午之居柰內也。父雖沒而母猶在。或有時而寬懷。癸酉之來岐江也。母亦歸于泉下。在今日。望慕之 懷無亦切於昔年乎。空山闃寂。與世隔絶。宿草蕪沒。斷雲凄涼。徘徊瞻眺。此感何極。霜露旣降。百物凋落。則心悽愴而摧傷。索然無生意者。秋之望慕也。雨露旣濡。草木萌芽。則心怵惕而驚動。如將見之者。春之望慕也。流金爍土。日輪如火。則地下得無燠乎。風饕雪虐。朔氣疑沍。則地下得無寒乎。八表同昏。雨濕天陰。則地下之意象如何。百花開遍。月白鵑啼。則地下之懷抱如何。孤兒在世。隻影涼涼。地下有知。則應惻怛而憐之。一女出嫁。亦旣抱子。精靈有感。則必陟降而臨之矣。知耶不知耶。感耶不感耶。地下之有知無 知。精靈之感與不感。皆不可度思。而歲歲年年觸物生悲。朝朝暮暮隨事起感。歌焉而怨生於聲。詠焉而哀寓於詞。事事物物無一非惱我方寸。哀哀此恨。死 而後已。則此身未化。此恨未已。望慕之情。寧有極乎。時皇明崇禎紀元癸酉月日。庵主孤哀子任道。泣血書。

 

망모암기

초막을 망모(望慕)라고 이름한 것은 나의 돌아가신 부모님을 바라보고 사모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부친께서 세상을 떠난 지 27년이 되었고, 나의 모친께서 돌아가신 지 13년이 되어 얼굴을 다시 뵐 수 없고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다. 멀리 바라보고서 사모할 만한 것은 송추(松楸)와 무덤, 초목과 구름뿐이다. 얼굴을 다시 뵐 수 없고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형세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다. 바라보고 사모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직도 힘을 다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나의 초막을 이름하여 종신토록 우거해 사모하는 곳으로 삼은 까닭이다.
아! 무오년(1618) 가을에 처음으로 함안에서 내내(柰內.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의 마을)로 옮겼고, 계유년(1633) 봄에 다시 기강(岐江)으로 옮겨 살았는데, 기강은 영산(靈山) 땅이고, 내내는 칠원(漆原) 땅이다. 내내는 선영과의 거리가 10리쯤 되고, 기강은 선영과의 거리가 한 마리 소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곳인데, 내내와 기강은 모두 나의 고향은 아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영산과 칠원에 두지 않고 선영에 마음을 둔 것은 바라보고 사모하기 위한 까닭이다. 더구나 무오년 내내에 살 때 아버지는 비록 돌아가셨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셔서 때때로 마음을 위로받았는데, 계유년 기강으로 와서는 어머니 또한 세상을 떠나셨으니, 지금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또한 옛날보다 간절함이 없겠는가.
빈산은 고요하여 세상과 떨어졌고, 해묵은 풀은 황폐하고 조각구름은 처량하여 배회하며 바라보니 이러한 감회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려 만물이 시들면 마음이 애달프고 아파서 삭막하게 살려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은 가을철의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고, 비와 이슬이 내려 땅이 젖어서 초목이 싹을 틔우면 마음이 두렵고 놀라 장차 부모를 뵐 듯 하는 것은 봄철의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다. 쇠덩이와 흙이 녹고 태양이 불 같으니 지하도 뜨겁지 않겠는가. 바람과 눈이 매섭고 차가운 북풍이 얼어붙게 하니 지하도 춥지 않겠는가. 팔방이 다 어둑하고 비 내리고 날씨가 음침하니 지하의 광경은 어떠하겠는가.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우니 지하의 회포는 어떠하겠는가.
고아인 나는 살아있지만 홀로 쓸쓸하니, 지하에서 알고 계시다면 응당 가슴 아파하며 가엾게 여기실 것이다. 딸은 시집을 가서 또한 이미 자식을 낳았으니 정령께서 감응이 있다면 반드시 오르내리며 임하실 것이다.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감응을 하였습니까, 하지 않았습니까? 지하에서 알고 모르는 것과 정령이 감응하고 하지 않은 것은 모두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물건을 만지면 슬픔을 자아내고 아침저녁마다 일을 하면 감회를 일으켜, 노래를 부르는데도 원망이 음성에 묻어나오고 시를 읊는데도 슬픔이 문장에 깃들어 있으니, 사물마다 한결같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슬프고 슬픈 이 한은 죽은 뒤에야 그치리니 이 몸이 죽지 않으면 이 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바라보고 사모하는 정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계유년(1633) 모월 모일에 초막의 주인 고애자(孤哀子) 임도가 피눈물을 흘리며 쓰다.

 

 

 

상봉정翔鳳亭 전경

 

상봉정翔鳳亭 편액 망모암望慕菴

翔鳳亭記
吾嘗聞鳥有鳳者。儀于韶鳴于岐。事在經傳。自文王及乎夫子未久也。王澤已斬。鳳影寥寥。宜夫子之起歎。而德衰之有歌也。自是之後。歷千百載而未聞有是鳥之實出乎其間。豈其無鳳哉。惟其有瑞世之德。而出必以時也。信乎其非凡禽比也的矣。商山之四。南陽之雛。是皆好事者言。豈眞有鳳德者哉。金羅後人趙君致遠。昂昂乎出群之姿。飄飄乎高逝之趣。而守先人之舊廬於儉水之涯。一夕肩潘輿挈萊婦。移卜於洛江之南。上浦之西而居焉。實萬曆戊午年之九月日也。幾年丘荒之地。奄作棲遲之所。天不得愛其寶。地不得祕其勝乎。抑茲地之有待於斯人。而風 於斯月於斯。詠歸於斯。講誦於斯者。蓋有數焉。偸佗一片閒地。長占萬古煙波。魚鰕爲侶。鷗鷺同群。漫浪江湖。若將終身焉。豈其胸衿之無所得而然哉。庚申秋。余寓劍岩草舍。趙君自其新居來過余。問無恙外。袖出柰內說示余。乃其所自爲也。其江山之好。風景之美。與其四時之氣象。朝夕之變態。飛潛動植於其間。上下來往於所見者。歷歷於一紙上。怳然置我於其中。眞所謂有聲之畫也。因謂余曰。余方構亭于江皐。名以翔鳳。蓋有意焉。子其爲我記之。余應之曰。君 膝穿藜床。舌弊經史。作爲文章。大放厥辭。又何必假 手於人。君曰是何言也。公開口吐鳳。鳴世久矣。盍題凡鳥。用賁吾亭。余曰是亭之翼然翬飛。迥臨空碧。勢若鳳凰之翺翔者乎。君曰否。曰然則君之意。我知之矣。主是亭者有優游繫表之志。而鳳翔千仞底氣乎。 嗚呼。世多蒿目。知德者鮮矣。是鳥也負其異於衆也。 其肯握粟之招。矰徼之嬰。而自甘於羽毛之譙譙乎。 宜其丹山乎長往。碧梧乎棲老。扶搖九萬長風。下視人世蜉蝣。不與鴟鶚相嚇燕雀頡頏也審矣。古詩云 雲間鸞鳳人間見。正謂此也。雖然鳳之出。必有聖人在乎位。鳳爲聖人出也。吾知是鳳之去是亭。而羽儀 於王庭也不遠矣。吾然後題翔鳳曰儀鳳。
楊時遇

 

 

 

상봉정 주련 翔鳳亭 柱聯


一鶴高飛萬仞天 한 마리 학이 높게 날아 만 길의 하늘에 오르니
江湖勝地好盤旋 강호의 경승지 배회하기 좋아라.
由來飽食終媒禍 언제나 포식 하면 마침내 화를 불러 오나니
莫逐秋鴻近稻田 가을 기러기 좇으려고 벼논에 가까이 가지 마라.

 

翔鳳亭重建記
翔鳳亭者故徵士澗松堂趙先生菟裘之所也 先生早受業于 槃泉金公之門 而又就正於 文康公 旅軒張先生益博其學 益崇其德 時當北人弄權而恣 基所行則先生毅然 以立抗斥之甚 確而爲其所惡避居于 此寓樂江湖 而杜門求志 三除官而終不就 然其憂國愛君之誠 老而益篤仁孝 兩廟之喪 皆食素至卒哭後 又疏陳時務十四條 得蒙嘉納於乎 先生之所立心而自期者 盖可想已 其道學文章之醇 正志操行誼之高潔 蔚然爲當世之山斗南方學者 翕然尊信而百世之下遺風 剩韻尙存於江湖水月之間 華山之蒼松老石賴被 其光澤洛水之淸風霽月 依然彷彿乎 浩然之氣像豈不偉歟盛哉 此亭舊在漆原之內柰 而累經滄桑廢 爲茂草者歲已久矣 則是豈但 雲仍之齎 恨實士林之所 共憂嘆者也 進年庚申春得官府之力 重修合江亭因用 其餘址以建 此亭是或不無棄 其舊基之感然 此亦先生杖屨之地 而扁仍其舊 先生之所取義者 未可謂亡之矣 則登斯亭而誦 先生翔鳳之詠 宛然如朝陽爽氣之逼於人 而感興者矣 奚獨爲便於登臨 而籍其江山之勝觀也哉 盖是役也 後孫再奎甫不待衆力全擔巨費 而成之其爲先之誠非出乎 等夷者烏能如是哉 在今之世尤 爲可尙役 旣完後孫鏞瓚甫以其門父兄之命 造余而請記重建 顚末顧東恩之不文 何可當之然窃 以載名楣間 爲榮遂冒濫而謹書 斯亭之故實 以寓夙昔高景之松
甲子春分節 眞城李東恩謹記


상봉정중건기 翔鳳亭重建記
원래 징사徵士 간송당澗松堂 조선생趙先生의 상봉정翔鳳亭은 토구菟裘에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반천槃泉 김공金公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아가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에게 학문을 닦고 덕을 쌓아, 당시에 북인이 방자하게 권세를 부려도 선생은 의연하게 대처하여 그들을 피하여 강호江湖에 은거하여 학습하는 즐거움을 삶의 낙으로 뜻을 세우시고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러도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섬기기에는 늙도록 인효仁孝로 정성을 다 하고, 양묘지상兩廟之喪(仁祖와 孝宗 喪)에 졸곡卒哭을 이루도록 육류와 생선을 먹지 않고 또 소진시무14조疏陳時務十四條에 전하는 말을 바르게 듣고 깨우쳐서 선생이 마음을 세운바 스스로 생각을 기다리어 이미 그 도학 문장과 지조행의志操行誼가 바르고 두텁고 고결高潔하여 당시에 남쪽에 우뚝 선 큰 학자로서 화합과 존경과 믿음이 백세의 후손까지 이어지는 유풍遺風이 되었다. 강(洛東江)과 달 사이 용화산龍華山의 늙은 소나무와 바위는 푸르게 덮이어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의연하게 낙동강에 비치는 큰 기상이 어찌 선생과 다름이 있으리오.
이 정자는 옛날 칠원漆原 내내內柰에 있었다. 오랜 세월에 초목이 무성하여 황폐되어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한탄하여 지난 경신년 봄에 관의 도움으로 합강정을 중수할 때, 그 남은 땅에 선생의 장구가 있던 그 옛터를 잊어버리지 않고 상봉정을 건립하였다. 이 정자에 올라 선생의 상봉을 읊고 외우니 상쾌한 기운이 아침 햇살과 같이 완연하여 모두 감흥에 겨워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였다. 이 정사의 사역은 후손인 재규가 여러 사람의 성금으로 거액을 이루어 건축하였는데 이는 선생을 위하는 정성이 없으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지금 정자를 완공하여 후손 용찬이 문중 어른들의 명을 받아 나에게 중건 기문을 청하니 전말을 돌아보고 불문한 동은東恩이 어찌 가당하리오. 그리하여 남몰래 이름을 새겨 처마사이에 이름을 걸고 영광을 따라 넘치도록 퍼질 수 있게 삼가 이 정자에 옛 사실의 글을 쓰서 높이 솟은 태양이 소나무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물게 하노라
갑자년(1924년) 춘분절에 진성 이동은李東恩 삼가 쓰다.

 

출처 및 참조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간송(澗松) 조임도(趙壬道)선생과 합강정(合江亭)/ http://cafe.daum.net/gaebiri/hnDh/5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김익재 양기석 구경아 정현섭 (공역)/2015
함안누정록-함안문화원/대보사(201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