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의창구 동읍 금산리 김해김씨 경모재 景慕齋

천부인권 2020. 3. 2. 06:00



2020.2.29. 금산리 김해김씨 경모재景慕齋 전경


의창구 동읍 금산리 575-2번지(동읍로661번길 22)는 김해김씨 금산공琴山公 김귀金龜를 향사하는 재실 경모재景慕齋가 있다. 현지에서 위치기반고도계로 위치를 확인해 보니 해발 24m이고 「위도 35°19′21″N 경도 128°39′41″E」를 기록한다.
금산마을 안쪽에 위치한 경모재景慕齋 앞에는 출입도로가 좁은 것에 비해 차량이 주차하고 회전할 정도의 공터가 마련 됐고 공터의 좌측에는 유당 김종하가가 기록한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금산김공묘도비명병서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琴山金公墓道碑銘幷序』라 새긴 금석문이 서있다. 대문에는 경유문敬由門이라 편액 했고 본채에는 경모재景慕齋 이름 했으며 기둥에 주련은 없고 내부 마루에는 김귀의 후손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이 쓴 기문記文이 걸려 있다.




경유문敬由門 편액



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금산김공묘도비명병서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琴山金公墓道碑銘幷序



경모재景慕齋 전경



경모재景慕齋 편액





景慕齋記
恭惟我先祖翰林琴山府君 以經學文章 負望一世 際値群小當塗 舍簪南下 懷仁自貞 其出處行藏之履歷 想多可傳 而屢經兵燹 散亡無餘 嘗與佔畢齋金文忠公 爲道義交 畢齋之挽府君詩曰 如何經術士 倏謝聖明朝 鄕閭應雪涕 墳土酒頻澆 可稽者有此 而此亦可見府君之大槪也 一傳而有文川公之錄功制閫 再傳而有禁都公之趾美蒙渥 三傳而有敎授公之學宮淸班 四五六傳而有參議參判同樞公之聯世增秩 累世衣履之藏幷夫人祔十一封 皆在府東琴山之原 琴山乃吾家世葬之地也 而文川公墓獨不在是焉 每歲十月上旬 數郡子孫來會于此 遠近眺望 岡壟不改 上下登臨 蘋藻相將 惟是齊宿之無所 實爲先父兄之所咨嗟而未遂焉 歲癸酉 宗論齊發 各隨力捐金 遂相地於墓下 命匠庀材 建五楹四間 覆以瓦 門庫隨以就焉 盖斯役也 族叔翼元氏 殫誠經始 而不幸工未訖而沒世 輔元叔 及閏河姪 克就竣役 而若其捐金之尤者 則三從姪光河也 旣落 咸屬余定名以記其事 余以景慕名之 且爲之一言 以告于衆曰 人之本 惟祖是已 而子孫之所不可忘者也 況祖先積德開業 子孫畢霑滋蔭者乎 惟我先祖 德學以開其源 文辭以達其流 啓佑後人 俾稱承儒守文之家 則遺澤之遠 復何加馬 而凡祖先之一事一行 無非子孫之所當取則不忘者也 夫能不忘 則斯知慕矣 惟我宗族 父必詔子 兄必勉弟 勿墜其先緖 則孝友敦睦之道 將家行而戶達 門風以之鴻長而景慕之旨 于以永存矣 竊以是屬望焉
戊寅陽復月上澣 後孫 柄璘 謹記


경모재기 景慕齋記
생각건대 우리 선조이신 한림翰林 금산부군(山府君¹⁾께서는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으로 한 시대의 촉망을 받으셨다. 여러 붕당이 갈래지어 다툴 때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낙향하여 인仁을 마음에 품고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였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나아가 행하고 또 자취를 숨기는 이력이 많이 전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여러 번의 병란을 지나면서 망실되어 남은 것이 없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문충공金文忠公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는데 필재畢齋께서 부군府君을 애도한 시가 있다. “어쩌다 경술經術을 익힌 선비가 그리 빨리 성군의 조정에서 물러 가버렸는가. 고을의 모든 백성들이 눈물지우니, 그의 무덤에는 술이 자주 뿌려지리라.” 부군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이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또한 부군의 대략을 볼 수 있다. 한 대를 지나 문천공文川公의 공훈록이 사고史庫에 실렸고, 2대를 지나 금도공禁都公은 아름다운 자취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삼대를 지나 교수공敎授公은 학궁學宮에 들어 청직淸職을 지냈다. 사대, 오대, 육대를 지나면서 참의공參議公 참판공參判公 동추공同樞公이 대를 이어서 녹봉이 높아졌다. 여러 세대의 무덤과 부인夫人을 합사合祀하여 열 한 봉분으로 모셨는데 모두 창원부 동읍의 금산琴山 구릉에 있다. 금산은 이로 인해 우리 가문의 세장지世葬地가 되었다. 문천공文川公의 묘소만 유독 이곳에 있지 않다. 매년 시월 상순에 여러 군에서 자손들이 이곳에 모여 멀고 가까이서 서로 바라보며 언덕이 바뀌지 않게 하고 위 아래로 오르내리는 동안 후손들이 서로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숙齊宿할 장소가 없으니 이것은 실로 선대 부형父兄들이 탄식하는 바였지만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계유癸酉년에 종중의 논의가 일어 각기 힘을 보태고 돈을 내어 묘역 아래에 땅을 고르고 장인을 부르고 재목을 갖추어 다섯 기둥 네 칸의 집을 세우고 기와를 덮고 문과 창고는 그에 맞추어 지었다. 대개 이 공역에서 집안 아저씨인 익원翼元씨가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일을 경영하였으나 불행히도 공역을 마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보원輔元 숙부와 윤하閏河조카가 맡아서 공역을 마쳤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돈을 더하여 낸 사람은 삼종질三從姪인 광하光河이다. 이미 낙성을 하고 모두 나에게 재실의 이름을 정하고 그 일에 대해 기록한 기문을 지어라고 맡겼다. 나는 이에 그 이름을 경모재景慕齋라 하고 한마디 글로 뭇사람들에게 고하였다. 사람의 근본은 오직 조상뿐이니 자손이 그것을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선조께서 덕을 쌓고 업을 열어 자손으로서 그 음덕을 입은 자이겠는가. 우리 선조께서는 학덕學德으로 그 근원을 열었고 문사文辭로써 그 유풍流風을 달성하여 후세 사람들을 깨우쳐서 도우니 유학을 계승하고 학문을 지키는 가문이라고 할 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남겨진 은택의 아득함에 다시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선조의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행실이라도 자손들이 마땅히 취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릇 선조의 덕업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경모景慕의 뜻을 아는 것이다. 우리 종족은 아비는 반드시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반드시 아우를 권면하여 그 선대의 전통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로써 효도하고 우애롭고 돈독하고 화목한 도의가 집집마다 행해지게 될 것이니 가문의 기풍이 크게 떨쳐지고 경모景慕의 뜻이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내 이를 간절히 바라노라.
무인(1938)년 음력 11월 15일전에 후손 병린柄璘 삼가 기록함


【주석】
금산부군琴山府君¹⁾ : 금산공琴山公 김귀金龜는 사정공司正公 김이형金利亨의 아들이다. 1466년(세조 12)문과에 급제하여 한림, 사헌부지평, 첨정을 지낸 선비로 점필재 김종직과 친분이 두터운 관계로 권신들에게 미움을 사서 창원으로 귀양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출처 및 참조
창원의 누정-박태성/불휘미디어(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