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동읍 화양리 경주이씨 용강재 龍岡齋

천부인권 2020. 3. 4. 08:36



2020.2.29. 동읍 화양리 화목마을 경주이씨 용강재龍岡齋 전경


동읍 화양리 1288(화양길 96)에는 경주이씨의 재실 용강재龍岡齋가 있다.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36m을 표시하고 「위도 35°17′58″N 경도 128°38′53″E」를 기록한다.
화양리 화목마을은 재루정齋樓亭을 찾지 않았다면 아마도 와볼 일이 일이 없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재실의 관리는 담을 같이하는 경주이씨의 집에서 하고 있어 주련과 용강재기龍岡齋記를 볼 수 있었다. 대문에는 편액이 걸려 있지 않고 본채에는 용강재龍岡齋라 편액 했고 이규하李圭夏가 쓴 용강재기龍岡齋記와 김학두金鶴斗가 기록한 용강재중수기龍岡齋重修記가 나란히 걸려 있다.




화목마을 월성이씨 용강재龍岡齋 전면



용강재龍岡齋 편액




용강재 주련


[해문 : 조여-이현호]
維玆一區澗壑         생각건대 여기 한 구역 시내 골짜기에
載建數間棟宇         비로소 서너 칸 동우棟宇¹⁾를 지었도다.
實是十卌門欄         참으로 400년이나 된 가문이니²⁾
庸償積歲經營         여러 해 재(齋)를 경영했다고 어찌 보답하랴!
于以蘋藻³⁾相將⁴⁾    이에 마름 뜯으며 서로 보내주고
亦可花樹同歡         또한 화수⁵⁾회하며 함께 기뻐할만 하네


【주석】

동우棟宇¹⁾ : 동우(棟宇)는 상동하우(上棟下宇)를 줄인 말로 마룻대(용마루)와 추녀(서까래)를 말한다. 《주역》 계사(繫辭)에 “상고시대에는 사람들이 굴에서 살고 들판에서 살았다. 후세에 성인이 이것을 집으로 바꾸어 위에는 들보를 얹고 아래에는 서까래를 얹어 비바람에 대비하였다. 이것은 대장괘에서 취하였다.〔上古, 穴居而野處. 後世聖人, 易之以宮室, 上棟下宇, 以待風雨. 蓋取諸大壯.〕”라고 하였다.
가문이니²⁾ : 집안, 가문을 말한다.
蘋藻³⁾ : 《시경》〈소남(召南) 채빈(采蘋)〉에 “이에 마름을 뜯기를 남쪽 시내에서 하도다. 이에 마름을 뜯기를 저 흘러가는 도랑에서 하도다.〔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 하였다
相將⁴⁾ : 《시경(詩經)》 정풍(鄭風) 진유(溱洧)에 “사내와 계집이 희희덕거리며 장난치고, 작약을 꺾어 주며 서로들 헤어지네.[維士與女 伊其將謔 贈之以芍藥]”라는 말이 나온다. 상장(相將)은 서로 전송한다는 말이다.
화수⁵⁾ :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이 좌습유(左拾遺)에 제수되어 장안(長安)에 갔을 때, 원외랑(員外郞)으로 있는 어느 위씨(韋氏) 집안의 친족들이 꽃나무 밑에서 매번 술자리를 벌이고 단란한 모임을 갖는 것을 보고 〈위원외가화수가(韋員外家花樹歌)〉를 지어 찬양한 데서 왔다. 친족 간의 모임을 ‘화수회(花樹會)’라고 부른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






龍岡齋記 
府之爲境 山海相錯 而背於官廨 曰天柱 抽一幹東騖 若雲龍之騰翥 列峙於金昌之交 而各奏其能者 九龍山 中有一支 低垂而阧起 蜿蟺東北 而若牛膍然者 高陽峴環彎之中 地武成區者 花谷里也 松竹交翠 蓊蒨繚匝 前臨大野 端倪軒豁 昔我八世祖和軒先生第五子諱雲茂 南轉于此 而奠居之 子孫因以重世焉 築一室于陂陀之側 爲子姓肄業之所 歲一之祭 亦於斯行焉 歲久壞缺 殆不可支 嗣孫相大 遂合謀于族 撤其舊而規其新 易茅以瓦 崇楹疊架 視前增倍 室燠軒凉 可以歌哭聚族焉 以其在九龍山之趾 故名之曰龍岡齋 盖天地靈畜有四 而龍其一也 初潛于谷也 麟甲未壯 待時晦養 及乎乘雲霓窮玄間 其變始靈矣 故君子進德修業 處則爲无憫不拔之潛龍 出而爲德施文明之見龍 而亦將以有爲之時矣 今雲仍之居是齋 能繼述祖先忠孝業 以克底于無忝 使是齋傳於久遠 則是齋也與龍山 相埒於無窮 豈不盛哉 書此爲龍岡齋記
屠維大荒落 小春節 世宗嗣孫 圭夏 謹記


용강재기 龍岡齋記  
창원부昌原府의 경계는 산과 바다가 교차되는 곳이다. 관아의 뒤는 천주산天柱山인데 한 줄기가 달려 나와 동쪽으로 내달려 마치 구름을 탄 용이 승천하듯 솟아올라 김해와 창원의 경계에 줄지어 솟아있다. 그 각각이 모여 봉우리를 이룬 것이 구룡산九龍山이다. 그 중간의 한 줄기가 나직하게 내려앉다가 치솟아서 동북으로 구물거리다가 마치 소의 천렵처럼 켜켜이 쌓여 높고 양지바른 구릉이 둘러친 가운데 땅기운이 뛰어나 한 마을을 이룬 곳은 화곡리花谷里이다. 솔과 대나무가 푸른빛을 뿜으며 무성하게 서로 얽혀있다.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 아득히 먼 곳까지 훤하게 트였다. 옛날 나의 팔세조八世祖 화헌선생和軒先生¹⁾의 다섯 번째 아들 휘諱 운무雲茂께서 남쪽으로 옮겨서 이곳에서 살게 되면서 자손들이 여러 세대동안 이어졌다. 산비탈 한쪽 켠에 집을 짓고 자손들이 배우고 익히는 자리로 삼았다. 매년 한번 지내는 제사 역시 이곳에서 행하였다. 세월이 흘러 한 쪽이 무너지고 떨어져 나가 거의 지탱할 수 없게 되자 후손인 상대相大가 종족들과 의견을 합하여 옛 재실을 철거하고 새로 재실을 지었다. 짚 이엉은 기와로 바꾸고 기둥을 높이고 도리를 첩첩이 올려서 이전의 모습보다 훨씬 커지고 방은 따뜻하게 하고 창문은 시원하게 내니 이곳에서 함께 즐거운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종중이 모이기에 충분하였다. 그 자리가 구룡산九龍山 아래에 있으므로 이름을 용강재龍岡齋라고 하였다. 대개 천지天地의 네 신령이 있는데 용龍이 그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골짜기에 잠겨 있다가 용의 비늘이 장대해지지 않으면 때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서 양생한다. 구름과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오를 때 그 변화가 비로소 신령스럽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으로 나아가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학문에 있어서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수양할 때에는 뽑히지 않은 것을 근심하지 않는 잠룡潛龍이 되고, 벼슬에 나아가게 되면 덕을 베풀고 문명을 밝히는 현룡現龍이 되니 또한 장차 그 때에 맞추어 일이 이루어짐이 있음이다. 지금 후손들이 이 재실에 있으면서 능히 선조들의 충효의 가업을 이어 후손에게 전하여 부끄럼이 없는 데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재실이 영원히 전해지게 하면 이 재실은 용산龍山과 더불어 무궁할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아니한가. 이 글로써 용강재기龍岡齋記로 삼는다.
도유대황락(기사 己巳:1809)년 소춘절(1월 1일) 대대로 종손을 이어 온 규하圭夏 삼가 기록함.


【주석】
화헌선생和軒先生¹⁾ : 이종욱李宗郁( 1553~1623) : 월성이씨月城李氏이다. 이종욱의 자는 희문希文이고 호는 화헌和軒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그는 1553년(명종 8년)에 태어났고 이종영과는 재종간이다. 그는 재종형인 종영과 더불어 남명선생에게 급문하였고, 임진왜란 때(선조 25년, 1592년)에 군공軍功을 세워 주부主簿에 배해졌으며,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후 영창대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동에 강정江亭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龍岡齋重修記   
山之九龍 盖昌東諸山之特著名焉 艈氣鍾靈 間有挺隱德之士 感神之孝而餘韻遠振 環是山所居 多古家著閥 而月城李氏門 與其一也 昔在昭敬王世 有若原從功臣訓練主簿諱宗郁和軒公 以勳業文行 世推儒望 其第五子諱雲茂 薰沐庭訓 又名重儒苑 而性高孤淨潔 不求營利 有癖於名勝山水 南遊見九龍之淸秀明麗 甚愛之不能去 意謂隱者可居 自宜春 拔宅以來 占取山陰之幽庄 結茅以棲 日每嘯詠於泉石雲霞之中 而翦其翳治其畬 以做淮桐朝暮之計 安其居終其年 竟托魄于玆 子孫仍居爲世庄 後乃稍稍蕃衍 自成一閭 世襲儒素 淸閑之業 外無烜爀之名 內修敦睦之規 雍雍和氣 蕩蕩作一門春矣  乃築齋于先壟畔村之東 而扁之龍岡 盖取山名也 於是 具籩爵謹香火 聚宗族悅情話 迪子姓之孝悌 邀賓友詢儀節 此實全門紹述之有所也 勢久而坭 冑孫相大君 寤寐憂懼 遍告于族曰 先祖之貽謨至此而墜 豈敢以力 詘 趑趄經營乎 僉無異辭 乃以辛未之歲 掇舊募新 以瓦易茅 規模大壯 盖斯役之特捐巨貲 克至有成者 後孫永雨君之力也 於是 丘壟增彩 衆心惟洽 邀鄕隣以落 相大君 請余記其槪 余本不文 近又吟病 辭之牢而請之固 遂略記如右 而竊惟叔季滔滔 古色沈晦 人或忝祖坭族 而今以斯齋之 一建再建言之 其功辛辣 初其諸族 血心團體 胼手赴役 各忘其勞 繼以永雨君之到貧 析毫逐利 合銖成算 能散其積 吁亦難哉 如無追述之孝 講倫之情 烏能如是乎 惟願李氏之居斯齋者 循襲遺謨 使來裔永世勿替 則齋與龍山撑立宇宙 而以卜无疆之休矣 盍相勉焉
黃兎復月上澣 金海 金鶴斗 記


용강재중수기 龍岡齋重修記
구룡산(九龍山)은 창원 동읍의 여러 산 중에서 특별하게 이름난 산이다. 흐르는 기운이 매우 신령스러워 그 속에 숨어서 덕을 기르는 빼어난 선비와 신을 감동시키는 효자가 있어 그 여운이 멀리까지 진동한다. 이 산을 둘러싸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 오랜 가문의 이름난 문벌들이 많다. 월성이씨月城李氏의 문중은 그 중의 하나이다. 옛날 소경왕昭敬王 때의 임진란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신 휘諱 종욱宗郁 화헌공和軒公은 뛰어난 공훈과 문장과 행의로써 세상 사람들이 추대하고 유학자들의 존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다섯째 아들인 휘 운무雲茂는 부친의 엄하고 두터운 가풍과 깊이 있는 가르침을 받아 유학자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성격이 고고(孤高)하고 정결淨潔하여 영리를 구하지 않고 다만 아름답기로 이름난 산수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남쪽으로 유람하다 구룡산의 맑고 빼어난 경관을 보고 너무 좋아하여 버릴 수가 없고 은자隱者가 살만한 곳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의춘宜春(의령)에서 집안을 모두 이끌고 와서 산 북쪽편의 그윽한 전장田庄을 골라서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날마다 아름다운 산수와 풍광과 노을과 구름을 노래하면서 우거진 수풀을 베어내고 논과 밭으로 가꾸어 동백산에서 발원한 회수淮水¹⁾가 바다에 이르듯 먼 장래의 계획으로 삼았다. 그곳 집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임종하여 이 땅에 혼백을 의탁하게 되었다.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대대로 세거지로 삼게 되었으며 그 후로 차츰 번성하여 스스로 큰 마을을 이루었다. 대대로 유학자의 본 행실과 맑고 여유로운 가업을 이어 밖으로 이름이 빛나기를 원하지 않고 안으로 돈독하고 화목한 규범을 닦아 서로 어우러진 화목한 기운이 넘쳐 한 가문이 온통 봄기운이 흘러넘쳤다. 이에 논두렁가 마을 동쪽에 재실을 짓고 이름을 용강龍岡이라 편액 했으니 대개 산 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이에 제기를 갖추고 제사를 드리니 종족이 모두 모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자손들이 효도하고 공경하도록 하고 빈객을 맞이하여 예의범절을 갖추니 이는 실로 온 가문이 조상의 가업을 이어 후세에 물려주는 장소가 되는 곳이다. 세월이 오래 되어 재실이 무너지게 되니 후손인 상대相大군이 자나 깨나 두려워하고 근심하다가 온 집안에 두루 의논하였다. 이에 ‘선조께서 남기신 뜻이 지금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힘이 모자란다고 하며 다시 짓는 것을 머뭇거리겠습니까.’하니 아무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신미辛未년에 옛집을 철거하고 새로 집을 지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하고 그 규모도 훨씬 장대하게 하였다. 대개 이 일에 특별히 많은 자금을 출연하여 끝내 일이 이루어지게 한 것은 후손인 영우永雨군의 힘이다. 이에 산과 들은 더욱 그 빛을 더하고 많은 사람들은 흡족해하며 이웃 마을의 사람들을 맞이하여 낙성을 하였다. 상대相大군이 나에게 그 개략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본래 문장이 보잘것없고 근래에 또 병으로 신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간청이 워낙 완고하여 드디어 이와 같이 기문記文을 쓰게 되었다. 생각건대 말세의 기운이 도도하고 옛 법도와 풍속이 가라앉아 어두운 때 사람들은 모두 조상을 더럽히고 가문을 무너뜨리는 상황이다. 지금에 이 재실이 한번 지어지고 다시 중건한 것으로 본다면 그 공은 매우 힘들고 험난할 것이다. 처음 여러 족손들이 온 마음을 쏟아 단결하여 일손을 더하고 부역에 참가하여도 누구도 그것을 힘들게 여기지 않았다. 다시 그것을 이어 영우군은 처음 매우 빈곤하여 털끝만한 이익을 모아 쌓고 쌓아서 큰 재산을 이루었는데 그러한 재산을 흩어서 써버리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조상을 따라 섬기고 그 가업을 이어 후손에게 전하려는 효성과 인륜의 당연한 뜻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능히 그러했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이씨李氏로서 이 재실에 자리하는 사람들이 조상의 남기신 뜻을 잘 이어서 다가오는 후손들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면 재실과 용산이 함께 이 우주를 지탱할 것이니 한없는 아름다움이 되도록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다.
황토黃兎(기묘 己卯:1939) 11월 상한 김해  김학두金鶴斗 기록함.


【주석】
회수淮水¹⁾ : 회(淮)가 들어가는 지명으로는 중국의 회수(淮水)가 있다. 회수(淮水)는 하남성(河南省)의 동백산(桐柏山)에서 발원하여 안휘성(安徽省)을 지나 강소성(江蘇省)을 거쳐 바다에 흘러드는 중국에서 셋째로 큰 강이다. 그리고 회수(淮水)의 남쪽에는 옛날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오(吳)나라가 있는데, 이 오(吳)나라의 이전 이름이 바로 회남(淮南)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淮桐朝暮之計’는 회수가 동백산에서 흘러 바다에 이르듯 먼 장래를 생각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


출처 및 참조
창원의 누정-박태성/불휘미디어(20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