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무안면 모로리 창녕조씨 삼은재 三恩齋

천부인권 2020. 3. 5. 06:00



2020.3.1. 무안면 모로리와 삼은재三恩齋가 있는 풍경


무안면 모로리 460번지(모로안길 11-7)에 위치한 삼은재三恩齋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양문曺養文 공의 은덕隱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그 현손玄孫 희영喜榮이 임술壬戌(1982)년에 창건한 집이다. 구글 지도에는 위치를 「위도 35°27′41″N 경도 128°38′47.6″E」으로 표시한다. 대문에는 영조문永照門이라 편액 했고 기둥에 주련은 없으며 본채는 삼은재三恩齋라 이름 했다.
조양문曺養文(1802~1858) 공은 취원당聚遠堂 조광익曺光益 선생의 8대손이다. 효우孝友로써 치가治家하더니 만년에 무안면 모로리慕老里로 이거移居함으로써 자손이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다.




2020.3.1. 무안면 창녕조씨 삼은재三恩齋 전경



2020.3.1. 무안면 창녕조씨 삼은재三恩齋 정면



2020.3.1. 무안면 창녕조씨 삼은재三恩齋 입구에서



2020.3.1. 모로리 창녕조씨 삼은재三恩齋 대문



창녕조씨 재실 대문인 영조문永照門 편액



2020.3.1. 무안면 모로리 창녕조씨 삼은재三恩齋



삼은재三恩齋 편액



三恩齋記
昌寧曺氏之居密州者 槪皆聚遠堂先生諱光益之後 而子姓蕃衍熾昌 爲州之閥閱者久 而在在成門戶 其一派之居武安面慕老洞者 世以書農承 且以敦睦本之篤 稱於鄕里 可想其源深而流長之理之不爽也 先生之八代孫 處士諱養文 隱居修德 不求聞達 以孝友政于家移居于慕老洞 子孫漸煩昌焉 公之玄孫喜榮君 與諸族詢謀僉同 爲公建齋舍于洞于邊 名之曰三恩齋 盖欲遂先親之遺志也 請文於余以記之 余年過八旬 不能此等酬應久矣 然君之孝 裡面事也 不可以不文固辭 竊惟君之以恩名齋 其意在不忘祖德也 世之知此者 能幾人 君之昌寧官界之任 實不易之役也 遵哲人之戒 以兼動二字 在職三十年 一無過誤 人稱良吏 退職之日 自上有養老之金 此在䟽廣之事也 古詩云 孝順還生孝順者 点点適適不差移 此千古不易之正理也 君家將來之興昌 豈不可必乎 余以是心祝 而爲三隱齋記
壬戌 至月 日 瑞興 金昌埴 記


삼은재기 三恩齋記
창녕조씨昌寧曺氏로써 밀주密州에 사는 자는 대개 취원당선생聚遠堂先生 이름이 광익光益의 후예로서 자손이 번성하여 고을의 벌열閥閱이 된지 오래인지라 곳곳마다 문호門戶를 이루었다. 그 한 갈래로 무안면武安面 모로동慕老洞에 사는 자는 대대로 독서와 농사를 계승하고 또 돈목敦睦과 보본報本이 독실하여 향리에서 칭송 되는데 그 근원이 깊으며 흐름이 길다는 이치가 어긋나지 않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선생의 8대손 처사 이름이 양문은 은거하여 덕을 닦으며 세상에 알려져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고 효도와 우애로 집안을 바로 잡아 모로동慕老洞에 이사하여 살았는데 자손이 점차 번창 하였다. 공의 현손 희영喜榮군이 여러 일족들과 의논하여 의견을 모아 공을 위하여 동네 곁에 재사齋舍를 세우고 이름을 삼은재三恩齋라 하였다. 대개 선친의 유지遺志를 이루려 함이다. 그리고서 내게 글로 기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나이가 여든이 넘어 이런 문자에 응하지 못한지 오래이다. 그러나 군의 효성은 이명의 일인지라 글을 못한다고 굳지 사양할 수 없다.
가만히 생각건대 군이 ‘은恩’이란 말로 재실의 이름을 지은 것은 그 의도가 조상의 덕을 잊지 않음에 있다. 세상에 이를 아는 자가 몇이나 될까? 군의 창녕 관계官界의 책임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철인의 훈계를 따라 청렴 근면[兼動] 두 글자로 30년 동안 재직하면서 과오가 하나 없어 사람들이 선량한 관리라고 칭송하였고 퇴직하는 날 위에서 양로금養老金이 내려왔는데 이는 한漢나라 소광䟽廣의 일이다.
옛날 시에 이르기를 “효순孝順은 효순孝順한 자식을 낳나니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 어긋나지 않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천고에 바뀌지 않는 바른 이치이다. 그대 집안이 장래에 흥창興昌할 날을 어찌 예측하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으로 축원하면서 삼은재기三恩齋記를 짓는다.
임술(1982) 동짓달 일 서흥 김창식金昌埴 기록하다.


출처 및 참고
국역밀양누정록-밀양문화원(200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