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오서리 안동권씨 회계재 檜溪齋

천부인권 2020. 4. 2. 19:02

 

2020.3.20. 진전면 오서리 회동마을 안동권씨 회계재檜溪齋 연못이 있는 풍경

 

진전면 오서리 1153(회동길 23)에는 안동권씨 월암月巖 권공權公의 향례享禮를 드리는 회계서당檜溪書堂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구글 지도가 「위도 35°05'50.9"N 경도 128°24'26.3"E」를 가리킨다.
회동檜洞마을 입구 좌측에 회계서당檜溪書堂이 위치하며 대문 앞에는 인공연못이 있고 연못의 좌측 언덕 위에는 『진전면 오서리 회동마을 지석묘』 1기가 있어 이곳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터임을 증명하고 있다. 오서리 인근에는 안동권씨의 재실 5채가 집중적으로 있어 안동권씨들의 세거지 임을 알 수 있는데 비운의 대통령 노무현 처가妻家 선산이 있고 그 일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 오서리의 안동권씨들은 회계서당檜溪書堂으로부터 4곳의 재실齋室이 파생되었다.

 

 

2020.3.20. 진전면 오서리 회동마을 안동권씨 회계재檜溪齋 대문

 

2020.3.20. 진전면 오서리 회동마을 안동권씨 회계재檜溪齋 전경

 

회계재檜溪齋 편액

 

회계서당檜溪書堂 편액

 

 

 

 회계서당檜溪書堂 주련

 

 

 

 

檜溪書堂記
檜溪書堂者 在鎭海縣竹谷里之檜洞 其舊院而 爲贈吏曹參判 月巖權公妥享所也 始公之後孫就公丘壟下爲之齋 以齊宿寓思 旣而士論齊發謂公之行學 爲一方矜式宜有畏壘之奉 遂設院於 此而俎豆之 其刱在憲宗辛丑而至 高宗戊辰撤於邦禁 則茂草之歎蓋久矣 後十數年辛巳後孫 復就其址而爲之堂 堂焉而循院號 蓋識其舊也 此則堂之故實也 公仁祖時人篤孝其性也 自初上學見父母字 則輒敬而不敢慢讀書 尤好小學 必求實踐 事親盡識侍病而致 黃魚之感 血指之誠 廬墓六載有虎衛之異 鄕人慕其孝至 繪圖以傳之而 遂菴權文純公 歎其爲天生孝子 此其行義之實 而朝家給復旌贈之典 前後頻繁 士林尸祀之議久而不己 則豈非其眞誠實行之感天動人者 愈久而愈著者耶 雖其遺文散佚無 以考其學問之實 然學求所以行之也 其行之著而其學者在是矣 更何他求哉 夫孝者源於百行 而通神明達四海 則今雖綱常墜盡 天下不復知有孝 而人心之秉彛終 有不可泯者 則聞公之風 亦必有感發而興起者矣 俎豆崇奉在外之文也 感發興起在內之實也 苟無在內之實 則其外者虛矣 苟實之不泯 則在外者有不必待也 然則是堂之爲一方矜式 而爲人所感慕者 豈以儀文之未擧有今昔之殊而子孫之寓慕者 亦豈但丘壟芬苾之薦而己哉 堂舊無記 其十世之胄奇洛 以記不可闕屬之於余 余不能辭 則略述古今 興發之由 與公行學之實 俾登斯堂者 有所考而興感焉
歲丙午暮春 花山 權龍鉉 記
                 端興 金煕淵 書

 

회계서당기 檜溪書堂記
회계서당檜溪書堂은 진해현 죽곡리竹谷里 회동檜洞에 있는데 옛날 서원의 터로서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월암月巖 권공權公의 향례享禮를 드리는 곳이다. 처음에는 공公의 후손들이 공公의 묘 아래에서 재齋를 세워 제숙齊宿하며 사모思慕하고자 했는데 얼마 후 사림들의 여론이 공公의 행의行義와 학문은 한 지방의 자랑이 된다고 하며 마땅히 서원書院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드디어 여기에 서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니 그 창건은 헌종 신축년辛丑年(1841)이었다. 그 후 고종 무진년戊辰年(1868)에 이르러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 되었으니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져 탄식한지 오래 되었다. 그 후 10수년 지난 신사辛巳(1881)년에 후손들이 그 터에 다시 서당을 세우고 그 원호院號인 회계檜溪를 따랐다. 대략 이와 같이 옛날 원院을 기술 하니 이것은 서당의 옛 사실이다. 공公은 인조仁祖 때 사람으로 효성이 독실한 성품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당에 가서 부모의 이름 자字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함부로 읽지 않았고 책은 소학小學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반드시 배운 대로 실천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며 도리를 다하고 병시중을 들며 엄동설한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해 드리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또 여묘살이 6년 중에는 호랑이가 호위하는 이적異蹟이 있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도를 사모하여 그림을 그려 전하기에 이르렀다. 수암遂菴 권문순權文純도 그가 천생효자天生孝子라고 탄복하였으니 이것이 의義를 행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조정朝政에서 다시 정려旌閭하고 증직贈職하는 사례가 전후로 빈번하였고 사림士林들이 향사享祀를 드리자는 의견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어찌 그의 진실한 정성과 실행이 하늘에 미치고 인간을 감동시켜 해가 갈수록 더욱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가 남긴 글이 흩어져 없어 학문의 실적實蹟을 볼 수 없으나 학문이란 실행이 되어야 중요하므로 그의 실행이 보여주듯 그의 학문은 여기에 있으니 어찌 달리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신명神明에 통하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니 지금은 비록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지고 다하여 세상 사람들이 효가 있는 줄 모르나 사람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어서 끝내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니 공의 효행을 들으면 감화되어 효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제사를 높이 받들어 모시는 것은 밖으로 보이는 꾸밈이요 감발感發하여 효심을 일으키는 것이 실상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내재된 효가 없으면 밖의 것은 거짓이다. 진실이 건재 한다면 서원의 향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서당이 한 지방의 자랑이 되며 남이 감모感慕하는데 어찌 묘소에서 제사 드리는데 만 국한 되겠는가. 서당에 오래 전부터 기문이 없었는데 그 10세손 기락奇洛이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다고 나에게 부탁하므로 내 사양할 수 없어 대략 고금古今의 흥발興發한 사유와 공公의 행의行義한 학문의 사실을 서술하여 이 서당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상고詳考하여 느낌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1966년 늦봄에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기록하다.
                     단흥端興 김희연金煕淵 쓰다.

 

 

 

 

檜溪齋上樑文
書院講會之所 本齋仍舊百餘年 遺址尙存先慕歲薦之儀 肇祀迄令十數間 齊閣方造於山仰止之心 油然恭惟我月巖先祖 花原古家曰 忠而曰孝竹谿遺訓學禮乎 學詩至行周純 贈職表楔之榮 自天降命 公議齊發 癸未乙酉之歲 立祠妥靈籩萬豆菹 是升春秋中丁之享 樓樑堂壁以賁大人君子之文 運蓋有否泰之循環理豈無成毁之換局不保院樣 通一國已同盡掇屋材自本官申飭 卽事以睹三眛之形影 俱空往蹟所 思一場之夢寐都盡 多士復無依歸之地 諸孫益切悽愴之心 後岡掃塋禮不可廢 前堂飮鋑勢將何爲 詢謀僉同於斯焉 衣冠竝聚厥構乃肯于時也 繩墨惟均屋子不日 而成維辛是月也 窉崔嵬朱栱排六闥 而周遭森羅小栭壓八楹 而弘敞甄亭之視思以廣室於前 而創新瀧岡之孺慕冞深齊 於是而展省玆控短引用助脩樑
阿郞偉抛樑東 蒼然松檟此山中 千秋人地相遭吉 顧視回龍遠勢豐
阿卽偉抛樑西 峯名金鳳出坤倪 庭前梧葉香猶在 來宿翩翩覽德兮
阿郞偉抛樑南 墓廬舊址至今談 六年來護冥頑物 相別吼聲裂翠嵐
阿卽偉抛樑北 長川一帶流無極 黃魚盈尺來跳沙 號泣于天忽有得
阿卽偉抛樑上 同鼎炊煙氣遠放 誠孝元來惟有知 無雲萬里月星朗
阿郞偉抛樑下 薤鹽淡味冬而夏 密符自有聖謨傳 喫緊工夫來學者
伏願上樑之後 日夕登臨 霜露踐履 㺚心報本 盍相與戒 吾殫誠燕毛受釐 庶何以勉爾序齒
宗孫進士 權(土+耒) 謹撰


회계재상량문(檜溪齋上樑文)
서원(書院) 강학하고 모이는 장소다. 이 재실은 옛것으로 백여년이 되었다. 그 터가 남아 선조를 추모하는 제의가 있고 제사를 시작한 지 십수세대가 되었다. 재실을 산에 지으니 마음이 바라보이는 지점으로 유연히 우리 월암선조(月巖先祖)를 그리워하는 곳이다. 화원(花原) 고가(古家)에 이르길 충(忠)을 다하면서 효성스러운 것은 죽계(竹谿)의 교훈으로 예를 배우고 시를 배워 지극한 행실이 두루 순정하여 증직(贈職)되고 정려를 세우는 영예가 나라에서 명으로 내려졌다. 고을의 공의(公議)가 일제히 일어나 계미(癸未) 을유(乙酉)년에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제의를 드리게 되니 봄가을 중간 정일(丁日)에 향사를 올린다. 누각과 들보와 집 벽에 대앤 군자의 글이 풍성하게 걸렸다. 그러나 운세가 맞지 않고 우주가 순환하면 어찌 그것이 훼손되어 서원의 형식을 보존하지 못하는 국면이 없겠는가. 온 나라가 동시에 서원을 철폐하니 이곳도 수령이 명을 따라 실행할 뿐이었다. 눈앞에 닥친 일이니 어둠게 골몰한 형상을 옅볼 뿐이었다. 이에 옛 자취를 간직한 집이 텅 비게 되었으니 세상일이 일장춘몽은 꿈자리에서 다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모든 선비들이 귀의할 곳이 없어졌고 자손들은 더욱 슬퍼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이후 산소를 쓰고 제를 드리는 예를 그만둘 수 없으니 앞 채에서 음식과 술을 올리니 그 위세가 어떠했겠는가. 이에 의견을 모으니 모두 이일에 동의하였다. 여러 유림들이 모여 때에 맞게 재실을 다시 짓게 되니 먹줄을 균형있게 퉁기니 집이 몇날이 지나지 않아 이루어지니 신축년 이 달이다. 우뚝히 솟은 붉은 기둥 위 두공은 셋이고 문은 여섯으로 배치하고 두루 펼쳐 작은 두공으로 여덟 기둥을 눌렀다. 크고 밝으니 견씨의 사정(思亭)의 모습이니 앞에는 넓을 방을 생각한다. 구양순이 상강(瀧岡)비석을 세워 어려서부터 사모하던 정이 더욱 깊어진 일을 새롭게 일으켰다. 이에 이 모든 것을 펼쳐 살펴서 짧은 노래를 지어 들보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어랑차 들보 동으로 던져라. 울창한 무덤 도래솔 이 산속에 있으니, 천년토록 사람과 땅이 복으로 만났도다. 고개돌려 청룡설을 보니 멀리 그 세력 뻗쳐가네.
어랑차 들보 서편으로 던져라. 금봉산 봉우리 땅 끝에 우뚝하고, 뜰앞 오동잎은 향기롭도다. 이곳에 와 재숙하면 봉황같은 덕이 무성함을 보리라.
어랑차 들보 남으로 던져라. 여묘의 옛 터 지금도 회자되니 육년을 짐승이 범이 와서 호위한 뒤, 서로 이별할 때 울음이 푸른 산빛을 찟는 듯.
어랑차 들보 북으로 던져라. 긴 냇물 한줄기 끝없이 흐르는데 한 자나 되는 황어(黃魚) 모래밭에 뛰어 올랐네, 하늘에 울며 빌어서 홀연히 얻은 것이라.
어랑차 들보 위로 던져라. 한 솥 아궁이 연기는 멀리 날아가는 것 보니, 정성과 효성이 원래 근원이 있음을 알겠네, 구름없는 만리 하늘에 달과 별이 밝도다.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제사의 해염(薤鹽)을 겨울여름 올리니 성인의 계획을 전함으로부터 이것이 매우 부합되니. 매우 긴요한 끽긴사(喫緊事)를 뒤에 오는 학자들이 공부할 것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 올린 후에 밤낮으로 올라 임하고 봄가을 서리이슬을 밟고 제를 올리며 마음을 다하여 근본데 보답하고 서로 경계하게 하소서. 우리의 정성을 다해 제사 후 연모(燕毛)의 차례로 술을 마셔, 거의 나이에 따라 힘써 노력하게 하소서.
종손(宗孫) 진사(進士) 권내(權棶) 삼가 쓰다.

 

 

 

 

 

삼가 회계재에 짓다
謹題檜溪齋 尤平韻[해문-조여調汝]

 

欄干徙倚望先楸 난간으로 옮겨와 선영¹⁾ 우러러보니                             
吾祖遺風吹不休 우리 선조가 남긴 가르침 쉼 없이 고취되네                       
百行源中魚躍水 효도하는 행실 속에²⁾ 물고기 물에서 뛰어오르는³⁾ 이치 있고          
一抔隴下翬飛樓 한 줌 산소 아래 날아갈 듯 처마 들린 누대 있구나                 
春秋霜露愀然感 봄 이슬 가을 서리 내리면 서글픈 느낌 일고⁴⁾
晨夕魂靈儼若留 아침 저녁 혼령이 엄연하게 머물러 계신 듯 하도다 
小子那堪追慕意 후손들 추모하는 마음을 어찌 참으리오                             
百年香火某山邱 백년토록 모산(某山) 언덕에서 제사를 지낸다네                          
증손(曾孫) 정래(正來)


【주석】
선영¹⁾ : 선조의 산소나 산소가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
행실 속에²⁾ : 효도가 모든 행실은 근원(孝爲百行之源)이라고 하였다.
뛰어오르는³⁾ : 어약(魚躍)은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준말이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만물이 각기 제자리를 얻어 이치가 환히 드러남을 형용한 말이다. 《중용장구》 제12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하였으니, 상하에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현상은 다르지만, 그 이치는 같다는 뜻으로 쓰였다.
서글픈 느낌 일고⁴⁾ : 상로지감(霜露之感)을 말한다. 상로지감은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거든 군자는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픈 마음이 있기 마련이니, 그 추움을 말함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이 적셔주거든 군자는 이것을 밟고 반드시 놀라는 마음이 있어 장차 부모를 뵈올 듯이 여긴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하였다.

 

 

 

 

檜溪齋有感
獨倚欄干立
倍新遠慕心
南喬蕃實實
老檜蔚森森
問筍篁園邃
觀魚石澗深
儼然若侍地
起整我班袊
后孫 堛 謹題

 

 

 

 

檜溪寓感
小子登斯日
油然孝悌心
儀瞻邊豋薦
香襲檜松森
輪〇室堂地
經營歲月深
千秋公議在
濟濟幾靑袊
后孫進士 (土+厚)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