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구산면 옥계리 밀양박씨 경온재 憬蒀齋

천부인권 2020. 4. 6. 07:39



2019.7.7. 구산면 옥계리 밀양박씨 경온재憬蒀齋


구산면 옥계리 149-3(옥계로 300)에는 밀양박씨 단암공檀菴公 박사성朴師聖을 향사하는 경온재憬蒀齋가 있다. 이곳은 구글 지도가 「위도 35°05'36.7"N 경도 128°36'43.0"E」를 가리킨다. 마을 입구 공터를 마주하는 경온재憬蒀齋는 옥빛의 기와를 하고 있어 쉽게 눈에 띈다. 후손을 만나지 못하면 담장이 높아 외부에서만 볼 수밖에 없는데 대문에는 준극문峻極門이라 편액 했고 본실은 경온재憬蒀齋라 이름 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방문하여 기문을 봤으면 하지만 지금은 『마산문화지』의 기록을 옮겨 두는 것으로 한다.




2019.7.7. 구산면 옥계리 밀양박씨 경온재憬蒀齋 대문





憬蒀齋記
古昌原之東 龜山玉溪里家嶝山下 有密陽朴氏上祖諱彦孚 麗朝評議事封密城府院君 中祖忠肅公松隱先生之十二世至 諱師聖之先祖 檀菴公統氣脈之遺家世庄也 卽公於號檀菴於 公之八世雲仍居之地卽玉溪 然之自生曆累百年也 今距公之沒于 近於三百 而故體魄之藏失 其眞子孫於 愁懜久矣 歲戊午年春 其公孫鍾圭氏先考生涯有遺言曰 未就先事 而使嗣子傳乎之納乃 其命詞不違之克功財力 而相與宗孫庸基熙碩玉基氏 不得齊心合力 營建齋舍 將欲謀歲壇祭之 若奉取朱夫子墓禋有薺之義也 功告訖請余書 公之族孫聖穆氏余辭不獲 而其事謹紀 昊追遠而報本承意 而述事者孝之至 而人道之不也 故尊其先括尊其祖也 故祭祀以時 此古之君子所 以重其神乎 而今世降禮壞人不知 其所本者多矣 獨夫遵其禮俗不忘 其所本誠仁孝之道也 詩云 永言孝思 孝思維則 者非此之謂歟 公之靈紹之定 千秋百世之皝皝洋益無窮矣 乃其嗣孫之筠椅 將復之萬曆厥德無斁之矣 是堂下之諸宗者 天道之禮 從抽升降 以勉之哉
民國己未重陽節 咸安趙鏞柱 記
檀菴公 後孫 國會議員 鍾圭 謹錄


경온재기 憬蒀齋記
옛 창원昌原의 동쪽 구산龜山 옥계리玉溪里 가등산家嶝山 아래 밀양박씨들이 있으니 윗 조상의 이름은 언부彦孚로 고려 때 평의사評議事이며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중조는 충숙공忠肅公으로 송은선생松隱先生 12세이다. 이름이 사성師聖 선조에 이르러 단암공檀菴公으로 이어 기맥氣脈이 내린 집안으로 대대로 살고 있음이라. 공의 호는 단암檀菴이요 공의 팔세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즉 옥계이다. 그런고로 살기 시작한 세월이 여러 백년이다. 공이 세상을 떠남은 지금부터 근 300년이 되어 몸과 혼을 감춘 산소를 잃은 고로 참으로 자손의 근심이 오래 되었음이라. 무오년戊午年 봄 그 공公의 후손 종규씨鍾圭氏가 아버지 생애生涯 때 유언이 있어 이르기를 선조 일을 이루지 못했음을 자손들에게 전하니 받아 두어라 하였다. 그 명하는 말씀 어기지 아니하고 극진한 공功과 재력으로 종손 용기庸基 희석熙碩玉 옥기씨基氏와 서로 더불어 하니 부득이 마음이 같아지고 합력하여 재실을 지었고 장래에 한해 한번 제단에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묘제墓祭를 받들어 지냄은 주자朱子께서 요제의 뜻과 함께 같은 것이라 공사를 마치고 나에게 글을 청하고 공公의 족손族孫 성목씨聖穆氏가 나의 사양을 거두지 못하게 하여 그 사실에 삼가 기록함이라 널리 먼 조상을 추모하고 보본報本에 뜻을 잇고 선조의 일을 펴내는 것은 효도의 이름이요 사람의 도리라 그러므로 그 선조를 존경함이 모아지면 그 할아버지를 존경함이라 그런고로 제사 때 이러한 것을 옛 군자들은 그 신神을 중하게 여겼다. 지금 세상은 떨어지고 예는 무너져 사람들은 그 근본이란 것을 알지 못함이 많도다. 독특하게 그 풍속을 쫓아 이지 아니하면 그 본과 성과 인이 효의 도리이다.
시경에 말하기를 길이길이 조상에 효도하여 온 세상에 법도가 되었다. 한 것은 이를 이른 것이 아니랴. 공의 신령이 이어져 정함이 천수백세 황황하게 넘쳐 성대함이 무궁하면 이내 후손들도 무성하여 장래 오래도록 선조의 덕 무너짐이 없으리라 이 당堂 아래 모든 친족들은 천도天道의 예를 거두어 쫓아 오르고 내림에 힘쓸지어다.
민국기미중양절 함안 조용주趙鏞柱 기록하다.
단암공檀菴公 후손 국회의원 종규鍾圭 삼가 쓰다.



출처 및 참조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