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여양리 밀양박씨 옥산재 玉山齋

천부인권 2020. 4. 8. 06:00



2014.11.30. 여양리 밀양박씨 옥산재玉山齋 전경


진전면 여양리 909(의산삼일로 590-1)에는 1960년 세운 밀양박씨 효자 박의진朴毅鎭을 기리는 옥산재玉山齋가 있다. 이곳은 구글 지도가 「위도 35°10'46.1"N 경도 128°22'46.7"E」를 가리킨다.
옥산재는 『여양리 소나무보호수』를 찾았을 때와 쌍효각雙孝閣과 창효각彰孝閣을 찾았을 때에도 방문한 적이 있고 아들과 방문한 적도 있다. 여러 번의 방문에도 직접 내부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옥산재玉山齋의 마당에 풀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옥산재玉山齋의 대문에는 앙지문仰止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옥산재玉山齋라 이름 했다. 마산문화지에는 기문이 실려 있지만 편액은 볼 수 없었고 주련은 걸려 있다.




2019.7.2 진전면 여양리 옥산재 대문 전경



2014.11.30. 여양리 밀양박씨 옥산재 대문 앙지문仰止門 편액



2019.7.2 진전면 여양리 옥산재玉山齋


玉山齋記
夫孝百行之源 而萬世之準也 虞舜之大德 而其本在於 是郕公之篤學而其始亦於 是故能行是道上天感應 鬼神顧護至 於魚鳥草木 亦皆隨時而顯異 王祥之鯉 董生之鷄 孟宗之筍 大抵是物也 然世之尙論者 或以非其時 而出非其類 而救疑之此不過膠柱鼓瑟也 誠力所至 無處不通況 上天臨之在 上鬼神質之在 傍寧有一毫 差爽之理乎 所以有非常之孝 以非常之事報之也 巴山之郡艅航之坊玉方之村 舊有密城朴公 諱毅鎭號晩圃恭孝 公仲孫忠靖公 崇元之後也 天性至孝 幼而能承順父母 稍長貧無以爲養 耕讀漁樵 如董生之爲 歲乙亥(西紀一八一五年)大雨傾盆 怒濤塡谷 甚於懷襄 自空中呼 公名曰 置爾父母何地於 是公與夫人趙氏 背負父母 而出時夜 昏黑咫尺 難辨忽地 電明指示 前路使父母安全 而村落至於陷沒也 大水後門戶復圓 而母病禱天請代 父沒廬墓終制 豈非千古初見之孝 而有合於上所云 上天感應鬼神顧護也 歟公沒後第三子準奎 與阿兄以儒狀聞于朝 高宗壬午(西紀一八八二年 高宗十九年) 蒙旌令人趙氏亦與焉 贈公以童蒙敎官朝奉大夫 鳴呼 公之棹楔如彼其壯 而子孫以免裘之無屋 爲慊累歲經營 築五棟之室 而今年告竣亦詩之所云 孝子不匱 永錫爾類者也 取地名而榜之曰玉山齋 玄孫三圭君謁余記其事 余於巴山爲先世 覉寓之鄕 又念孝子之事 感服殊甚 玆敢據實書之 一以爲子孫塞責 一以爲世人勸勉
歲庚子 驚蟄節 光州 盧根容 記


옥산재기 玉山齋記
자고로 효孝라는 것은 백행百行의 근원이며 만세의 준칙이다.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대덕大德도 그 근본은 여기에 있으며 성공郕公의 독학篤學도 그 시초는 여기에 있기 때문에 능히 이도道를 행하면 하늘도 감응感應하고 귀신도 돌아보며 보호할 것이며 새 물고기 초목까지도 또한 때에 따라서 기적을 나타내니 왕상王祥의 리어나 동생董生의 계란이나 맹종孟宗의 죽순¹⁾이 대개 이 같은 물증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따지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혹 그것이 시기가 아닌데도 나왔으며 그 류가 아닌데도 구원해 준 것을 의심하여 이것은 마치 「아교기둥으로 거문고를 켜는 격」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성력誠力이 닿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통하지 않는 법이 없나니 하물며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귀신이 곁에 있으며 대질하여 주며 차라리 털끝만큼도 오차가 없는 이치에서랴! 이른바 비상한 효성이 있으면 비상한 사실로서 보답해 주는 것이다. 파산군巴山郡 여항면艅航面 옥방촌玉方村에 옛날 밀성박공密城朴公이 겨셨는데 이름은 의진毅鎭이고 호號는 만포晩圃이시며 공손한 효자였다. 공은 충정공忠靖公의 둘째이고 숭원崇元의 후예이다.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승순承順²⁾하셨고 점차 자라서는 집이 가난하여 부모님을 봉양할 수 없게 되자 밭갈이와 글 읽기와 고기 잡고 나무하기를 동생董生이 하였던 것과 같이하였다.
을해乙亥(1815)년에 홍수가 동이로 들어붓듯이 퍼부어 노도가 골짝을 꽉 메우며 천지개벽하는 것보다 심하였는데 공중으로부터 공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기를 「너의 부모를 어느 곳으로 모셔라」 하였다. 그제야 공이 부인 조씨趙氏와 함께 부모님을 등에 업고 나가니 밤이 칠흑같이 어두워 지척咫尺을 분별하기 어려웠는데 번갯불이 땅을 밝혀 앞길을 비춰주어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었으며 촌락은 함몰陷沒되었던 것이다.
홍수가 지나간 뒤에 문호門戶를 복원하였으며 어머니의 병환 시에는 하늘을 향하여 자신이 어머님의 병환을 대신하겠다고 빌었으며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묘에서 상제를 마치셨으니 이것이 어찌 천고에 처음 보는 효도가 아니며 위에서 말한 하늘이 감응하고 귀신이 돌아보며 보호하여 준다는 것과 부합되지 아니하겠는가.
공公이 돌아가신 뒤에 셋째 아들 준규準奎가 주축이 되고 그의 형들이 도와서 유생들의 서장誓狀³⁾으로서 조정에 계문啓聞⁴⁾하여 고종高宗 임오壬午(1882)년 효자의 정려각旌閭閣을 하사 받은 은전을 받게 되었는데 부인 조씨趙氏도 함께 포함 되었고 공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인 조봉대부朝奉大夫의 품계를 증직 받았다.
아! 공의 효행비가 이와 같이 거룩한데도 자손들이 재실이 없음을 아쉽게 여기다가 여러 해를 공사하여 5동(4칸)짜리 집을 신축하여 금년에야 준공을 보게 되었으니 역시 시경에 이른바 「효자의 행적은 묻혀 지지 않는 것이며 길이 너와 같은 류類를 주리라」한 것과 같다.
지명을 따라서 현판을 옥산재玉山齋라 하고는 현손玄孫인 삼규군三圭君이 나를 찾아와서 그 사적에 대한 기문을 요청하였다. 나로서는 파산巴山이 실세失世 어른들이 오랫동안 살던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효자의 사적을 생각해 보니 특수하게 매우 감복이 되었으므로 이에 감히 실기에 의하여 쓰노니 한편으로는 자손들이 나에게 책임지운 마음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효행을 권장하는 마음으로 쓰노라.
경자庚子(1960) 경칩에 광주 노근용盧根容 지음.


【주석】
왕상王祥의 리어나 동생董生의 계란이나 맹종孟宗의 죽순¹⁾ : 옛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들로 왕상王祥은 겨울에 어머니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려 할 때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나왔다하며, 동생董生은 당나라 때 문호한 문공이 그의 효행을 칭송하는 글(동생행)을 지을 정도로 대표적인 효자이고, 맹종은 겨울에 어머니가 죽순을 찾자 대밭에 가서 엎드려 우니 돌연 죽순이 올라 왔다고 함.
승순承順²⁾ : 윗사람의 명령에 잘 따름
서장誓狀³⁾ : 서약하는 글
계문啓聞⁴⁾ : 임금에게 글로써 아룀





2019.7.2 진전면 여양리 옥산재玉山齋 편액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