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봉암리 능성구씨 봉명재 鳳鳴齋

천부인권 2020. 4. 11. 06:00



2020.4.9. 진전면 봉암리 능성구씨 봉명재鳳鳴齋


진전면 봉암리 108-1(진전봉암길 28)에는 능성구씨綾城具氏 봉암리鳳岩里 입향조入鄕祖 성암省岩 구정황具鼎煌을 비롯하여 선조의 시향時享을 받드는 봉명재鳳鳴齋가 있다. 구글지도는 「위도 35°07'54.2"N 경도 128°22'05.6"E」를 가리킨다.
봉명재鳳鳴齋는 대문은 없으나 흙돌담장이 둘러쳐 있고 마당은 텃밭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담장 앞에 사시는 할머니가 재실을 관리하고 계신다. 4칸인 봉명재鳳鳴齋의 5개 기둥은 모두 네모져 있으며 주련이 달려 있다. 마루 위에는 봉명재기鳳鳴齋記 봉명재상량문鳳鳴齋上樑文 소식小識 및 원운原韻 차운次韻 들이 걸려 있다.




봉명재鳳鳴齋 편액



봉명재鳳鳴齋 주련




鳳鳴齋記
齋於鳳岩 而曰鳳鳴者 盖因地名以鳳 而又以取鳳鳴 高岡之我也 鳳岩在晋東咸西 其山曰天皇 其水曰巴川 可以樵可以漁 有若隱者之盤旋 而具氏居焉 贈領議政綾原府院君諱揚之裔也 中世有諱崟號明谷 文左承旨 子諱文游號禮谷 崇禎庚午進士 宰玄風高靈 刊行周禮子集 號淸原以肅廟時人退居于 晋之勝山 子鼎煌號省岩 子垣號逸南 隱求不仕 以山水漁樵之意胥宇于 此至今七八代 閒䄻埋之墓 皆在鳳岩之近 其子姓稍蕃竝居一閈 其庥蔭將盛大矣 相與潗曰 墓必有祭 祭必有齋 吾東士族之固然也 今欲置之于 逸南公墓下 則道里稍遠力絀者 莫可以成 雖成之今世 守護之策 盖亦難矣 易若營建于 子孫集居之地 以之致時思之敬 以之講惇敍之誼乎 咸曰可遂募力建斯齋 齋凡四間於 是齋明有所宗族 有會一擧 而兩義具矣 日逸南公之七代孫 會龍君請余作文 以記其實且 以演鳳鳴之義 余辭不獲則曰 鳳之爲性 非梧桐不捿 非竹實不食 非治世不鳴 是以古之人 有比於高世之賢才也 吾聞具氏之先 以賢才而鳴於治朝者多矣 若議政公之純 忠補祚明谷公之對 揚王休 禮谷公之治民 以禮皆鳳之鳴者也 若淸原公之退藏 省岩公自修是鳳之止 其耶而亦可見千仞底氣像也 具氏而居斯齋者必須 以先祖之心爲心 以先祖之學爲學 以克其才以成 其德如先祖之爲 則安知無鳳鳴世治之日乎 詩曰菶菶萋萋 雝雝喈喈 吾將執契 而侯之矣 其名勉哉斯齋也 尸其事者會龍會鳳董 其役者千會滋玉其人
戊戌復月至日 宜春 南啓震 記


봉명재기 鳳鳴齋記
재사齋舍는 봉암鳳岩에 있는데 봉명鳳鳴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지명地名을 따라 봉자鳳字를 썼고 봉명鳳鳴은 鳳凰이 높은 산에서 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봉암鳳岩은 진주晋州의 동쪽 함안咸安의 서쪽에 있는데 산은 천황산天皇山이고 시내는 파천巴川이다. 나무를 할 수 있고 고기를 잡을 만하여 은거隱居하는 사람이 거닐며 노닐 수 있어서 구씨具氏가 살고 있는데 증영의정贈領議政 능원부원군綾原府院君의 이름은 양揚으로 그 후손이다. 중세中世에 이름은 음崟이요 호號는 명곡明谷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좌승지左承旨가 되고 그 아들은 이름이 문유文游요 호號는 예곡禮谷이며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163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여 현풍玄風과 고령高靈의 현감縣監을 지내고 주례자집周禮子集을 간행刊行 하였다.
호號가 청원공淸原公은 숙종肅宗(1675~1720) 때 사람이다. 진주晋州 승산勝山에 퇴거退居하고 그 아들 정황鼎煌은 호號가 성암省岩이고 또 그 아들 원垣은 호號가 일남逸南으로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구求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유람遊覽하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이곳에 집터를 잡은 지 지금 7~8대를 지나 혼백魂魄을 묻은 묘가 다 봉암鳳岩의 근처近處에 있다. 그 후손后孫이 점점 번연蕃衍하여 한 마을에 같이 살고 있는데 선조先祖가 끼친 음덕蔭德이 장차 성대盛大할 것이다.
지금 그 후손后孫들이 서로 논의論議하여 말하기를 묘墓에는 반드시 시향時享을 받들어야 하고 시향時享을 받들려면 반드시 재사齋舍가 있어야 되는 것이 우리나라에 양반兩班의 족속族屬이 본디부터 그러한 것이다. 지금 일남공逸南公의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짓고자 하나 길이 멀어서 힘이 모자라는 사람은 이룰 수 없고 비록 지금 이룬다 하더라도 수호守護하기 어렵다. 만일에 자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지으면 때때로 공경恭敬히 사모思慕할 수 있고 돈독惇篤한 의誼을 베푸는데 쉽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다들 옳다고 하였다. 드디어 힘을 모아 재사齋舍를 지으니 이 재사齋舍는 무릇 4칸인데 제계齊戒하고 깨끗이 하여 종족宗族이 모일 장소가 생기게 되어 한 가지 일을 하여 두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
하루는 일남공逸南公의 칠대손七代孫인 회룡군會龍君이 나에게 글을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고 또 봉명鳳鳴의 뜻을 풀이하여 주기를 청請하여 내가 사양辭讓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말하기를 「봉의 성품性稟 됨이 오동梧桐나무가 아니면 살지 아니하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태평太平한 세상이 아니면 울지 않아서 옛 사람들이 세속世俗에서 뛰어난 현재賢才에 비유比喩하였다. 나는 구씨具氏의 선세先世에 현재賢才로 태평太平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 조정朝廷에 많았다고 들었다. 영의정공領議政公이 진심眞心으로 섬기는 충성忠誠이 왕王의 지위를 도운 것과 명곡공明谷公이 국가의 좋은 일을 천양闡揚¹⁾한 것과 예곡공禮谷公이 예禮로써 다스린 것 등은 다 봉鳳이 세상을 울린 것이다. 또 청원공淸原公이 벼슬을 그만 두고 은거隱居함과 성암공省岩公이 자기自己 스스로 자기 몸을 바로 잡은 것 등은 봉鳳이 머물 곳에 그쳤으니 천길이나 되는 높은 기상을 알 수 있다. 이 재사齋舍에 거처居處하는 구씨들은 선조先祖의 마음을 거울삼아 행行하고 선조의 학문을 배워 그 재주를 발휘發揮하고 그 덕德을 이루어 선조를 모범模範으로 삼으면 어찌 태평太平한 세대에 봉鳳이 울지 않겠는가.」하였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장卷阿章에서 「菶菶萋萋 오동나무가 무성하니 雝雝喈喈²⁾ 봉황새 소리 어울린다.」하였으니 나는 장차 부절符節³⁾이 부합符合하 듯이 봉鳳이 우는 세상을 기다리노니 각각 힘쓸지어다.
이 재사의 일을 주관한 사람은 회룡會龍과 회봉會鳳이고 그 역을 감독한 사람은 천회千會와 자옥滋玉이다.
무술戊戌(1958)년 11월 동지일에 의춘宜春(의령) 남계진南啓震 짓다.


【주석】
천양闡揚¹⁾ :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雝雝喈喈²⁾ : 원문에 『詩曰菶菶萋萋 雝雝喈』로 기록되어 있어 『喈』자 한자가 누락되어 첨가했다.
부절符節³⁾ : 돌이나 대나무, 옥 따위로 만든 물건에 글자를 새겨 다른 사람과 나눠 가졌다가 나중에 다시 맞추어 증거로 삼는 물건




봉명재상량문鳳鳴齋上樑文




小識 작은 기록
봉암鳳岩은 우리 능주구씨綾州具氏 세거지지世居之地이며 면대선조丆代先祖님의 유택幽宅이 계시는 곳입니다. 거금이백년전距今二百年前에 칠대조휘항호일남공七代祖諱恒号逸南公께서 진주승산晋州勝山으로부터 이거移居하셔 금일今日에 이르기까지 칠팔세七八世가 경과經過하는 동안 묘예苗裔가 수십호 되었습니다. 중다자손衆多子孫이 선산하先山下에 토착土着하고 있으나 조선祖先의 재각齋閣 한 칸 없음을 못내 송구하게 생각生覺하던 차次에 불초손회봉미력不肖孫會鳳微力이오나 부조父祖님의 숙원宿願이시던 제각祭閣 건립 사업事業을 추진推進하였습니다. 이는 강극岡極하신 조선祖先의 은혜恩惠를 보답함이요 우又는 매년일차원근자손每年一次遠近子孫이 일당一堂에 모여 종족宗族지의誼를 두터이 하는 것이 지당지사至當之事가 아니겠습니까. 십년전十年前에 건립된 재실이 지지부진으로 금일今日에 이르게 됨은 기간대동보오기정정其間大同譜誤記訂正을 위爲하여 수십차상경교척數十次上京交陟을 위한 난관難關도 겪었으며 황차설상가상況且雪上加霜으로 재각齋閣이 풍우風雨에 힘쓸이여 이삼차중수二三次重修하는 재력적財力的인 곤경困境도 불소不小하였습니다. 우리 자손子孫들은 이제부터 성집誠慹을 다하여 영구永久토록 재각齋閣을 보호保護합시다.
一九七二年(1972) 四月日(4월 어느 날) 七代孫(7대손) 회봉會鳳 謹職(삼가 적음)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