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동산리 초계변씨 영언재 永言齋

천부인권 2020. 4. 14. 06:00



2018.3.20. 진전면 동산리 초계변씨 영언재永言齋


진전면 동산리 산 1-1(팔의사로 511-28)에는 초계변씨草溪卞氏 증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 변진서卞振瑞를 추모하기 위하여 1943년 후손 변상태卞相泰, 변상구卞相龜 등이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00m를 표시하고 구글지도에는 「위도 35°07'01.2"N 경도 128°23'40.9"E」를 가리킨다.
영언재永言齋는 동산리東山里 입구 우측 언덕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재실齋室이 돋보이는 자리였겠으나 지금은 앞쪽에 큰 건물이 들어서 자칫하면 못보고 지나칠 수 있다. 담장이 높아 내부를 구경하기 쉽지 않아 외부에서 그 기록만 했다. 기회가 있다면 내부의 편액들도 구경할 것이다. 솟을대문에는 수덕문修德門이라 편액 했다.




동산리 초계변씨 수덕문修德門 편액





永言齋記
卞有二氏而其以密陽者實分 自草溪所鼻之祖共 惟我文烈公 草溪氏遍布南服 而以居於晋州之良田者 爲宗密陽氏 分處南北 而以居於 畿輔之富平者 爲宗兩宗父老於 其百世之親 一本之誼坐 風氣之阻絶 路道之綿遼 雖未克數 數焉有所講修 而有時相値泯然 無間依戀不忍相捨 此其間消息載 在往牒殘留遺什 此乃吾晋富間 故實昭昭不絶焉 而隨世益遷漸欲 卽於黯眛不章者 余以繼富平之 故恒用自訟 有若譴何之逼於頭上者 己非一日 癸未冬月草溪之相泰相龜 從胞兩君 遶繞千里間 關戎馬來 見吾於先人之故廬 又皆良田之尤秀者 所以鎭撫 余不肖者 甚盛因以其 爲高祖考府君 贈通訓大夫司僕寺正 諱振瑞之 新建墳庵永言齋 記文見囑 則余之感動于 中者多矣爲 可以辭哉 府君以英祖庚戌生于 門道山下及 其壽終安葬于 食峰山負良之原跡 其生平最其行蹟 以早孤孱産力田資活 亦不廢講讀 有子十人一秉義訓咸至成立 自時厥後 子姓蕃衍門戶大昌 良田之草溪氏文烈 以後直旁忠孝義烈往往 有作輝映人耳目 故己久矣顧於 其繁昌之道 府君初載危乎艱哉 未免有中微之歎 迺由府君躕躇 以就之綿廷 以引之芊眠 以敷之密勿 以嚴之無可復容 誰何俾良田一區宛然 有卞氏一族金湯之觀 宜其墓於斯而有俎豆馨香之所於其下也 是齋之構 豈徒然哉 是齋之名以永言 亦豈無謂哉 鳴呼懿矣 若夫齋位置之玅 結構之善 前後旁近松篁水泉之美凡一至 是鄕者將無不目 而豔之非余所宜番番也 余之幸得托名於是齋也 則其趣遠矣 將世誼是重區區 文辭之末 其不足深論也夫
甲申首夏密陽后人 卞榮晩撰


영언재기 永言齋記
변씨卞氏는 관향貫鄕을 달리하는 두 가문家門이 있는데 밀양을 관향貫鄕으로 쓰는 사람은 실實로 초계변씨草溪卞氏의 시조始祖인 문렬공文烈公으로부터 분적分籍 되었다. 초계변씨草溪卞氏는 영남嶺南에 두루 분포되어 진주晋州의 양전良田에 사는 사람들이 종주宗主가 되고 밀양변씨密陽卞氏는 남북南北에 분포되어 경기도京畿道 부평富平에 사는 사람들이 종주宗主가 되었다.
두 문중의 부로父老들이 백세百世에 친親하게 지낸 것은 같은 뿌리의 정의情誼¹⁾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속風俗과 환경環境이 다르고 길이 멀어서 자주 만나지 못하였지만 때때로 강수講修²⁾할 때에는 서로 만나면 혼연渾然³⁾하여 조금도 서로 틈이 없이 인정人情에 끌려 차마 헤어지지 못하곤 하였다. 그 동안의 서로의 소식消息은 내왕來往한 편지片紙에 실려 있고 남아 있는 글들에 있다. 이는 곧 진주晋州와 부평간富平間의 참된 실상實像을 밝힘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져 감에 따라 어두워져서 빛을 잃으려고 하니 나는 부평富平의 후손后孫으로 항상恒常 자책自責을 하면서 선조先祖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과 같은 것이 오래 되었다.
계미癸未(1943)년 겨울에 초계변씨草溪卞氏의 상태相泰 상구相龜 종반간從班間⁴⁾이 천리의 험한 길을 말을 타고 내가 살고 있는 선인先人의 옛 집으로 찾아왔다. 이 두 사람은 다 양전良田의 훌륭한 인물인데 나 같이 불초不肖한 사람에게 의론議論을 하러 왔으니 매우 장壯하도다. 이 두 분은 그 고조高祖이신 증통훈대부사복시정贈通訓大夫司僕寺正은 이름이 진서振瑞로 분암墳庵인 영언재永言齋를 새로 짓고 그 기문記文을 촉탁囑託받아 내 마음속에 감동感動되는 바가 크니 내 어찌 사양辭讓하겠는가. 부군府君은 영조英祖 경술庚戌(1730)년에 문도산門道山 아래에서 태어나서 천수天壽를 다하시고 돌아가시자 식봉산食峰山 량좌良坐의 언덕에 장례葬禮하였다. 그 평생平生에 가장 뛰어난 행적行蹟을 기록記錄한다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살림은 가난하여 힘껏 농사農事를 지어 살림살이에 도움을 받는 한편 독서讀書를 폐廢하지 아니하셨다. 아들 열을 두었는데 한결같이 의義를 가르쳐 다 성취成就시켰다.
이후로 후손이 번성繁盛하여 문호門戶가 크게 창성하였다. 그 번창한 도道를 돌이켜 보건대 부군府君이 초년初年에 외롭고 어려웠으며 중년中年에는 쇠미衰微⁵⁾한 탄식歎息을 면免할 수 없었지만 부군府君으로부터는 망설이면서도 나아갔고 길이 뻗어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引導하였으며 활달活達하여 뜻을 펴고 노력努力하면서도 엄숙嚴肅하여 누구에게든지 위용威容을 갖추어 양전일구良田一區가 완연宛然히 변씨일족卞氏一族의 튼튼한 성城으로 보이니 여기에 선대의 묘墓가 있고 묘墓가 있으니 시향時享을 받들 장소場所가 있음이 마땅하여 이 재실을 지었으니 어찌 부질없는 일이겠는가. 또 이 재사의 이름을 영언永言이라 한 것 또한 어찌 뜻이 없겠는가.
아아! 아름답도다 재사齋舍의 위치位置의 신묘神妙함과 결구結構⁶⁾의 훌륭함과 주위周圍의 송죽松竹과 경치景致의 아름다움은 한번 와본 사람은 아름답다고 지목指目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번번이 말할 바가 아니다. 나의 다행多幸한 것은 이 재사齋舍에 이름을 가탁假託⁷⁾하였으니 그 뜻이 위대偉大하다. 앞으로 세의世誼가 중重하여 질것이니 하찮은 문사文辭의 값어치는 깊이 논論할 바가 아니다.
갑신甲申(1944)년 여름에 밀양 후인 변영만卞榮晩⁸⁾은 짓다.


【주석】
정의情誼¹⁾ :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情
강수講修²⁾ : 익히고 닦다.
혼연渾然³⁾ : 차별이 없는 모양 또한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고르게
종반간從班間⁴⁾ : 4촌간四寸間을 가리키는 말
쇠미衰微⁵⁾ : 쇠衰하여 잔약孱弱하고 희미하여 짐
결구結構⁶⁾ : 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든 것을 의미한다.
가탁假託⁷⁾ : 다른 사실을 비교하여 말함.
변영만卞榮晩⁸⁾ : 변영만卞榮晩(1889~1954)은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 출신의 법률가이다. 그의 형제 변영태卞榮泰·변영로卞榮魯와 함께 ‘한국의 3소三蘇·변씨삼절卞氏三絶·삼변三卞’으로 불렸다. 산강재山康齋·삼청三淸·곡명曲明·백민거사白旻居士 등의 호를 사용 했고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동국대학교·서울대학교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52년에는 사법부 법전편찬위원을 지냈다. 1954년 서울 미아리에서 눈을 감았고, 묘소는 고강동 63-7번지 밀양변씨 선산에 있다.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