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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면 시락리 안동권씨 요산재 樂山齋

천부인권 2020. 4. 17. 10:25

 

2020.4.14. 진전면 시락리 안동권씨 요산재 樂山齋  대문

 

진전면 시락리 528-3(시락본동길 132-129)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 권필래權弼來弼來와 그 아들 증참의贈參議 권중억權重億 부자父子를 기리기 위하여 을해乙亥(1935)년 건립한 요산재樂山齋가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 고도계가 해발 28m를 표시하고 구글지도는 「위도 35°04'44.5"N 경도 128°26'01.5"E」를 가리킨다.
시락리時樂里는 작은 어촌마을이라 집의 수에 비해 4개나 되는 재실이 있음에 놀라웠다.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요산재樂山齋는 마을과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홀로 우뚝한 듯 보이는데 흙돌 담장의 일부가 무너져 보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솟을삼문에는 편액이 없고 본당本堂에는 요산재樂山齋라 편액 했고 4칸의 집에는 좌우左右에 방房을 넣었고 재실을 중심으로 우측右側에는 산천운우山川雲雨라 이름했고 좌측左側에는 산해숭심山海崇深이라 했는 듯하다. 마루에는 요산재기樂山齋記와 요산재상량문樂山齋上樑文이 걸려 있다.

 

 

2020.4.14. 진전면 시락리 안동권씨 요산재 樂山齋  무너진 담장 너머에서

 

2020.4.14. 진전면 시락리 안동권씨 요산재 樂山齋  풍경

 

2 020.4.14. 진전면 시락리 안동권씨 요산재 樂山齋  -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이 쓴 요산재樂山齋 편액

 

 

樂山齋記
舊鎭海竹谷之南未十里而有時樂山吾權氏 贈僕正諱弼來 贈參議諱重億父子二公之藏託焉 後孫 以其無齊明之所 各捐力以殖 今年春創建五間齋於墓下 取山名而扁以樂山 其始也嗣孫五成因 其 族大父鶴煕 徵梁頌於 不佞不佞辭以未能 則旣落 又以楣記固請不可以又辭 乃受二公狀錄而讀之  二公俱以孝友文學著名士友間 不佞爲之改容 而記之曰 人有百行孝友爲本 苟能孝友 則道漸生矣  人生世間不可不學 不學則無以知人道矣 然則孝友文學是人之最 爲要切而不容暫廢者也 二公之 以是而父傳子受者足 可爲百世之靑氈矣乎 今天下倫理毁 而父子兄弟爲路人矣 舊籍廢而孔孟程朱 爲棄人矣 於是乎見二公之傳受 令人有感歎而 不能已者也今僉宗氏能辦置屢世未遑之丙舍可 見孝思之摯矣旣有此孝思則以二公傳受之孝友 文學各自勉勵期有以不墜先德而無爲世人之同 流此眞孝之大者豈以區區儀物之備爲足云爾詩曰無念爾祖聿修厥德僉宗氏念乎哉若夫殖物建 舍之始終致力玄孫錫仁爲最云
旃蒙大淵獻(乙亥)之無射月(九月)宗後生 權載奎 謹記

 

요산재기 樂山齋記
옛 진해鎭海 죽곡竹谷에서 남쪽으로 10리가 못된 곳에 있는 시락산時樂山에는 우리 권씨權氏인 사복사정司僕寺正의 증직贈職을 받은 이름이 필래弼來와 참의參議 증직贈職을 받은 이름 중억重億 부자父子 2공公의 무덤을 의탁依託하였다. 후손後孫들이 깨끗이 제계齊戒할 장소場所가 없어서 각각各各 능력能力에 따라 출연出捐한 금액金額을 불려 금년今年 봄에 오간재사五間齋舍를 묘墓 아래에 창건創建하고 산의 이름을 따서 요산樂山이라고 편액扁額하였다.
그 처음에 사손嗣孫 오성五成이 그 일가 어른인 학희鶴煕를 통通하여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상량문上樑文을 요구하여 사양辭讓하여도 되지 않았다. 지금 낙성洛城을 하고 또 기문記文을 굳이 청請하여 또 사양辭讓할 수 없어서 2공公의 행록行錄을 받아 읽어보니 2공公이 다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사우간士友間에 이름이 드러났다. 보잘 것 없는 내가 몸을 단정히 하여 기문記文을 짓기를 사람에게는 백행百行이 있으나 효우孝友가 근본根本이 되므로 진실眞實로 효우孝友를 하면은 인간人間의 도리가 효우孝友에서 나온다. 사람이 세상世上에 태어나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배우지 않으면 금수禽獸나 다름없이 사람의 도리를 알 수 없다. 그른즉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은 사람에게 가장 긴요緊要하므로 잠시暫時라도 그만둬서는 안 된다. 2공公은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을 아버지는 전傳하고 아들이 받은 것은 백세百世에 가업家業이 될 것이다. 지금 천하天下에 윤리倫理가 무너져 부자형제父子兄弟가 길가는 사람처럼 남이 되었다. 또 옛 경전經傳을 배우지 아니함으로 공자孔子 맹자孟子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에 2공二公이 전傳하고 받은 것을 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이 그칠 수 없다.
지금 모든 종씨宗氏들이 여러 대代에 이루지 못하였던 재사齋舍를 이룬 것은 효사孝思의 지극至極함을 알 수 있다. 이미 효사孝思가 있으니 2공二公이 전傳하고 받은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에 각자 힘써서 선덕先德을 떨어뜨리지 않기를 기약期約한다면 말세末世의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진실眞實로 효孝의 큰 것이니 어찌 구구區區한 의물儀物을 갖추는 것으로 만족滿足하겠는가.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장文王章에서 「그대의 조상을 아니 잊으려거든 항상 덕을 닦아 키워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든 종씨宗氏들은 생각할지어다. 재물財物을 불리고 재사齋舍를 창건創建하는 역사役事에 현손玄孫 석인錫仁이 가장 힘을 썼다고 하더라.
을해乙亥(1935)년 9월 종후생宗後生 권재규權載奎 삼가 기록하다.

 

 

 

樂山齋上樑文
欝彼佳城 賸知山水精英之聚 稽諸舊典 合有春秋 澆掃之規篤 孝思之無疆 喜新成之有日 竊念安東權氏 寔惟南服名家 源遠流長 德降太師之邁種 漑根食實 澤垂忠憲之覃仁 自軍監始奠嘉岐 閥閱推於鄕土 至副尉中移鎭海 衣冠成列於藝林 有若贈司僕寺正公 載振家聲 克持雅望事親志養 至情已發於髫齡 爲已工深 眞趣不專於章句 視儻來而何物 歸歟澗陸之考槃 覬有助於斯文 蔚甭英髦之挾笈 爰曁贈吏曹參議公 聰明夙詣 豈弟令儀契心坏樸之編 何必多書盡讀 常目屛障之訓 無非進德是資 爲祭寘田 仂用無愆於尊祖 觧衣與客 義高罕聞於急人 繄玆有作有承咸曰 是爺是子 想當日仰喬俯梓 聲猷久擅於一方 逮後孫保艾衍蕃 貤贈上延於三世 由是某邱某樹 擧存閭里之敬恭 矧伊若斧若堂 敢緩封塋之表護 卽樂浦兩墳之下 麓宜思亭一構之新圖 立契殖貲 始積闔宗之心若 諏周敦事 終多賢嗣之幹勤 寫地材而方斵隨加 大者杗細者桷 考宮制而興居咸適 後爲室前爲堂 廚庖櫃皿之苟完 守隷園莊之悉備 髦梗同歸古禮 嗟今世之謂何 獺豺猶有良知 可以人而忍此 誠深追遠 嘉君獨免於俗流 戒切忝生 宜爾重恢於世業 乍停郢斵 請贊巴歈
兒郞偉抛梁東 古城山色翠連空 時登來往無今昔 悄憶當年畵輞翁
兒郞偉抛梁南 一控灣回海色涵 天際陰雲愁滿目 望中仙嶠幾層嵐
兒郞偉抛梁西 轎山落照掛林低 有懷念昔自明發 未繫春暉心更悽
兒郞偉抛梁北 虎踞山巖臨屋極 只被堪興喜說誇 奇砂配與靑龍直
兒郞偉抛梁上 人家有作思初剏 善餘必慶竟難誣 所賴天心終古亮
兒郞偉抛梁下 俯瞰逶迆開大野 但願時和百穀登 年年烝畀賡豳雅
伏願上梁之後 墓道淸夷 地靈拱佑 廢興衰盛 縱必復於天行 當構增修 乃實資於人事 俾樹木猶爲愛惜 誡楸檟而勿傷 推墓墟必有興哀 奉苾芬而加飭
旃蒙大淵獻中春之日 聞韶 金榥 撰

 

요산재상량문(樂山齋上樑文)
무성하도다 저 아름다운 고을은 산과 물에 정령이 모였음을 알고도 남겠네. 옛 법도를 계고해보니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는 돈독한 규범에 합당함이 있으므로 효성과 사모하는 마음이 끝이 없으니 새로운 일이 이루어지는 기쁜 날이 있으리라. 생각건대 안동 권씨는 영남의 이름난 가문으로 그 뿌리가 깊으며 덕이 태사공(太師公)에서 심어져 내려와 그 뿌리에 물을 넉넉히 대니 은택이 충헌공(忠憲公)의 어진 덕으로 채워지고 군자감(軍資監) 공에서부터 비로소 아름다운 제전이 베풀어져 고을의 벌렬(閥閱) 집안이 되었다. 부위(副尉)에 이르러 처음 진해로 이사하여 예림(藝林)에 의관이 줄지어 벌어졌다. 또 증사복시정공(贈司僕寺正公)에 이르러 온 고을에 집안을 알렸고 부모봉양의 아름다운 명망을 이루었다. 지극한 정이 이미 어린아이에게서 드러났으니 그 공이 이미 깊어 참된 취지가 문장에 오르지 않겠는가. 이 집안에 문득 내려온 것이겠는가. 산수 사이에 귀의하여 은거하였으니 어찌 유학의 도움을 바랬겠는가. 무성한 저 젊은 영재들이 모여든 것일 뿐이다. 증이조참의공(贈吏曹參議公)은 총명하고 일찍 깨쳤으니 어찌 올바른 행실과 마음에 적합한 타고난 아름다운 글을 기다리겠는가. 하필 날마다 독서를 하고 항상 눈으로 병풍에 새긴 잠언을 보며 덕으로 나아감의 실재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제사를 위한 밭을 마련하고 선조의 제사에 힘을 다하여 느슨함이 없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빈객을 맞이하니 의리의 높은 것으로 사람을 급하게 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처럼 선대는 덕을 쌓고 후대는 이어가니 모두들 그 할아비에 그 자손이라고 한다. 당일에 높은 교목과 가래나무를 올려보고 굽어볼 것을 생각하니 그 명성이 온 고을에 오래도록 높을 것이다. 자손들이 영원히 번성할 것이며 위로 삼대를 추증할 것이니 이로부터 어느 언덕의 어느 나무는 그 고을이 받들어 공경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공역을 하여 당우(堂宇)를 지었으니 감히 선영을 보호하는 일을 게을리 하겠는가. 시락포의 두 분묘 아래 산록에 선조를 생각하는 정자 한 채가 새롭게 도모하여 계를 결성하고 재물을 모으니 합종(합종;가문)의 마음이 쌓여 도모하고 주선하여 일을 돈독히 하니 끝내 많은 어진 후손들이 힘을 다해 주간하고 땅에 재료를 옮기고 깎고 다듬으니 큰 것은 들보고 작은 것은 석가래니 석까래니 집의 제도를 살펴 기거할 곳을 살피니 모두 적합하다. 뒤쪽은 방이 되고 앞은 마루가 되며 주방과 푸줏간과 그릇 넣는 궤가 모두 완비되었고 원장(園莊)을 지킬 사람들까지 다 갖추어졌으니 모경(髦梗)이 옛 예법에 모두 맞게 되었다. 아아 지금 세상에 이를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다만 수달이나 승냥이도 제사를 드리는 뜻을 진정으로 알겠으니 사람된 자로서 이를 참을 것인가. 진실로 깊이 추원하니 조상을 소홀히 하는 시류에서 홀로 벗어나니 못난 사람들에게 절실한 경계가 되도다. 의당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잠시 나무 다듬는 일을 멈추고 찬양하는 노래 한곡을 청하노라.
어랑차 들보 동으로 던져라. 고성(古城)의 푸른 산빛 하늘에 닿았으니, 때맞게 오르내림에 옛과 지금 따로 없네 아아 당년의 화망옹(畵輞翁)을 생각하네
어랑차 들보 남으로 던져라. 온통 휘감긴 저 물굽이 바다 빛인데 하늘 끝 먹구름 수심 가득하지만 멀리 저 신선세계 남기(嵐氣)가 몇 겹인가.
어랑차 들보 서쪽으로 던져라. 높은 산에 걸린 노을 숲에 나직한데 예부터 스스로 덕을 밝힐 뜻 있었지만 봄이 와도 그 약속 이루지 못했으니 처량해지네
어랑차 들보 북으로 던져라. 호거산 바위 북극성에 닿았으니 다만 기쁨 일어나 자랑할 만하네 그 중의 기사괴석(奇砂怪石)이 청룡등과 더불어 곧네
어랑차 들보 위로 던져라. 집집마다 사모하는 정으로 처음 지었으니 그 착한 마음 필경 속이기 힘드리라 하늘이 내리는 마음이 영원히 밝으리.
어랑차 들보 아래로 던져라. 구불구불 넓은 들 바라보며 다만 오곡백과가 시절에 맞게 자라서 해마다 좋은 술 빚어 아름다운 제사 이어가기 바라네
엎드려 바라건대 이 들보올린 후에 묘도(墓道)는 맑고 평탄하며 땅의 신령이 도우시어 응망성쇠가 비록 하늘의 운에 달였다고 하지만 이 집은 더해지고 수선해져서 사람의 떳떳한 윤리를 드러내는 실질적 자료가 되게하소서. 숲과 나무도 비호하여 아끼게 하고 묘소의 소나무도 상하지 말게 하여 묘의 터에 가면 반드시 슬픔이 일어 제사를 받드는데 신칙하게 하소서.
전몽(旃蒙;乙) 대연헌(大淵獻;亥) 중춘일(中春日) 문소(聞韶) 김황(金榥) 짓다.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쓴 산천운우山川雲雨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쓴 산해숭심山海崇深

 

 

 

 

요산재樂山齋 대련對聯
新苽報熟櫻桃慕 새 참외 익어 갚으려니 앵두와 복숭아도 원하네.
節屆端陽感舊思  단오절이 돌아오니 옛 느낌 생각나네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