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4. 진전면 시락리 김해김씨 세전사世奠祠와 이요정二樂亭 또는 추원재追遠齋 전경
진전면 시락리 475(시락본동길 82)에는 세전사世奠祠와 추원재追遠齋 또는 이요정二樂亭이라 불리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사당祠堂과 재실齋室이 있는 곳이다. 사당祠堂인 세전사世奠祠 앞에는 근성문謹省門이라 편액한 솟을삼문이 있고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이요정二樂亭이라는 편액이 걸린 재실齋室 앞 솟을대문에는 첨앙문瞻仰門이라 편액 했다. 이 두 건물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건설됐으며 추원재追遠齋 또는 이요정二樂亭은 제숙齋宿의 장소로 사용한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16m를 표시하고 「위도 35°04'29"N 경도 128°26'11"E」를 가리킨다.
추원재追遠齋 또는 이요정二樂亭에는 추원재기追遠齋記 추원재원운追遠齋原韻 근차추원원운謹次追遠齋韻 이요정중건기二樂亭重建記 이요정중건상량문二樂亭重建上樑文 이요정중건운二樂亭重建韻 근차이요정운謹次二樂亭韻 시락당자서時樂堂自序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해문 되지 못한 편액들은 시간을 두고 하나씩 글을 옮길 것이다.
2020.4.14. 진전면 시락리 김해김씨 이요정二樂亭 또는 추원재追遠齋 전경
시락리 김해김씨 이요정二樂亭 또는 추원재追遠齋 대문 첨앙문瞻仰門 편액
시락리 김해김씨 이요정二樂亭 또는 추원재追遠齋 마당
추원재追遠齋 편액
이요정二樂亭 편액
追遠齋記
洛江之右牛山之西巋然有一閣 故通仕郎時樂堂 金公之楸齋也 山聳水廻松杉蒼鬱雲烟淡薄宜乎 致齋之有其所也 祀者所以報本也 子姓之於祖先 氣血相貰典 謀相襲其於 雨露霜雪之際 孝子慈孫之感 慕悽悵有難裁仰 則歲祀之因情 起禮不得不爾也 公之沒歷百有餘 祠齋庖之所 迄今未達雲晜之齎志 永歎厥亦久矣 迺於壬子歲合謀輪誠 翌年癸丑春重新 二樂亭於先墓傍古基 而增廣之棟宇 翼翼輪奧秩秩用 一間揭追遠齋之額 而兼之以歲祀 齊宿之所於是乎 山益高水益淸 公之靈洋洋如在於苾芬 俎豆之間 而薦裸興俯聿中儀式 金氏之孝思可謂至矣 追遠之義 其志徽哉 追遠者何也 誠之謂也 一誠之至 無遠不屆所 以交神明照心德也 如或不然雖粢盛豊潔牲酒肥香 而神不享焉 則追遠之義缺矣 故君子先誠 而後物貴德 而賤貨以致 其極焉余雖不能及 公之世槩 以南服之遺傳 則公韜光晦跡無意於 進取性以道 自樂囂囂然若不見 是而無悶焉 無愧爲龜軒公之後孫也 公之宋以受乎 家庭者旣如此而貽乎 來許者示如此 故錫頗之慶 繁衍昌大 而鴻碩間作往往聞世于 此無非公之德之所 以克亨無競也 凡爲公後仍者 克體公之心 克修公之德 勿替相引 以繩厥緖 則其於亢宗壽後可以有辭 而追遠之義 不歸於虛矣 時昌熙甲甫幷 公之肖孫 而跡脩程要余置一言 以爲識不 可以不文辭於 是以爲之記用勉于 金氏之來孝焉
乙丑三月日 河東 鄭煥喆 記
추원재기 追遠齋記
낙동강의 우측인 우산牛山¹⁾의 서쪽에 우뚝 솟은 재각齋閣이 있는데 이는 옛 통사랑通仕郎²⁾ 시락당時樂堂 김공金公의 제각祭閣이다. 산은 우뚝 솟았고 물은 주위周圍를 두르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구름과 안개가 담박淡薄³⁾하니 마땅히 재사齋舍를 지을만한 곳이다. 제사祭祀는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는 소행所行이다. 자손子孫은 선조先祖에 있어서 기혈氣血을 서로 주고받으며 모습을 서로 이어 비나 눈이 오거나 이슬과 서리가 내릴 즈음에는 앙제仰制하기 어려워 해마다 시향時享을 받드는데 시향時享은 정情으로 인因하여 예禮가 된 것이므로 예禮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공公이 돌아 가신지 백여년百餘年을 지났으나 제계齊戒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할 장소場所를 지금까지 마련하지 못하여 후손後孫들의 뜻을 가지고 탄식歎息한지 오래되었다. 임자壬子(1972)년에 모의謀議를 합合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익년翌年 계축癸丑(1973)년 봄에 선대先代의 묘 옆에 있는 옛터에 이락정二樂亭을 옛 보다 크게 중건重建하니 동우棟宇가 성대盛大하고 미려美麗함이 질서秩序가 정연整然하고 한 간間에 추원재追遠齋라는 편액扁額을 걸고 세사歲祀에 제계齊戒하고 유숙留宿할 장소場所를 겸兼하였다. 이에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아 공公의 령靈이 양양洋洋히 제수祭需 사이에 계시는 것 같고 제사祭祀를 받드는 의식儀式을 베풀 장소場所로 알맞아 김씨金氏의 효사孝思가 지극至極하다고 이를만하다. 추원追遠이란 그 뜻이 아름답다. 추원追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성精誠을 말한다. 정성精誠이 지극至極하면은 아무리 멀어도 신神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서 신명神明을 사귀고 심덕心德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혹 그렇지 않으면 비록 제수祭需가 풍성豊盛하고 깨끗하며 희생犧牲⁴⁾이 살찌고 제주祭酒가 향기香氣로와도 귀신鬼神은 흠향歆享하지 않을 것이며 귀신鬼神이 흠향歆享하지 않으면 추모追慕하는 뜻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정성精誠을 먼저하고 물질物質을 뒤로하며 덕德을 귀貴히 여기고 재화財貨를 천賤하게 여기어 그 지극至極함을 이루는 것이다. 내가 비록 공公의 세대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남쪽 땅에 전傳하여 오는 말에 의依하면 공公은 재덕才德과 공적功績을 감추고 진취進取에는 뜻이 없으며 성품性稟은 도道로서 스스로 즐거워하며 자득自得하여 근심이 없는 듯하였다. 만약萬若 이를 보고 번민煩悶하는 사람은 구헌공龜軒公의 후손后孫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공公이 가정家庭으로부터 받은 것이 이미 이와 같고 후손後孫들에게 물려줄 것이 이와 같으므로 효자孝子는 효자孝子를 낳아 이어가는 경사慶事가 번연창대繁衍昌大⁴⁾하고 큰 학자學者가 간간間間히 태어나서 혹 이 세상에 이름이 드러난 것은 공의 덕이 끊임없이 누리게 된 까닭이다. 무릇 공公의 후손后孫 된 사람은 공公의 마음을 본받고 공公의 덕을 닦아 쇠衰하지 아니하고 서업緖業을 서로 이어가며 종족宗族을 비호庇護하고 후손後孫이 오래갈 구실이 있게 되어 추원追遠 하는 뜻이 헛된 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시창時昌과 희갑熙甲군은 다 공公의 초손肖孫⁴⁾으로 먼 길을 와서 나의 한 말로 기문記文을 지어 주기로 요구要求하여 불문不文이라고 사양辭讓할 수 없어서 이로써 기문記文을 삼으니 김씨金氏 후손들은 효도孝道에 힘쓸지어다.
을축乙丑(1985) 3월에 하동河東 정환철鄭煥喆이 짓다.
【주석】
우산牛山¹⁾ : 진동면 신기리 산 29번지에 있는 해발 230m 정도의 산으로 옛 진해현鎭海縣이 위치한 고현리古縣里의 진산鎭山이다.
통사랑通仕郎²⁾ : 조선시대 문신 정8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사록(司錄)·설경(說經)·저작(著作)·대교(待敎)·학정(學正)·부직장(副直長)·부검·좌시직(左侍直)·우시직·사맹(司猛)·수문장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담박淡薄³⁾ : 구름 따위가 엷게 있는 모양
희생犧牲⁴⁾ : 제물로 쓰는 소, 양, 돼지, 개 따위의 짐승. 색이 순수한 소를 ‘희(犧)’라 하고 길함을 얻지 못해 죽이는 것을 ‘생(牲)’이라 한다.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재물, 또는 권리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고사성어대사전>
번연창대繁衍昌大⁴⁾ : 번성하여 뻗어 나아가 크게 창성昌盛함.
초손肖孫⁴⁾ : 손자孫子의 다른 말
二樂亭重建記
金海金氏氏族蕃 遍於郡國 殆不知其數 而其同出於駕洛璿 興武祚胤則一也 傳 曰德厚者 流光 其不驗於此乎 當崇明之際 有通仕郎諱聲生 自咸安 移奠于鎭海之時樂洞 因號時樂堂 取四時之樂 而有詩若序以自志 又別置一亭 扁曰二樂 以其山水俱美 有契乎仁智之趣也 公 歿而子孫 仍世居其里 而亭之廢則已久矣 往在壬子年間 後孫 相與發議 建于故墟 今且五十餘年 爲其制度湫隘 勢不能維支久遠 復謀抜力以重新之 始役於甲辰之夏 而明年乃訖 既成 後孫尙俊 與從後孫之在咸安者尙純 同來過余涉川別莊 請以爲記 且示公遺詩文 及行錄爲徵 觀公平生 行誼自勅 恬淡自守 不慕榮利 隱居海濱 杜門求志 以自樂於日用 而後孫之遵奉遺志 世督追慕 式至勿替 又從以表厥閭里 不忘桑梓之敬恭 是固在所讚歎 而見之文者 第有一可言者 樂之爲言 驩洽之謂 而常主乎發散在外 若夫樂水樂山之樂 乃爲嗜好之自內 而其字音辭旨 俱不相襲 是疑若有着互然者然 余復窃思 以爲 惟其嗜好之得宜 所以驩洽之常足 亦惟其自樂之工深 所以玩物而情適 如是則其事 未始不相因 而其義 亦可以相備而相發也 仰又推之 孟夫子 嘗有二樂之語 而以仰不愧天 俯不怍人 爲二樂 程子解之 以爲是 克己之效 如公之持心修身 要亦無愧乎此者 亦安知夫公當日命名之初 隱然有取於斯之一義與 請並記其說 以質于知者云
檀紀四千二百九十八年乙巳 菊黃節 上浣 義城 金榥 記
이요정중건기 二樂亭重建記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씨족氏族이 온 나라에 두루 번성蕃盛하여 그 수數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가락국駕洛國의 왕족王族인 흥무왕興武王의 맏아들에서 비롯되었다. 곡량전穀梁傳에서 「덕德이 두터우면 그 영광榮光이 멀리까지 미친다.[德厚者 流光]」라 한 것을 여기에서 징험徵驗하지 않았겠는가.
숭정崇禎¹⁾ 년간年間에 통사랑通仕郎 이던 이름이 성생聲生인 분이 함안咸安으로부터 진해鎭海의 시락동時樂洞으로 이사移徙 와서 터를 잡았으므로 호號를 시락당時樂堂으로 하여 사시四時²⁾의 낙樂을 취하려 시서時序³⁾로 자기의 뜻을 폈다.
또 따로 한 정자亭子를 두고 이요二樂로 편액扁額하고 그 산수가 아름다움을 갖추어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⁴⁾의 뜻을 합한 것이다. 공公이 돌아가시자 자손들이 그 마을에 대代를 이어 살았는데 정자亭子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임자壬子(1912)년간에 후손들이 서로 옛터에 정자亭子를 중건하기로 발의發議하여 지금 50여년이 되었는데 그 제도制度가 땅이 낮고 좁아 형세形勢가 유지維持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되어 다시 힘을 내어 중건하기로 도모圖謀하여 갑진甲辰(1964)년 여름에 비로소 착공着工하여 그 익년翌年에 준공竣工하게 되었다.
후손 상준尙俊이 종후손從後孫으로 함안에 사는 상순尙純과 함께 나의 섭천별장涉川別莊으로 찾아와서 기문記文을 청請하였다.
또 공公이 남긴 시문詩文과 행록行錄을 보여 주어 공公의 평생의 행의行誼가 스스로 명리名利를 탐내는 마음이 없어 담박淡泊함에 힘쓰고 영리榮利를 사모思慕하지 않고 바닷가에 은거隱居하면서 두문불출杜門不出⁵⁾하고 뜻을 구求하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스스로 즐거워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후손들이 공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따르면서 대대로 추모追慕에 힘써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또 마을에 비碑를 세워 선조先祖의 유지遺址에 공경恭敬함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眞實로 찬양讚揚하고 감탄感歎하는 바이고 그 글 속에 나타난 것을 첫째로 말할 것은 기뻐하여 화합和合하는 것이니 이는 항상 밖으로 발산發散한 것을 주主로 한 것이고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요樂은 안으로부터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이니 그 글자의 음音과 말의 뜻이 서로 일치一致하지 않는 것은 의심疑心컨대 차이差異가 있어서 서로가 지적指摘하는 바가 다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내가 다시 홀로 생각해보니 오직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은 마땅함을 얻은 것이고 기뻐하여 화합和合하는 것은 항상 만족滿足한 바이다. 또한 오직 스스로 즐거워하는 공부工夫가 깊으면 사물事物을 완미玩味하는 정情이 적합適合하니 이와 같으면 그 일이 처음부터 낙樂과 요樂가 서로 작용作用하지 아니함이 없고 그 뜻이 서로 갖추어 발發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맹자孟子가 일찍 말한 이요二樂⁶⁾의 말을 미루어 본다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두 번째 낙樂으로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해석解釋하기를 이것이 「사욕私慾을 누르고 예절禮節을 쫓게 함(克己復禮)의 효험效驗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공公이 마음을 억누르고 몸을 닦은 요지要旨 또한 여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니 이 또한 어찌 무릇 공公이 당시當時에 이요二樂이라고 명명命名한 시초始初도 은연隱然히 이 한뜻에 부침이 아니겠는가.
공자孔子가 말한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知者는 요수樂水한다.」는 것과 맹자孟子가 말한 「앙불괴천仰不愧天하고 부부작인俯不怍人」의 두 설說을 아울러 기록記錄하니 아는 사람은 판단判斷을 결정決定하라
을사乙巳(1965)년 9월 상순에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짓다.
【주석】
숭정崇禎¹⁾ : 명明나라 의종毅宗의 연호年號
사시四時²⁾ :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아울러 이르는 말
시서時序³⁾ : 계절이 지나는 차례와 질서
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⁴⁾ : “樂山樂水”는 子曰 「知者樂水 仁者藥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라 한데서 나온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나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사나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두문불출杜門不出⁵⁾ :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않음을 일컫는 고사성어로 춘추시대 좌구명의 <국어國語>와 전한 사마천 <사기史記>의 상군열전商君列傳,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등의 역사서에 인용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다음 백과사전>
이요二樂⁶⁾ : 「父母俱存 兄弟無故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晨於人二樂也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며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서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 즐거움이다.」
이요정중건상량문 二樂亭重建上樑文
시락당자서 時樂堂自序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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