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성주사 창건기로 본 믿기 어려운 역사 이야기

천부인권 2020. 6. 4. 06:08

2020.6.1. 장복산 능선에서 본 성주사 곰절

 

이 사진을 찍은 곳은 웅산에서 안민고개로 내려오는 능선으로 높이는 해발 452m, 위도 35°09'58.5"N 경도 128°42'48"E의 위치이다. 아래의 2012년 사진과 비교해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변해가는 성주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12.1.5. 장복산 능선에서 본 성주사 곰절

성주사聖住寺의 또 다른 이름이 웅신사熊神寺이다. ‘성인이 머무르는 사찰’이란 의미의 성주사聖住寺와 ‘곰의 신령이 있는 절집’이란 의미의 웅신사熊神寺를 동시에 사용하는 절집이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부터 ‘성주사 곰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성주사聖住寺의 창건설화는 2가지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하나가 가야시대 남방불교를 전파한 장유화상長遊和尙 창건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흥덕왕 때의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이다.

 

첫째, 장유화상長遊和尙 창건설을 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 결혼을 하여 아들 열을 낳았는데 장남인 거등왕居登王은 왕통을 잇고 그 아래 아들 둘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고 나머지 일곱은 모두 허황옥과 함께 왔던 장유화상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처음 입산한 산이 ‘불모산佛母山’으로 일곱의 아들이 출가하여 불교의 어머니가 되는 산이라는 뜻의 불모산佛母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또 장유화상이 수행한 절이라 하여 성인이 머문다는 뜻으로 성주사聖住寺가 되었다』고 한다.

 

둘째,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을 보면 「성주사 창건사적」에 나타나는데 아래의 성주사聖住寺 창건사적創建事蹟의 전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동계東溪가 쓴 이 사적기事蹟記의 내용으로는 무염화상이 불모산에 와서 왜구를 물리치고 성주사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827년(흥덕왕 2)이라는 것이라 역사의 기록으로는 믿을 수 없게 한다. 이 시기에 무염국사는 당나라 유학 중으로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020.6.1. 장복산 능선에서 본 성주사 대웅전과 부속 건물

 

聖住寺 創建事蹟
謹按僧史 釋氏之敎 自西竺來入中國 在於東漢 永平十三年而 有迦葉摩騰竺法蘭二梵僧 以佛像及舍梨佛書四十二章經 載於白馬 至于洛陽 帝見而大悅 卽以佛像舍梨 安於顯節陵 復以經寫于蘭臺石室中 未幾白馬死建寺其處 以白馬名之 旌其御經之功 以留騰蘭二法師 此其中國寺刹始也 自玆厥後 於魏晉齊梁唐宋之世 其道大行於天下也
又考吾東方則 在新羅訥祗王時 有神僧墨胡子者 自晉而入高麗 又在炤智王時 有阿度和尙 入于新羅 至一善之毛禮家 禮異之造寺於冷山中名爲桃李 此卽爲我國寺宇之肇也
今玆聖住寺 乃新羅四十一世興德大王之始創云 歲有倭寇十餘萬兵來犯 王以禦寇之策 問于群臣 群臣相顧失色 莫敢議者 大王憂愁不樂 其夜夢有神人告之曰 王國之西 有山曰 智異山中有一和尙 號曰無染 乃金山寶蓋如來之後身也 實有不可思議之神力 常領天神左右守護 且國之西南間 有山曰佛母山明水麗 祥雲靄然不絶 迎師居之 則倭寇庶可禦之
王乃覺 卽見使迎之問 以禦寇之策 和尙卽以金錫之杖 竪立於嶺上 惟以其左手拍腹 聲動天地 卽有金甲之神遍現環山 倭寇見之大懼而遁去
王聞之大喜 卽拜師爲國師 遂命平章事柳春雨等 創是寺 以報師恩 以田三百六十結 奴婢百戶而寵賜之云 噫 自新羅至于今 上下年代己過二千年之久 其在基階殿宇興發年記 不可得以攷也 逮于壬亂之後 佛宇入于松蘿之間 金磬聾啞於白雲之中
眞鏡大師慨然有興復之志 迎工匠 設斧斤 有數百群熊 運移棟梁之木 助役成之 事畢後忽隱不見 世稱大師道化廣大 群熊感師法乳得養而然也 中間改寺名 稱熊神 良有是事故也
有無染國師 唱於前 有眞鏡大師 踵於後 其法堂及寮殿之屬 與佛像十王羅漢等 凡諸什物 何其壯 且備哉 惟其成功之歲次 作事之顚末 不可的記焉
赤虎 抄秋 東溪 謹識

 

 

성주사 창건사적¹⁾
승가의 역사를 살펴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축西竺²⁾로부터 중국에 들어왔다. 동한東漢 영평永平³⁾ 34년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범란竺法蘭’ 두 명의 덕행이 뛰어난 인도 중이 불상과 사리 ‘42장경’을 백마에 싣고 낙양에 이르니, 임금이 보고 크게 기뻐하여 불상과 사리를 현절능顯節陵⁴⁾에 봉안하고 다시 경전을 사경하여 난대蘭臺⁵⁾의 석실 안에 봉안하였다. 오래지 않아 백마가 죽자 그곳에 절을 지어 ‘백마사’라 부르고 경전을 싣고 온 공덕을 기리어 등(가섭마등), 란(축법란) 두 법사를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 사찰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위·진·제·양·당·송 시대에 그 도(불교)가 천하에 크게 행해졌다.
또 살펴보니 우리 동방은 신라 눌지왕 때 신승 묵호자墨胡子⁶⁾가 진晉으로부터 고구려에 들어왔고, 또 소지왕 때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신라에 들어와 일선현一善縣의 ‘모례毛禮’ 집에 이르러니 모례毛禮가 기이하게 여겨 냉산冷山⁷⁾에 절을 지어 ‘도리桃李⁸⁾’라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절집의 시작이다.
지금의 성주사는 신라 42대 흥덕왕 때 창건했다고 한다. 어느 해에 왜구 10여 만이 침범하여 왕이 왜구를 막을 방법을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군신들이 얼굴빛이 변한 채 서로 쳐다보기만 하고 감히 의논을 못 하였다. 대왕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날 밤 (임금의) 꿈에 신인이 고하기를 “왕국의 서쪽에 지리산이 있고 그 산중에는 한 화상이 있는데 이름은 무염無染이고 ‘금산보개여래’의 후신으로 실로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있어 항상 천신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수호를 받고 있습니다.”
“또 나라의 서남쪽에는 불모佛母라는 산이 있는데 산명수려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자욱이 끊이지 않으니 스승으로 맞이하여 머물게 하시면 왜구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꿈을 깨어 곧 사신을 보내 맞이하고 왜구를 막을 묘책을 물으시자 무염화상은 쇠지팡이를 산 정상에 곧게 세우고 배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곧 쇠갑옷을 입은 신병神兵이 온 산을 둘러쌌다. 왜구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도망을 갔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스승을 국사國師로 제수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 류춘우柳春雨 등에게 명하여 이 절(성주사)를 지어 스승에게 보답하고 밭 360결과 노비 100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아! 신라로부터 지금까지의 상하연대가 이미 이천년의 세월이 흘러 사찰의 터와 기초, 전각의 흥폐한 연대를 상고하기 어렵도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는 절집이 송라松蘿⁹⁾ 사이에 묻혀 버리고 쇠북소리는 흰구름 속에 귀가 먹었도다.
진경대사가 분연히 다시 일으킬 뜻을 품고 공장工匠을 맞이하여 일을 시작하니 그때 수백 마리의 곰들이 목재를 운반해 역사를 도왔고 일을 마친 뒤에는 홀연히 사라져 볼 수가 없었다.
세간에서 말하기를 ‘대사의 도의 교화가 광대하여, 곰들이 그 법유로 길러줌에 감동하여 그렇게 되었다.’라고 한다. 중간에 절 이름을 고쳐 ‘웅신熊神’이라 하니 진실로 이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무염국사가 앞에서 이끌고, 진경대사가 뒤에서 따르니, 법당과 전각, 요사와 더불어 불상, 시왕, 나한 등과 여러 가지 비품들은 어찌 그리도 장하게 갖추어졌을까.
생각건대 그 성공의 연대와 일의 이루어진 전말은 정확히 기록할 수가 없도다.
적호赤虎(병인년)¹⁰⁾ 초가을(음력 7월) 동계東溪¹¹⁾ 삼가 적다.

 

 

【주석】
성주사 창건사적¹⁾ : 대구 대성사 중 주인周印이 초역하고 서예가 다천 김종원이 감수했으며 정리는 경남불교대학 권순학 교학실장이 맡았다. 내용 일부는 내가 고쳤다.
서축西竺²⁾ : 지금의 인도印度(India)
영평永平³⁾ : 후한後漢 명나라 황제
현절능顯節陵⁴⁾ : 명明나라 황제의 수릉壽陵(임금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만들어 둔 무덤)
난대蘭臺⁵⁾ : 황실의 서고
묵호자墨胡子⁶⁾ : 묵호자墨胡子는 아도阿道와 함께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 승려이다.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묵호자墨胡子’는 얼굴빛이 검은 사람, ‘아도阿道’는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를 뜻하는 ‘아두阿頭’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당시에 인도에서 온 중을 이르는 명사였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묵호자는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신라의 일선군一善郡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묵호자는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의 집에 있는 토굴에서 기거하였다. 이때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향과 옷가지 등을 전했는데, 왕과 신하들은 이것의 이름과 쓰임새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향을 싸 가지고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향이라는 것이며 태우면 향기가 짙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릅니다. 신성한 것 가운데에는 삼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것을 태워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왕녀가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왕이 묵호자를 불러다 향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사례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냉산冷山⁷⁾ : 현 태조산太祖山,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유량동에서 동남구 목천읍 덕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421m. 고려 태조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태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리桃李⁸⁾ : 도리사桃李寺는 고려 때 아도阿道가 신라 일선현一善縣의 토호 모례毛禮의 집에서 불법을 전하다가 냉산冷山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핀 것을 보고 절을 지은 것이 신라 최초의 절집이 되었다.
송라松蘿⁹⁾ : 소나무와 쑥이 자란 것을 비유한 것으로 폐사지를 말한다.
적호赤虎(병인년)¹⁰⁾ : 서기 1746년 병인년丙寅年
동계東溪¹¹⁾ : 동계東溪는 「범어사창건사적」을 지은 인물이다.

무염국사無染國師(800~888)에 대해 조금 알아보면
무염국사無染國師는 신라 무열왕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화씨가 팔이 긴 천인으로부터 연꽃을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해 800년에 탄생했다. 속성은 김씨 법명은 랑혜朗慧, 법호는 무염無染, 휘호는 백월보광百月葆光이다. 12세에 경주 금오산 설산오색석사에 주석하고 계신 법성선사에게 출가했다. 이후 헌덕왕 13년(821) 조정사朝正使 왕자王子 흔昕을 따라 중국으로 갔고 형산 마조암에 주석하고 있던 마곡선사을 만나 법을 구하니 국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멀리 사물에서 취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대 마음속의 부처를 인지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가르침을 전하던 스승 마곡은 어느 날 말 없이 국사에게 나뭇가지를 손에 쥐어 주고 홀연히 열반했다. 스승의 열반 후 문성왕 7년(845)에 신라로 돌아와 상주 심묘사에 참선도량 무염당(無染堂,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다.)을 열어 선법을 펼쳤다. 보령 성주사에 주석할 때에는 대중이 무려 2천명에 이르러 성주산문의 문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진성여왕 2년(888) 법랍 65세, 세수 89세로 보령 성주사에서 입적했다.
一心無碍
筏師旣捨矣(벌사기사의) 큰 배를 이미 버렸거늘,
舟子何繫焉(주자하계언) 어찌 작은 배에 매여 있으리요.
[출처] 무염국사 – 일심무애(一心無碍)/작성자 단애


「성주사창건사적聖住寺創建事蹟」에 의하면 불모산성주사는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 826~836) 때 무염국사無染國師(801~888)에 의해 창건했다고 한다. 흥덕왕 재위 때는 무염국사無染國師의 당나라 유학 시기에 해당한다. 즉 821년부터 845년까지가 유학 기이다.
무염국사無染國師 창건설에 해당하는 절집을 보면
불모산성주사佛母山聖住寺 827년(흥덕왕 2)
덕유산백련사德裕山白蓮寺 830년(흥덕왕 5)
성수산신광사聖壽山新光寺 830년(흥덕왕 5)
전단산우곡사栴檀山牛谷寺 832년(흥덕왕 7)
무릉산장춘사武陵山長春寺 832년(흥덕왕 7)
팔판산성흥사八判山聖興寺 833년(흥덕왕 8)
불모산성주사佛母山聖住寺를 비롯하여 이 모두의 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