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전국회의를 지방에서 처음으로 단양에서 열 개 되어 부울경지역회원들도 참석을 하게 됐다. 창원시역에는 총 6명의 사료조사위원이 있는데 이번에는 4명이 참가하고 자가용으로 이동 수단을 이용하기로 해 김해지역 위원 1명도 포함해서 5명이 한차량으로 이동하게 됐다.
새벽 5시에 출발하자고 해 출발하여 단양에 도착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배위원의 건의로 국보(1979.05.22.)로 지정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를 탐방하게 됐다. 이 탐방은 다음에 기록하기로 하고 전국회의 중 잠시 짬을 내어 다녀온 단양 팔경의 하나이며, 명승 제44호인 도담삼봉(島潭三峯)의 이야기를 먼저 남긴다.
도담삼봉(島潭三峯)은 개인적으로 몇 번을 갔다 왔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이번에도 기록하지 않으면 또 잊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담상봉은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삼봉로 644-13에 위치하며 남한강의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강의 한가운데 3개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장군봉(남편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교태를 머금은 첩봉(딸봉)과 오른쪽은 얌전하게 돌아앉은 처봉(아들봉)이라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외가가 있는 곳으로 자신의 호를 삼봉(三峯)이라 할 만큼 사랑한 곳이다.
또한 퇴계 이황 역시 도담삼봉(島潭三峯) 좋아하여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山明楓葉水明沙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三島斜陽帶晩霞 석양의 도담삼봉에는 저녁노을 드리웠네
爲泊仙蹉橫翠壁 신선의 뗏목은 푸른 절벽에 기대어 자고
待看星月湧金波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진다.
이곳 주차장을 중심으로 정도전의 동상(銅像)과 시비(詩碑) 및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三峰鄭道傳先生崇德碑) 등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이웃하여 단양석문(丹陽石門), 이향정(離鄕亭) 등의 볼거리가 있다.
먼저 정도전(鄭道傳)의 시비와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三峰鄭道傳先生崇德碑)를 소개한다.
仙人橋 나린 물이
정도전(1342-1398)
仙人橋 나린 물이 선인교 아래로 내리는 물이
紫霞洞에 흘러드러 자하동으로 흘러드니
半千年 王業이 오백년 화려했던 고려왕조가
물소리 뿐이로다 물 소리 뿐이로구나
아희야 故國興亡을 아이야 고려가 흥하고 망한 것을 물어서
무러 무삼하리오 무엇 하겠느냐
訪金居士野居 김거사의 들판 집을 찾아가며
鄭道傳
秋陰漠漠四山空 가을 구름이 넓고 넓어 온 산이 텅비었네.
落葉無聲滿地紅 낙엽은 소리 없이 떨어져 온 땅을 붉게 물들이네
立馬溪橋問歸路 말은 개울 다리에 세워두고 돌아갈 길 물으니
不知身在畵圖中 이 몸이 그림 중에 있는지 알지 못했네
삼봉정도전선생숭덕비 三峰鄭道傳先生崇德碑
삼봉 정도전(三峰鄭道傳, 1342~1398)은 고려말 조선초기에 민본정치民本政治의 길을 열어놓은 위대한 학자관료學者官僚이자 혁명가革命家이다. 청백사淸白史로 이름을 떨친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외가(外家)인 단양(丹陽)에서 태어난 삼봉(三峯)은 성균관(成均館)에서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공부한 뒤 도탄(塗炭)에 빠진 민생(民生)을 구(救)하기 위하여 권신(權臣)과 싸우다가 우왕원년(禑王元年, 1375)에 첫 번째 귀양살이를 했다. 9년간에 걸친 권신(權臣)의 박해 속에서 새 사회 건설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진 삼봉(三峯)은 개혁파(改革派) 사대부(士大夫)의 영수인 이성계(李成桂)와 손잡고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는 등 내치(內治)와 외교(外交)를 개혁하다가 마침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고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 되었다.
그 사이 삼봉(三峯)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반대하고 온건한 개량정치(改良政治)를 지지하는 인사(人士)들의 미움을 받아 두 번째로 귀양살이를 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한 혁명운동(革命運動)에 줄기차게 매진했다. 개국후(開國後)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요직을 맡으면서 새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고려국사(高麗國史) 등을 왕(王)에게 지어 바치고 요동(遼東)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군비강화(軍備强化)에 앞장섰으며 새 수도(首都) 한양(漢陽)의 궁전(宮殿)과 대소문(大小門) 그리고 거리 이름을 짓는 등 여러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오른팔로서 개국사업(開國事業)에 가장 큰 공(功)을 세운 삼봉(三峯)은 태조칠년(太祖七年)에 일어난 왕자(王子)들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한 채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봉(三峯)은 많은 저술(著述)을 남겨 후세(後世)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불교(佛敎)의 사회적 폐단을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성리학(性理學)시대(時代)를 열어 놓은 길잡이가 되었고 주례(周禮)를 모범으로 하여 지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은 백성(百姓)을 나라의 근본으로 존중하는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지침서가 되었다. 6백년 전의 삼봉(三峯)이 남기고 간 자취는 나라의 백성(百姓)을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한영우 지음 이두식 씀
신단양 지역개발세움
1988년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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