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 東圃齋

천부인권 2020. 6. 29. 18:00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전경

진북면 정현리 766-1(정삼길 168-24)에는 창원황씨昌原黃氏 동포東圃 황대승黃大承을 기리는 동포재東圃齋가 있다.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10m이고 「위도 35°10'21"N 경도 128°27'44"E」를 표시한다. 동포재의 솟을대문에는 수진문守眞門이라 편액 했고 본재의 이름은 동포재東圃齋라 했으며, 기둥의 주련은 한글로 하여 읽기 쉽게 하였고 옛 동포재중건기東圃齋重建記와 상량문上樑文 외에 새로 새긴 한글 기문과 상량문이 있다. 시운은 걸려 있지 않으나 해산海山 이은춘李殷春의 책에는 시운이 있어 소개를 한다.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솟을대문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솟을대문 수진문守眞門 편액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山高於北水長東 산은 북쪽에 높고 물은 동쪽에 길게 흐르니
應是先生百世風 이것은 당연히 선생의 백세 풍이리
大路連通巫峽衷 큰 길은 이어져 무협속으로 가까웠고
前川流下島橋中 앞 냇물 흘러서 섬 다리로 내려간다.
知先事業兼知後 선대의 사업 알고 후대를 겸해 알면
有始經綸亦有終 처음의 경륜 있어 마무리 또한 있게 되네
繼繼雲仍相盡力 후손들이 이어가며 서로 힘을 다하니
童修齋宿告成功 재실과 숙소 중수하여 성공을 알리도다.
海山 李殷春 해산 이은춘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편액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주련
2020.6.28. 진북면 정삼리 창원황씨 동포재東圃齋 대청에 걸린 편액
동포재중건기 東圃齋重建記
동포재상량문 東圃齋上樑文 편액

東圃齋重建上樑文
엎드려 생각 하옵건대 세월이 여러번 바뀌어도 군자에게는 고인古人의 유풍이 남아 있음이로다. 바야 흐로 옛터에 다시 집을 돌이켰으매 후손이 미미한 성의를 다함이로다. 좋은 날을 점쳐 완공을 보았음매 처마는 새가 나는 것 같고 땅은 스스로 상스로움을 뿜고 있는 듯 하도다. 삼가 헤아리니 동포공東圃公은 고관의 옛 명문으로서 실로 강호江湖의 은자隱者이셨도다. 시중侍中의 조상으로부터 출발하여 고려 때에 드러났으며 도사공都事公에 이르러선 학문을 떨쳐 일찍이 퇴계退溪의 문하에 갔었도다. 그러나 액운을 맞고 또 어지러운 조정을 만났으니 어찌 뭇 사람으로 더불어 함께 달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에서 곧은 길을 가리고 흐린물을 피하였으니 그 지켜진 절개가 일월日月같이 빛남이 있었도다. 오로지 마음을 흰구름과 맑은 물에 붙여 이곳에 숨으셨으니 후손들은 오늘의 번화가 근원 없음이 아니로다. 
봄과 가을에는 공을 추모해 제사를 올리고 멀고 가까운 친족이 모이니 가지록 우애가 도타와지도다. 이에 짦은 노래를 지어 마룻대의 다스림을 돕노니 
어여차 동쪽을 바라보니 부상扶桑의 아침해가 붉은 빛을 내 쏘고 있고 
서쪽을 바라보니 여항산艅航山과 하늘이 하나인 듯 가지런 하도다. 
여여차 남쪽을 바라보니 앞 냇물이 콸콸 옥같이 흐르고 있고
북쪽을 바라보니 조상의 유덕遺德이 서기瑞氣로 변해 비쳐오고 있도다. 
아아 세월은 흘러도 인륜人倫은 변하지 않는 것이어라
아아 인륜人倫이 이어진 곳에 어찌 자손의 번영이 없는 것이리오.
이제 풍우風雨의 시달림 끝에 또 한번 이 재각齋閣을 중건重建하게 되었음이여. 옛 사람들의 문체를 본떠 삼가 이로써 중건重建의 글을 삼으려 함이로다. 
辛酉 西紀 一九八一年 四月下澣
九世孫 來性

 

옛 동포재중건기 東圃齋重建記

東圃齋重建記
郡治之北有黃氏之世庄曰鼎山村 雲林窈窕 泉石明麗 宜隱者薖軸地而奧 我穆陵壬丁之後 黃氏之先祖東圃公 肇奠基業於此 以遺後仍者也 竊惟公籍昌原溯厥本原累公累卿 殆譜不絶 書而至于公 身其遺澤 尙未斬 若藉此以求將闊步天衢足以 蜚英於一世矣 雖然豈公之志也 方其時也 新經大亂 衆心疑懼 又値昏朝權奸弄柄 以智者觀之 隨時應變 實有可戒 故公固守是庄 囂囂然樂其樂 而寧沒齒無怨 尤所謂所居而安 所樂而玩者 公庶幾歟 及其沒葬在廬山下王枝嶝麓 與是庄距數弓許 而相望精靈之陟降 必于彼乎 于此乎矣 是以後仍嘗輪奐於庄東爽塏處以寓追慕之懷 而爲歲祭齊宿之所 揭扁曰東圃齋者用公之所自號也 頃在庚寅夏國有大燹 一月之間村落之廬舍齋閣盡爲灰燼 令人不忍擧目 而是齋亦不得免焉黃氏曰噫嘻德 奈若之何 今年三月 余自梨庄將向羈鄕午過是庄 訪其門 秀致龍甫而暫憩有頃 老少齊來 禮數頗優 咸一辭請曰 孱門將欲重建 旣燼之齋於其墟 敢以楣顔之文 得於未前以備異日 賁飾之資 願垂惠之 余辭以老昏且不文 仍復思之日 今燹怯之餘 人皆急於私庇緩於爲先 惟黃氏則不然 有此大經營 其繼述之誠 足以感動得人 余若終有辭焉 豈爲善之勸也 於是乎記

 

동포재중건기 東圃齋重建記
창원군의 북쪽에 황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 있으니 정산촌(鼎山村)이다. 우거진 숲이 깊고 조용하며 샘과 물과 돌이 맑고 아름다워 은자(隱者)들이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다. 옛날 우리 선조왕 때 임진(壬辰) 정유(丁酉)의 난리 후에 황씨 선조 동포공(東圃公)이 처음 이곳에 가업을 정하고 조상을 모신 후로 후손들로 물려 내려졌다. 생각건대 공의 관향은 창원인데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번의 공경(公卿)의 벼슬이 족보에 거의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고 공의 대에 이르러서도 그 물려받은 은택이 오히려 끊어지지 않고 이처럼 자자하니 족히 장차 조정에서 활보함을 구하였고 족히 일세(一世) 명성과 실질이 가득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어찌 공의 뜻이겠는가 바야흐로 그때는 새로이 겪는 큰 임진란과 정유재란으로 군중들의 마음은 의심으로 두려워했고 또 아침저녁으로 조정은 권세를 부리는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나라를 희롱하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변화에 대응하여 시로 경계함이 있었다. 공 이 세장지(世庄地)를 굳게 지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의 즐거움을 즐기다가 차라리 세상을 떠났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소위 이른바 그 사는 바에 안분지족하고 그 즐길 바를 즐기는 것이 거의 공이 그에 가깝지 않겠는가. 공이 세상을 떠나 광려산(匡廬山) 아래 왕지등(王枝嶝) 구릉에 장사하였다. 공이 살았던 마을과 몇리 되지않는 거리에 있어서 서로 바라보이니 정령(精靈)이 오르내림을 저곳에서나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에 후손들이 살던 마을 동쪽의 상쾌하고 높다란 곳에 훤출하게 지은 집을 세우고 추모의 정을 기대고 해마다 제사 때 제계하고 장소로 삼았다. 현판을 걸고 동포재(東圃齋)라 이름한 것은 공이 스스로 지은 호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경인년 여름 나라의 큰 난리(한국전쟁)가 있어 한 달 사이에 마을의 초가집과 재각이 모두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으니 사람으로써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이 재실역시 병화(兵火)를 면하지 못하였다. 황씨들이 아아!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금년 3월 나는 이장(梨庄)에서 타향으로 가는 길에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그 집안 수재(秀才) 치용(致龍)을 방문하여 잠시 쉬었는데 잠깐 동안 집안의 노소(老少)들이 모두 와서 예를 갖추어 여러번 자못 후하게 대접하면서 모두 한 말씀을 청하였다. ‘잔약한 가문에서 장차 이미 불에 타 재가 된 재실을 그 터에 다시 중건하려하니 재실을 짓기 전에 미리 문설주 위에 걸어둘 기문을 얻어두었다가 다른 날 재실을 꾸미는 자료로 갖추고자 한다.’며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원하였다. 나는 늙어 혼미하고 또 문장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다시 생각한 것이 있었다. 오늘날 전쟁의 난리를 당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가 사사로이 살기에 급하고 선조를 위함을 느슨히 하는데 오직 황씨들은 그렇지 않고 이런 큰 일을 경영하여 그 선조를 계승하여 가업을 이으려는 정성이 있으니 족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다. 내가 만약 끝까지 사양한다면 어찌 선한 것을 권장함이 있겠는가. 이에 기문을 쓰게 되었다.

임진(壬辰,1952)년 삼월 하순 전주(全州) 이강선(李康瑄) 쓰다.

 

옛 동포재상량문 東圃齋上樑文 편액

출처 및 참조
나는 대한민국의 마지막 선비다-이은춘(해문 이봉수)/자연과 인문(2011.3.7.)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