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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비천당 丕闡堂

천부인권 2020. 6. 23. 06:04

2020.6.17. 성균관 비천당丕闡堂 모습


비천당丕闡堂은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1664년 건립된 성균관의 별당으로 명륜당과 같이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1661년(현종 2)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자수원慈壽院 등 두 사찰을 훼철하고,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그 재목을 북학北學의 진흥사업에 사용하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비천당이 되었다. 비천당丕闡堂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2020.6.17. 성균관 비천당丕闡堂 편액


丕闡堂記
上之二年辛丑命地部禁國內僧尼 大臣以猝處無漸爲言 上曰 然然則先罷京裏兩尼院 以建北學於 是有司之臣 奔走奉行 惟北學之建 以年侵而有待焉 癸卯九月大司成臣閔鼎重啓曰 北學旣未易設而 兩院材尼擯於無用請就太學 以修齋舍之未偏者 上可之明年甲辰九月 先達別堂於西洋水之上 在明倫堂之西 次建二齋於西南 南北相値所 以爲長貳弟子治事 肄業之處也 先是太學有事則黌舍偪促 而章甫羡溢於閭家 又時設試場於大成殿之後 事多不便自是之後 恢然有容儼然而整 前日所病 一朝盡祛事之得 宜無遇於此者 旣成名其堂曰丕闡 盖取朱子所謂贊 聖上丕闡大猷抑邪慝正之意也 其齋之處北者 則朱子盖嘗廢佛寺 立儒宮而曰 一擧而兩得之故名曰 一兩其處南者 則程子盖嘗論二氏之害 而曰闢之而後可以入道 故名曰闢入斯兩言者 似若程朱今日准備 而待之者 自世敎衰異端之害 不可勝言時君世主信惑右甚至 而爲國之綿 促人之脩短皆係於 此聖道之晦騫 人心之陷 盖由於此矣 可勝歎哉 今我主上殿下 以天縱上聖穗學明道 以建皇極 而即位之初 首先以放淫辭 興儒學爲懋 眞可謂度百王 而承三聖矣 鳴呼聖哉 苐惟所謂異端者 不時西方之鬼敎也 凡非聖人之道 而別爲一端者皆是己 自孔孟以來大經大法 俱在經書而至 程朱則尤詳且明 凡其外是而爲道者 非吾所謂道也 欲以是而攻彼者 是五十步百步之間也 況其奔迻明利貧冒貨色者
宋時烈 撰


비천당기 丕闡堂記
현종2년 신축辛丑(1661)에 지부地部¹⁾에게 국내의 승니僧尼를 금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이 졸지에 금하는 것이 어렵다고 아뢰었다. 임금께서 이르시길 “그렇다면 도성안의 두 이원尼院²⁾을 파罷하여 이로써 북학北學³⁾을 세우라”하여 이에 이 일을 담당하는 신하가 분주하게 다니며 명을 받들어 행하였는데 다만 북학의 건립만은 흉년이 들어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계묘년(1663) 9월에 대사성 신臣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북학은 이미 쉽게 세울 수 없게 되었는데 두 이원의 목재와 기와가 쓸데없는데 버려지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태학의 미비한 재사를 보수하는데 사용하소서”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갑진년(1664) 9월에 먼저 별당을 서쪽 반수泮水의 위인 명륜당의 서쪽에 건립하고 다음으로 두 재사를 서남쪽의 남북이 상치相値한 곳에 건립하니 장이長貳⁴⁾와 제자가 일을 다스리고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태학에 행사가 있으면 횡사黌舍⁵⁾가 좁아 선비들이 민가에 나가 거처하고 또한 때로 대성전 뒤에서 시장試場을 베풀게 되면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이후부터는 넉넉하게 수용됨이 있고 엄연히 정돈되어 지난날에 병폐로 여겨졌던 것이 하루아침에 제거되었으니 일의 마땅함을 얻음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집이 왕성되고 난후 당의 이름을 비천丕闡이라 하였으니, 대게 주자朱子의 이른 바 ‘성상聖上의 큰 지략을 크게 드러내어 사특함을 억제하고 정의를 숭상함을 찬贊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북쪽에 위치한 재齋는 주자가 일찍이 불사佛寺를 폐하고 유궁儒宮을 세우고 이르기를 ‘일거에 두 가지를 얻었다.’고 한 까닭으로 이름을 ‘일양一兩’이라 하였고 남쪽에 위치한 재는 정자程子가 일찍이 노자老子와 석가釋迦의 폐해에 대해 논하여 이르기를 ‘물리친 뒤에라야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까닭으로 이름을 ‘벽입闢入’이라 하였는데 이상의 두 말은 마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오늘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린 것 같다.
세교世敎가 쇠퇴한 이후로부터 이단의 폐해가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되어 군주가 이를 믿고 현혹됨이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국운의 장단과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고 여겼으니 성도聖道가 어두워지고 인심이 빠지게 된 것은 대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 주상전하가 하늘이 낳으신 상성上聖으로서 학문에 힘쓰고 도리를 밝혀 천하를 다스리는 표준을 세우고 즉위하고 난 초기에 우선적으로 음란한 말을 추방하고 유학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노력하였으니 진실로 백왕百王을 지나고 삼성三聖⁶⁾을 계승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아! 성대하다. 생각건대 이른바 이단異端이라는 것은 다만 서방의 귀교鬼敎만이 아니다. 무릇 성인의 도道가 아니고 별도로 일단이 되는 것은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공孔맹孟 이래로 사람이 지켜야할 큰 도리와 중요한 법률이 모두 경서에 갖추어져 있고 정자와 주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상세하고 분명해졌으니 무릇 여기에서 벗어난 것을 도로 삼는다 할지라도 이는 우리가 일컫는 바의 도가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서 저것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십 보와 백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명예와 이익을 쫓고 재물과 여색을 탐하는 자가 도리어 사념과 사심이 없으며 그윽하고 오묘한 말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면 이는 다만 맹자의 이른바 ‘한 잔의 작은 물로 스레에 가득실린 섶의 불을 구한다.’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진실로 이른바 ‘사특함으로써 사특함을 공격하여 솜을 묶어 기름을 붓고 달려가 몸이 불타 재가 된 뒤에라야 그칠 자인 것’이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는가? 여러 군자들은 부디 서로 더불어 힘쓰고 노력하여 무릇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가 아닌 것은 다만 입으로 감히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몸으로 행하지 말고, 몸으로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마음속으로도 감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거의 사람으로 지켜야할 큰 도리를 세우고 대통大統을 밝히게 되어 성상聖上의 오늘의 뜻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니 여러군자들은 또한 생각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송시렬宋時烈(1607~1689) 찬하다.

 

【주석】
지부地部¹⁾ : 지부아문地部衙門의 약어로 선조 때 호조戶曹를 육조六曹의 둘째라는 뜻으로 일컫던 말.
이원尼院²⁾ : 비구니가 있는 절
북학北學³⁾ : 조선시대 서울에 있었던 동서남북중 다섯 가운데의 하나.
장이長貳⁴⁾ : 관아의 장관과 차관을 일컫는 말
횡사黌舍⁵⁾ : 공부하는 집. 학교
삼성三聖⁶⁾ : 요堯순舜우禹 또는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을 이르는 말

 

반궁도泮宮圖 1785년 태학지에 수록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泮中雜詠。二百二十首】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丕闡堂,撤尼院材構成,故取“丕闡吾道”之義。一兩齋、闢入齋,皆在丕闡堂墻內,一兩在丕闡之西,闢入在丕闡之南,皆以其餘材構之,故取“一擧兩得”及“闢異端入吾道”之義。每科時,以丕闡堂庭爲試所,設一二所則爲二所
비천당(丕闡堂)은 비구니 절을 헐어낸 목재로 세웠다. 이 때문에 ‘우리 도를 크게 밝힌다〔丕闡吾道〕’는 뜻을 취하여 당호를 삼은 것이다. 일양재(一兩齋)와 벽입재(闢入齋)도 모두 비천당 담장 안에 있는데, 일양재는 비천당 서쪽에 있고 벽입재는 비천당 남쪽에 있다. 이 두 건물은 모두 비천당을 짓다 남은 목재로 지었다. 이 때문에 ‘한 가지 조치로 두 가지 유익함을 얻었다〔一擧兩得〕’는 뜻과 ‘이단을 물리치고 우리 도로 들어간다〔闢異端 入吾道〕’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과거를 설행設行할 때면 늘 비천당 앞뜰이 시험장이 되는데, 일소(一所)와 이소(二所)를 설치할 때면 이소가 된다.

 

明倫西畔又如翬 / 꿩이 나래 펼친 듯한 명륜당 서쪽 건물
丕闡堂深墻四圍/ 높은 담장 사방 두른 비천당이네
一兩之東闢入北 / 일양재 동쪽이요 벽입재 북쪽에서
槐黃時節點朱衣¹⁾ / 홰나무 꽃 필 때면 과거가 설행設行되네

 

【주석】
點朱衣¹⁾ : 구양수(歐陽脩)의 다음 고사에서 유래하여 ‘朱衣’는 시험관을 뜻하는 말로, ‘朱衣點(頭)’은 과거 급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宋)나라 구양수가 지공거(知貢舉)로 있을 때 답안지를 채점할 적마다 등 뒤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머리를 끄덕이는 듯한 느낌이 들면 그 답안지가 합격되곤 하였는데,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行禮後,御丕闡堂懸題,後御下輦臺,試武科
알성례를 행한 후에 비천당(丕闡堂)으로 납시어 글제를 내건 다음 하련대(下輦臺)로 납시어 무과 시험을 보인다.

 

是日設科丕闡堂 / 이날 비천당에서 문과 시험을 보이는데
八方多士共觀光 / 팔도의 선비들이 모두 함께 응시하네
懸題更御輦臺上 / 글제를 내건 다음 다시 하련대에 납시면
妙技爭穿百步楊 / 무사(武士)들이 활쏘기 재주를 겨루네

 

출처 및 참조

서울문묘 실측조사 보고서 (상)-문화재청(2006.9.)/아이씽크 커뮤니케이션(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다음/비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