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여양리 옥방 밀양박씨 여양재 艅陽齋

천부인권 2020. 7. 23. 17:32

2020.7.18.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밀양박씨 여양재艅陽齋 전경

진전면 여양리 121(옥방내동길 175-12)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옥방玉方마을 입향조 통덕공通德公을 향사하는 여양재艅陽齋가 있다. 이곳의 위치를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82m를 알리고 「위도35°10'46"N 경도128°23'22"E」라 표시한다.
여양재艅陽齋 담장 밖 입구에는 『박순호선생을 기리는 비』가 서있고 솟을대문에는 경모문敬慕門이라 편액 했고 5칸의 시멘트 구조물에 전통 기와집의 형태를 이룬 여양재艅陽齋는 규모가 나무 기둥을 사용하는 집보다 훨씬 크다. 각 기둥마다 주련을 달았고 내부는 잠겨 있어 볼 수 없었다.

 

옥방마을 밀양박씨 여양재 솟을대문
여양재 대문 경모문敬慕門 편액

 

2020.7.18. 진전면 여양리 옥방마을 밀양박씨 여양재艅陽齋

 

여양재艅陽齋 편액

艅陽齋原敍
齋之艅陽扁額者 盖取諸吾耕叟公詩集 處士申嶔氏序曰 暫旅于蘿井之傍 永遯乎艅山之陽之義也 公之先考通德公密陵君之第三子也 公世襲簪纓 志存揖退 肅廟癸亥 自靑州月灘掣家 南寓慶州之蘿井者 固爲始祖陵寢之所在 而以展膽謁之素誠也 適有徵命而不就 乙丑又移居咸安之平巖中村 至今人傳朴氏之舊地云 癸酉築室于求瑟坊哲 居人鮮少松竹盤鬱 樂付耕樵 構小齋而潛 究書籍有詩集禮案 景廟辛丑卒 翌年壬寅 葬于玉方洞艮坐之原 謹按寒岡鄭先生本郡誌 以求求瑟坊昭載 而今云玉方者盖隨音 省書記誤也 又云玉溪者公之子玉溪處士 扁堂之詩號也 俗傳三坊之間竹葉落地者 卽公墓之所在也 子孫仍居邱墓繼成 古人所謂 幷州之故鄕也 不肖之先考菊園公 學於樂溪趙先生之門 尋墜緖於家庭之訓而備述通德公墓誌實錄 與從子毅鎭 慨然裒集 家傳儀節 於斷爛之餘而有志未遑也 歲己未鳩合些財 先修公外內山石物 歲丁卯西紀一八六七年)高宗四年 建是齋以爲墓享時 致齋依歸之所 而頗采巾笥遺稿爰集 家庭舊聞 扁曰艅陽齋者窃想公之永遯遺墟 久則懼夫失傳 故忘拙謹敍以寓羹墻之慕云爾
崇禎紀元後四辛未五月甲午 五世孫 維鎭 謹識

여양재원서 艅陽齋原敍
재실을 여양재(艅陽齋)라 한 것은 대개 경수공(耕叟公)의 시집(詩集)에 처사(處士) 신금(申嶔)이 쓴 서문에 ‘잠시 나정蘿井 곁을 여행하다가 영원히 여산(艅山) 양지쪽에 은둔하였네’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공(公)의 아버지는 통덕공(通德公)이신데 밀릉군(密陵君)의 셋째 아들이다. 공은 대대로 벼슬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오시다가 뜻을 지키기 위하여 사양하고 물러나셨다. 조선 숙종 계해(癸亥,1683)년에 청주(淸州) 월탄(月灘)에서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경주(慶州)의 나정(薦井)에 기거하며 진실로 시조(始祖)의 능(陵)이 있는 곳이어서 첨모하여 바라보며 배알하는 정성을 드리기 위한 정성이다. 그때 마침 나라에서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기축(己丑,1685)년에 다시 함안(咸安) 평암리(平巖里) 중촌(中村)으로 이사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傳하는 말로는 ‘박씨(朴氏)들의 옛터’라고 한다. 계유(癸酉, 1693)년에 구슬골(求瑟谷)에 집을 지으니 사는 사람들이 적고 또한 송죽(松竹)이 울창하여 밭갈이와 나무하는 것을 즐겨하기에 적합하였다. 작은 재실을 짓고서 서책을 깊이 연구하시어 시집(詩集)과 예안(禮案)이 있다. 경종(景宗) 신축(辛丑, 1721)년에 돌아가시고 다음 해인 임진(壬辰, 1722)년에 옥방동(玉方洞)의 간좌(良坐) 구릉에 장사를 치렀다. 살펴보면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께서 기록하신 함안군지(咸安郡誌)에 구슬골 즉 옥방(玉方)에 대한 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옥방(玉方)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음(音)을 책의 기록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또한 옥계(玉溪)라고 한 것은 공(公)의 아들이신 옥계처사(玉溪處士) 집의 현판을 지칭하는 것이다. 세상에 세 마을 사이에 대나무 잎이 떨어지는 곳이 곧 공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자손들이 그로 인해 살게 되고 묘소도 잇달아 조성되니 옛사람들이 이른바 ‘병주(幷州)의 고향’¹⁾이라 하였다. 나의 선고(先考)이신 국원공(菊園公)께서도 낙계(樂溪) 조선생(趙先生)의 문하에서 배우신 뒤 추락해가는 가정의 가르침의 실마리를 찾으셨다. 그리고 통덕공(通德公)의 묘지(墓誌)와 실록(實錄)을 갖추어 서술하셨다. 그리고 조카 의진(毅鎭)과 더불어 개탄하며 끊어지고 문드러진 집안에 전해지는 의절(儀節)을 모으려는 뜻은 있었으나 겨를이 없어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기미(己未, 1835)년에 조금의 재물을 모아 먼저 공의 내외 산소에 석물(石物)을 고치고 정묘(丁卯, 1867) 고종 4년에 이 재실을 건립하여 묘소 향사 때 재계하고 의지하는 장소로 삼았다. 또한 보따리와 상자 속에 있는 유고를 채집하고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수집하였다. 그 현판을 여양재(艅陽齋)라고 한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고 공이 영원히 은둔하신 옛 터가 오래면 전해지지 않을지 두려워한 까닭에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삼가 그 전말을 서술하여 국그릇이나 담장에서도 조상의 모습을 그리는 마음을 깃들게 하고자 함이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4 신미(辛未, 1871) 5월 갑오(甲午) 5세손 유진(維鎭) 삼가 짓다.

【주석】
‘병주(幷州)의 고향’¹⁾ : 제 2의 고향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唐) 때 가도(賈島)가 병주(幷州)에 오래 살다가 떠나면서 병주를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는데 <도상건(度桑乾)>이라는 작품이다. 객사병주이십상(客舍幷州已十霜) 귀심일야억함양(歸心日夜憶咸陽) 무단갱도상건수(無端更渡桑乾水) 각망병주시고향(却望幷州是故鄕) : 나그네로 병주에 머물기 어언 10년 돌아가고파 밤낮으로 고향 함양을 생각하였노라. 뜻하지 않게 상건강을 건너 더 먼 곳으로 가게 됨에 돌아서 병주 쪽 바라보니 오히려 거기가 고향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