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근곡리 선산김씨 옥강재 玉岡齋

천부인권 2020. 7. 18. 20:20

2020.7.18. 진전면 근곡리 선산김씨 옥강재玉岡齋 대문

진전면 근곡리 210(근곡1길 142-21)에는 선산김씨善山金氏 생원공生員公 향사하는 옥강재玉岡齋가 있다. 이곳의 위치를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18m를 알리고 「위도35°10'47"N 경도128°26'47"E」라 표시한다.
솟을삼문에는 함휘문含輝門이라 편액 했고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으며 본당은 옥강재玉岡齋라 편액하고 대청마루에는 옥강재기玉岡齋記와 옥강재상량문玉岡齋上樑文 및 근제옥강재謹題玉岡齋라는 시를 걸어 두었다. 마당의 우측에는 진사선산김공추모기적비進仕善山金公追慕紀蹟碑가 있다.

 

2020.7.18. 대문 함휘문含輝門 편액
2020.7.18. 진전면 근곡리 선산김씨 옥강재玉岡齋

 

2020.7.18. 진전면 근곡리 선산김씨 옥강재玉岡齋 편액
옥강재 주련


玉岡齋 柱聯
家世追慕蓮籍
棟宇新成玉岡
成器必待磨琢
待賈何妨蘊藏
光輝勿替永世
德蔭也垂無疆
惟願承承相守

 

玉岡齋記
鎭海之爲縣이 濱海而斗小나 然이나 間多文學之士와 科第之選而至近世에 又多하니 齋舍之營而先蹟之述者는 盖其淳古之風이 猶有所未泯也라. 善山金氏之居縣之佳谷者 近築一齋於其里中하야 爲寓慕其先生員公者而名以玉岡은 以其在玉女峰下也라 其玄孫一相在吉이 抱其蹟하고 問記於余하니 盖生員公이 自少有才氣攻藝業하야 中哲宗己未 增廣試하니 聲譽頗鬱而不復求進取하고 尙志丘園하야 行義風範이 爲一方所頌慕하니 宜其子姓之進思於久遠而寓羹墻於棟宇也라. 金氏之中世盖自宜寧으로 遷하여 其在宜也라 與吾族으로 同閆而居하야 世相密故로 習聞其家世之詳而於是役에 有不能辭나 然이나 余未嘗一至其地하니 其於江山風物과 棟宇面勢에 無得以稱焉이요 獨就其名齋者而一濱其說이 可乎아 夫玉은 爲天下之至寶而其用에 心琢之後成器하여 磨之後光生하니 苟不琢不磨而委之塵土則 與瓦礫으로 無以異也라. 人之德業之成否와 家世之顯晦 何以異此리요 金氏 本出新羅之玉葉而 遠有代序하니 光輝之著己久矣라 至籠巖公하야 岡備鼎革之際하니 義聲이 振世則 盖磨之以義理而其光이 益著顯矣라 自後系世簪組亦不隕其光 而中世에 稍未免沈晦則 生員이 復有意於一磨之而雖未克大顯이나 猶不失爲蘊櫝之光矣라 苟因此而益勤琢磨之功하야 不失先世之輝光이 是非 生員公所望於後人者耶아 夫志事之述이 是爲追慕之實則 後人而追慕公者 其責이 亦惟在是焉而己라 苟或不然而任其塵土矣요 瓦礫矣則雖有輪奐之美와 護守之勤이나 何有於追慕之實而 又何稱於玉岡之名哉아 因書此以爲之記하니라.
赤羊之歲 大寒節 花山 權龍鉉 記

 

옥강재기 玉岡齋記
진해현鎭海縣은 바닷가 작은 고을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학문하는 선비와 급제한 사람들이 근세에 들어서 더욱 많았다. 이로써 재실을 지어 조상의 자취를 이어가는 것은 그 순수하고 고아(古雅)한 풍속이 있는 것이다.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가곡佳谷에 사는 사람들이 근래에 그 선대 생원공生員公을 사모하는 재실을 지어서 그 이름을 옥강(玉岡)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곳이 옥녀봉玉女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 현손玄孫 일상一相과 재길在吉이 생원공의 남긴 자취를 안고 나에게 와서 기문을 부탁하였다. 생원공生員公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개가 있고 예능과 학업을 익혔다. 철종哲宗 기미己未년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니 명성이 높았지만 다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초목에서 살려는 뜻을 두니 그 의로운 행실과 기풍과 예의범절을 온 고을이 칭송하였다. 자손들이 앞으로 추모하는 일을 오래고 멀리 이어가기 위하여 재실을 지어 향사享祀를 드리려고 하였다. 김씨는 중세中世에 의령에서 이사왔다. 의령에 있을 때 우리 일가로 한 마을에 살아서 대대로 서로 친밀하였으므로 그 집안의 세대를 자세히 들었다. 그러므로 이 공역工役에서 사양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번도 그 곳에 가보지 못했으니 그 산과 강, 그리고 풍습과 물정을 알지 못하고 재실의 모습도 말할 수 없으니 오직 재실 이름만으로 한마디 말로 하는 것이 옳겠는가.
옥玉은 천하의 최고 보배이지만 반드시 쪼은 후에 그릇이 되고 다듬어서 갈아낸 뒤에 빛이 나는 것이니 쪼지도 갈지도 않고 진흙 속에 버려지면 깨진 기와나 자갈과 다름이 없다. 사람의 덕업德業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집안이 대대로 일어나고 망하는 것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시대부터 그 세대가 멀고 집안이 빛남이 오래이다. 농암공籠巖公에 와서 고려가 망하면서 새 왕조가 설 때 의로운 명성이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개개 의리로써 갈아서 그 빛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 후로 대대로 벼슬하여 그 빛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중세中世에 와서 조금씩 빛을 잃고 쇠잔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생원生員이 다시 집안을 빛낼 뜻이 있었으나 크게 드러내지는 못하였지만 그 동안 쌓인 빛을 잃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진실로 이로부터 쪼고 갈아내는 정성을 부지런히 하여 그 선대의 빛을 잃지 않는 것이 실로 생원공이 후손들에게 바라는 바 아니겠는가? 무릇 그 일에 뜻을 두고 선대의 업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추모追慕하는 실제가 되므로 후손으로써 공을 추모하는 자는 그 책임이 오직 여기에 있을 뿐이다.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옥을 진흙에 버려서 깨어진 기와와 자갈로 만드는 것이니 미록 아름답게 빛나는 재실이 있고 그 집을 지키는 노력을 하여도 어찌 추모하는 실제가 있다고 하겠는가. 또한 무엇으로 옥강玉岡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겠는가. 인하여 이글을 쓰서 기문記文으로 삼노라.
적양赤羊(丁未)년 대한절大寒節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짓다.

 

옥강재상량문玉岡齋上樑文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