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전면 둔덕리 옥산장씨 여산재 艅山齋

천부인권 2020. 7. 20. 13:23

2020.7.18. 진전면 둔덕리 옥산장씨 여산재艅山齋 전경

진전면 여양리 448(둔덕양담길 27)에는 옥산장씨玉山張氏 옥봉처사玉峰處士 장석원張錫源을 향사하기 위해 후손이 지은 여산재艅山齋가 있다. 이곳은 구글 지도는 「위도35°11'35.8"N 경도128°23'20.3"E」라 표시한다.
대문에는 영사문永思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여산재艅山齋라 이름했으며 기둥마다 주련을 걸었고 대청마루에는 노근용盧根容과 조용후趙鏞厚가 각각 쓴 여산재기艅山齋記가 있으며 9세손 돈규敦圭가 지은 여산재상량문艅山齋上樑文과 9세손 재규在圭가 지은 여산재운艅山齋韻도 있다.

 

여산재艅山齋 대문
여산재艅山齋 대문 영사문永思門 편액
2020.7.18. 진전면 둔덕리 옥산장씨 여산재艅山齋
여산재艅山齋 편액
여산재艅山齋 주련
치암실致巖室 편액

艅山齋記
咸州治西艅航山下 有艅陽洞乃張氏之世居 而玉峰處士諱錫源公之墳庵在焉 公以旅軒門人 南坡公諱學之 玄孫早習家庭淹博經史 蔚然爲儒林之冠冕矣 當壬辰亂後翻然 有就靜之意 自仁同周覽嶺下山水竟至 於玆山之下 則林壑幽○眞隱者 考槃之處況之山也 出於雲海之中 盪漾若船舶之出 陸挺然有抜萃之象耶 遂卜居于 此不求聞達開拓 田園土肥 而泉甘追從士友直諒 而多聞敎誘村誘貿俗丕變 公之來寓于 此豈非人地之相得也 耶居民至 令稱流澤之不尠也 公沒而葬其西麓 令其後孫在圭性軫錠圭伊圭且圭龍圭允圭 相與謀曰 吾祖之世三百有年 其遺風餘韻尙有不泯 而其於楸下 尙闕齊宿之所 吾等雖在窮弱盍相圖成乎 於是出力招工 始於乙未春 而至秋功訖暑 其楣曰 艅山齋門曰 永思請余以記 余以老病廢 却筆硯久矣 然○有感於心者 詩曰 無念爾祖聿修厥德 令僉君不以堂構爲能事 齊明於斯而蘋藻 致潔聚族於斯而花樹成歡 誦讀於斯而圖書靜嘉 則曾氏歸厚之德 日新楊氏春兩之澤 將洽而門戶之昌大可卜矣 僉君加勉之哉 是爲記
乙未十二月下澣 巴山 趙鏞厚 記

 

艅山齋記
齋在咸安郡艅航坊艅陽里 故榜艅山齋 玉山張氏爲其先祖玉峰處士公 諱錫源而作也 正堂三間外門亦相稱 己未春始役至秋竣工是役也 後孫在圭性軫錠奎伊奎且奎龍圭允圭諸君 多有勤勞云 今年夏在圭請余記其楣 余惟咸幷州也 慣識其山川風土 又與其士友多相識 文字酬應 非止一二 獨於張氏以無夙昔契分辭之乎 謹按公之家狀而記之 高麗上將軍 諱金用公之始祖也 松隱諱安世嘉善諱仲陽 在麗季而罔僕也 曰諱內範號克明堂 諡文康 遊寒旅兩先生門 曰諱慶遇號晩誨堂 江都亂 倡義立勳 曰諱學 南坡旅軒門人 曰諱溟號四非庵 曰諱羽瀛慶尙左水使曰諱光璧通德郞 自公考以上六世 此公世德之徵也 生有異質 甫學語知父母之重讀書見父母 字必三復 乃己稍長 定省靡懈 勝冠而孤耕 書幷進博通經史 壬辰亂後 率家南下隱跡於此里 俗貿貿不知禮義 設立學舍 敎誨不惓 未幾年 鬱然爲文化之方 又與名碩 講磨追逐 此公行治之大略 以公如是 世德如是 行治當 穆陵盛時 宜思一試 蘊抱而捲而懷之 深藏不市 必有揲蓍之見 當大易天山之遯乎 昔朱先生得此爻隱於武夷山 成精舍以居 想公居此山之日 必如朱子之爲而屋子不傳 今子姓之以艅爲扁 亦有合於朱先生船齋詩 考盤雖在陸 混瀁水雲深 正爾滄洲趣 難忘魏闕心之云乎 是爲記
歲壬寅 小滿節 光州 盧根容 記

 

여산재기(艅山齋記)
재실이 함안군咸安郡 여항艅航마을 여양리艅陽里에 있기 때문에 현판을 여산재艅山齋라 하였다. 옥산장씨玉山張氏들이 그들의 선조이신 옥봉처사공玉峰處士公 휘 석원錫源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본당本堂이 3칸이고 외문도 역시 서로 걸맞게 세웠는데 을미乙未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준공을 하게 되었다. 이 공역工役을 하는 데 후손인 재규在圭 성진性軫 정규錠奎 이규伊奎 차규且奎 용규龍圭 윤규允圭 군 등 여러 사람이 노고가 많았다고 한다. 올해 여름에 재규在圭가 나를 찾아와 문설주 위에 달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같이 함안군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산천과 풍토를 익히 알고 있고 또한 그의 사우士友들과 알고 지내며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유독 장씨張氏만 옛날부터 맺은 연분 없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공公의 가장家狀을 살펴보고 그것을 적게 되었다. 고려高麗 상장군上將軍 휘諱 금용金用은 공의 시조始祖이다. 송은松隱 휘 안세安世와 가선대부嘉善大夫 휘 중양仲陽은 고려 말에 조선에 복종하지 않는 정절을 지키셨다. 휘 내범內範은 호號가 극명당克明堂으로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한(寒岡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 두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휘 경우慶遇는 호가 만회당晩晦堂으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휘 학學은 남파南坡와 여헌旅軒의 문인이다. 휘 명溟은 호가 사비암四非庵이며 휘 우영羽瀛 경상도좌수사慶尙道左水使를 지내셨다. 휘 광벽光璧은 통덕랑通德郞이시다. 이 분들이 공의 선고先考에서 위로 6세이다. 이것이 공께서 대대로 이어온 떳떳한 덕이 밝게 드러남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을 가져서 겨우 말을 배울 즈음에 부모의 소중함을 알았서 책을 읽을 때 부모父母라는 글자가 나오면 반드시 세 번을 반복하였다. 점차 성장하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0세에 관을 쓰자 홀로 농사일과 글을 아울러 하고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가족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이곳 여양리에 자취를 숨겼다. 이곳은 풍속이 어지러워 예의를 알지 못했다. 이에 서당을 설립하여 가르쳐 깨치기를 게을리 않았으니 몇 년 지나지 않아 문득 이 골짜기가 문화가 있는 마을이 되었다. 또한 이름난 큰 학자들과 강론하고 연마하며 서로 추존하고 따랐다. 이것이 공의 덕행과 치적의 대략이다. 공은 이와 같이 대대로 내려온 덕을 이어받았고 또한 이와 같이 뛰어난 덕행과 치적이 있으니 목릉성세穆陵盛世인 선조임금 때 마땅히 과거시험에 응시할 생각을 함직도 한데 온축하여 쌓은 학문을 품에 안고 말아서 그것을 가슴 깊이 저장하고 마음에 간직한 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반드시 점을 쳐서 주역의 천산지둔天山之遯(三三)의 괘를 본 것이리라. 옛날 주자朱子께서 이 괘효를 뽑고는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살았다. 생각해보니 공께서 이 산에 사시던 그 날에도 주자가 하시는 것과 같이 집을 지었을 것이지만 그 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자손들이 집을 짓고 여산재艅山齋로서 편액을 단 것 또한 주자선생朱子先生의 선재시船齋詩를 지으신 것과 합당하다. “고반考盤이 비록 육지에 있지만 혼양混瀁의 물과 구름은 깊고 또 높다하니 창주滄洲로 달리지만 위궐魏闕의 마음 잊기 어렵네”라고 한 것과 합치하는 점이 있다. 이것으로 기문記文을 삼노라.
임인壬寅 소만절 광주 노근용盧根容 짓다.

 

 

艅山齋韻
吾祖當年避地來
遺風尙振隴西隈
寒流曲曲盈科進
翠壁層層展畵回
旣露旣霜懷莫禁
于蘋于藻意難裁
搆堂豈畢雲仍責
繼述先聲勿墜哉
九世孫在圭敬稿

 

출처 및 참조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