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진주 지수면 청담리 김해허씨 관란정 觀瀾亭

천부인권 2020. 7. 19. 21:15

2020.3.27. 진주 지수면 청담리 김해허씨 관란정觀瀾亭 전경

지수면 청담리 409(방어산로 99)에는 김해허씨金海許氏 관란觀瀾 허국주許國柱(1548~1608)선생이 의병으로 활동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벼슬에 뜻이 없어 만년을 보내기 위해 지은 관란정觀瀾亭이 있다. 이곳의 위치를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1m를 알리고 「위도35°15'24"N 경도128°16'28"E」라 표시한다.
이 관란정觀瀾亭은 방어산 서북쪽에 위치하며 남해고속도로와 인접하여 진주방향으로 갈 때마다 궁금했던 정자인데 함안의 강씨 재실을 찾던 중 이 정자 옆으로 가면서 찾아봤다. 이곳에서는 염창강溓滄江이라 부르는 남강南江이 관란정觀瀾亭을 받치는 절벽 단애에 꺾어져 다시 북쪽으로 물줄기를 바꾸는 곳인데 이 정자의 바로 아래쪽에 옛 염창나루터가 있다.
솟을삼문에는 여사문如斯門이라 편액 했고 본당은 관란정觀瀾亭이라 이름했으며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고 대청마루의 곳곳에 관란정중건기觀瀾亭重建記와 관란정상량문觀瀾亭上樑文과 10세손 승선承宣의 서敍를 비롯하여 관란觀瀾 허국주許國柱의 관란정원운觀瀾亭原韻과 부사 성여신成汝信, 독촌獨村 이길李佶, 노파蘆坡 이흘李屹,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구산臼山 전우田愚 등의 차운 시가 걸려 있다.

 

솟을대문 여사문如斯門 편액
진주시의 관란정觀瀾亭 안내문
2020.3.27. 진주 지수면 청담리 김해허씨 관란정觀瀾亭
2020.3.27. 진주 지수면 청담리 김해허씨 관란정觀瀾亭 편액

觀瀾亭重建記
古之君子 或從王事 或處林樊 進退雖殊 而無非爲立身之地 故 贈侍郞許公諱國柱 値龍蛇之役 以下僚散職 首先擧義 賈勇殲賊 厥績甚偉 及夫事定 不伐其勞 遂營老菟裘於晉陽之東 濂江之上 混漁樵而詛鷗鷺 盟府勳名諸將錄用 視之以浮雲物事 構若干楹 環以松竹 前臨淼茫 扁其顔曰觀瀾 俯仰上下 襟懷淸曠 萬慮不侵 超然如出入境 而立於埃氛之表 則公之所尙 不在耳目之娛 意趣之適。而別有所存。可知也已。金火交易。亭廢而墟。且百餘年。後孫駿。一日慨然。與焌聲言于衆曰。世變日新。人事難保。不可使先祖嘉遯遺躅。任其泯然而無傳也。鳩財募工。因舊址重建。東而樓者。爲淸寒。西而齋者。爲悟道。門曰如斯。㙜曰詠歸。並一新改觀。光復舊樣。旣而玩赫。二友屬不佞。一言以記實。竊聞孟子觀瀾之訓。蓋貴乎水之有源也。潢潦之水。雨集而盈。雨止而涸。何瀾之可觀。此之經數十百里而來。合數十百川而一者。有源也。此之歷四時千載而如一日者。亦有源也。政猶君子之道。靜而有本。故能溥博而無窮也。其行也非喜事而求名。其處也非潔身而獨善。要以慊於吾心。合乎道義而已。是則侍郞公之鞱晦名迹。不求人知而能見稱當時。樹風百世者。夫豈無所本而致之哉。爲其出而有可用之材。處而有可藏之實。隨地裕如。若水之有源而無窮也。後之人。勿以亭視亭。以心傳心。敦篤乎仁義忠孝之傳。審愼乎華夷人獸之分。而早夜乾惕。勿有間斷。則斯其爲繼述志事之大者。而記之有無。不須言也。姑書此。以塞詢蕘之盛意。
重光亦奮若 仲秋上旬 月城 崔益鉉 記

 

관란정중건기 觀瀾亭重建記
옛날의 군자는 때로는 관직에 종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림에 은거하여 나아가고 물러남이 비록 다르나 출처가 몸을 세우는 바탕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증 시랑侍郞 허국주許國柱 공은 임진왜란을 만나 하급의 보잘 것 없는 관직으로써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용감하게 활약하며 왜적을 섬멸하니 그 공적이 아주 뛰어났다. 난이 평정되자 그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드디어 진양 동쪽 염창강溓滄江¹⁾ 위에 늙어서 은거할 곳을 마련하여 어부와 나무꾼과 섞이고 갈매기와 해오라기와 함께 하면서 충훈부忠勳府²⁾에 이름이 녹훈되어 여러 장수가 등용된 것을 뜬 구름 같은 물사物事³⁾로 보았다. 약간의 기둥을 지어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둘러 심고 앞으로는 나무가 빽빽하고 물이 질펀하게 흘러 편액을 관란정觀瀾亭이라 하였다.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보니 가슴이 맑고 넓어져서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초연히 인간세계를 나와서 속세의 밖에 서 있는 것 같았으니 곧 공이 지향한 것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마음의 취향이 따로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미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 정자는 폐허가 되고 폐허만 남았다. 세월이 또 백여년이 지나 후손 준駿이 하루는 개탄하며 준焌과 함께 사람들에게 공언하기를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 변하고 사람 일은 보장하기 어려우니 선조께서 아름답게 은거하신 유적을 방임 한 채 사라져서 전승하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라 하고 재물을 모아서 목수를 모집하여 옛 터에 중건하였다.
동으로는 누각을 짓되 청한루淸寒樓라 이름 짓고 서쪽에는 오도재悟道齋, 문은 여사문如斯門이라 하고 대는 영귀대詠歸臺라 하여 모두 경관을 고쳐서 새롭게 하고 옛 모양대로 모습을 회복하였다.
이미 완玩 혁赫 두 친구가 내게 한마디로 사실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하기에 가만히 듣자니 맹자孟子의 관란觀瀾의 가르침은 대개 물에 근원이 있음을 귀하게 여긴 것이었다. 비온 뒤에 길에 고인 물은 비가 오면 모여서 차지만 비가 그치면 말라 버리니 어찌 물결이 볼만 하겠는가. 이것이 수십 수백리를 거쳐 오면서 수십 수백의 냇물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은 근원이 있어서이다. 이것이 사계절과 천년을 지나면서 하루처럼 된 것 역시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군자의 길처럼 고요하면서도 근본이 있고 그래서 광대하고 평평하여 다함이 없을 수 있다. 그것을 행할 때는 일은 기뻐하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고 그 처함에 있어서는 몸을 께끗하게 하였으나 혼자 선함에 처신하지 않았으니 요컨대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도 도의에 합치 되도록 할 뿐이었다. 이는 곧 사랑공侍郞公이 자기의 명예로운 자취를 감추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나 당시 백세에 풍속을 세운 것에 칭송받음이 무릇 어찌 근본한 것 없이 이루었겠는가. 공이 출사해서 쓸만한 자질이 있었고 물러나서는 간직할 만한 실제가 있었으니 처지에 따라서 여유롭게 따름이 마치 물이 근원이 있어서 귾임 없는 것 같았다.
후손들은 정자를 정자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마을을 전하여 인의仁義와 충효忠孝를 전하기에 돈독하며 중화와 오랑캐, 인간과 짐승의 구분을 신중하게 살펴서 「아침부터 굳세게 노력하고 저녁에는 반성하여」⁴⁾ 쉽게 잠시라도 그치지 않도록 한다면 곧 이것은 아마도 선조의 일과 뜻을 계승하는 큰 것이 되므로 기문이 있고 없음은 반드시 말할 필요가 없다.
짐짓 이것을 써서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묻는 성의를 막는다.
신축년(1901) 음력 8월 상순에 월성月城⁵⁾ 최익현崔益鉉 짓다.

 

【주석】
염창강溓滄江¹⁾ : 현재의 남강南江
충훈부忠勳府²⁾ : 조선 시대, 공신과 그 자손을 대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
물사物事³⁾ : 물건이나 일 그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근본과 말단. 원인과 결과를 아우르는 이치
「아침부터 굳세게 노력하고 저녁에는 반성하여」⁴⁾ : 「주역周易」 상경上經 중천건重天乾 구삼九三조, 군자는 종일 굳세어서 저녁에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君子 終日乾乾 夕惕若』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월성月城⁵⁾ : 경주慶州를 지칭함.

 

관란정상량문觀瀾亭上樑文
관란정중건기觀瀾亭重建記

觀瀾亭重建記  
晉陽防禦山下濂滄江上。有觀瀾亭。卽宣武原從功臣贈兵曹參判許公諱國柱棲息之所也。由來三百年。頹圮已久。其後孫僔 萬佑與玩駿等。合謀重建。經始於己亥之春。越三年辛丑秋工告訖。遣其族人五百里來。請記於晩燾。余固已欽公之風。而濂滄之波瀾。曾未一觀。何能泚筆於其間哉。然旣辭之不獲則試以耳之所聞者。證心之所欽可乎。夫是瀾也。發源於頭流山。混混不息數百里爲濂滄者。乃公之少小。以孝友著聞也。遇墳衍而爲鄭白之沃。通舟楫而興姬姜之富。功利謄於風謠者。乃其便騎射薦爲部將之時也。若夫壬辰之亂。興義旅而赴節幙。以伏兵將效敵愾之忠者。雨潦之時。洪流滚汩下土。於是焉嚴堤防而䟽下流。以遏汎濫之患也。若夫功成身退之後。蕭然作江湖逸民。與良朋勝友。琴酒逍遙。以盡天得之樂者。激湍之下。必有深淵。而演漾泓渟。沙鷗錦鱗。翔泳其中而不見涯涘也。然則觀於水知公。觀於公知瀾。是知崇華黃河之於歐陽公。同爲天下之大觀也。然朱子以孟子觀水章。爲如詩之有比興。余故證比之如此。若孟子本旨則有在焉。其曰觀於海者難爲水。言聖人之道大也。其曰觀水有術。必觀其瀾。言道之有本也。其曰不盈科不行者。言學之必以漸而乃能至也。葢其章內三言水。而道之本末。學之階級。燦然有條理。如欲學而至乎道。則須是務實而已也。公所謂觀瀾者。葢亦取義於此。欲從務實上做去也。夫實者何也。如爲子眞個做得孝成。爲臣眞個做得忠成也。曰孝曰忠。固已見於上面證比之中。而若執定爲說則公自是有謙退之盛德者也。其在後孫師法之道則固當本之忠孝家法源頭。溯其瀾而造其深可也。亭凡四間。齋曰悟道。樓曰淸寒。門曰如斯。臺曰詠歸。合而扁之曰觀瀾。

관란정중건기
진양(晉陽) 방어산(防禦山) 아래 염창강(濂滄江) 가에 관란정(觀瀾亭)이 있으니 바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증 병조 참판 허국주(許國柱) 공이 머물던 곳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나 허물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그 후손 준(僔), 민(?), 만우(萬佑)가 완준(玩駿) 등과 함께 중건하기를 도모하여 기해년(1899, 광무3) 봄에 경영하기 시작해 3년이 지난 신축년(1901) 가을에 공사를 마쳤다. 그 후 족인 균()이 500리나 먼 곳까지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 본래 공의 풍도를 흠모하고 있었으나 염창강의 물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찌 그에 대해 붓을 적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사양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어디 한번 들은 것을 가지고 마음에 흠모하던 바를 증명해 보아도 될 것이다.
이 물결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발원하여 펑펑 솟아나서 수백 리를 쉬지 않고 흘러와 염창강이 된 것은, 바로 공이 어렸을 적부터 효성과 우애로 소문난 것에 해당한다. 언덕을 만난 물이 질펀하게 모여서 정백(鄭白)의 저수지처럼 농토를 비옥하게 하고 뱃길을 통하게 하여 주(周)나라와 제(齊)나라 같은 부를 일으켜서 공리(功利)를 칭송하는 노래로 불린 것은 바로 공이 무예로 천거되어 부장이 되었던 때에 해당한다. 공이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절도사의 막하로 달려가서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적개심에 불타는 충성을 바친 것은, 장맛비가 내릴 때 홍수가 땅으로 넘쳐흐르면 이에 제방을 높이 쌓고 하류를 소통시켜 범람하는 우환을 막은 것이다. 공(功)이 이루어지자 스스로 물러난 뒤에 호젓하게 강호의 일민(逸民)이 되어 좋은 벗과 함께 거문고와 술로 소요하여 타고난 즐거움을 다한 것으로 말하자면, 세찬 여울이 내려가다 보면 반드시 깊은 못이 있어서 출렁거리는 깊고 너른 물에 갈매기와 물고기가 그 가운데서 나래 치고 헤엄치되 물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즉 물을 살펴보면 공을 알고 공을 살펴보면 물을 알게 되니, 산으로는 숭산(崇山)ㆍ화산(華山)이, 물로는 황하(黃河)가, 사람으로는 구양공(歐陽公)이 똑같이 천하의 큰 볼거리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자가 《맹자(孟子)》의 관수장(觀水章)을 가지고 《시경》에 비(比)와 흥(興)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그래서 이처럼 공(公)과 물을 비교해 증명한 것이다. 《맹자》의 본래 뜻으로 말하자면 따로 있는 데가 있다. 《맹자》의 “바다를 구경한 자 앞에서는 큰물 되기가 어렵다.〔觀於海者 難爲水〕”라는 것은 성인의 도가 크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물을 구경하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구경해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것은 도에 근본이 있음을 말한 것이요,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不盈科不行〕”라고 한 것은 학문은 반드시 점진적으로 하여야 이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장 안에서 세 번 물을 말하였는데 도의 본말과 학문의 단계가 분명하게 조리가 있으니 배워서 도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실제를 힘써야 할 뿐이다. 공이 말한 관란(觀瀾)이라는 것도 여기에서 뜻을 취하여 실제를 힘쓰는 것으로부터 해 나가고자 한 것이다. 실제란 무엇이겠는가? 예컨대 자식이 되었으면 참으로 효(孝)를 하여 이루고, 신하가 되었으면 참으로 충(忠)을 하여 이루는 것이다. 효니 충이니 하는 것은 진실로 이미 위에서 비유해 증명한 것 중에 보이지만 확정하여 말한다면 공은 본래 겸양하는 훌륭한 덕을 가진 자요, 그 후손이 본보기로 삼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충효 가법의 근원에 근거하여 그 물결을 거슬러서 그 깊은 경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자는 모두 네 칸인데, 재는 오도재(悟道齋)라 하고 누각은 청한루(淸寒樓)라고 하며 문은 여사문(如斯門)이라 하고 대는 영귀대(詠歸臺)라 하니, 합쳐서 편액을 ‘관란정’이라 하였다.
李晩燾

[주-D001] 방어산(防禦山) : 
진주 반성현(班城縣) 북쪽 15리에 위치한 산으로 방아산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0 晉州牧》
[주-D002] 정백(鄭白) : 
전국(戰國) 시대의 정국(鄭國)과 한 무제(漢武帝) 때 백공(白公)의 저수지를 말한다. 그들은 정국거(鄭國渠)와 백거(白渠)를 축조하여 주변 광활한 지역의 농토를 비옥하게 하여 국가의 경제를 부흥하였으므로 후대에 수로(水路) 관개(灌漑) 사업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되었다.
[주-D003] 공리(功利)를 …… 것 : 
대본에는 ‘功利謄於風謠’로 되어 있는데, 문맥과 용례를 참고하여 ‘謄’을 ‘騰’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산으로는 …… 있다 : 
소철(蘇轍)의 〈추밀원 한태위에게 올리는 편지[上樞密韓太尉書]〉에 “제가 와서 산으로는 종남산, 숭산, 화산의 높다란 모습을 보았고, 물로는 황하의 크고도 깊은 것을 보았으며, 사람으로는 대문장인 구양공을 보았지만 오히려 태위를 아직 뵙지 못했기에 바라건대 현인의 광휘를 관찰하여 한마디 말씀을 듣고 스스로 장해지고자 하노니, 그런 다음에야 천하의 큰 볼거리를 다 보아서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轍之來也 於山見終南嵩華之高 於水見黃河之大且深 於人見歐陽公 而猶以爲未見太尉也 故願得觀賢人之光耀 聞一言以自壯 然後可以盡天下之大觀而無憾矣]”라고 하였다.
[주-D005] 관수장(觀水章) : 
《맹자》 〈진심 상(盡心上)〉 제24장으로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 보고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에 올라가 보고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러므로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는 큰물 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유학한 자에게는 좋은 말 되기가 어려운 것이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觀瀾亭重建記
嶺之晉陽 爲山水佳處 而淸淑之所鬱積也。萬曆 以來 碩人君子之治亭榭占形勝 蔚然而相望。若 故贈小司馬許公國柱觀瀾之亭 亦其一也。亭在 防禦山下 濂滄之上 盡得淸淑之尤者。夫濂江之 水發源於智異山 縈洄曲折 遇山而滀 一鑑前開 萬狀畢露 防之爲山 巓崖崫嵂 林壑幽深 臨水而 停 壁立千仞雲屛如畵 其天作地生之狀類智者 之所施設 非有倜儻雄偉之節 恬曠雅潔之懷 則 莫得以稱焉。時則許公以忠勇不群之才 値龍蛇 菲茹之難 奮身先唱七百影從 遂使凶鋒摧折 屹 然爲江淮之保障 而大賢之襃啓鄭重 聖朝之 鑑臨如燭 錄三等之勳陞禦侮之秩 功烈其盛矣。 望實其隆矣。惟其恬退不伐之性 獨以大樹爲歸退 臥江湖東岡之志已確然矣。乃卜築於斯 偃息 於斯。而取鄒夫子觀水之訓扁之曰觀瀾 其志遠矣。山之壁立者 益以高水之鑑開者 益以淸仰觀 俯眺優游自適 不知朱紱之在身 則斯所謂人與 山水之兩相遭 而廬陵子所謂視其所好而知其 人者 不亦信矣乎。嗚呼。公之世邈矣 劫灰伏滄桑 翻 爾來三數百年之間 徒見山高而水淸 則後嗣 子孫愴感之情安得三遇而如常哉。其裔孫僔 萬佑等協力經始 卽舊而新之 三年而功告訖。棟 楹秩秩 堂宇灑灑 蓋輪焉 爾煥焉 爾亭凡四架。齋曰悟道 門曰如斯 樓曰淸寒 臺曰詠歸 皆推演觀 瀾之義 於乎偉哉。今許生以諸公之命 越四百 餘浬請記於不佞。噫。不佞老矣。雖未得一笻南爲 隨意登望以少償疇昔之願 而竊以託名其間不 爲廬山之生客 則亦區區之一幸也。於是乎書。
辛丑 華節 聞韶 金道和 謹記

 


此亭 昔我參判先祖 休退之所 而扁之 以觀瀾 逍遙自適 鷗鷺同老 永其無閔歟 晉陽之誌 遺蹟炳炳 噫 自代已久 亭頹而遺墟而已 識者奧歎 行路指點 其在雲仍 尤如何哉 太歲己亥 丹碧柱梁依舊 巍然 是豈偶爾神明黙佑 防山屹屹 溓江浩浩 斯亭也 與之壽夫
强圉單閼 菊月 九日 十世孫 承宣 謹識

 

관란정 서敍
이 정자는 옛날 우리 참판 선조께서 물러나 쉬시던 곳인데 관란정觀瀾亭으로 편액하고 소요 자적하시며 갈매기 해오라기와 같이 늙으면서 오래도록 근심이 없으셨다. 「진양지晉陽誌」에는 그 유적이 밝게 빛난다.
아! 대수가 이미 오래됨이여. 정자는 무너지고 유허뿐이라 아는 사람은 속으로 탄식하며 길에 그곳을 가르키니 그것이 자손에게는 더욱 어떠하겠는가. 지난 기해년己亥年(1899) 기둥과 대들보에 옛날처럼 단청을 하니 우뚝하도다. 이 어찌 우연히 신명께서 묵묵히 도우셨는가. 방어산이 우뚝하고 염창강溓滄江¹⁾이 질펀히 흐르니 이 정자와 더불어 오래 갈 것인저!
정묘년(1927) 음력 9월 9일 10세손 승선承宣 삼가 짓다.

 

【주석】
염창강溓滄江¹⁾ : 현재의 남강南江

 

觀瀾亭原韻 - 허국주許國柱
十載干戈掃盡餘 10년 동안 왜적을 소탕한 나머지
溓滄江上卜幽居 염창강 위에 은거 터를 잡았네
渡口行人如問我 나루에서 행인이 나를 찾으면
竹林深處臥看書 죽림 깊숙이 누워 책 본다고 하게나.

 

浮查 成汝信 부사 성여신
幾年荒廢待君開 몇 년을 황폐하게 지내다 그대 기다려 열었으니
千丈澄潭百尺臺 천길 물 맑은 못에 백 척 높이 대가 있고
身世已難供武服 신세身世¹⁾가 이미 어려워 의병을 일으키니
時平誰復隱其雷 태평세상 누가 회복했나 그 공적 숨겼네.
洲邊綠匝千株柳 물가의 푸른 숲과 천 그루의 버드나무
窓外香浮一樹梅 창밖의 좋은 향기 떠도니 한 그루 매화로다
鷗鷺烟波塵事小 갈매기 백로도 자욱한 물안개로 세상일 작게 보여
笑他玄舘看花埃 남의 객사 꽃에 묻은 먼지 보고 웃는 격이지

 

【주석】
신세身世¹⁾ : 일신상에 관련된 처지나 형편으로 주로 불행한 처지의 신세

 

독촌獨村 이길李佶
春風湖海水溶溶 봄바람은 바다 같은 호수에 물결이 질펀하니
兩岸桃花影倒江 강 양쪽 언덕의 복사꽃은 물에 거꾸로 비쳤다.
爲問武陵無乃是 무릉도원 물으면 여기가 아닐는지
竹林深處吠閒狵 죽림 깊숙한 곳엔 삽살개 짓는 소리만 들린다.

 


노파蘆坡 이흘李屹
慳秘人無具眼開 인간에게 아껴 둔 곳 갖추지 않아도 눈이 열려
値公今夕化亭臺 공을 만나 오늘 저녁 정자로 바뀌었네.
林間任看昻昻鶴 숲 속에서 쳐다보니 학이 높이 날고
嵒竇時聞隱隱雷 때때로 바위 구멍엔 감춰진 우레 소리
嶰谷已移含韻竹 골짜기로 옮겨가니 대나무가 소리 머금었고
羅浮更植醉魂梅 나부羅浮¹⁾에 다시 심어 매화에 혼이 취한다.
登臨欲賦江山好 정자에 올라 글을 짓자니 강과 산이 좋아서
還愧徒添壁上埃 판상만 더럽힌 것 같아 부끄러이 돌아온다.²⁾

 

【주석】
나부羅浮¹⁾ : 옛날 중국 매생梅生이란 사람은 나부羅浮 땅 사람이다. 그는 용모와 자태가 우아하고 성격이 꽃답고 고결하여 무엇으로도 그 본심을 바꿀 수 없었다. 고소태수姑蘇太守 안원헌晏元軒이 매생을 데리고 서강西岡에 와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선물을 주었으나 매생은 영화롭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담담할 뿐이어서 군자로 칭송 되었다는 고사가 녹천속집綠泉續集 문文4권券에 나온다. 그래서 매화 또는 매화 심은 곳을 나부羅浮라고 한다.
부끄러이 돌아온다.²⁾ : 졸작을 하나 더 벽에 붙이고 왔다는 겸양의 말이다.

 

謹步觀瀾亭原韻 - 삼가 관람정 운을 따라서 / 전우田愚 지음
七百豼貅勝捷餘 칠백의 비휴豼貅¹⁾와 승전한 나머지
蕭然亭舘似仙居 고요한 정자에는 신선이 사는 듯
有功不伐誰能爾 공을 세워도 내세우지 않으니 누가 이럴까
可惜今人不讀書 요즘 사람들 독서 하지 않는 게 안타깝구나.

 

【주석】
비휴豼貅¹⁾ : 범과 비슷하다고도 하고 곰과 비슷하다고도 하는 맹수. 비는 수컷이고 휴는 암컷을 뜻 하나 여기서는 용감한 장병을 이른다. 즉 의병義兵을 말한다.

 

謹次觀瀾亭原韻 - 삼가 관란정 원운을 차운하여 / 최익현 짓다
粧點名園歲月餘 단장한 아름다운 동산 세월의 나머지에
遺風傳誦碩人居 유풍이 전해 오니 큰 어른 살았다네
與孫克紹先公志 자손들과 선조 뜻을 잘 이어서
相懲循環路運書 서로 꾸짓으며 순환하는 길에 책을 전하길

 

登臨其家老衰何 이곳에 오르니 정자 어찌 그리 노쇠 했나.
回首前塵漫發唫 머리를 돌려서 보니 전날의 먼지 가득하네
堂構百年風不聲 집 지은지 백년이나 바람은 소리 없고
屛樽乘洽一宵多 둘러놓은 술통 남으니 하룻밤 흡족함이 많도다

 

離鄕三朔蒼如情 고향 떠난지 석 달 만에 정만 많아진 듯
待到觀瀾强有聲 관란정 닿기를 기다려 힘찬 소리 나고
雨歇溓江止更好 염창강의 비 개니 다시 정신 좋아져서
翛然使我六根淸 빠르게 나의 육근六根¹⁾을 맑게 한다.

 

【주석】
육근六根¹⁾ : 신체身體와 마음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총칭하는 말.

 

十世孫 現
敵愾功成百戰餘 왜적을 처서 공을 세움은 백전百戰의 여분이요
觀瀾之術獨屛㞐 관란정 세운 것은 혼자 은거하기 위함 이었네
當時不仗誰能會 당시 공훈을 사양할 이유를 누가 알았겠는가
抛却兵書讀聖書 병서를 버리고 성경을 읽기 위함이었네

 

출처및 참조

진주의 누정 문화-박기용/도서출판 월인(2010.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