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 성산구 천선동 산 213-2번지의 성주사聖住寺 가는 길옆에는 자연 거석의 일부를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글을 새긴 마애석이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33m이고 위치기반 고도계는 「위도35°10'37"N 경도128°42'56"E」이다. 평면으로 다듬은 면의 위쪽 중앙에는 『송설당松雪堂』이라 새겨 이 마애석을 『송설당마애석松雪堂磨崖石』이라 이름 붙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松雪堂 송설당¹⁾ – 해석 文山
和順崔氏 화순최씨
身爲女子 聖恩如天 여자의 몸이지만 성스러운 은혜 베품은 하늘 같다네
閣建七星 壽祝萬年 칠성각을 건설하니 만년이나 오랫동안 살기를 빈다오.
辛丑十月日 1901년 10월 일
【주석】
송설당¹⁾ : 송설당松雪堂(1855~1939)은 일제강점기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을 설립한 여성 육영사업가로 화순최씨이며 본명은 미상이고 호가 『송설당松雪堂』이다. 경상북도 김천 출생인데 아버지는 최창환(崔昌煥)이며, 어머니는 경주정씨(慶州鄭氏)이다. 외가쪽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연루되어 증조부와 조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누명을 벗게 할 것을 맹세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사별하자 39세 때 불교에 귀의하여 정진하였다. 그뒤 서울에 올라와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하던 중 입궐하게 되어 영친왕의 보모가 되었으며, 귀비(貴妃)에 봉하여지고 고종으로부터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부터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편 금릉학원(金陵學園)에 기부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 25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재산을 희사할 취지를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고, 1931년 2월 5일 전재산 30만 2100원을 희사하여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을 설립, 김천고등보통학교를 개교하여 오늘날의 김천중학교와 김천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건학이념은 "길이 사학을 경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이다.
시문에 능하여 200여 수의 한시와 60여 수의 국문시가를 남기고 있으며, 저서로는 『최송설당문집』 3권(1922년)이 있다. 무덤은 김천중·고등학교 뒷산의 송정(松亭) 옆에 있으며, 1935년 11월 30일 교정에 송설당의 동상을 세워 설립자의 뜻을 기리고 있고, 1963년 8월 15일 대통령 문화 포상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최송설당
송설당마애석松雪堂磨崖石 위에는 네모진 암석이 올려져 있는데 이 암석의 앞면에는 『이용교李瑢教』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아래에 찬시讚詩가 있으나 희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그 내용을 옮겨 적어 보고자 한다.
송설당마애석松雪堂磨崖石의 맞은편 길 아래쪽에는 『윤태흥尹泰興』이라는 이름 3자만 새긴 마애석이 길 방향을 보고 있다. 윤태흥은 1841년(헌종 7)에 태어나 대한제국기 경효전제조, 장례원소경, 경기도관찰사, 사직서제조·홍릉제조·종묘서제조·청주군수 등을 역임한 관료로 일제강점기에는 김홍조金弘祚 장지연張志淵(1864~1921) 등과 함께 불교진흥회라는 친일불교단체에 가입한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매국노라는 것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문익(文翊). 윤종성(尹宗成)의 아들로 윤유성(尹維成)에게 입양되었으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김준현(金準鉉)의 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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